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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717화 (1,474/2,000)
  • 1717화. 5백 년

    *

    제단 주변을 빙빙 돌던 한립은 퍼져나간 금빛이 사라질 때쯤 눈이 번득였다. 재빨리 수결을 맺은 그의 등 뒤로 진언보륜이 나타나 회전하면서 진실안을 만들었다.

    진실안의 시선이 천천히 움직여 제단에 닿았을 때, 문양 가운데 뭉개진 흔적들이 없어지기 시작했다.

    텅 비어 있던 공간에 보일 듯 말 듯 꽃술의 복잡한 선들이 살아나고 있었다.

    한립이 자세히 관찰할 틈도 주지 않고 복원된 허상이 빠르게 흔들리면서 불안정해졌다.

    억지로 참고 쳐다보던 그도 머리가 어질어질해지자 진언보륜을 거둬들이고 말았다.

    “어떻습니까?”

    “정말 이상한 공간이군요. 평범한 물건들도 시간법칙의 힘을 함유하고 있는데 아주 미약해서 진실안으로 조사하려면 허상이 흐릿해 제대로 살필 수가 없습니다.”

    한립은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

    “……수사의 진언보륜은 지금 최상의 상태가 아닙니다. 위력을 회복하면 몽은부문의 온전한 모습을 보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겠지요.”

    “그 생각은 저도 했습니다만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명한선부 비경이 개방되는 시일에는 한계가 있는데 출구가 닫히면 어느 세월에 다시 나갈 수 있겠습니까?”

    사실 출구만 발견하면 이곳에 한동안 더 머물러도 상관이 없었다.

    지난 며칠간 아무 일도 없었고 바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몰라도 거령이 그만 기다리고 있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선인의 몸을 지닌 수사는 수명이 무한에 가까운데 어찌 그런 걱정을 하십니까? 이곳의 천지원기는 북한선역 어느 곳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농염하니 안심하고 수련하다가 다음 비경이 개방될 때 나가면 될 겁니다.”

    해 도인은 뜻밖의 제안을 했다. 그 말에 눈빛이 흔들린 한립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북한선궁 같은 거대한 세력을 건드려 놓아 안 그래도 숨어다니는 처지에 거령이라는 강자에게 찍히고, 보기만 해도 소름 끼치는 봉천도도 있었다.

    그에게 북한선역은 결코 안전한 수련 장소가 아니었고 비경에 남으면 확실히 안전하기는 했다.

    “수사의 말도 일리가 있지만 명한선부의 출구가 닫히면 비경 안에 무슨 일이 발생할지 알 수 없습니다. 거령을 마주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무서운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고요.”

    고민을 거듭하던 한립은 여전히 걱정스럽다는 어투였다.

    그리고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그가 비경에 수십만 년 정도 갇혀 있게 되면 바깥에서는 천지개벽할 변화가 벌어져 있을 것이다.

    거령의 위협 속에 있는 금동은 물론이고 아직 그의 마음속에는 지워낼 수 없는 이들이 많았다.

    “어찌 되었든 당장 떠날 수 없는 것이 기정사실입니다. 일단 진언보륜을 회복하는 시도라도 하시지요. 어쩌면 얼마 걸리지 않아 몽은부문을 확인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그러는 방법밖에 없겠군요.”

    해 도인의 말에 한립도 수긍했다.

    * * *

    며칠 뒤, 성 중앙의 볼록하게 돌출된 넓은 광장.

    광장을 이룬 하얀 석판들 주위로 파헤쳐진 붉은 흙에 기와, 돌 그리고 문짝 조각들이 섞여 있어 원래 있던 건물들을 무너트리고 만든 지 얼마 안 된 티가 났다.

    하얀 석판 위로 파인 고랑들이 서로 연결되어 복잡하기 짝이 없는 거대한 진법을 이루고 있었다.

    이 거대진법은 ‘주천취성대진(周天聚星大陣)이란 이름으로 <대주천성원공> 말미에 기록된 공법수련 보조용 정통진법이다.

    ‘취성진법’은 물론 한립이 스스로 개량해 사용하던 ‘성진진법’보다도 몇 수 위였다.

    주천취성대진은 81개의 별의 위치를 상징하는 지점에 각각 천성석 1개씩을 박아 넣어 수련자가 쾌속으로 별빛의 힘을 흡수할 수 있게 도왔다.

    어둠이 드리우고 칠흑 같은 밤하늘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별이 떠올라 빛을 반짝거렸다.

    백석 광장 중앙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한립의 두 눈이 거울처럼 검은 하늘과 별빛을 담고 있었다.

    시간도문은 매년 겨우 하나씩 회복되어 진언보륜이 최상의 상태가 되려면 오랜 시간이 걸릴 게 분명했다.

