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721화 (1,478/2,000)

1721화. 핵심

*

실망한 기색을 보이던 도사 잔혼은 빠르게 평정을 회복하고 입을 열었다.

“그럼 나와 무생검종의 명성은 어떠하냐? 천년만년 칭송을 받고 만인이 우러러보는 그 정돈가?”

“당신이 무생도인이라면 어째서 이곳에 봉인되어 갇혀 있었던 것인지요?”

한립은 쓸데없는 질문에는 답하지 않고 다른 질문을 했다.

“누구보고 갇혀 있다는 것이야?”

도사 잔혼이 눈을 부릅뜨면서 뭐라고 했다. 한립도 의심스럽게 여기던 부분이었다. 기왕 잔혼만 남았으면 굳이 이렇게 일을 크게 벌여 봉인할 이유가 없었다.

“보고도 모르겠느냐? 내 스스로 혼백 일부를 봉인해 이곳에 숨겨둔 것이다.”

“어째서 이곳에 숨으셨는지 궁금하군요.”

“에휴, 다 저 여편네 때문이 아니면 무엇 때문이겠나.”

잔혼은 숨었다는 말에 수염을 씰룩거렸으나 결국에는 한숨을 내쉬면서 힘없이 답했다.

“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한립이 잔혼의 시선을 따라 건장한 궁장여인을 보고 의아해했다.

“사람은 무슨, 저 여자는 회계(灰界)에서 온 태을회선이다.”

“회계요? 회선?”

노인의 대답에 한립의 의혹은 더욱 깊어졌다.

“아아……. 하긴 천정은 늘 회계의 존재를 숨기려 했으니 너 같은 어린 수사들은 회선을 모를 만도 하지. 그게 복인지 화인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회계가 어떤 곳인지 설명을 부탁드려도 될지요?”

“뭐, 오랫동안 말동무할 사람도 없었고 오늘 기분도 썩 괜찮으니까 말해주마. 회계는 말이다, 사실 우리 진선계처럼 거의 무한한 지역으로 그 안에 다양한 회계 생명체들이 살아가고 있다. 그들이 우리처럼 수련하면 회선이 되는 것이고 태을회선은 태을옥선에 버금가는 회선이라 생각하면 된다.”

노인은 담담하면서도 한숨이 섞인 어투로 설명해주었다.

‘태을급…….’

태을회선과 태을옥선이라는 말이 주는 무게감에 한립의 얼굴도 진지해졌다.

“그럼 명한선궁의 변고는 이 여인 때문입니까?”

“어째서 선궁 일에 그리 관심이 많지?”

“이유는 간단합니다. 아직 수사를 믿을 수 없으니 이야기를 더 들어보려는 것이지요.”

바로 답하지 않고 화제를 돌리는 도사 잔혼을 향해 한립이 차갑게 웃어 보였다. 잔혼은 버럭 화를 내고 싶었으나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한립의 태도에 그만두었다.

“당시 막 명한선궁의 궁주가 된 나는 아주 의기양양했었지. 그런데 그때 저것들이…….”

“뭐라고요? 선궁의 궁주가 되다니, 당신이 명한선군이란 말입니까?”

잔혼이 한참 기억을 회상하다 입을 열었는데 깜짝 놀란 한립이 말을 끊었다.

“왜? 무생도인이 명한선군이면 안 되느냐?”

도사 잔혼이 자신의 말을 끊은 것에 기분이 나빠 눈썹을 끌어올리고 쳐다보는데도 한립은 의심스럽다는 표정이었다.

“흥, 너 같은 평범한 수사가 어찌 하늘이 내린 기재의 삶을 이해할까! 됐으니까 자꾸 말 끊지 말고 좀 잘 듣거라. 어린 것들은 어찌 가면 갈수록 버릇이 없어지는지 모르겠어.”

“계속 말씀해보시지요.”

