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0화. 또 다른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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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뒤 손바닥을 펼쳐 불러낸 시간정사는 어둡게 변해 있었다. 한립은 수정실을 진언보륜으로 돌려보내 체내로 회수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손짓에 깨끗한 푸른 장포가 입혀졌고, 백옥으로 만든 비녀가 나타나 산발이 된 검은 머리카락을 정갈하게 올렸다.
그때 해 도인이 근처에 착지했다.
“새로운 경지에 이른 것을 감축드립니다, 한 수사.”
“십여 년간 저를 위해 호법을 서주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공수하는 해 도인을 향해 한립이 밝게 웃어 보였다.
“그런 말씀 하실 것 없습니다. 금선의 경지에 이르고 진언보륜신통도 회복하셨을 테니 다시 제단의 몽은부문을 보러 가실 겁니까?”
해 도인이 물음에 한립의 미소가 굳었다. 시공간을 초월했을 때 진언보륜의 시간도문들이 전부 꺼진 것이 떠오른 것이다.
“무슨 문제라도…….”
“아닙니다, 가서 살펴보시지요.”
한립은 쓴웃음을 지으며 해 도인과 같이 날아올라 정원으로 향했다. 제단에는 잡초가 무성했지만 아무런 변화 없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립은 다가가 제단을 살펴보다 등 뒤로 금빛 찬란한 보륜을 불러냈다. 그러나 고리상의 시간도문들은 전부 어두워져 있었다.
그가 수결을 맺자 고리 중간에 떠오른 금색 눈알이 광선을 쏘았고 예전처럼 제단에서 허상이 어른거리다가 원래대로 회복되었다.
“아무래도 안 되려나 봅…….”
한립이이 탄식을 하려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수결을 달리했다. 진언보륜에서 시간정사 세 가닥이 날아올라 곧장 제단으로 떨어졌다.
화아앗!
이번에는 금빛이 만연하면서 덩굴 광채로 변해 제단을 중심으로 가지가 뻗어 나가 정원의 수풀로 퍼져나갔다.
“몽은부문의 숨겨져 있던 핵심 도안뿐 아니라 진법 전체의 모습이 드러났습니다.”
금빛이 만발하는 제단을 본 해 도인이 감탄했다.
“해 수사, 이제 어떻게 파훼하면 될지 아시겠습니까?”
그 말에 한립이 미소를 머금고 물었다.
“……복원된 꽃술 무늬를 통해 보건데, 이건 몽은부문 중에서도 특수한 구염문(九魘紋)입니다. 이제까지 강제로 뚫으려 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로군요. 만일 그랬다면 오히려 진법을 자극해 비경 안이 뒤집어졌을 겁니다. 어쨌든 진법 전체의 모습까지 확인했으니 해결하는 것이 어렵지는 않습니다.”
대답을 마친 해 도인은 한립에게 진법을 파훼하는 깃발과 법기들을 빌려 성을 이리저리 오가며 바삐 움직였다.
한립이 제자리에서 일각을 기다렸을 때 해 도인이 복잡한 문양이 새겨진 하얀 옥쟁반을 들고 나타났다.
신기하게도 옥쟁반은 몽은부문의 꽃술자리에 딱 들어맞았다.
“훼손된 부분을 옥석으로 대체한 겁니다. 소용이 있기를 바라야겠지요.”
수결을 맺은 해 도인은 나지막하게 주문을 외다 한 손을 들어 제단 중앙을 내리쳤다.
웅!
그의 손바닥에서 빠져나온 금빛이 옥석을 투과해 제단을 때리자 눈부신 빛이 터져 나왔다.
몽은부문에서 금빛 허상이 고공으로 날아올라 높이 오를수록 규모가 커져 성 전체를 뒤덮는 거대한 꽃 허상으로 변했다.
9개의 커다란 꽃잎에 새겨진 복잡한 금빛 무늬가 서로 교차하고 연결되는 자리마다 해 도인이 미리 준비해둔 진법 깃발들이 박혀 있었다.
