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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723화 (1,480/2,000)

1723화. 찰나

*

한립이 폐관 수련에 들어간 지 어언 천여 년.

콰르릉 콰쾅!

그날 오랫동안 고요하던 성 위로 광풍이 몰아치고 먹구름이 몰려들어 제단이 있는 정원으로 천지영기를 쏟아부었다.

새까만 하늘에 거대한 영기의 소용돌이가 생겨나 깔때기 모양으로 떨어졌다.

어두컴컴하던 지하궁전의 밀실은 출렁이는 금빛 바다로 변해 있었고, 그 한가운데 방석을 깔고 앉은 한립은 금빛으로 반짝거렸다.

그는 마치 수겹의 금빛 의복을 두른 듯했는데 화려한 금빛 바닷속에서 흐릿하게만 보였다.

몰려든 천지원기들이 밀실 안에서 소용돌이쳐서 한립이 미리 곳곳에 꽂아놓은 진법 깃발들을 미친 듯이 펄럭이게 했다.

몇 시진이나 지나고서야 모든 천기현상이 가라앉고 한립은 번쩍 눈을 떴다. 금빛들이 그의 눈동자에서 빠져나와 오랫동안 흩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길게 숨을 내쉰 한립의 입으로 밀실을 가득 채운 금빛 바다가 빨려 들어가 사라졌다.

그의 목 아래에 금빛이 떠올라 더없이 밝게 빛나면서 천지원기를 부단히 흡수하고 있었다.

금선 중기에 이르기 위한 마지막 선규를 뚫은 일이었다.

휘이잉.

바람소리가 들리고 등 뒤로 진언보륜이 나타나 빙글빙글 회전했다. 한립이 고개를 들어 고리에서 반짝이는 4백여 개의 반투명한 시간도문을 보았다.

미소를 띤 그는 고리를 감고 있는 여섯 가닥의 금실들을 불러들였다. 그러자 그의 손바닥 앞에서 우뚝 멈춘 실들은 질기면서도 아주 유연하게 그의 손가락을 타고 내려왔다.

그것은 다름 아는 시간정사였다.

이전에 응결한 세 가닥 외에 진언화련경을 수련하는 과정에서 다시 세 가닥을 더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이번에 금선 중기에 이를 때 한 가닥 더 응결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뜻대로 되지 않았다.

천여 년의 고된 수련 중 시간정사를 수련할 기회는 딱 세 번밖에 주어지지 않았으니 얼마나 드문 일인지 알 수 있었다.

시간정사가 늘 때마다 시간법칙의 힘에 대한 이해도 깊어져서 진언화륜경 4성 공법을 익히며 맞닥뜨린 난관들이 쉽게 풀렸다.

천년의 세월이면 범인들이 윤회를 했어도 수십 번은 했을 시간이었지만 진선경 이상의 수사라면 수련에 매진하다 보면 눈만 감았다 떠도 지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래서 한립은 이렇게 빨리 금선 중기에 이른 것에 스스로 놀라면서 현살명령공이라는 편법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후환이 무엇일까 걱정해서 선규를 뚫을 때마다 자세히 관찰했는데 구멍에 회색 실 같은 게 돌아다니는 것을 제외하면 심각한 이상은 없었다.

이곳을 떠나는 것이 급했으니 나머지는 나가서 해결방법을 생각해도 늦지 않았다.

차분히 몸을 일으킨 한립은 밀실의 진법을 거두고 노도사 잔혼이 있는 대청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직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노도사 잔혼은 허공에 떠서 자신의 조각상을 마주 보고 있었다.

“에효, 이런 풍채와 얼굴을 지니고 선군이란 신분에 검선으로서 명성까지 자자했으니 얼마나 많은 선자들이 나를 흠모했던가? 내가 갇혀 있는 동안 그 어여쁜 여인들이 눈물깨나 흘렸…….”

문밖에 서서 잠시 듣고 있던 한립은 도저히 더 들어줄 수가 없어서 헛기침을 하며 서둘러 말을 끊었다.

“많이 회복하셨군요. 예전보다 혼백의 기운이 강해지셨습니다, 선배님.”

그 소리에 휙 몸을 돌린 노도사 잔혼은 처음에는 굳어 있다가 얼굴을 활짝 폈다.

“어떻게 벌써? 뭐 얼마나 지났다고 금선 중기가 되어서 나타난 것이냐. 혹시…….”

‘혹시?’

자신을 가리키며 소리치는 노도사의 말에 한립이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것인지 귀를 기울였다.

“네 녀석도 이 몸처럼 하늘이 내린 기재였던 것이냐!”

농담도 아니고 진지한 노도사의 말에 한립은 할 말을 잃었다.

“이번에 찾아온 것은 작별 인사를 올리기 위해섭니다. 금선 중기 수사가 되었으니 저는 그만 이곳을 떠날 생각입니다. 양혼로는 그리 귀한 물건도 아니니 선배님께 선물로 드리지요.”

