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2화. 흉살기
*
촥!
해시계의 검은 바늘이 바르르 떨리다 검은빛을 독사처럼 쏘았다.
손끝에서 느껴진 따끔함에 손을 움츠린 한립은 혼백으로 전해지는 고통에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때 양혼로 속에서 기력을 되찾은 노도사의 낄낄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웃음소리가 그치기 전에 양혼로 전체가 푸른빛에 휩싸여 끌려 들어와야 했다.
“으앗, 너 이 녀석!”
지면에서 금빛이 솟아올라 노도사를 기함하게 만들었다. 한립이 향로를 둥글게 빛으로 감싸 금빛을 차단하고서야 노도사는 비명을 멈추었다.
“도, 독한 것. 예전 같았으면 노부가 너를…….”
“그보다 이게 뭔지 설명해 주시지요.”
향로를 잡아든 한립이 해시계를 가리키며 노도사의 말을 끊었다.
“나라고 아나……. 아이고, 알겠다고 알겠어! 좋게 말로 할 것이지.”
모른척하던 노도사가 한립이 빛을 거두려 하자 바로 말을 바꾸었다.
“그건 태음일귀(太陰日晷)라는 것이다. 비경의 핵심이 들어있어 그걸 완전히 부수면 이곳을 떠날 수 있을 것이야.”
“그냥 없애면 된단 거군요?”
“충고하자면, 네 실력으로는 계란으로 바위 치기와 다름없다. 괜히 음뇌(陰雷)에 반격을 당해 혼비백산하지 말라고 해주는 소리다.”
“시간이나 공간법칙을 장악한 자는 비경 핵심을 파괴하는 데 유리하다고 하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렇지! 공간법칙이야 본래 공간장벽이나 관련 금제의 근간을 이루고, 시간법칙은 반쯤 선기나 다름없는 태음일귀가 함유한 법칙의 힘과 일치하니까.”
노도사의 청산유수와 같은 설명에도 한립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는 해시계에서 시간법칙을 전혀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선배님, 서로 솔직하게 한 번 이야기해보시지요. 제가 운 좋게 시간법칙을 익혔습니다만, 해시계에서 어떤 시간의 힘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뭐라? 장난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시간법칙을 익혔다고? 괜히 늙은이를 놀라게 하지 말거라. 일단 믿는다 치고, 시간의 실은 몇 가닥이나 만들어냈느냐?”
노도사가 크게 기뻐하며 향로 안에서 벌떡 일어났다.
“제 질문에 먼저 답을 주시지요.”
한립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알겠다. 그 말을 듣고 보니까 네 녀석이 근골도 특이하고 인상도 달라 보여……. 시간법칙을 깨우쳤는데도 태음일귀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시간의 실을 다섯 개도 응결하지 못한 것일 테지.”
웃음을 흘린 노도사는 너스레를 떨다 본론으로 들어갔다.
“제가 깨우친 시간법칙이 부족해서란 말씀입니까?”
“쉽게 설명을 해주마. 네가 시간법칙 공법을 수련했더라도 핵심을 파괴하려면 반드시 금선 중기 이상을 수행을 지녀야 하고 최소한……. 시간법칙의 실을 6개는 응결한 상태여야 한다.”
“금선 중기……. 저는 아직 금선 초기의 수행도 안정을 시키지 못한 처지라 금선 중기에 도전하려면 만년은 걸릴 것입니다.”
“허허, 녀석이 말은 참 쉽게 하는구나. 만년이면 중기에 이를 수 있다고? 3대 지존법칙을 수련해서 그 정도 경지에 이르려면 백만 년은 걸릴 것이다. 이것도 최대한 긍정적으로 말해준 것이야.”
노인이 삐딱하게 바라보든 말든 한립은 상관없었다.
