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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718화 (1,475/2,000)
  • 1718화. 뇌지(雷池)

    *

    시간이 유수와 같이 흘러 십여 년이 또 지나갔다.

    대주천성원공을 수련하면서 오백 년, 그리고 또 십여 년이 지났는데도 작은 성은 광장을 제외하고 그가 들어왔을 때와 달라진 점이 없었다.

    동쪽과 서쪽에서 해와 달이 번갈아 떠오르기는 해도 사계절의 변화가 없는 성안 곳곳에 이끼만 무럭무럭 자랐다.

    성 변두리 3층 누각 위에서 해 도인이 황포를 휘날리며 성 중앙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드디어…….”

    쿠쿠쿵.

    그의 말소리가 끝나기 전에 성 중심에서 굉음이 터져 나오고 버려진 성이 거세게 흔들렸다.

    금색 빛기둥이 치솟아서 하늘의 구름을 뚫고 있었다.

    광장 위 하늘에 먹구름들이 천군만마(千軍萬馬)처럼 밀려들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십 리를 새까맣게 채운 먹구름이 회오리치면서 뇌전빛을 번득였다.

    한립은 금색 빛기둥 아래 단정히 앉아 찢겨나간 의복 아래로 단단하지만 과하지 않은 근육질의 금빛 몸을 드러내고 있었다.

    용솟음치는 기운에 머리카락들이 수직으로 뻗친 그는 몸에 응결한 선규 35개가 밝은 빛을 뿜으면서 명치에 36번째 마지막 선규 자리에서 금색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마지막 선규를 뚫기까지 단 한 걸음만이 남아 있었다.

    “크아아악!”

    바로 그때, 눈을 번쩍 뜬 한립이 하늘을 향해 괴성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명치의 금빛이 더욱 격렬하게 소용돌이쳤고 주변의 천지영기들이 실뭉치처럼 응결해서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휘이잉.

    명치의 구멍은 바다라도 품을 수 있을 듯 채워도 채워도 가득 차지 않았고 천지원기를 미친 듯이 흡입해 선규를 형성해갔다.

    한립은 긴장을 풀지 않고 부단히 수결을 바꾸어가며 천기영기의 흐름을 바른길로 인도하고 조심스럽게 선규의 흡입 속도를 조절했다.

    대략 한 시진 뒤, 천지영기가 흘러드는 속도가 느려지면서 명치의 빛이 더없이 왕성해졌다.

    그때 한립은 굵은 땀방울을 흘리면서 혹시 모를 이변을 대비해 모든 과정을 주시하고 있었다.

    콰르릉!

    별안간 고공에서 굉음이 울려 퍼졌다.

    하늘을 가리고 있던 먹구름과 뇌전들이 드디어 폭발해 곧은 창 같은 검은 뇌전 기둥을 한립의 머리 위로 떨구었다.

    한립은 신속히 별빛에 휩싸인 주먹을 들어 고공을 후려쳤다.

    펑! 펑! 펑! 펑! 펑! 펑! 펑!

    일곱 번의 주먹질에 커다란 별빛 주먹 허상 7개가 번개처럼 튀어 나가 은빛 찬란한 빛의 장막을 펼쳤다.

    곧 검은 뇌전 기둥이 그 위로 떨어지면서 지축을 울렸다.

    그와 동시에 고공의 먹구름 소용돌이 속에서 마치 분노에 찬 포효처럼 뇌성이 이어지고 더 굵은 검은 뇌전 기둥이 떨어졌다.

    팟.

    멀리서 이를 지켜보던 해 도인이 금빛 뇌전 실로 변해 사라졌다.

    다음 순간, 한립과 뇌전 기둥 사이 허공에 나타난 그는 팔을 번쩍 들어 올렸다.

    뇌전이 팔로 밀려들어 파치칙 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팔뚝이 거대한 금색 집게발로 변해 검은 뇌전 기둥을 가위질했다.

    차칵!

    엄청난 뇌전 소리와 함께 금빛 집게발이 검은 뇌전 기둥을 반으로 잘라버렸다. 그러나 잘려나간 뇌전 기둥은 흩어지지 않고 올가미처럼 해 도인을 덮쳐왔다.

    “이런…….”

    놀란 해 도인이 팔을 저어 자신을 지나치는 뇌전들을 막으려 했으나 이미 늦고 말았다.

    구슬 형태의 그물 감옥으로 변한 검은 뇌전이 사방팔방으로 굵직한 뇌전을 뻗어 한립을 노렸다.

    그중에서 검은 채찍 같은 뇌전 한 줄기가 정확히 한립의 등에 내리꽂혔다.

    치지지직!

    검은 뇌화가 튀고 한립의 등이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 얼굴을 구긴 한립은 다급히 명치를 내려다보았다.

    형태를 잡아가던 선규 안에 머리카락처럼 가는 검은 빛이 흘러 들어가 구멍을 오염시키고 있었다.

