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716화 (1,473/2,000)

1716화. 작은 성

*

절체절명의 순간,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눈앞에 금동이 순간이동을 하듯 나타난 것이다.

엄청난 금빛을 발산하던 금동은 금색 딱정벌레의 모습이 아니라 9살 정도의 여자아이의 얼굴을 하고 금색 머리카락을 휘날리고 있었다.

몸에 딱 붙는 정교한 금색 갑옷을 입고 검은 유리알 같은 눈동자를 반짝이는 아이는 입가에 금색 핏물이 고여 있었고 기운이 어느 때보다 허약해 보였다.

금동이 작은 입술을 달싹거리면서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리자 황금으로 주조한 조각처럼 금빛으로 물들었다.

쾅! 쾅!

여자아이의 두 팔이 터져나가면서 거산 크기의 굵은 수정빛으로 바뀌었다. 수많은 금색 주술문자들이 반짝거리다 결합해 수정빛에 선명한 줄무늬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거센 물줄기 같은 법칙의 힘이 수정빛의 무늬에서 빠져나와 천지를 뒤흔들며 삼색 빛기둥을 가로막았다.

“금동, 너…….”

한립은 자신을 보호하려 뛰어든 여자아이의 뒷모습을 보며 만감이 교차했다.

그리고 그때,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

궁전 금색 문이 쿠쿵! 하고 열려 틈을 만들어내더니 그 안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흡입력이 발생해 금빛에 감싸인 한립을 빨아들인 것이다.

어스름한 안개에 둘러싸인 듯 시야가 침침해진 한립은 갑자기 아래쪽으로 쑥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어느새 완전히 다른 공간에 도착해 있었다.

그는 통증이 느껴지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면서 천천히 정신을 차리고 발아래 푸른 이끼가 가득한 석판을 보았다.

몸을 바로 세운 그는 금동, 거령, 육우청은 보이지 않고 혼자만 있자 탄식했다.

오랜 세월 떨어져 있던 서금선을 이런 상황에서 마주친 것도 놀라웠는데, 몇 마디 나눌 새도 없이 위기에 처한 순간 그를 대신해 나서줄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 순간을 떠올리자 한립의 마음이 따뜻해졌다.

평생 꿈꾸던 진선계도 와서 보니 인계, 영계와 다를 바 없이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아귀다툼을 하기 바쁜 곳이었다.

영환계에서 만난 류낙아를 제외하고는 오랜 시간 누군가가 진심을 다해 자신을 아낀다는 느낌을 받아 보긴 처음이었다.

이런 감정은 이전에도 그가 금동을 반쯤 자식처럼 여겼던 것과 연관이 있었다.

2천 년 동안 어떤 기연을 얻은 것인지 금동의 수행이 크게 늘어 금선 후기의 강자와 오랫동안 대치하기는 했으나 한립도 그 아이가 거령의 적수가 될 수 없음을 알았다.

거령은 강력한 신통이 한둘이 아니었고 그보다 법칙의 힘을 다루는데 능했으며 괴이한 호리병박도 있었다.

마음이 무거워진 한립은 만일 오늘 금동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금선이 되어 반드시 거령을 찾아가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라 다짐했다.

그리고 육우청은 어느 순간부터 어디가 이상한 것인지 콕 집어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이따금 괴이한 느낌을 받았다.

우연히 몇 번 마주쳐 명한선부에서 동행했다 하더라도 정이 깊다고 하기에는 부족함이 있었다.

한립 때문에 거령의 표적이 되기는 했어도 보물과 기연을 찾기 위해 그를 따라다니겠다고 선택했으면 이런 위험도 감수하는 것이 옳았다.

어찌 됐든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곳에 홀로 들어왔으니 열 받은 거령의 손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는 그녀의 운과 능력에 달렸다고 봐야 했다.

순식간에 잡념을 다스린 한립은 주위를 살폈다.

주변을 둘러싼 담벼락이 허물어져 있고 방들도 검푸른 이끼가 끼어 있어서 방치된 지 한참 된 것 같았다.

그러나 뜰 뒤쪽으로 시선을 옮기자 한립의 눈에 의혹이 어렸다. 그리 크지 않은 방 오른쪽 귀퉁이에 기와와 기둥 자재들이 둥실 떠 있었다.

마치 무형의 힘에 의해 무너질 당시의 모습이 그대로 유지가 되는 것 같았다.

두 눈에 남색빛을 일렁인 한립은 의식을 방출했다.

탁.

잠시 후 소리 없이 훌쩍 뛰어오른 그는 허공에 있는 기와 하나를 잡아 당겨보았다. 다른 파편들이 여전히 고정되어 있었지만 그건 쉽게 들어 올려졌다.

