소설리스트

학사신공-1727화 (1,484/2,000)
  • 1727화. 불나방

    *

    “어휴…….”

    한립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런데 금동의 이빨이 장도에 닿기 전에 멈추더니 고개를 들고 빙긋 웃어 보였다.

    “약속한 거예요?”

    “물론.”

    한립의 대답에 금동은 거만한 얼굴로 장도에서 손을 놓았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그것을 챙기고 다시 다른 물건들을 살펴보았다.

    “엇, 저것은…….”

    다음으로 그의 눈에 든 것은 놀라운 영력 파동을 내뿜는 은색 대나무 줄기였다. 은색 대나무의 기운은 그가 약재밭에서 뽑아낸 은색 대나무 뿌리와 같았다.

    그 옆으로는 채취한 지 얼마 안 된 귀한 영초들도 잔뜩 있었다.

    한립은 그들보다 먼저 약재밭에 가서 현천의 보물을 꺾어간 사람이 거령이었다고 확신했다.

    현천선등에 맺힌 열매가 바로 비취색 호리병박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물건 정리만으로 반나절이 지나고 한립은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른 기분이 들었다.

    거령이 지닌 보물은 정말 상상 이상이어서 진귀한 재료와 영초를 차치하더라도 선원석만 십여만 개는 되었다.

    이 정도면 수많은 종문 세력도 오랜 세월이 걸려야 쌓을 수 있는 양이었다.

    그밖에 이름난 단약과 경전도 많았는데, 약간 품질이 떨어지는 영보들은 대부분 금동의 뱃속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금동은 기운을 완전히 회복하고 두 팔도 정상이 되어 흡족한 얼굴을 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지나고도 탐식의 고질병을 고치지 못한 듯했다.

    물론 이것도 서금선 특유의 수행을 늘리는 방법 중 하나라 속이 쓰리긴 하지만 이해했다.

    금동의 실력이 세지면 결국 그에게도 좋은 일이기 때문이다.

    “오늘 고생 많으셨습니다.”

    한립은 분류를 마친 물건들을 넣어두면서 마광과 해 도인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런 인사는 되었습니다. 우리야말로 운명 공동체 아니겠습니까? 앞으로도 무슨 일이 있으면 언제든 불러주세요.”

    마광은 미소를 지으며 검은빛으로 변해 한립의 그림자로 사라졌다. 그는 마광의 태도가 이전과 달라진 것을 느끼고는 눈을 반짝였다.

    해 도인 역시 말없이 공수하고 금빛으로 변해 그의 체내로 스며들었다.

    팟.

    의복을 단정히 한 한립은 편전을 나와 사방을 살피고는 남색 화폭을 하나 꺼내 들었다.

    거령의 저물법기에서 찾아낸 명한산하도였다. 화폭은 남색 빛이 사라져서 그냥 평범한 그림처럼 보였다.

    “가자.”

    미간을 좁힌 한립은 그것을 넣어두고 자신과 금동을 푸른 빛줄기로 엮어 날아올랐다.

    * * *

    명한선부 모처.

    거의 다 무너진 궁전 폐허 속, 마갑에 검은 두건을 쓴 이종족 사내와 여인, 그리고 염소수염 노인이 잡초가 가득한 길을 지나고 있었다.

    다들 표정이 어둡고 무척 피곤해 보였다.

    “우리가 교삼에게 속았습니다. 괜히 그자를 따라 선부 비경에 들어와서는 보물은 얼마 건지지 못하고 연달아 위험한 일만 겪으니 말입니다.”

    아담한 체구의 까만 피부 여인이 울분을 터트렸다.

    “그러게 말입니다. 명왕전(明王殿)에서 우리야 죽든 말든 혼자 달아난 것 좀 보세요! 지금까지 그림자도 보이지 않고 말입니다.”

    진한 눈썹의 거한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와서 그런 이야기가 무슨 소용입니까. 그나마 우리 셋이 흩어지지 않았으니 교삼을 찾아다닐 것 없이 우리끼리 기연을 찾아보면 되지요. 그러다 눈치를 보아 빠져나갑시다.”

    염소수염을 기른 수척한 노인이 차분히 말하자 나머지 둘도 동의했다.

    그들이 이야기를 나누는데 고공에서 청옥(靑玉) 비차가 번득 날아들어 세 사람 앞쪽으로 내려왔다.

    길쭉한 마차 위에 청아한 외모의 중년인이 서서 곰과도 비슷하고 범과도 비슷한 맹수 ‘비휴(豼貅)’ 모양의 백옥을 만지작거리고 있었고 그 뒤로 괴뢰로 보이는 금갑 사내 둘이 서 있었다.

    세 사람은 사내를 향해 경계심 어린 시선을 보내다 상대가 진선 후기 수행을 지닌 것을 감지하고 약간 안심했다.

    “세 분께 말씀 좀 묻겠습니다. 혹시 오면서 북한선궁 수사들을 보지 못하셨습니까? 아니면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아십니까?”