금선 수사에게 적합한 단약을 무한정 복용할 수 없었다면 그도 수만 년 내로 중기에 이를 수 있을 거라 장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도 나를 만난 것을 보니 네가 운이 좋은 것은 확실해. 도울만한 방법을 하나 알기는 하는데 해낼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노도사가 그를 아래위로 훑으면서 도발했다.
“어떤 방법입니까?”
“금선 중기에 이르는 길에서 가장 어려운 게 선규 24개를 뚫는 것이다. 원래는 진선경일때 뚫은 36개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그 과정이 어렵고 지지부진하지. 허나 이 몸에게 흉살기로 선규를 뚫는 방법이 있어 그걸 따라하면 수련시간을 대폭 줄일 수도 있을 것이다.”
“흉살기요? 그런 편법으로 지름길을 가는 데는 분명 후환이 따르겠지요?”
한립은 뻔한 이야기라 냉소를 흘렸다.
“누가 아니라고 했느냐? 그러니까 네 녀석이 하지 못할 거라 하지 않았더냐. 난 어차피 방법만 일러주는 것이고 시도를 하고 안 하고는 네가 선택할 문제다. 흉살기도 법력과 마찬가지로 몸에 잘 쌓이는데 일반적으로 드러내놓고 사용하기는 어렵지. 뭐, 후환이라면 이 방법으로 뚫은 선규 안에 흉살기가 남아 몸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인데. 개인차가 심해서 나도 장담할 수는 없다.”
노도사가 미소를 지으면서 설명하다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급히 덧붙였다.
“아차, 문제가 하나 더 있었지! 이 방법도 연신술처럼 천정에서 용납하지 않는 금술이라 발각당하면 순찰 선사에게 쫓기고 보통 골치 아픈 게 아니다.”
그 말에 한립은 습관적으로 코를 긁적였다.
흉살기로 선규를 뚫는다니 그 ‘영향’이라는 것이 노도사가 말하는 것처럼 간단한 문제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천정에게 들키면 쫓길 수도 있다는 것은 어차피 연신술을 익힌 그에게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 방법으로 선규를 뚫으면 얼마나 시간을 단축할 수 있겠는지요?”
“그것도 사람마다 개인차가 큰데 흉살기가 농후하면……. 달리 말해 선인들을 잔뜩 죽여 왔으면 선규를 뚫는 일이 쉽고 빠를 테고, 흉살기가 희박하면 그리 빠르지는 않을 것이야. 내 네 모양새를 보니 흉살기가 농후해 보이지는 않는데, 한두 배 정도 빠르게 선규를 뚫을 수 있겠어. 이 정도만 되어도 최상급 단약보다 낫기는 하지.”
“흉살기가 농후한지 아닌지는 어찌 확인하면 좋겠습니까?”
“내 흉살기를 드러낼 수 있는 살기현화결(煞氣顯化訣)을 들려줄 테니 잘 듣거라.”
노도사는 기괴한 구결을 암송해 주었고 한립은 그의 지도를 받아 특이한 수결을 맺은 다음 구결을 읊었다.
“일기분음양(一氣分陰陽), 현음유삼살(玄陰有三煞)……. 흉살취용천(凶煞聚溶泉), 혈살내관주(血煞內關駐)…….”
“나타나라.”
한립이 한 발로 쿵! 하고 바닥을 찍어 대청이 울렸다.
검은 기운이 연기처럼 그의 머리를 빠져나와 먹처럼 진한 먹구름을 이루고 대청의 천장을 뒤덮었다.
그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끝도 없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한립은 평소와 분위기가 싹 달라져 전신에서 살기가 뻗어 나왔다.
향로 속의 노도사는 흉신악살처럼 흉흉하게 변한 한립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 이게……. 사람은 겉모습만 보고 모른다더니, 그 말이 딱 맞는구나! 대체 얼마나 많은 이들을 죽이며 수도의 길을 걸어온 것이냐…….”
노도사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지만 한립은 그리 큰 변화를 느끼지 못했다.