한립은 인사를 하고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 그런데 그가 한 걸음을 떼기도 전에 뒤에서 다급한 노도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놈아, 나는 데려가지 않을 참이냐.”

노도사는 바람처럼 날아와 그의 앞을 막았다.

“제가 언제 선배님을 밖으로 모시겠다고 말씀드린 적 있었나요?”

한립의 입에 잔잔히 미소가 맺혔다.

“이, 은혜도 모르는…….”

노인이 버럭 화를 내려다 말을 멈추었고 한립은 계속해보라는 듯 잔혼을 응시했다.

“하하, 그래도 노부가 네게 나갈 방법을 일러주지 않았느냐. 게다가 네가 비경 핵심을 부수면 지하궁전도 버티지 못하고 사라질 텐데 혼백만 남은 나는 어디서 살라고?”

작전을 바꾼 노도사가 가련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 말에 한립은 고의로 고민을 하는 척하며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

“흠, 선배님의 말씀이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허나 저희는 그저 지나다 우연히 만난 것에 불과하고 아직 좋은 인연을 맺었다고 하기에도 부족함이 있지요. 이렇게 하시지요! 선배님께서 제게 영역을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시면 저도 선배님을 이곳에서 데리고 나가 드리겠습니다. 어떠십니까?”

한립의 조건을 들은 노도사는 자신의 입을 찰싹 때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신세 한탄을 하며 묵우에게 영역을 전수해 준 이야기를 한 탓에 이 꼴이 되고 만 것이다.

“노부가 영역을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었는데도 네가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어쩌라고?”

“저는 그저 제안을 드렸을 뿐이니, 선배님께서 싫다면 되었습니다. 저도 싫다는 사람에게 뭘 강요하는 성격은 아니라서요.”

“너……. 너 이 녀석! 어휴, 되었다. 알겠으니 네가 말한 대로 하자꾸나.”

“호쾌하신 분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 영역에 대해서는 얼마나 아느냐?”

“솔직히 잘 모릅니다. 그냥 선배님께서 아는 것을 말씀해 주시지요.”

“영역의 위력이야 내 길게 말하지 않아도 경험해 본 적이 있을 것이고, 그 본질은 수사가 장악한 법칙의 힘과 관련이 있다. 모종의 법칙의 힘을 펼쳐 일정 범위에서 환경에 영향을 미치는 것인데 그 위력은 얼마나 법칙의 힘을 장악했느냐에 따라 달라지지.”

“선배님, 영역은 그럼 반드시 법칙의 힘을 장악한 다음에만 펼칠 수 있는 것입니까?”

한립은 영계에서 보화가 법칙의 힘을 장악하기 전에 영역 비슷한 것을 만들어냈던 것을 떠올리고 물었다.

“기본적으로 그렇다. 하지만 절대적인 원칙은 아니라서 특수한 보물에 특수한 공법을 더불어 이용하면 법칙의 힘을 장악하지 못한 수사도 영역을 펼칠 수는 있다. 물론 어린아이가 그린 그림처럼 수준이 떨어지고 많은 약점을 갖고 있어 노부는 거들떠볼 가치도 없다 여긴다만.”

“그랬군요. 영역이 법칙의 힘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면, 영역은 법칙의 힘으로 지탱하는 것인지요?”

“그렇다. 영역이 얼마나 안정적으로 유지가 되고 위력이 굳센지는 수사의 법칙의 힘에 대한 깨달음과 비례해서, 네가 법칙의 실을 많이 얻을수록 영역의 위력도 세진다고 볼 수 있지.”

노도사는 그의 질문에 줄줄이 답해주면서 영역에 대한 기본 상식을 알려주었다. 이에 한립은 오래전부터 궁금해하던 영역에 대한 의문들을 거의 풀 수 있었다.

“네게 알려주려는 건 선역에서 가장 흔한 영역 응결법으로 널리 퍼진 만큼 모자람이 없는 공법이다. 잘 듣거라.”

노도사는 마지막으로 공법의 구결을 알려주었다.

그는 잡상인이 파는 물건처럼 흔하고 보잘것없는 공법이라 말했으나 그건 태을옥선의 경지에 올랐던 상대의 입장에서였고 이제 막 금선이 된 한립에게는 귀한 기회였다.

촉룡도에 있을 때도 관련 경전을 교환하려 했지만 금선 이상만 교환이 가능했고 무상맹을 통해 구하려 해도 가격이 터무니없이 높았다.

“다 외웠느냐?”

“외웠습니다. 어렵지 않게 익힐 수 있을 것 같은데 시험을 해봐야 알 것 같군요.”

“네 녀석이 그리 말할 줄 알았다.”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됩니다.”

한립은 투덜거리는 노도사를 향해 미소를 짓더니 소매를 펄럭이면서 바삐 대청을 빠져나왔다.

대청 안의 노도사는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은지 뒤에서 쭝얼쭝얼 구시렁댔다.

* * *

그 후로 몇 년이 지나갔다.