    흠칫 놀란 한립은 눈을 가늘게 떴다. 아직 경험한 바는 없었으나 이게 삼쇠 중 하나인 규쇠임이 틀림없었다.

    짐작하고 있던 일이지만 마음이 무거워졌다.

    고금 이래 얼마나 많은 천고의 기재들이 수많은 역경과 고난을 이겨내고 진선 최고경에 이르렀겠는가.

    그들도 금선을 한 걸음 앞두고 규쇠 때문에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고는 했다.

    소문으로 이전의 두 쇠락보다 마지막 규쇠는 훨씬 치명적이라 선규 하나가 망가지면 그게 다른 선규로 퍼져나가 오랜 세월 힘들게 응결한 36개 선규가 전부 썩어버린다고 했다.

    일단 선규가 썩으면 진선의 몸도 쇠하고 선령력이 흩어져서 다시 재기할 기회마저 주어지지 않았다.

    한립은 마지막 선규에서 눈을 떼지 못했고 몹시 불안해졌다. 저 머리카락 같은 검은 실 한 줄기가 그가 이뤄온 모든 것을 망칠 수도 있었다.

    시간법칙의 힘을 이용해 급히 대응하려 할 때 그는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선규를 오염시키는 검은 빛이 반은 검은색에, 나머지는 흰색으로 변해 움직임이 지지부진했다.

    고서에 묘사된 불길처럼 번져나간다는 표현과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이지?’

    예기치 못한 현상에 한립은 좋기보다는 걱정스러웠다.

    자세히 살펴보자 구멍 안의 검은 실을 하얀 빛 알갱이들이 달려들어 밀어내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마치 하얀 빛의 우산이 펼쳐져 검은 실들을 막아주는 것 같았다.

    “이건……. 성광지력!”

    그가 미리 뚫어 놓은 36개의 현규가 선규와 중첩된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 안에 품고 있던 성광지력이 규쇠에 이렇게 특효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다른 진선경 수사들이 보았다면 기가 찼을 것이다. 어느 누가 수도자의 절체절명의 위기인 규쇠의 겁을 이리 쉽게 넘긴단 말인가!

    규쇠흑사(竅衰黑絲)와 성광지력은 하늘과 땅처럼 대치하면서 엇비슷한 위력을 냈다.

    규쇠흑사가 미세하게 우위를 점하기는 해도 진행속도가 무척 느려서 티가 나지 않을 정도였다.

    달리 말해 현규 속의 성광지력이 수사가 세 번째 쇠락에 대항할 진귀한 시간을 벌어주고 있다는 소리였다.

    잠시 지켜보던 한립은 맹렬히 수결을 맺어 등 뒤로 진언보륜을 불러냈다.

    웅웅웅…….

    회전하면서 그의 앞으로 날아온 고리에서 360개의 시간도문이 반투명한 빛을 발했다.

    슁.

    강렬한 시간법칙 파동이 고리 중앙의 금색 눈알로 모여 한 줄기 금빛으로 36째 선규 자리에 떨어졌다.

    금빛은 선명하고 굵은 금실로 변해 무라도 뽑듯 검은 실을 감아 바깥으로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헉!’

    두 힘이 맞붙는 순간 한립은 누군가 날카로운 칼로 몸을 헤집는 것처럼 생생한 고통을 느끼고 헛바람을 들이켰다.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은 선규에서 바로 의식으로 전달되는 것처럼 강렬했다.

    슁.

    서둘러 수결을 맺어 금색 고리의 회전을 가속하자 시간도문의 빛이 더욱 진해지고 진실안에서 또 한 줄기의 금빛이 빠져나갔다.

    그가 천신만고 끝에 응결한 시간법칙의 실이었다. 빳빳한 금실이 선규 속으로 파고들고 구멍이 환한 금빛 광채로 차올랐다.

    선규의 가느다란 검은 실은 정순한 법칙의 힘을 머금은 광채에 눈 녹듯이 녹아 깨끗하게 제거되었다.

    이 모든 게 순식간에 지나갔다.

    검은빛이 물러나기를 기다렸다는 듯 주변의 천지원기들이 꿀렁꿀렁 쏟아져 들어와 선규로 흡수되고 있었다.

    진선경 후기 수사라면 누구나 듣기만 해도 치를 떠는 규쇠의 겁이 이렇게 지나간 것이다.

    한립은 다시 눈을 감고 집중해 겨우 반각 만에 36번째 선규를 뚫었다.

    한립의 몸속에서 쿠릉! 하는 소리가 울리고 명치에서 선규가 눈부신 금빛을 번득 쏘아 올렸다.

    “이, 이게 무슨! 규쇠의 겁이 이렇게 끝났단 말인가……. 현선 공법과 시간법칙이 상호작용해 이런 효과를 낼 줄이야…….”

    허공에서 해 도인이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는 위험이 지나가자 번득 사라져 다시 청죽으로 만든 누각 지붕으로 돌아갔다.

    쿠르르르…….