잔혼의 기색에 한립이 어깨를 으쓱했다. 잔혼은 헛기침을 해서 목을 풀고 조잘조잘 자신이 겪은 일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도사가 말하기로 그의 본명은 ‘육운’이었다.

중급 세력을 지닌 육 씨 세가의 방계 일족 중에서도 서자로 자질도 고만고만해서 가문의 중시를 받지 못하고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다양한 정통공법을 익힐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

주머니 사정도 좋지 않던 그는 가문 서가를 뒤져 아무도 원치 않는 연체술 공법을 가져다 익히기 시작했다.

그렇게 떠밀리듯 시작한 현선의 길이 잘 맞아서 온갖 잡다한 연체술을 죄다 익혔다고 했다.

그러다 우연히 밤하늘에 가득한 별을 보고 영감을 받아서 그 성광지력으로 몸을 단련하는 방법을 연구해 <대주천성원공>을 창안하고 그 뒤로 수행이 나날이 쑥쑥 늘어 금선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 후, 그는 현선의 신통으로 수행이 약간 높은 금선 검수와 싸우다 무승부가 난 것에 치욕스러워 열이 받아 그 길로 검수로 길을 틀었고, 3천 년 넘는 시간 동안 잠적하다 완전히 새로운 무생도인이라는 신분으로 명한선역 검수의 정점을 찍고 무생검종을 창립했다는 것이다.

그 뒤로 고강한 실력과 수많은 기연 조화가 어우러져 태을옥선의 경지에 이르러 명한선역을 제패했고, 천정의 밑으로 들어가지 않는 조건으로 명한대륙 선궁 궁주 자리를 수락했다.

인생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흥이 오른 도사 잔혼은 만일 실체가 있었다면 침을 튀겨가며 열정적으로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한립은 무표정하게 듣고 있지만 내심 깜짝 놀랐다.

잔혼의 이야기가 거짓이 아니라면 그저 ‘하늘이 내린 기재’라는 간단한 표현은 그를 설명하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묵우라는 회선 여인이 비술로 이계의 기운을 억누르고 우리 명한선궁에 들어왔을 때가 떠오르는구나. 내 보기에 자질이 뛰어나다 싶어 문하로 들여 무상검법을 전수하고 영역 비술까지 가르쳐 주었건만…….”

여기까지 말한 노인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계속했다.

“결론적으로 묵우는 선궁을 입구로 회계와의 통로를 뚫어 회계 생물들을 선역으로 끌어들였지. 노부가 그들과 싸우는 동안 진작 회계와 결탁해 있던 윤회전이 명한선궁으로 쳐들어와 전세는 돌이킬 수 없게 되었고, 참혹한 일들이 벌어졌어…….”

“명한선궁의 방어선이 뚫리고 패하셨군요.”

“패했다라……. 흥, 그들이라고 뭐 멀쩡하게 이득을 취한 줄 아느냐? 아까운 명한선궁만 풍비박산이 났지. 적잖은 구역이 쪼개져서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게 사라졌다.”

“혹시 명한선궁에 광한계라는 구역이 있었습니까?”

돌연 옛일이 떠오른 한립이 급히 물었다.

“광한계? 그런 곳이 있기는 했지. 그건 왜 묻는 것이냐?”

잔혼의 대답에 한립은 오랜 의혹이 해소되었다. 광한계는 당시 전쟁으로 이곳에서 떨어져 나간 구역의 일부로 영계에 이르러 그곳의 비경이 된 것이다.

그가 예전에 광한계에서 얻은 만검도도 원래 무생검종의 물건이었단 소리였다.

“자질구레한 질문에 다 답해 줬으니 이제 내가 몇 마디 물어도 되겠지?”

“당시 전쟁은 어떻게 끝나게 되었고, 당신은 어쩌다 이곳에 이르게 된 것인지요?”

한립은 못 들은 척 다시 물었다.

“어휴, 그래 도리보다 주먹이다 이거냐? 인심이 옛날 같지가 않아…….”