몽담화 허상에서 수백 줄기의 금빛 실들이 뻗어 내려와 진법에 박힌 깃발들과 이어졌을 때 허상의 꽃술 부분으로 금빛이 출렁출렁 몰려들어 빛기둥을 이루었다.
쿠쿵!
둔중한 소리와 함께 금색 빛기둥이 거미줄처럼 덩굴 광채가 만연한 제단 속으로 번득 사라졌다.
스르릉.
이어서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고 둘로 갈라진 제단 중앙에 협소한 지하 동굴 입구가 나타났다.
새까만 동굴 내부에서는 바람 소리만이 들려왔다.
미간을 좁힌 한립은 8개의 불덩이를 안으로 날렸고 불덩이들은 금방 바닥에 부딪혀 안쪽으로 굴러갔다.
불덩이가 비춘 지하동굴은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낮은 천장을 지닌 통로였다. 확실한 것은 비경을 빠져나가는 입구는 아니었다.
“비경을 벗어나려면 고생을 좀 해야겠습니다.”
“이 안은 몽은부문으로 봉쇄가 되어있던 공간이니 막대한 기연이 수사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작게 한숨을 쉬는 한립을 보고 해 도인이 덤덤히 말했다.
“지금은 기연보다 급히 이곳을 떠나고 싶은 마음만 가득합니다.”
한립이 쓴웃음을 지었다.
“수사의 호법을 서는 동안 크게 힘을 쓸 일은 없었으나 오랜 시간 외부에 머물었기에 한동안 휴식을 취해야 합니다. 필요한 일이 있으면 그때 다시 부르시지요.”
“감사했습니다.”
한립은 해 도인에게 진심에서 우러난 고마움을 표했다. 이에 해 도인은 손을 내저으며 금빛으로 변해 그의 소매 속으로 사라졌다.
혼자 남은 한립은 잠시 생각하다 신중한 눈빛으로 지하동굴로 펄쩍 뛰어내렸다.
동굴에 내려선 후 내부를 살피니 바닥과 벽이 아주 고르고 전방으로 이어진 검은 통로의 크기는 한두 사람이 나란히 지나기에 충분했다.
그는 두 눈에서 남색빛을 일렁이며 의식을 방출해 통로 곳곳을 조사했다. 뜻밖에도 지하에는 지상과 맞먹는 규모의 거대한 지하궁전이 있었다.
몽은부문이 전부 가리고 있어 의식으로 조사를 해도 소용이 없었던 것이다. 통로를 따라 수백 걸음을 걸어간 한립은 매끈한 석벽과 마주했다.
손을 들어 힘껏 석벽을 밀자 쿠쿵 하면서 천천히 벽이 밀려 또 다른 통로가 나타났다.
“…….”
통로 중앙에 서서 양쪽을 살피던 한립은 오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른쪽 길은 백여 걸음 만에 끝나고 작은 방에 이를 수 있었다.
석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어두컴컴한 통로와 달리 십여 개의 형광석들이 천장에 박혀 서늘한 하얀빛으로 방을 밝히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한립은 스윽 방을 훑어보았다.
방구석에 놓인 흑목(黑木) 진열장은 낡고 오래전에 부서져서 그 아래로 여러 용기들이 쏟아져 뒤섞여 있었고 기이한 향기가 났다.
그 속에서 검은 자기병을 하나 불러들인 한립은 뚜껑을 열었다. 그러나 용기 안에서 기이한 약 향기가 훅 끼쳐와 검은 병을 던져버렸다.
데구루루.
병 안에든 단약은 오랜 세월이 지나 약효가 흩어지고 없었다.
찬찬히 방을 살피던 한립은 별다른 것이 없자 방을 빠져나와 통로의 다른 쪽으로 걸어갔다.
반 각 뒤에 또 다른 석문 앞에 이른 그는 문에 예스럽고 복잡한 봉인 주술문자들이 새겨진 것을 발견했다.