    고공의 먹구름들이 걷히고 드러난 것은 맑은 하늘이 아니라 금색 뇌전 연못이었다. 연못에는 대량의 뇌전들이 액체처럼 출렁이고 있었다.

    “…….”

    고개를 들어 그것을 본 한립은 마지막 남은 옥함을 불러들였다. 몇 장의 부적을 뜯어내자 옥함 안에서 기이한 향기가 퍼져 나왔다.

    그 안에 든 금색 단약은 금선 원영을 제련해 만든 금혼단이었다. 그는 잠시 단약을 감상하다 그것을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단약이 목을 타고 부드럽게 넘어가 그의 가슴을 시작으로 금빛이 번져 얼굴 전체가 금칠해놓은 것처럼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기이한 힘이 그의 단전이 아닌 머리로 올라가 의식의 바다에서 혼백과 융합되고 있었다.

    “……!”

    한립은 날카로운 바늘로 콕콕 찌르는 것 같은 극통을 느끼면서 점점 더 정신이 맑아져 찰나의 순간 오감이 공간을 벗어나는 경지까지 도달했다.

    눈앞의 세계는 여전했지만 그가 느끼는 바는 전혀 달랐다.

    허공을 흘러 다니는 영력의 흐름이 눈에 보이고, 두 귀에는 공기 중에서 먼지들이 부딪치는 미세한 소리까지 쿵쿵! 울렸다.

    의식을 퍼트릴 것도 없이 비경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머릿속에 떠올랐고, 해 도인의 몸 안에서 핵심이 규칙적으로 박동하는 소리도 들려왔다.

    한립이 돌연 귀를 쫑긋 세웠다.

    폐허가 된 저택의 정원에 있는 제단 아래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뭐가 있는 거지?’

    그가 주위를 기울여 더 많은 것을 알아내려 하자 홀연히 오감의 비정상적인 증폭이 풀렸다.

    달라진 것은 그의 혼백이 훨씬 강해졌다는 것뿐이었다.

    금선에 이르기 전 마지막 관문이 남아 있다는 걸 떠올린 한립은 다른 생각을 지우고 집중했다.

    그가 자신의 뒤통수를 때리자 두개골이 열리면서 금빛 보호막을 두른 소인이 날아올라 한립과 똑같은 얼굴을 드러냈다.

    쉬익!

    몸을 떠난 원영은 자신의 육신을 한 바퀴 돌아보고 하늘로 솟구쳐 금색 뇌전연못 안으로 뛰어들었다.

    금선 원영은 진선 경지 원영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멸하기 어려웠는데 그 원인 중 하나가 금선 경지에 이르기 전에 나타나는 구천뇌지(九天雷池)였다.

    구천뇌지라는 뇌전 연못에서 원영이 티끌만 한 불순물도 모두 씻어내고 새로운 존재로 거듭났기 때문이었다.

    한립의 원영이 뇌전 연못으로 들어서자 금빛 뇌전이 기름에 물을 부은 것처럼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철썩철썩.

    정결한 구천뇌지의 금색 액체가 한립의 원영을 수없이 치고 지나가면서 단련시키고 있었고, 소인은 그 안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굳건히 버텼다.

    츠즈즛!

    물줄기가 실처럼 변해 나풀나풀 금색 의복을 짜고 금색 소인을 덮었다. 뇌전 실들은 소인이 품고 있는 금빛과 충돌하면서 요란하게 반짝였다.

    광장 바닥에 앉은 한립은 자세는 틀어지지 않았지만 점점 미간을 찡그리면서 고통스러운 기색을 드러냈다.

    의식 세계에 폭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뇌전 연못에서 원영이 금색 파도에 휩쓸릴 때마다 혼백의 껍질을 벗기고 뼈를 바르는 듯 고통스러운 것이 고문이 따로 없었다.

    구천뇌지에서 원영을 정련하는 일은 선부에 다녀온 후 호언 도인에게 조언을 구할까 하고 깊이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런 비경에 갇혀 얼떨결에 치르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진선 수사에게 선규 36개를 뚫는 것이 금선으로 가는 문턱에 한 발을 들인 것이라면 구천뇌지에서 원영을 정련하는 것은 나머지 발걸음을 옮기는 것과 같았다.

    이 과정은 하늘의 뜻과 사람의 의지가 맞물려 있어서 원영이 일단 뇌전 연못으로 들어가면 언제 다시 나올지 알 수 없었다.

    짧으면 반나절 길면 몇 개월이 걸리기도 했다.

    이 단련의 시간이 길면 길수록 금선 원영이 더욱 단단해지는 것은 당연했지만 그 과정에서 원영이 견디지 못하고 붕괴할 가능성도 있었다.

    한립은 본래 원영이 다른 진선 수사보다 강했고, 연신술을 4성까지 익힌 데다 금혼단을 복용해서 유리했다.

    ‘과연 얼마나 걸릴지…….’

    해 도인이 멀리 서서 묵묵히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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