말문이 턱 막힌 노 도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타박했다. 무표정한 한립은 장검을 다시 만지작거렸다.

“커험……. 전쟁이 어찌 끝났는지는 노부도 모른다. 묵우와 윤회전의 맹공에 나 홀로 그들과 싸우며 중상을 입혔지만 수적으로 열세라 패배를 피할 길은 없었지. 육신이 훼손된 나는 어쩔 수 없이 잔혼만 이곳으로 달아나 스스로를 봉인하고 도움을 기다려야 했지.”

“천정은 왜 나서지 않은 것입니까? 그들도 윤회전과 불화가 있었을 텐데요.”

“나도 명한선궁을 맡아서 윤회전 못지않게 제멋대로 굴었거든. 천정의 선적(仙籍)에도 이름을 올리지 않겠다고 버티고 그들 말도 안 들었으니, 천정이야 나와 윤회전이 양패구상하면 앉아서 구경만 하다 이득이나 챙기려 했을 거야. 내 짐작이 맞다면 명한선역은 이제 완전히 천정의 손에 떨어졌겠지?”

노 도사가 멋쩍게 웃음을 흘렸다.

“명한선역은 북한선역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현재 북한선궁은 천정 소속이 맞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한립의 말에 노 도사가 더이상 입을 열지 않고 오랫동안 침묵했다.

“이 조각상들은 어디서 난 것인지요.”

한립이 청죽봉운검을 거두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껄껄, 할 일이 없으니까 시간도 때울 겸 솜씨 좀 부려 봤다. 어째 봐줄 만은 하더냐?”

“스스로 봉인한 것이면 빠져나갈 길도 마련해 두셨겠지요?”

“원래 감옥으로 설계된 곳에 노부도 창졸간에 숨어들었는데 빠져나갈 길을 마련해 두기는 무슨?”

“……그럼 당신도 이곳에서 어떻게 빠져나가야 하는지 모른단 말입니까?”

침묵하던 한립이 다시 물었다. 눈앞의 잔혼의 말은 기껏해야 5할밖에 믿을 수 없었다.

분명 무언가를 숨기고 있으리란 것은 알았지만 아직 허점을 찾지 못해 그냥 듣고 있을 뿐이었다. 노 도사가 대놓고 한립을 관찰하고는 쯧쯧 혀를 찼다.

“네 녀석의 실력에 나가고 싶다고 나가 지겠느냐? 내 일일이 설명할 시간도 아까운 수행이구만.”

“오,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비경은 외부에서 열어주지 않으면 핵심을 파괴하는 것밖에 없다. 비경 전체와 연결된 핵심은 공격받으면 공간 전체의 천지영기를 끌어와 대항하기 때문이지. 예전의 내 수행이면 문제가 없겠지만……. 쯧쯧, 네 녀석은 수행이 금선 초기나 될까? 껄껄. 괜히 나갈 생각 말고 여기서 머물면서 노부의 말동무나 하면 되겠다.”

“선배님께선 어느 경지까지 오르셨는지 물어도 될지요?”

한립은 냉큼 호칭을 선배님으로 격상해서 물었다.

“에이, 뭐 그리 높지는 않았고 겨우 태을옥선 후기 정도?”

웃음 짓는 노 도사의 얼굴에 자부심이 묻어났다. 예상한 답이었지만 직접 들으니 놀라 입이 벌어졌다.

“그럼 저도 태을경 후기가 되어야만 비경 핵심을 파괴하고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 거란 말씀입니까?”

“후기까지는 필요 없고, 태을경 초기만 되어도 되기는 될 것이야……. 엇, 그러고 보니 넌 어떤 공법을 수련했느냐? 법칙의 힘은 장악했고?”

“비경 핵심을 파괴하는 것과 관련이 있는 질문입니까?”

“관련이 있고말고! 어중이떠중이 같은 법칙을 깨우쳤으면 태을경은 되어야 가능하겠지만, 3대 지존법칙 중 시간이나 공간 법칙을 약간이라도 익혔으면 금선 중기만 되어도 어떻게 될 것이야. 하긴, 네 녀석이 그럴 리가…….”