검은 안개가 드러나 오히려 몸이 훨씬 가벼워진 느낌이었는데 어렴풋이 마음이 혼탁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제 흉살기 정도면 어떻겠습니까?”
혼탁한 마음을 억누르면서 한립이 입을 열었다.
“너처럼 흉살기가 농후한 자는 내 살면서 몇 보지 못하였다. 허나 대부분 피비린내가 짙고 암홍색을 띄기 마련인데 네 흉살기는 아주 정순한 먹색이구나. 장래가 밝아. 내가 알려준 방법대로 수련해도 영향을 그리 많이 받지는 않겠다.”
노도사가 칭찬을 늘어놓자 한립은 기뻐하는 기색도 없이 법결을 거두어 아직도 바깥으로 새어 나오고 있던 검은 기운을 체내로 거둬들였다.
“왜 그만둔 것이야? 아직 다 보이지도 않은 것 같구만.”
“공법을 전수해 주십시오.”
“그 방법을 써보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냐? 잘 생각하고 결정하는 게 좋을 텐데…….”
노도사의 말대로 한립은 일단 공법을 손에 넣고 살펴본 다음에 결정할 생각이었다.
그는 노도사에게 <현살명령공(玄煞暝靈功)> 흉살기 공법을 전해 들은 다음 잔혼을 그가 원래 있던 지하 대청으로 돌려보냈다.
혼백이 기력을 되찾을 수 있도록 양혼로도 같이 넣어주었다.
노도사가 하는 말을 몇 할을 믿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명한선궁에 대해 아는 것이 많았고, 잔혼만 남아 큰 위협이 뒤지 않았으니 일단 남겨두기로 한 것이다.
한립은 또 다른 지하궁전의 밀실을 찾아 석문을 닫고 신속하게 진법 금제들을 펼치기 시작했다.
* * *
반 시진 뒤, 밀실 중앙에 주저앉은 한립은 품에 손을 넣어 선부로 들어올 때 호언 도인이 내준 저물대를 꺼냈다.
그 안에는 <진언화륜경> 4성 공법이 적힌 새하얀 옥간이 들어있었다. 지금까지 어렵사리 진언화륜경의 앞부분 공법을 얻었던 것에 비해 너무 쉽게 일이 풀리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이제 와 되돌아보니 외부 세력이 촉룡도에서 진언화륜경 3성까지의 공법을 아주 중시하고 있다고 오해하게 만들기 위한 장치에 불과했던 것 같았다.
그가 손에 든 옥간은 첫 번째 공법을 얻었을 때처럼 진품이 아닌 복제품이었다. 그 내용은 이전보다 난해하고 길어서 한 달을 집중해서야 겨우 통독을 할 수 있었다.
앞서 익힌 3성까지의 공법을 기초로 4성 공법에서 관건이 되는 부분이 살이 붙어서 단번에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반가운 사실은, 진언화륜경 4성부터 이미 시간법칙의 힘을 쌓기 시작한 수사가 수련 과정 중에 시간의 실을 응결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얼마나 많은 실을 응결할 수 있을지는 수련자가 얼마나 많은 법칙의 힘을 모았는지에 따라 달렸다.
한립은 급히 4성을 수련하지 않고 1성부터 3성까지의 공법을 꼼꼼하게 복습하면서 4성 공법과 연관된 부분이나 중복되는 부분을 살폈다.
시간은 오래 걸리는데 효과는 그리 좋지 않아 여전히 4성 공법 연구는 진척이 없었다.
이럴 거라 이미 예상하고 있던 한립은 어차피 떠나지도 못할 것 수련이나 실컷 하자는 마음으로 임하고 있었다.
이날도 수련용 단약을 삼키면서 진언화륜경을 들여다보던 한립은 문득 진언보륜을 불러내고 깜짝 놀랐다.
고리에 반투명한 시간도문 하나가 반짝이고 있었다.
도문들이 전부 꺼지고 불과 4달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하나가 되돌아온 것이다.
‘설마 시간법칙의 실이 늘어서?’