    이곳을 빠져나갈 다른 방법이 없어 시간도문이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면서 대주천성원공을 수련해 더 많은 현규를 뚫고 금선의 경지에 도전하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의 손에서 남색 수정빛이 날아올라 수십 가닥의 빛줄기로 갈라져 진법의 81개 별자리로 떨어졌다.

    후우웅.

    천성석들이 제자리를 찾자 진법이 휘황찬란한 빛을 뿜어 광장 전체가 밝아졌다. 동시에 한립이 입을 벌려 7개의 남색 빛고리를 연달아 내뿜어 밤하늘로 띄웠다.

    칠요성환은 진법의 일부가 아니지만 그래도 성진법보라서 별빛의 힘을 모으는 데 도움이 되었다.

    수결을 맺고 주문을 외는 그의 주변으로 진법의 빛이 멀리 퍼져갔다.

    한립은 이 순간 밤하늘과 지척에 있는 듯 별들이 가까워진 기분을 느꼈다. 각각의 별들이 점점 커지고 밝은 빛을 내뿜어 하나하나가 마치 밝은 태양 같았다.

    누군가 광장에 서서 한립을 보았다면 그의 검은 눈동자가 새하얗게 물들어 별처럼 반짝이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쿠릉!

    별빛이 가득한 가운데 백여 개의 새하얀 빛기둥이 밤하늘에서 떨어져 버려진 성을 채웠다.

    그 중 칠요성환을 지나 내려온 일곱 빛기둥이 특히 굵고 실했다.

    성 중앙의 주천취성대진이 극심하게 떨리면서 모든 천성석들이 별빛을 모아 한립을 향해 하얀 빛기둥을 터트렸다.

    두두두둥.

    81개의 눈부신 별빛 기둥이 한립의 몸속으로 쏟아져 들어가며 북 두드리는 것 같은 소리를 냈다.

    한립의 골격과 근육에서 투두둑거리는 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

    강대한 성광지력이 차올라서 현규가 빵빵하게 부풀어 오르고 배에 더부룩한 괴로움이 전해졌다.

    이를 악문 그의 몸에서 현규들이 별빛을 삼키고 있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던 백여 개의 새하얀 빛기둥이 경로를 이탈해 한립의 몸으로 모여들었다.

    주천취성대진을 거쳐 들어온 별빛이 폭포라면 이번에는 밀물이 밀려드는 것 같았다.

    훨씬 많은 양의 별빛이 한립을 내리눌러 하마터면 앞으로 고꾸라질 뻔했다.

    별빛의 힘은 가느다란 실처럼 변해 그에게 파고들었고 푸른 의복은 그의 피로 물들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별빛에 의해 증발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한립은 엄청난 고통에 두 무릎을 어찌나 세게 눌렀는지 손등의 힘줄이 불룩 솟고 전신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별빛이 스며든 그의 피부가 반투명하게 변해가서 의복 안으로 골격과 혈관이 보였다.

    파앗!

    그때 한립이 번쩍 손바닥을 높이 들어 병풍을 방출했다.

    투명한 검은색 병풍에 남색 구슬들이 박혀 있어 마치 밤하늘에 뜬 별을 연상시켰다.

    대주천성원공 구결이 적힌 석판을 얻은 대전에서 가지고 나온 물건이었다.

    머리 위로 떠오른 병풍은 얇은 천처럼 한립을 두르고 그를 압도적인 별빛의 압력으로부터 보호했다.

    천천히 참고 있던 숨을 내쉰 한립은 두 눈을 감고 전력을 다해 흡수한 성광지력을 흡수했다.

    * * *

    별이 가득한 밤하늘이 몇 번이나 지나갔는지 알 수 없었다.

    한립은 하루도 빠짐없이 해가 지면 밤하늘에서 성광지력을 흡수하고 낮에는 천성석을 이용해서 대주천성원공을 수련해왔다.

    처음 몇 년 동안은 시간도문이 회복되는 동안 정원의 제단에 새겨진 몽은부문을 확인하러 다녔지만, 그 후로는 안심하고 수련에만 전념해 19번째 현규를 뚫을 수 있었다.

    걱정과 달리 비경에는 아무런 이변이 없었다.

    대주천성원공 수련도 큰 어려움 없이 진행되어 한립은 세월을 잊고 수련에만 매진했다.

    그렇게 벌써 5백 년이 지나고 있었다.

    이날 밤에도 백여 개의 별빛 기둥이 밤하늘에서 떨어져 성을 대낮처럼 밝혔고, 광장에 가부좌를 튼 한립도 투명하게 반짝이는 몸을 드러냈다.

    새까맣던 그의 머리카락도 별빛을 흡수한 뒤에는 은빛 수정처럼 반짝이면서 길게 흩날렸다. 그의 등 뒤에도, 옆구리에도 별빛이 반짝여 현규로 가득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현규 36개를 전부 응결해 대주천성원공을 대성한 상태였다.