그는 약간 주저하다 다섯 손가락 끝에서 빛을 일으켜 문에 가져다 대었다.
그러자 다섯 덩어리의 빛을 흡수한 석문은 주술문자들이 중앙으로 몰려들어 기이한 원형 무늬를 이루었다.
쿠릉.
한립이 그 원형 무늬를 누르니 묵직한 석문이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파아앗!
안에서 터져 나온 밝은 빛에 그는 바로 청죽봉운검을 손에 들었다.
완전히 열린 문 뒤로는 좁고 기다란 통로가 기다리고 있었는데 양쪽 벽에 파인 고랑에 가득 담긴 기름에 불이 붙어 천천히 연소하며 그곳을 밝히는 중이었다.
한립은 공기 중에 퍼진 옅은 비린내를 맡으며 코끝을 찡긋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곳을 시작으로 갈림길이 많아지고 작은 방과 규모가 크지 않은 대청들이 수시로 나타났다.
이런 방들은 가구가 거의 없었고 별다른 물건이 든 것도 아니라 한립도 처음에는 일일이 조사하다 나중에는 의식으로 특수한 파동이 느껴지는지만 살폈다.
몇 시진 후, 한립은 어느 석문을 빠져나와 확 넓어진 직선 통로로 들어섰다.
그 끝에 양쪽으로 열리는 높고 큰 전각의 대문이 보였고 굳게 닫힌 문에는 절반씩 흉악하게 생긴 짐승의 머리가 조각되어 있어 그곳에서 시작된 구불구불한 무늬가 문 전체를 뒤덮었다.
모르는 짐승이었지만 간단한 금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후 진실안을 발동한 그는 진언보륜을 거두고 곰곰이 생각을 해보다 금제를 풀기 시작했다.
파파팟.
연달아 법결들이 석문으로 날아가고 주술문자가 누런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크르르…….
문에 조각된 짐승의 눈으로 그 빛이 번진 순간, 짐승의 으르렁거리는 소리와 함께 짐승 허상이 튀어나왔다.
한립이 서둘러 피하자 짐승 허상은 흩어져 종적을 감추었고 석문은 빛을 잃고 다시 어두워졌다.
차분히 문을 밀자 이번에는 부드럽게 열리는 문틈으로 대전 내부를 볼 수 있었다.
틈 사이로 무언가 어른거린 것 같았는데, 미간을 좁힌 그가 의식을 불어넣어도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번득 대청 안으로 이동한 한립은 잠시 내부를 훑었다.
그 안에 사람과 비슷한 크기의 회백색 석상들이 일고여덟 개가 놓여 있었고 그것들이 바닥에 어른거리며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
대청 중앙으로 걸어가 자세히 석상을 살피자 그는 이것들이 대청을 지지하는 기둥 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는데, 괴력을 지닌 역사나 강력한 짐승이 아닌 경건한 얼굴을 한 사내와 여인들이라는 게 특이했다.
한립의 눈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생생하기 짝이 없는 조각상 중 늙은 도사와 궁장 차림의 여인 조각상이 가장 정교했다.
염소수염을 기른 야윈 얼굴의 노년 도사는 바람에 미세하게 구겨진 도포의 주름까지 섬세하게 표현이 되어있었고, 사내처럼 체구가 큰 궁장 여인은 선이 굵고 표정도 위풍당당해서 나풀거리는 궁장 차림과 별로 어울리지 않았다.
한립은 차라리 여인이 갑옷을 입고 있었더라면 특유의 기질을 잘 살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쾅!
그때 그가 느닷없이 손을 들어 오른쪽 벽을 후려쳤다.
“에구구…….”
앓는 소리와 동시에 퍽! 하고 백옥 골격이 벽에 부딪혀 뼈다귀들이 흩어졌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뼈다귀들이 가루가 되는 것을 보고는 한립이 소리쳤다. 뼛가루 속에서 어두운 녹색 빛들이 천천히 떠올라 야윈 노인의 허상을 만들었다.