    중년 사내는 온화한 미소를 띠고 한가롭게 물어왔다. 세 사람은 이상한 마음에 다들 입을 열지 않았다.

    눈앞의 중년인은 분명 수행이 그리 높지 않은데 그들을 대하는 어투는 그렇지 않았다.

    “보지 못했습니다.”

    눈빛이 흔들린 수척한 노인이 입을 열었다. 표면적으로 내보이는 수행만으로 상대의 진정한 수행을 판단할 수는 없었다.

    더욱이 중년인은 선부로 들어올 때는 본 적이 없는 자였기에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다.

    “폐가 많았습니다.”

    중년인은 담담히 답하고는 마차를 돌려 고공으로 날아올랐다. 그가 멀리 사라지는 것을 유심히 지켜보다 송충이 눈썹 사내가 입을 열었다.

    “……어떤 것 같습니까?”

    “기도가 비범해 보이기는 했지만 제 영목신통으로도 별다른 점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진선 후기 수사가 맞는 듯합니다.”

    수척한 노인이 습관적으로 염소수염을 비틀며 답했다.

    “제 눈에 타고 다니던 마차가 썩 좋아 보이던데요.”

    까만 피부 여인이 갑자기 엉뚱한 소리를 하는데 송충이 눈썹 거한과 수척한 노인이 동시에 묘한 웃음을 흘렸다.

    “하하, 저물법기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손에 들고 있던 옥조각만 해도 값이 나가 보이기는 하더이다.”

    “그럼 입고 있던 법포는 제 것입니다.”

    세 사람은 중년인을 죽이고 보물을 챙기기로 합의를 보았다. 그들과 수십 리 떨어진 고공에서 마차가 유유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쯧쯧, 수행만 하며 나아가기에도 어려운 길이거늘…….”

    마차에 서서 여전히 온화한 낯으로 옥 비휴를 만지작거리던 중년인이 중얼거렸다.

    그의 말이 떨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둔광 세 개가 나타나 앞길을 가로막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선궁 수사들이 어디로 갔는지 기억나셨는지요?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중년인은 그들을 향해 빙긋 웃어 보였다.

    수척한 노인은 그 웃음을 보자마자 가슴이 섬뜩해져서 일이 틀어지면 일행 두 사람을 버리고 혼자라도 달아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송충이 눈썹 거한과 까만 피부 여인이 시선을 마주치고 각각 검은 돌도끼와 은색 장검을 불러냈고, 노인도 7층 금탑 보물을 꺼내 크기를 키웠다.

    “위영역만도 못한 물건을 꺼내 놓다니 부끄럽지도 않더냐?”

    돌연 어투가 냉랭해진 중년인이 옥 비휴를 꽉 쥐었다.

    그 말에 깜짝 놀란 노인 일행이 무슨 일인지 파악하기 전에 사방팔방에서 무서운 힘이 밀려들었다.

    그러자 중년인을 덮치려 날아들던 7층 금탑의 빛의 장막이 가장 먼저 깨졌다. 이어서 그들은 팔다리와 몸통이 엄청난 압력에 갈가리 찢겨나가는 것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그들은 머리만 온전하게 남고 몸은 살점과 부러진 뼛조각 덩어리가 되어 버렸다.

    이 모든 일이 한 호흡 만에 일어났다.

    중년인이 대충 손을 저어 만들어낸 반투명한 거대 손이 허공에 깊은 주름 같은 파문을 만들어냈고, 세 원영은 그 거대 손에 붙들려 끌려왔다.

    “사, 살려 주십시오! 소인들이 태산과 같은 선배…….”

    노인을 비롯한 거한과 여인의 원영이 몸부림치면서 애원했지만 중년인은 전혀 듣고 있지 않았다.

    “거짓이 아니었구나. 정말 아는 게 없어. 허나 의외의 수확도 있구나.”

    두 눈이 이채를 띠고 원영들을 응시하던 중년인이 중얼거렸다. 그의 손끝에서 빛이 번쩍하고 원영은 으깨져 가루가 되었다.

    고공에서 가루가 흩어져 떨어지는 동안 세 사람의 신체 잔해에서 사슴, 올빼미, 원숭이 얼굴의 가면이 하나씩 분리되어 날아들었다.

    가면을 살핀 그는 소매를 펄럭여 허공에 거대한 나무 진열장 하나를 불러냈다. 그 위에는 각양각색의 무상맹 가면들이 빼곡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소, 뱀, 악귀, 용, 호랑이, 봉황, 거북이 등 없는 가면이 없었고 대충 살펴도 천여 개는 되는 듯했다.

    “어느새 이만큼이나 모았구나.”

    가볍게 웃음 지은 중년인은 태연하게 들고 있던 가면도 올려두고 진열장을 거두었다.

    그는 바로 출발하지 않고 구멍이 숭숭 뚫린 금색 원반을 불러냈다.

    쉭!

