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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714화 (1,471/2,000)
  • 1714화. 자기편을 공격하다

    *

    잠시 후 드디어 결론을 내린 거령은 주문을 외면서 양손을 움직여 등 뒤로 회색 왕좌를 불러냈다.

    커다란 의자 양쪽에는 5개의 발톱을 지닌 잿빛 용이 그 틀을 타고 올라가고 있었는데 위엄 넘치는 진룡과 달리 이 오조회룡(五爪灰龍)은 생김새가 흉측하고 사악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웅장한 법칙 파동이 회룡왕좌에서 발산되고 있었다.

    거령이 왕좌에 앉자 얼굴에 진한 잿빛이 드리운 오만한 여왕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그녀의 손이 오조회룡 중 한 마리의 머리 위로 가볍게 떨어졌다.

    쩌적!

    신기하게도 오조회룡의 입이 쩍 벌어지면서 수많은 주술문자들이 농염한 잿빛의 무시무시한 법칙의 힘을 품고 빠져나왔다.

    잿빛이 스며든 회색 구역은 확! 밝아져서 두 배에 달하는 잿빛 그림자들이 한립을 향해 벌떼처럼 달려들었다.

    이에 한립이 느끼는 압력도 확연히 늘어나 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는 크게 기합 소리를 지르며 선령력을 폭발적으로 일으켜 청죽봉운검에서 요란한 푸른빛과 뇌전빛을 사방으로 터트렸다.

    파파파팟.

    동시에 그의 머리 위로 네 개의 보물이 떠올랐다.

    회색의 초소형 산봉우리, 은색 방울, 검은색 송곳니 모양 괴검 그리고 검은색 거대 깃발이었다.

    한립이 불러낸 보물들은 도우와 그 살집 있던 호위에게서 빼앗은 것들과 원합오극산 등의 선기들이었다.

    그의 입에서 푸른 빛 네 덩이가 빠져나가 각각의 선기로 흡수되었다.

    휘리릭 회전을 시작한 원합오극산이 빠르게 몸집을 키우면서 항아리 크기의 회색 빛구슬을 연달아 주위로 날렸다.

    은색 방울은 딸랑거리는 방울소리가 점점 커져 음파를 연이어 방출했다.

    이와 함께 송곳니 괴검과 새까만 거대 깃발도 급격하게 커져 송곳니 형태의 검기와 검은 광채로 회색 영역을 갈랐다.

    네 개의 선기 중 원합오극산만 제련을 거쳐 온전히 그의 것이라 할 수 있었으나 그래도 네 개의 보물이 한꺼번에 쏟아붓는 공격의 위력은 대단했다.

    후웅.

    바로 그때 한립은 눈앞이 침침해지면서 거대한 용 발톱이 잿빛 그림자들 틈으로 불쑥 튀어나오는 것을 보았다.

    잿빛 기운이 응결해 만들어진 용 발톱은 거의 실재하는 것처럼 굵고 단단해 보였고 무궁무진한 힘을 함유해서 송곳니 괴검의 검기를 뚫고 한립의 가슴을 할퀴려 다가오고 있었다.

    그때 한립의 몸에서 금빛이 빠져나와 황금 게 괴뢰로 변했다.

    파치칙!

    황금 게 괴뢰의 두 집게발에서 굵은 뇌전이 떠올라 거대한 뇌전 도끼 한 자루를 응결해 잿빛 용의 발톱으로 떨어졌다.

    쿠르르릉!

    허공을 뒤흔드는 폭음이 지나고 부르르 몸을 떤 해 도인이 뒤로 한걸음 물러나고 잿빛 용의 발톱은 수축해 회색 구역 속으로 되돌아갔다.

    “금선괴뢰!”

    그걸 본 거령의 눈꼬리가 홱 올라갔다. 그녀는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흘리며 수결을 맺어 왕자의 또 다른 오조회룡의 머리를 내리쳤다.