어떤 신비로운 원리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아직 알 수 없었지만 희소식이었다.
* * *
눈 깜짝할 사이에 지하동굴에서 백여 년이 흘러갔다.
어두운 밀실 안에 가부좌를 튼 한립은 전신에서 은은히 금빛을 발산하면서 석상처럼 앉아 있었다.
한참 후 눈꺼풀을 들어 올린 그의 눈동자 깊은 곳에 금빛이 번득였다.
“이렇게 가다가는 천년이 지나도 선규 하나를 뚫기 힘들겠어……. 정말 현살명령공을 익히는 수밖에 없는 것인가?”
고민을 거듭하던 그가 낮게 ‘마광’이란 이름을 내뱉었다.
앞쪽 허공이 왜곡되고 길쭉하게 늘어나 새까만 피부에 한립과 비슷하게 생긴 흑포 사내로 변했다.
검은 마기가 넘실거리는 사내는 마광이었다. 오랫동안 쉬어서인지 몸을 완전히 회복하고 기운도 왕성해 보였다.
“한 수사, 드디어 저를 기억해 주십니다.”
마광의 입꼬리가 휘면서 매력적인 미소를 만들어냈다. 그는 말을 하면서 한립의 기운을 훑고는 표정이 미미하게 달라졌다.
“그간 여러 가지 일이 많아 수사를 불러낼 기회가 없었는데, 오늘 자문을 구할 일이 있어 이렇게 찾게 되었습니다.”
“벌써 금선경에 이르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하하, 제가 주인을 고르는 안목이 이전보다 나아졌나 봅니다. 뭐든 물어보실 것이 있으면 말씀해 보세요.”
“회계에 대해서 얼마나 아십니까?”
“회계요? 선역에서 줄곧 회계에 대해 숨기려 했고 마량도 그와 관련된 일에 참여하지 않아 저도 아는 바가 많지 않습니다. 선역에 상응하는 무한한 지역이라고만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흉살기는 어떻습니까?”
“흉살기라면 저보다는 수사와 같은 선인들이 더 잘 알 것입니다. 우리 천외마족이 살육을 하면 마기를 흡수할 수 있는 것처럼 사람들이 살육하면 쌓이는 게 흉살의 기운이니까요.”
“선계에 흉살기로 수행을 높이는 비술이 있다는 이야기도 들어보지 못하셨습니까?”
한립은 희망을 놓지 않고 다시 물었다.
“제가 알기로 그런 비술이 있기는 합니다. 허나 피치 못할 사정이 없는 한 익히지 않는 게 보통이지요. 후기에 이르러 수행증진의 고비로 작용하게 되니 누가 쉽게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고맙습니다. 이 일이 끝나면 다시 이야기 나누도록 하시지요.”
한립은 마광에게 인사를 하고 소매를 펄럭여 다시 돌려보냈다.
“수만 년을 기다릴 수는 없으니…….”
한립은 한숨을 쉬며 독특한 수결을 맺어 자욱하게 흉살기를 분출했다. 마음먹고 체내의 흉살기를 내보내자니 연기가 응결하는 것처럼 뭉쳐갔다.
한립은 경계는 하면서도 술법을 멈추지 않고 그 기운을 선규 자리로 인도했다. 그러자 흉살기가 법력처럼 그의 몸에서 뭉쳐 선규를 뚫으려 하고 있었다.
이에 그는 아예 눈을 감고 술법에 정신을 집중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미세한 소리가 들리고 한립의 옆구리 아래쪽에서 작은 소용돌이가 나타나 천지원기를 콸콸 빨아들였다.
빛이 가신 후 그의 옆구리 아래쪽에 새로운 금빛이 반짝였다. 37번째 선규가 뚫린 것이다.
약간 마음을 놓은 그가 진언보륜을 불러냈다.
시간도문이 회복된 고리에 두 개의 도문이 늘어 총 362개의 도문이 형성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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