노 도사는 자신이 말하면서도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두 법칙과 비경 핵심이 연관이 있군요.”

“비경 핵심이 시간법칙을 함유한 물건이라 강제로 부수려면 태을경 초기의 수행이 필요하고, 공간법칙으로 분해하려면 금선 후기는 되어야 한다. 만에 하나 시간법칙으로 파훼를 한다면 금선 중기 수행이면 족하겠고.”

“……핵심은 어디에 있는지요? 제가 살펴볼 수 있게 안내를 부탁드리겠습니다.”

괜한 걸 묻는다는 듯 성가셔하는 노인을 바라보다 한립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노 도사 잔혼이 뭔가 꺼려지는지 답이 없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그게, 거기에 펼쳐진 금제들 때문에 노부 같은 잔혼은 들어가기가 좀…….”

“방법이 있습니다. 여기 양혼로(養魂爐)에 들어가 쉬시지요.”

웅얼거리는 잔혼을 향해 한립은 보랏빛을 반작이는 검은 향로를 꺼내 들었다.

“그러지…….”

노 도사의 잔혼이 연기처럼 그 안으로 들어갔다.

“죄측에 보면 숨겨진 문이 하나 있는데 그곳을 빠져나가서…….”

향로에서 노 도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립은 목소리가 안내하는 대로 지하궁전 깊은 곳으로 들어서서 이리저리 통로를 돌아 한 시진 만에 또 다른 대청 밖에 도착했다.

“이곳입니까?

“그래, 비경 핵심은 이 안에 있다. 노부는 같이 들어가지 않을 것이니 향로랑 같이 바깥에 두고 들어갔다 오거라.”

한립은 두 눈에서 밝은 남색빛을 일으켜 대청을 살폈지만 어떤 금제나 영력 파동도 감지할 수 없었다.

슬쩍 입꼬리를 끌어올린 그가 냅다 향로를 안으로 집어 던졌다.

탱!

빙글빙글 돌아 향로가 바닥에 떨어지자마자 바닥에서 금빛이 스멀스멀 올라와 대청을 밝혔다.

“이 망나니 같은 놈아! 어서 노부를 꺼내 주거라. 더 늦으면 혼백이 흩어져 버릴 거라고…….”

향로 안에서 절박하게 들려오던 노 도사의 목소리가 점점 왜곡되고 있었다.

휙!

과연 바닥 무늬에서 발산되는 금빛이 벽사신뢰처럼 혼백 같은 귀물과 상극인 것을 보고 소매를 저어 향로를 바깥으로 불러들였다.

“에구, 나 죽는다. 에구구…….”

향로 속 잔혼은 빛이 어두워져 거의 허상처럼 소실되기 직전이었다. 끙끙 앓기만 하는 것이 한립을 욕할 힘도 없는 것 같았다.

한립은 별다른 말 없이 혼백을 견고하게 만들어 주는 부적을 꺼내 향로에 붙이고 대청 바깥에 내려 둔 채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서자 바닥이 전부 용양석(容陽石)으로 되어 있어 몸이 따끈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용양석은 강한 양기를 품은 석재로 혼백에 대한 살상력이 강했다.

넓은 공간에는 중앙에 허리춤까지 오는 제단을 제외하곤 아무것도 없었다.

바로 그곳으로 다가간 한립은 오목하게 파인 무늬가 하얀 원형 제단을 뒤덮고 용양석 바닥까지 이어진 것을 볼 수 있었다.

비스듬하게 기울어져서 위쪽에 십이시진이 표시된 돌덩이는 제단이라기보다는 해시계에 가까웠다.

한립은 해시계에서 은빛이 잔잔한 물결을 이루는 것을 보았다.

눈으로는 이상한 점을 찾지 못했는데 그가 손을 대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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