위에서 내려다보니 이런 이상한 일들이 고택 전체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망가진 누각과 정자들의 갈라진 파편들도 바닥에 떨어지지 않고 무너지는 순간 자욱하게 피어오른 먼지까지 고정되어 있었다.

방대한 의식을 퍼트린 한립은 아무런 제약 없이 곳곳을 살필 수 있었다. 곧 그의 표정이 묘해졌다.

“이게 대체…….”

공간이 짐작했던 것보다 작아 의식을 얼마 퍼트리지도 않았는데 그 끝에 있는 공간장벽과 마주쳤다.

반경 백 리 정도가 다인 곳이었다.

이론적으로 그가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왔으면 외부와 완전히 격리되지는 않은 공간이란 뜻이었고, 꼭 필요한 때에 빠져나가기 위해 공간장벽이 약한 곳을 찾아 두려 했다.

그런데 어느 곳이나 공간 파동이 강했고 불안정한 지점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한립은 한 손으로 수결을 맺어 등 뒤로 진언보륜을 불러냈다.

그의 수결이 변할 때마다 금색 고리 위의 열댓 개 반투명한 시간도문이 잇달아 밝아져 중간에 금색의 커다란 눈을 만들어냈다.

의식으로 발견할 수 없던 금제 진법 혹은 숨겨진 공간 입구를 진실안으로 찾아보기 위해서였다.

광선으로 가장 먼저 도착한 뜰의 석판 위부터 살폈다. 광선을 받은 공간은 여전히 텅 비어 있었고 아무런 이상도 없었다.

한립은 시선을 천천히 움직여 정원의 탁자, 담벼락 근처의 말라비틀어진 나무 그리고 두 개의 방들을 천천히 살폈지만 마찬가지였다.

진실안의 시선이 허공에 고정된 무너진 파편에 이르러서야 변화가 생겼다.

무너져 내린 지붕이 놀랍게도 금빛을 일렁이다 무너지기 전 상태로 돌아간 것이다.

“이상하군. 저 방들이 시간법칙의 힘이라도 함유하고 있단 소린가?”

그가 자세히 살펴보기도 전에 예전 상태로 돌아갔던 건물 허상은 흔들리면서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다.

진언보륜을 거둔 한립은 건물 앞으로 가서 외부와 내부를 샅샅이 뒤졌지만 시간법칙의 힘을 함유한 물건은 찾을 수 없었다.

“시간법칙의 힘을 너무 조금 갖고 있어서 찾아낼 수 없는 것일까? 그럴 리가…….”

잠시 생각에 빠졌던 한립은 다시 진언보륜을 불러내 고택 정원을 표표히 날아올라 다른 지역으로 날아갔다.

고공에서 내려다보니 낡고 망가지기는 했어도 구획이 속세의 성처럼 잘 되어 있었다.

동쪽 외곽에서 시작해 서쪽으로 날아간 한립은 무너진 상태를 유지한 건물을 만날 때마다 진실안으로 조사해 흐릿하게 원형 허상이 나타나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나 항상 처음 건물처럼 불안정하게 흔들거렸다.

성 전체가 미약하게 시간법칙 파동을 내지만 누군가 알아채기 어려울 정도로 그 강도가 약한 것처럼 말이다.

반나절 만에 성의 동서남북을 살핀 한립은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는데 저녁 무렵이 되자 하늘의 해가 붉게 물들어 서산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성의 남쪽, 풀이 무성한 어느 저택 정원에 흑목(黑木)으로 지은 9층 탑이 노을에 물들고 있었다.

한립은 언제든 무너질 듯 옆으로 기운 탑 기둥에 서서 떨어지는 태양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의 곁에는 노란 장포를 입은 해 도인이 평온하게 서 있었다.

“해 수사, 이곳을 어떻게 보십니까?”

“아홉 방위를 따라 지어진 성의 설계는 별다른 점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 어떤 특수한 배치가 되어 있는지는 이렇게 봐서는 알 수가 없군요.”

“그렇다면 수사를 귀찮게 해드리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뭔가 숨겨진 기관이나 진법이 있는지 살펴주시겠습니까?”

한립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해 도인이 목탑에서 튀어 나가 사라졌다.

그리고 목탑 지붕 위에 홀로 남아 석양이 점차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던 한립도 두 눈을 번득이고 푸른빛으로 변해 쏘아져 나갔다.

고공에서 펑! 하는 소리가 들리고 성 가장자리 허공에서 푸른 신영이 장벽에 튕겨 추락했다.

바로 한립이었다.

그는 바닥으로 떨어지기 전에 휙! 하고 다른 방향으로 쏘아져 나갔다.

* * *

며칠 뒤, 성 중앙의 저택 정원 안.

잡초가 숲을 이루고 이끼가 잔뜩 껴있는 돌 사이를 한립과 해 도인이 나란히 걸어가고 있었다.

