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6화. 재고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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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시진 정도 날아갔는데도 폐허가 된 풍경이 이어졌다.
“여기서 쉬어가는 것이 좋겠다.”
절반쯤 무너진 어느 궁전에 내려선 한립은 그나마 온전한 편전으로 들어가 수십 개의 남색 빛을 날렸다.
남색 빛들이 편전 곳곳에 떨어져 진법을 이루었고 금동이 따라 들어와 그 옆에 앉았다.
한립은 가볍게 숨을 고르며 단약을 삼키고 온화한 푸른빛에 휩싸였다.
큰 눈으로 그가 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금동도 눈을 감고 운공에 들어갔다.
반나절이 지나 푸른빛이 가시고 선령력을 회복한 한립이 눈을 떴을 때 금동은 금빛을 두르고 입안으로 선령기를 빨아들이는 중이었다.
팟. 팟.
한립은 금동을 힐끔 보고는 회색 왕좌와 거령 시체가 가득 담긴 푸른 발우를 불러냈다.
먼저 왕좌에 법결을 던져 넣자 잿빛이 은은하게 떠올랐다.
웅!
한립이 빠르게 수결에 변화를 줄 때마다 왕좌의 빛이 선명해지면서 거울 허상 세 개가 떠올라 각각 회색, 검은색, 하얀색 빛을 반짝였다.
그가 지닌 어떤 선기보다 품질이 좋았다.
솔직히 동시에 세 가지 법칙의 힘을 아우르는 선기는 이제까지는 들어본 적도 없었다.
안타까운 일은 왕좌가 거령의 본명 선기라 내부에 완벽히 제거할 수 없는 낙인이 남아 있어 제련한다고 해도 본 위력의 5, 6할밖에는 내지 못할 것이었다.
한립은 왕좌를 넣어두고 푸른 발우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손바닥 위로 날아오른 발우 속에는 색깔이 다른 보따리 네 개와 수백 개의 오색찬란한 보석이 박힌 하얀 옥 허리띠 그리고 시커먼 반지가 들어있었다.
전부 거령이 지니고 있던 것이었다. 보따리를 살핀 한립의 얼굴이 밝아졌다.
보따리는 흔한 저물대가 아니라 영수대였고, 작은 비경 공간에 맞먹는 광활한 내부공간을 지니고 있었다.
각 공간은 영기가 무척 농염했고 기후환경도 각양각색이었다. 이런 영수대를 만들어내려면 후천선기를 제련할 때만큼 공을 들였을 게 틀림없었다.
그러나 보따리는 전부 텅 비어 있었다.
아마 금선급 영수들이 머무는 곳이었을 텐데 그의 손에 죽어서 비어 있는 것 같았다. 한립은 기분 좋게 영수대 네 개를 거둬들였다.
당장 쓸 곳은 없어도 이런 무가지보(無價之寶)는 영수를 기르는 수사나 종문에 팔면 많은 선원석을 건질 수 있었다.
이번엔 하얀 옥대를 들어 살폈는데 그의 얼굴이 또 밝아졌다.
이것도 영수를 넣어두는 물건으로 옥대에 박힌 보석 하나하나가 분리된 공간이라 각각 다른 종의 영수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어떤 공간에는 한 마리, 또 다른 공간에는 천여 마리가 담겨 있었는데 그 종류가 무척 다채로웠다.
진선경 몇 마리를 제외하면 대부분 대승기 이하의 영수였지만 말이다.
그밖에 각 공간에 세워진 비석에는 그곳에서 기르는 영수의 특성과 용도가 적혀 있었는데 전투용부터 수색이나 추적 등 활용법이 다양했다.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견문이 넓다 자신하는 한립도 영수들의 소개를 읽고는 새로운 사실들을 많이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옥대 공간 안의 영수들은 놀랍게도 전부 죽은 것들이었다. 한립은 이상하게 여기며 크게 안타까워했다.
상처 하나 없는 영수의 시체들은 전투 중에 죽은 것 같지도 않았다.
침음하던 그가 손을 저어 눈, 코, 입에서 피를 흘리고 죽은 푸른 고라니 시체 하나를 불러냈다. 손끝을 고라니의 머리에 대고 푸른빛을 흘려보냈다.
잠시 후 빠르게 손을 거둔 한립의 얼굴에 노기가 스쳤다. 영수들의 죽음은 모종의 금제가 작용해서였다.
거령이 영수들의 몸에 자신과 공생의 금제를 심어 놓아 주인이 죽으면 다 따라 죽게 해놓은 것이다.
고개를 저은 한립은 옥대를 거두었다. 옥대의 가치는 어떻게 보면 고계 영수대 이상이었다.
마지막으로 검은 반지를 이마에 가져다 대어 의식을 불어넣었다.