푸른 의복을 입은 한립은 흑자색 향로를 들고 어두운 지하궁전의 통로를 지나 낯익은 대청으로 들어섰다.

대청 바닥에서 금빛이 올라와 온기를 전하고 있었다.

“제가 핵심을 파괴하는 동안 불편하시더라도 참으셔야겠습니다.”

한립은 대청 가운데로 가 향로에 대고 말했다.

노도사 잔혼은 다시 진짜 하늘과 땅을 볼 날을 손꼽아 기다렸고 그간 한립의 불경스러운 태도에 익숙해져서 이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그 모습에 한립은 미소를 짓고는 봉인 부적 두 장을 향로 위에 종과 횡으로 붙여 노도사 잔혼과 외부 세계의 연계를 철저히 단절하고 소맷자락 속에 넣었다.

그는 길게 숨을 내쉬며 태음일귀를 내려다보았다.

예전과 달리 명확하게 시간법칙의 힘이 느껴졌다. 해시계의 힘을 의식으로 건드리려면 그냥 찔러보는 수준으로는 미동도 하지 않아 힘이 많이 들었다.

수결을 맺은 한립은 등 뒤로 진언보륜을 불러내서 눈을 감고 진실안으로 광선을 쏘았다.

금빛 광선이 닿기도 전에 기이한 장면이 펼쳐졌다. 태음일귀가 잘게 떨리더니 허공으로 떠오른 것이다.

해시계의 검은 시곗바늘에서 검은 뇌전실이 번득 쏘아져 나가 금색 광선과 충돌했다.

파칫!

뇌전이 타고 흐르는 소리가 대청을 울렸다. 금색 광선이 갈라져 가루로 변하더니 해시계 위로 쏟아져 내렸다.

진실안을 통해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한립은 바로 옆에서 천둥이 내려친 듯 멍해져 무아의 경지로 진입했다.

이번에는 오감이 극도로 예민해지는 게 아니라 환각이 나타났다. 쏟아진 금색 가루가 역류하는 강처럼 거꾸로 솟아올라 그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마치 시간의 흐름을 헤치고 나아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부단히 흐르는 금색 물결을 잡아보려 해도 잡을 수가 없었다.

초조해진 한립은 묵묵히 진언보륜경 공법을 운용해 등 뒤의 진언보륜을 회전시켰다.

4백여 개의 시간도문이 눈부시게 빛을 발했다.

‘잡았다!’

한립은 물결 속에서 다시 손을 들어 금색 수정 실 한 가닥을 잡아챘다. 놀랍게도 시간법칙의 실이었다.

한립은 기뻐 어쩔 줄 몰라 하며 다른 실을 향해 손을 뻗었다. 두 번째 수정실을 손에 넣었을 때 흐름이 거세졌다.

숨이 차오르며 호흡하기가 어려워진 그는 빠져나가려 몸을 이리저리 비틀었지만 물결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바로 이때, 거대한 금색 파도가 밀려와 그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몸부림치던 그는 갑자기 무슨 마음이 들었는지 파도를 향해 양손을 뻗어 또 다른 금색 수정 실 두 가닥을 잡아챘다.

콰르릉!

물결 속에서 화들짝 놀랄 만한 뇌성이 터지고 모든 게 붕괴되었다. 그와 동시에 눈을 부릅뜬 한립은 숨을 헐떡였다.

고개를 내려 양손을 보았지만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아 낙담했는데, 휙! 하고 진언보륜을 돌아보자 그 위로 금색 수정 실이 무려 열 가닥이나 감겨 있었다.

방금 그가 겪은 일은 환각이 아니라 찰나의 깨달음이었다. 놀라운 일에 가슴이 벅차오른 한립은 다시 해시계로 시선을 돌렸다.

바닥에 내려앉은 해시계에서 검은 시곗바늘이 빠르게 돌고 있었고 12시진을 가리키는 표식이 흐릿해져서 더는 구분이 되지 않았다.

눈을 반짝인 한립은 양손으로 수결을 맺고 진실안에서 빛을 발했다.

강대한 시간법칙의 힘이 뻗어 나가 해시계의 오목한 무늬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이번에는 태음일귀는 반응이 없고 대청으로 거미줄처럼 금색 무늬가 퍼져나가 지하궁전 전체로 흩어졌다.

오래지 않아 지하궁전의 성 위에도 금색 무늬가 나타나 비경 전체를 금빛으로 물들였다.

쿠웅!

두 눈에 금빛을 일으킨 한립은 해시계의 양쪽 끄트머리를 붙들고 시간법칙의 힘을 열심히 불어넣었고 동시에 진언보륜의 시간도문이 하나씩 꺼져갔다.

콰직.

해시계 표면에 작은 균열이 가더니 금색 무늬와 마찬가지로 사방팔방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한립은 공간 전체를 교차하는 검은 균열이 시간도문이 꺼져감에 따라 더 조밀하고 더 굵어지는 것을 감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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