    거대해진 원반은 복잡한 문양을 반짝이고 눈부신 금빛 기둥을 하늘 위로 쏘아 올랐다.

    오래지 않아 금색 원반 위로 금색 알갱이들이 몰려들어 흐릿한 인영 셋으로 변했다.

    “공수구 수사, 명한선부를 순찰하러 간 것 아닙니까? 갑자기 웬 연락입니까.”

    그중 한 인영이 어깨를 떨면서 물었고, 다른 두 인영도 중년인을 바라보았다.

    “감구진이 지금 선부 안에 있습니다.”

    공수구라 불린 중년인이 차분히 답했다.

    “확실합니까? 그녀의 신분은 윤회전 내에서도 비밀이고 감구진이란 이름도 진짜인지 알 수 없을 텐데요. 거기다 가면으로 늘 용모를 바꾸는데 어찌 그녀인 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

    처음 입을 연 인영이 몸을 떨면서 물었다.

    “확실한 증거는 없습니다. 그저 막 무상맹 회원 몇을 죽여 기억을 살폈는데 그들을 이끌고 명한선부로 들어온 교삼의 행동거지가 감구진과 비슷했습니다.”

    “그렇다면 수사께서 수고를 해주셔야 겠군요. 알아낼 비밀들이 많으니 반드시 생포해 데려와야 합니다.”

    원반 좌측의 인영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중년인은 원반을 치우려다 뭔가를 떠올렸다.

    “한 가지 더, 선부에서 연신술을 사용한 자를 감지했습니다. 벌써 3성 이상을 익힌 듯하군요.”

    “금한지 오랜 세월이 흘렀건만 아직도 겁도 없이 연신술을 익히는 자가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런 자는 잡아 올 것도 없이 처리하시면 됩니다.”

    조용하던 마지막 인영이 단호히 외쳤다. 그 말에 공수구는 고개를 끄덕이며 소매를 저어 원반을 거두었다.

    * * *

    아주 먼 곳의 고공.

    한립은 금동과 쾌속으로 하늘을 가르다 멈춰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왜요?”

    “하늘을 관통하는 강력한 파동이 느껴졌다. 그런데 또 지금은 느껴지지 않는구나.”

    “강대한 파동……. 우리 가서 무슨 일인지 볼까요?”

    “괜한 일 만들 것 없다. 굳이 강자와 맞설 이유는 더더욱 없고.”

    “칫, 재미없게.”

    관심 없다는 한립의 태도에 금동이 실망해 입을 비죽거렸다.

    * * *

    궁전 건물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창류궁 복색을 한 네 명의 수사가 보물을 하나씩 들고 바깥쪽 금제를 파훼하고 있었다.

    거의 성공하려는데 궁전 문에 걸린 고대 거울이 새하얀 빛을 뿜어 그중 한 명의 가슴을 공격했다.

    이에 창류궁 수사는 참혹한 비명을 지르며 가슴에 구멍이 뚫려 고꾸라졌고 네 사람이 힘을 합쳐 펼치던 파훼용 진법도 허물어졌다.

    무리의 우두머리인 백면서생이 고꾸라진 수사 곁으로 이동해 금색 단약을 먹이고 자신의 선령력으로 약효를 퍼트렸다.

    빠르게 가슴에 뼈가 생기고 살이 붙은 수사의 호흡이 고르게 변했다. 남은 이들은 안도하다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궁주님과 연락이 끊긴 지 보름입니다. 어서 진법을 뚫고 나가 합류해야 합니다.”

    나머지 수사들은 서둘러 대답하고 다시 파훼 진법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 * *

    명한선부 안, 새까만 언덕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 수십 장 아래 지하궁전 안에서 회색 장포를 입은 키 크고 마른 사내가 검푸른 얼굴로 앉아 있었다.

    바로 복릉종 대장로 봉천도였다.

    그 아래 널린 검은 돌들은 이곳 대전을 지키던 괴뢰 잔해였다.

    그때 대전 바깥에서 걸음 소리가 들리고 회색 장포를 입은 마른 사내가 들어와 하나밖에 남지 않은 눈으로 돌의자에 앉은 사내를 보았다.

    “사형, 데리고 온 이들과 흩어져 그중 두 무리와는 연락이 끊겼습니다. 남은 이들이 수색을 계속하고 있지만 태을전(太乙殿)은 아직 찾지 못했고요.”

    제천소가 예를 취하고 진행 상황을 보고했다.

    “선궁과 창류궁 쪽은 어떠하냐.”

    “선궁과 창류궁 수사들도 우리 쪽과 비슷하게 흩어져 다니고 있답니다. 아직 찾지 못한 게 분명합니다.”

    “아직 시일이 남았으니 우리가 먼저 찾아내서 손을 써둘 수 있다면 우위를 점할 수 있을 것이다.”

    “안심하셔도 됩니다, 사형. 제가 사소한 것 하나도 놓치지 않고 잘 처리하겠습니다.”

    봉천도의 말에 제천소가 포권을 했다.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