후두둑
그의 손짓에 바닥에 수많은 물건이 그의 키보다 높게 쌓였다.
영초, 광석, 재료, 법보 등 없는 게 없었고 하나같이 강력한 영력을 품고 있는 값나가는 물건들이었다.
한립이 선부에 들어와 찾은 적잖은 보물들도 거령이 지닌 것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저건!’
한립은 그중에서 주작 도안이 새겨진 적홍색 영패를 불러들였다. 진염종의 표식인 영패는 대충 보아도 예닐곱 개나 있었다.
진염종 수사들은 거령에게 참살을 당한 게 분명했다.
탄식이 절로 나오는 일이었다.
그들에게 별다른 감정은 없었지만 그래도 동행을 했던 수사들이 떼죽음을 당한 것에 마음이 좋을 리 없었다.
한립은 진염종 수사들의 물건을 따로 빼놓고 수북하게 쌓인 물건들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쉭.
얼마 지나지 않아 푸른빛이 날아가 비취색 호리병박을 끌어왔다. 거령이 지난번에 사용했던 현천의 보물이었다.
한립은 입에서 푸른빛을 내뿜어 호리병 속으로 흘려보냈다.
파앗!
비취색 호리병에 미세한 주술문자들이 흐르는 녹색빛이 떠올라 은은하게 법칙파동을 내뿜었다.
생각지도 못하게 그와 비취색 호리병 간에 약간의 의식 연계가 형성되고 있었다. 한립은 반색하며 손끝에서 핏물을 흘려 호리병에 떨구었다.
똑.
그런데 핏물이 흡수되지 않고 호리병 표면을 따라 떨어져 내렸다. 한립은 실망하는 기색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호리병박은 과연 현천의 보물이었다.
예전에 현천참령검을 지녀보기는 했지만 현천의 보물에 대해 잘 알지 못했는데 선계로 와서 여러 경전을 찾아보고서야 관련 정보를 습득할 수 있었다.
현천의 보물은 천지가 배양하는 것으로 하늘이 낳아 땅이 기른다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일반적인 선기와 달리 정혈로 제련할 수 없고 선령력으로 배양해야 서서히 장악할 수 있었다. 그래서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한립이 현천참령검을 얻었을 때도 체내에서 오랜 세월 배양을 했기에 점차 조종이 가능하게 되지 않았던가.
덕분에 현천의 보물은 주인이 죽으면 다른 사람이 가져다 바로 발동할 수 있었고, 선기처럼 정혈로 각인을 지울 필요가 없어 좋았다.
한립은 비취색 호리병박을 이마에 대고 의식을 강제로 불어넣었다.
다음 순간, 미미하게 눈이 커진 그는 호리병박 안에 꽤 커다란 공간이 있고 비취색 광채가 거대한 소용돌이를 이루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녹색 소용돌이 안에 그의 청죽봉운검 한 자루가 떠 있었다.
그걸 본 한립은 안도했다. 한 벌로 된 본명선기인데 72자루 중 한 자루라도 없어지면 문제가 상당했다.
그는 바로 비검을 취하지 않고 의식으로 호리병박 내부를 살폈다.
하지만 녹색 소용돌이 근처에 이르자 무형의 힘이 의식이 더는 나아가지 못하게 가로막았다.
더 힘을 써 봐도 소용이 없자 한립은 호리병박을 장악한 후를 기약했다. 어차피 그의 손에 들어온 보물이니 현묘한 신통을 지녔을수록 그에게는 이득이었다.
한립은 의식을 거두고 푸른 검을 뽑아냈다.
작은 호리병 입구로 빠져나온 작은 검은 빛이 약간 어두워져 있었다. 한립이 비검 내의 의식 각인을 통해 보물의 상태를 살피다 움찔했다.
비검이 발산하는 빛이 어둑해진 것은 함유한 영력이 줄어서가 아니었다.
영력은 그대로고 약간 혼잡하던 영력이 정순해져 있었다. 호리병박이 영력을 정화하는 작용을 했던 것이다.
팟.
한립은 잠시 생각을 해보다 푸른빛을 호리병박에 흡수시켰다. 호리병박 입구에서 녹색 광채가 흘러나와 다시 비검을 품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유한궁에서 찾은 구금신통을 지닌 금색 3층 누각 선기도 딸려 보냈다.
호리병박의 신통이 어떤지 제대로 시험을 해보기 위해서였다.
손바닥을 뒤집어 호리병박을 치운 한립은 아직도 수북하게 쌓인 물건들을 보고 무엇부터 정리해야할지 약간 막막해졌다.
수량도 많지만 나머지 물건들은 대부분 정체를 알 수 없어 하루 이틀 사이에 끝날 것 같지 않았다.