    미친 듯이 반짝인 왕좌 뒤편에서 잿빛 거울 3개가 서서히 떠올랐다. 각각 고어로 ‘쇠(衰)’, ‘광(狂)’, ‘사(死)’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이에 회색 구역이 다시금 요동치기 시작하고 주위의 잿빛 그림자들이 용솟음치면서 잿빛이 더욱 진해졌다.

    흠칫 놀란 한립이 무언가를 하려는데, 왕좌가 쿵! 진동하면서 발산하던 농염한 잿빛을 거두어버렸다.

    거령의 얼굴이 굳어 의식으로 살피자 왕좌에서 왠지 모르게 하얀빛 줄기가 나풀거리면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나고 있었다.

    화앗.

    술법을 멈춘 그녀는 입에서 은빛을 내뿜어서 왕좌 전체를 감쌌다.

    은빛에 둘러싸인 왕좌는 이상한 소리도 멎고 하얀빛 줄기들도 차차 줄어들었다.

    얼굴을 푼 거령이 신속히 법결을 왕좌에 흡수시키면서 다른 손 손가락을 튕겨 푸른색 거대 애벌레와 금색 딱정벌레를 불러냈다.

    “너희 둘은 저자를 붙잡아 오거라. 써먹을 데가 있으니까 다치게 해서는 안 될 것이야.”

    여인의 분부에 푸른 애벌레는 답을 하고 얼른 날아갔는데 금색 딱정벌레는 멀리 한립의 신영을 힐끔거리기만 했다.

    “너도 가라고!”

    거령은 금색 딱정벌레가 움직이지 않자 서늘하게 소리쳤다.

    “네…….”

    금색 딱정벌레는 귀찮다는 목소리로 느릿느릿 한립을 향해 날아갔다.

    그들을 내보낸 거령은 계속해서 회색 왕좌에 법결을 던져 넣느라 바빴다.

    한립은 그를 겹겹이 에워싸고 있던 잿빛 그림자들이 청죽봉운검을 포함한 그의 다섯 개의 보물에 의해 정리가 되어서 겨우 길을 뚫을 수 있었다.

    해 도인은 이미 그의 몸속으로 돌아가 있었다. 이 중요한 패는 정말 위급한 때를 위해 아껴둘 필요가 있었다.

    이때 한립의 얼굴은 약간 창백했고, 호흡도 가빴다.

    영역에 갇혀서 외부의 천지원기를 흡수할 수도 없는 상태로 강력한 신통들을 펼치자니 원기가 부족했다.

    청죽봉운검과 네 가지 선기를 동시에 부리느라 선령력이 반도 남지 않았고, 영역의 괴이한 법칙의 힘에 저항하느라 몸을 두른 시간법칙의 힘도 조금씩 한계에 이르는 듯했다.

    ‘이렇게는 안 돼. 뭔가 방법을 생각해내야 하는데…….’

    한립은 열심히 머리를 굴리면서 남색빛이 일렁이는 두 눈으로 사방을 관찰했다.

    돌연 그의 시선이 어딘가에 고정되며 전신에서 푸른빛을 방출해 회색 구역 가장자리를 향해 날아갔다. 청죽봉운검이 크게 진동하면서 되돌아와 웅웅 울어댔다.

    거검의 표면에 푸른빛과 금빛 뇌전이 풍성해져서 푸른 태양을 금빛 뇌전이 휘감고 있는 것 같았다.

    파아앗!

    한립이 한 지점을 가리키자, 거검이 휘리릭 돌아 비늘 하나하나가 음산한 검기를 품고 금빛 뇌전이 흐르는 산만한 푸른 용으로 변했다.

    청룡이 몸을 털면서 전방으로 쇄도했다.

    잿빛 그림자들이 떼 지어 앞을 가로막았으나 청룡의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에서 강렬한 검기들이 수없이 번득여 그것들을 산산조각냈다.

    그 뒤를 바짝 따라가고 있던 한립은 나머지 네 가지 선기로 몸을 보호하면서 몇 호흡 만에 회색 구역 가장자리에 이르렀다.