“성안에 밀실이나 금제는 많았습니다. 대부분이 조잡한 솜씨에 굳이 조사해볼 가치도 없는 곳이었지요. 허나 이곳에 설치된 것만은 남다르더군요.”

해 도인이 오솔길을 따라 안내하면서 설명했다.

“수사께서 남다르다 칭할 정도면 비경의 출구일 가능성이 높겠습니다.”

한립이 기대감을 드러냈다.

해 도인은 무성한 잡초들 사이로 난 길을 지나 늙은 원숭이의 형상을 한 괴이한 바위 앞에 걸음을 멈추었다.

“직접 보시지요.”

그 말에 한립이 앞으로 나서서 괴석을 만지며 자세히 관찰했다.

“……설마 화황석(化荒石)입니까?”

“맞습니다.”

“의식으로 아무리 살펴도 어떤 파동을 느끼지 못할 만 했습니다. 진법을 일부러 감춰두었으니까요. 그런데 화황석의 효과가 이렇게 강력할 줄은 몰랐습니다.”

“그저 화황석만이었다면 한 수사가 알아챌 수 있었을 겁니다.”

“다른 수도 써놓았단 뜻입니까?”

한립의 질문에 해 도인은 말없이 그를 더 깊은 수풀 속으로 인도해 탁 트인 공터로 나왔다.

검은 재가 가득한 공터는 잡초와 관목들이 불타 돌로 된 원형 제단이 노출되어 있었다. 불길에 그을려 제단에 새겨진 문양과 문자들이 잘 보이지 않았다.

휭.

한립이 소매를 펄럭여 제단 위의 재를 날려버리자 제단의 본모습이 드러났다.

“이게 무엇입니까?”

몸을 굽혀 문양을 살핀 한립의 얼굴에 곤혹스러운 기색이 떠올랐다.

아홉 개의 꽃잎을 닮은 기이한 주술문양이 몽담화(夢曇花) 비슷한 형상을 이루고 꽃잎마다 복잡한 주술문자가 빼곡하게 들어가 있었다.

“제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아주 고명한 몽은부문(夢隱符紋)일 겁니다. 진법이나 보물의 기운을 숨기는 효과가 있는데 화황석과 결합해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한 듯싶습니다.”

해 도인이 덤덤히 설명했다.

“무늬의 정체를 아시는 것을 보니 파훼법도 아시는 것입니까?”

“한 수사, 문양의 중앙을 보시지요. 몽담화 꽃술이 있어야 할 자리가 부서져서 분간이 되지 않습니다.”

한립은 한참을 관찰하고서야 누군가 일부러 꽃술 부분을 지운 듯한 흔적을 발견했다.

“어찌 되었든 문양의 정체를 알아냈고 손상 정도도 크지 않으니까 둔술로 뚫고 나가면 되지 않습니까? 아니면 뭔가 걸리는 점이라도 있는지요.”

“한 수사께서는 ‘대몽삼천(大夢三千)’이란 말을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꿈이 숨겨져 있다 하여 몽은부문이라 불리는 만큼 이 문양은 약간의 변화만 생겨도 진법 전체의 원리가 달라집니다. 제게 관련 기억이 남아 있다고 해도 그것을 하나씩 대입해 볼 수는 없을 겁니다.”

“어쩔 수 없이 힘으로 파괴하는 수밖에 없겠군요.”

“그것이……. 일단 직접 해보시지요.”

한립의 말에 해 도인이 눈을 빛내다 애매하게 말했다. 뭔가 일이 간단하게 풀리지 않을 거란 예감이 들었지만 한립은 시키는 대로 해보았다.

금빛을 방출해 산악거원으로 변신한 그는 현규에서 빛을 발하며 주먹으로 돌 제단을 내리쳤다.

쿠웅!

제단이 흔들리고 금빛들이 호선을 그리면서 튕겨 나와 돌풍을 일으켰다. 모래바람이 불고 나무가 쓰러지는 소리가 수백 장 바깥까지 들리다 그쳤다.

동시에 제단 위 몽은부문에서 금빛이 덩굴처럼 퍼져나가 거미줄처럼 수풀 깊은 곳까지 파고들었다.

거원으로 변해 시야가 넓어진 한립은 덩굴의 형태를 띈 무늬가 저택의 정원이 아닌 비경 전체로 번져 화려하게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이런 걸 힘으로 부수고 지나가려면 적어도 금선경의 실력이 필요합니다. 제가 전력을 다한 일격을 날리지 않고서는 안 된다는 말이지요.”

보고 있던 해 도인이 입을 열었다.

“가능하다고 해도 그건 안 되겠습니다. 문양이 비경 전체와 연결되어 있어 강제로 뚫으려다 공간 전체가 무너질 수도 있겠어요. 그 와중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누가 알겠습니까.”

한립은 금빛을 거두어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해 도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