    그간 머리 위에서 별빛을 완화 시키는데 썼던 검은 병풍이 찢겨나가고 몰려들었던 빛기둥들도 서서히 흩어져 마지막에는 연기처럼 사라졌다.

    성안이 빛을 잃고 어두워져 정상적인 밤의 모습을 되찾았다.

    천천히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난 한립의 진극막은 광채가 줄줄 흐르고 어느 때보다 두껍고 단단해져 있었다.

    그가 가볍게 주먹을 쥐고 붕붕 휘두르자 주먹에서 빛이 응결해 기이한 힘을 발휘했다.

    한립은 현규를 막 응결해 성광지력이 불안정한 상태라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것이지 시간이 흐르면 괜찮아질 거란 걸 알았다.

    “시작할 때부터 오래 걸릴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시간이 많이 흘러가 버렸구나…….”

    한립이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말을 마친 그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한걸음 물러나는 듯하다 고공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쿠콰쾅!

    강력한 권풍이 눈에 보이는 하얀 바람이 되어 솟구쳤다.

    허공에서 굉음이 한참 들리다 밤하늘이 무너져 내릴 듯 돌풍이 휘몰아쳤지만 하얀 바람은 수백 장을 못 가고 위력이 줄어들어 흩어졌다.

    공간을 뚫지는 못했으나 한립은 하늘을 바라보며 만족스러운 얼굴로 주먹을 거두었다.

    전력을 다하지 않았는데도 대주천성원공 전반부를 익혔을 때 냈던 전력에 가까운 힘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이대로 제단으로 가서 전력을 다해 내리치면 금선 경지에 이르지 않아도 진법을 뚫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문제는 그러면 이 작은 비경 공간도 함께 허물어질 수 있다는 점이었다.

    이제 그는 진선 최고봉의 경지에 다다랐고 명실상부한 금선이 되기 위해서 남은 일은 36번째 선규를 뚫는 것뿐이었다.

    36개의 현규를 수련해서 마지막 선규를 뚫는 것도 문제는 아니었는데 유일하게 걱정되는 게 금선경에 이를 때 도래한다는 삼쇠 중 마지막 쇠락 규쇠(竅衰)였다.

    금선이 되려면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는 난관인 규쇠에 저항하는 데 법칙의 힘이 도움이 된다지만 직접 겪어 본 일이 아니라 확신할 수 없었다.

    한립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휘영청 밝은 달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더이상 수련할 마음이 나지 않아 가볍게 날아올라 인근의 누각 지붕에 기대 누워 눈을 감았다.

    * * *

    3일 뒤 해가 중천에 떴을 때 한립이 백석 광장으로 돌아왔다.

    두 눈이 초롱초롱해진 그는 단전의 선령력도 가득하고 의식도, 혼백의 힘도 충만해서 가히 절정의 상태였다.

    그가 소매를 펄럭이자 금빛이 날아가 그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해 도인으로 변했다.

    “한 수사, 표정도 환하시고 수행이 또 느셨나 봅니다. 축하드립니다.”

    해 도인은 얼굴에 보기 드문 미소를 띠었다.

    “수행이 약간 늘기는 했는데 어느새 수백 년이 흘렀으니 바깥 상황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바로 금선 경지에 도전해 하루빨리 이곳을 떠나려 합니다.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해 수사께서 호법을 서주셔야겠습니다.”

    “안심하고 경지를 돌파하는 데만 집중하시지요.”

    해 도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금빛 뇌전으로 변해 허공으로 녹아들었다. 그가 사라지는 것을 본 한립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손을 저었다.

    파파파팟.

    그 앞에 백옥 도자기병 4개와 세공이 정교한 옥함 하나가 부드럽게 착지했다.

    가장 먼저 옥병 하나가 스스로 날아올라 그 안에 들어있던 용 눈알 크기의 옅은 금색 환약을 꺼내놓았다.

    한립은 진선경 후기 수사의 수행 증진에 도움이 된다는 만륜단을 꺼내 입에 넣었다. 뱃속으로 들어간 단약은 뜨겁게 기경팔맥을 타고 퍼져나갔다.

    하지만 처음 먹었을 때와 비교해서는 그렇게 자극적이지 않았다.

    원래 한 가지 단약을 계속해서 복용하면 내성이 생기기도 했고 대주천성원공을 대성해서 육체와 정신이 눈에 띄게 강해진 덕도 있었다.

    눈썹을 끌어올린 한립은 연달아 만륜단 세 알을 더 불러내 삼킨 다음 또 눈을 감았다.

    수결을 맺고 주문을 외는 그 주위로 부드러운 금빛이 떠올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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