    팟.

    그때 전방에서 푸른빛이 번득이고 갑자기 거대 애벌레가 나타나 입을 벌렸다.

    쉬쉬쉭!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푸른 실들이 애벌레 입에서 빠져나와 그물을 이루고 한립의 머리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영역 내에서 움직이는 것 자체가 어려워 그물까지 피하는 것은 무리였다.

    겉보기에는 그냥 평범한 그물처럼 보이지만 특수한 법칙의 힘을 함유하고 있어 일단 걸리면 문제가 심각해질 게 자명했다.

    ‘어쩔 수 없지.’

    찰나의 순간 많은 생각이 오간 한립은 곁의 새까만 거대 깃발을 가리켰다.

    깃발이 바람을 타고 몸을 불리더니 검은 광채를 발산해 푸른 그물이 날아드는 것을 막았다.

    쿵.

    둔탁한 충돌음이 울리고 검은 깃발이 푸른 그물에 대신 걸려들었다.

    그물은 깃발을 붙들자마자 몸을 떨면서 실로 변해 쾌속으로 보물을 둘둘 말아 고치로 만들었다.

    검은 깃발은 그 속에서 전혀 움직이지 못했다. 한립은 깃발을 회수할 생각 없이 다급히 방향을 꺾어 계속해서 앞으로 뻗어 나갔다.

    거대 애벌레가 입을 벌려 다시 실을 토해냈는데 옆에서 금빛이 번득이고 금색 딱정벌레가 나타났다.

    “……!”

    한립은 우뚝 멈춰 서서 멍하니 딱정벌레를 쳐다보았다. 그를 바라보는 금색 딱정벌레의 작은 눈도 기이하게 반짝거렸다.

    쉬쉬쉬쉭!

    푸른 거대 애벌레는 그저 한립이 멈춘 것에 기뻐하며 입을 크게 벌려 이전보다 두 배나 많은 실을 뿜었다.

    한립을 덮치는 속도도 이전보다 배는 빨랐다.

    그 모습에 움찔하며 정신을 차린 한립은 금색 딱정벌레에게서 눈을 떼고 송곳니 괴검을 가리켰다.

    대량의 검은 검기가 괴검에서 떠올라 반경 수십 장 규모의 검해(劍海)를 이루고 푸른 그물을 막았다.

    즈즈즛!

    푸른 애벌레의 울음소리 속에 비웃음이 담겨 있었다.

    영충의 입에서 푸른 돌풍이 뿜어져 나가 그 안에 함유한 바람의 칼날들이 그물과 다른 방향에서 한립을 노렸다.

    옆에서 그것을 발견한 금색 딱정벌레가 불현듯 몸집을 키우더니 앞발에서 금빛을 번득였다.

    금색 딱정벌레의 앞발에서 빠져나간 거목 크기의 수정빛 두 줄기는 더없이 날카로웠는데 뜻밖에도 그것이 향한 방향이 한립이 아닌 지척의 거대 애벌레 쪽이었다.

    대경실색한 푸른 거대 애벌레는 깜짝 놀라 물러났지만 거리가 너무 가깝고 금색 수정빛의 속도가 너무 빨라 소용이 없었다.

    서걱! 서걱!

    경쾌한 소리가 두 번 울리자 푸른 거대 애벌레의 방대한 몸이 세 조각으로 갈라졌고 청록색 선혈이 낭자했다.

    기세등등하게 날아들던 푸른 거대 그물과 돌풍이 바람처럼 흩날려 사라졌다. 그걸 본 한립은 무척 기뻐하면서 대견스럽다는 눈빛을 보냈다.

    즈즈즈즛!

    괴성을 지른 푸른 거대 애벌레는 세 조각이 난 몸을 푸른빛으로 두르고 달아났다. 둔광 속에서 세 조각 난 몸이 꿈틀거리며 하나로 붙어 융합되어갔다.

    금색 딱정벌레는 두말할 것 없이 여러 다리를 동시에 휘둘렀다.