놀랍게도 골격에 혼백 한 줄기가 남아 있었던 것 같았다. 노인의 모습은 늙은 도사 석상과 똑같았다.
“야 이놈아! 뼈를 가루로 만들어 버리면 이 몸은 앞으로 어디서 지내란 말이냐?”
잔혼답지 않게 깨끗하고 우렁찬 소리를 내고 있었다.
“다시 묻겠습니다. 정체가 무엇입니까? 사실대로 말하지 않으면 혼백도 멸할 것입니다.”
미간을 좁힌 한립은 흔들림 없이 물었다.
“흥, 어린 녀석이 버릇없기는! 내가 명한선역을 종횡무진할 때 네 녀석은 어디서 불 구슬이 만지고 놀고 있었을 텐데…….”
양손을 허리에 대고 툴툴거리는 노인 허상은 전혀 두렵지 않은 얼굴이었다.
“명한선역……. 당신은 명한선부 사람이었습니까?”
한립의 질문에 도사 잔혼이 그를 아래위로 훑다 손에든 장검을 힐끗 보았다.
“너도 검을 쓴다면 무생도인이라는 칭호는 들어보았겠지?”
“무생검종은 여전히 선역에서 유명합니다. 무생검종 개파 조사의 이름이니 당연히 들어보았습니다.”
“쳇, 노부를 속이려 드는 것이냐? 명한선부에 변고가 있어 무생검종 문하의 수사들은 살아남지 못했다. 그런데 어찌 명성이랄 것이 남아 있겠더냐.”
도사 잔혼은 대노해 버럭 소리를 지르다가 고개를 저으면서 고민에 빠졌다.
“……설마 방계 후손이 남아서 무생검종을 계승했단 말인가? 아니야, 그럴 리가. 그것들이 무슨 능력이 있다고, 이 몸의 명성을 깎아내릴 뿐이지. 하아, 그 일만 없었다면…….”
도사 잔혼은 그리 유쾌하지 않은 기억이 떠올랐는지 투덜투덜 말이 많았다.
“그래서 대체 누구십니까.”
“잘 듣거라! 이 어르신은 네가 말한 무생검종의 개파조사 무생도인이시다.”
조사의 위엄을 보이려는지 도사 잔혼은 몸을 꼿꼿이 세우고는 당차게 외쳤다.
“말씀은 잘 들었습니다만, 그래서 무생도인인 것을 어찌 증명할 수 있으십니까?”
“까마득한 후배인 네 녀석에게 증명하라고? 내가 왜!”
“원래 도리는 멀고 주먹은 가깝다지 않습니까. 제 말뜻을 이해하시겠지요?”
작게 웃음을 흘린 한립은 괜히 손에 든 장검을 만지작거렸다. 잔혼도 그의 장검을 보고 어투가 누그러들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라는 것이냐. 몸도 박살 난 마당에 이 잔혼으로 본문 검법이라도 펼쳐 보이랴?”
“……무생검종에 만검현령(万劍玄令) 외에 비밀리에 계승되는 다른 보물이 있습니까?”
“아주 교묘하게 함정을 파는구나? 무생검종에서 전해지는 두 보물 중 하나는 만검현령이 아니라 만검철권이다. 본종의 정통이 되는 제자들에게 전승되지. 방계에게는 무생검단(無生劍胆)을 남겨 놓았고.”
도사 잔혼이 한립을 비웃으며 답했다. 그 말에 한립의 표정이 약간 풀어졌다.
“나도 잠깐 물을 것이 있다. 오늘날까지 무생검종이 전해 내려오고 있느냐?”
“아니요, 그나마 남아 있던 방계 일맥도 몰락한 것으로 압니다.”
한립은 성괴문의 제형 장로를 떠올리고 말했다. 그가 무생검종의 방계 일맥 일원이라고 추측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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