“……마광 수사.”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그림자가 꿈틀꿈틀 길게 늘어나 분리되었다. 분리된 그림자는 똑바로 서서 마광의 모습으로 변했다.
“한 수사, 무슨 분부라도……. 오, 그간 수행이 크게 느셨습니다. 아니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수사는 정말 기재 중에 기재시군요. 선계에서도 이런 경우는 드물기 짝이 없을 겁니다.”
마광은 한립의 수행을 감응하고 놀라 외쳤다. 그러곤 앞에 수북하게 쌓인 물건들과 곁의 금동을 보고 또 움찔했다.
한립은 대답 없이 손을 저어 해 도인을 불러냈다.
“해 도인…….”
마광은 해 도인이 발산하는 기운에 표정이 부자연스러워졌다.
수행을 회복했어도 그는 진선 중기밖에 되지 않았는데, 해 도인은 금선괴뢰에, 금동은 금선 영수 그리고 한립은 진정한 금선 수사이니 그만 뒤떨어진 셈이었다.
“방금 어떤 금선을 죽이고 얻게 된 물건이 적지 않습니다. 수량도 많거니와 저는 알아볼 수 없는 것이 많아 두 분의 도움을 받고자 합니다.”
“아, 그런 일이라면 맡겨주셔도 좋습니다. 제가 수행은 강하지 못해도 마량을 따라다니면서 보고 들은 것은 많아서요.”
마광이 웃음을 되찾았고 해 도인도 고개를 끄덕이고 한립 옆으로 가서 앉았다.
“물건 정리를 도와주시면서 제가 찾아볼 수 있게 특성이나 용도를 옥간에 기록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한립은 하얀 옥간을 하나씩 나눠주었다.
“이야, 보물이 엄청 많아!”
그때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금동이 언제 운공을 마쳤는지 희희낙락한 얼굴로 다가오고 있었다.
“서금선,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수사의 수행이 하루가 다르게 높아지니 한 수사가 이후 도조가 되는 날까지 큰 도움이 되겠습니다.”
마광이 먼저 웃는 얼굴로 알은체하면서 공수를 했다.
“음흉하게 생겨서는 뭘 히죽거려요? 아, 비켜요.”
금동은 싫은 티를 팍팍 냈고 그 말에 마광의 얼굴이 굳은 것은 당연했다.
“금동, 무례를 삼가거라. 함께 선계로 비승해 그간 많은 일을 함께하다 오늘에서야 다시 모인 것이 아니냐? 이것도 다 인연인 것이다.”
한립이 얼굴을 굳히고 그런 금동을 혼냈다. 금동은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득 쌓인 보물들에 이끌리듯 다가갔다.
“이번에 수확이 적지 않구나.”
그걸 보고 한립이 웃으며 말했다.
금동은 볼을 빵빵하게 불려 내뿜은 금빛으로 8자루가 한 벌로 된 금색 비도를 불러들여 그대로 입에 넣어 버렸다.
오물거리며 영보급 보물을 먹어치우는 모습에 마광과 해 도인은 정색했으나 한립은 얼굴을 씰룩이고는 막지 않았다.
금빛이 반짝이며 그녀의 두 팔로 흘러들어 기운을 보하고 있었다. 행복한 얼굴의 금동은 이번에는 은색 쇠망치에 시선을 빼앗겼다.
쉭!
금동은 마치 자기 혼자 있는 것처럼 냉큼 그걸 들어 한 입 베어 물었다.
사각!
쇠망치가 막 뽑은 신선한 무처럼 아이의 입속으로 사라져갔다. 한립이 보니 은색 쇠망치는 비도 영보보다 품질이 좋아 선기에 가까웠다.
“자, 어서 정리를 시작하지요. 기록을 마친 것은 여기 담아 주시면 됩니다.”
그가 저물법기를 꺼내 마광과 해 도인에게 넘겨주었고 그들은 시선을 마주치고 쌓인 물건들을 빠르게 분류하기 시작했다.
한립이 주변을 둘러보다 푸른빛으로 보라색 장도와 금색 그물 그리고 하얀 패루를 끌어와 넣어두려 했다.
그때 작은 손이 잽싸게 끼어들어 보라색 장도를 가로챘다.
“이거 나 줘요!”
“금동, 다른 건 얼마든지 먹어도 되지만 이것들은 안 된다. 이 세 가지는 선기라서 지금 먹어봐야 소화도 시키지 못할 것이야. 내가 지니고 있다 나중에 내주겠다.”
하얀 패루와 금색 그물을 넣어둔 한립은 금동이 보라색 장도를 놓지 않는 것을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치사하게.”
“그걸 넘겨주면 이후 금선을 참살하는 대로 금선 원영을 주마.”
한립의 설득에도 금동은 쳐다보지도 않고 입을 벌려 보라색 장도를 깨물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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