    수정빛들이 교차해 날아가 흐릿하게 사라졌다가 푸른 거대 애벌레 사방에서 나타났다.

    서걱서걱서걱.

    방대한 푸른 애벌레의 몸은 난무하는 수정빛 속에서 백여 조각이 되어 흩날렸다.

    금색 딱정벌레는 번득 이동해 푸른 애벌레 잔해 속을 통과했다. 잔해를 빠져나온 영충의 입에는 청옥을 섬세하게 깎아 놓은 듯 반짝이는 작은 애벌레가 물려 있었다.

    바로 거대 애벌레의 원영이었다.

    금색 딱정벌레는 푸른 애벌레의 원영을 씹어 삼키고 맛을 음미하듯 주변의 금빛을 일렁였다.

    나머지 영충의 잔해들도 딱정벌레가 내뿜은 금빛 광채에 이끌려 모조리 뱃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푸른 거대 애벌레의 죽음으로 검은 거대 깃발을 가두고 있던 고치도 뜯겨나가 한립의 머리 위로 돌아갔다.

    한립이 한숨을 돌리기도 전에 노기등등한 목소리가 영역 깊은 곳에서 들려와 머리를 쭈뼛하게 만들었다.

    “감히 나를 배신해! 죽어라, 이놈!”

    은빛 둔광이 번개처럼 들이닥쳐 얼굴이 파랗게 질려 있는 거령으로 변했다. 그녀는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핏빛 영패를 불러내 악력으로 펑! 하고 으깨버렸다.

    금색 딱정벌레가 고통스러워하며 입에서 소량의 금색 피를 토했지만 금세 멀쩡해졌다.

    그걸 본 거령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었다.

    “겨우 공신패(控神牌) 따위로 날 통제할 수 있을 줄 알았다면 바보 같은 생각인데?”

    금색 딱정벌레는 그녀를 비웃으며 금빛으로 변해 한립 옆으로 가서 섰다.

    “네 녀석이 서금선(噬金仙)의 원주인이었어?”

    거령은 서금충이 한립에게 가는 것을 보고 눈빛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금색 딱정벌레는 한립과 오래전에 연락이 끊긴 서금충 ‘금동’이었다.

    “내가 거령을 막을 테니, 그 틈에 달아나요!”

    금동은 한립에게 소리치고는 금빛을 일으켜 먼저 거령에게 달려들었다.

    그런 금동의 모습에 한립은 여러 감정이 교차하는 얼굴로 눈부신 푸른 빛줄기로 변해 전방으로 쏘아져 나갔다.

    “헛소리!”

    거령이 금동을 향해 하얀빛을 날렸다. 이전에 한립을 추격했던 하얀 밧줄 선기였다.

    반짝 사라진 하얀 밧줄이 금동 주변의 잿빛 그림자들 틈에서 튀어나와 금색 영충을 꽁꽁 묶었다.

    그녀를 향해 쇄도하던 금동은 그대로 멈출 수밖에 없었다. 거령은 바로 금동을 처리하지 않고 수결을 맺어 회색 구역에 법결을 던졌다.

    화르르.

    잿빛 그림자들이 불덩이로 변해서 회색 구역 전체가 잿빛 불바다로 변해갔다. 눈빛이 흉흉해진 그녀가 중얼중얼 주문을 외자 대량의 화염 파도가 한립을 덮치려 했다.

    쿠쿠쿵.

    한립이 술법을 펼쳐 상대하려는데 눈부신 금빛이 날아들어 주변의 잿빛 화염을 찢어발겼다.

    금빛 속에서 나타난 금동은 끊어진 하얀 밧줄을 들고 있었다.

    “이런 걸로 나를 막으시겠다? 웃기시네.”

    금동은 냉소를 흘리며 끊어낸 밧줄을 입에 넣고 질겅질겅 씹어 삼켜버렸다. 단단하기 그지없는 선기가 무슨 간식거리라도 되는 것 같았다.

    그 모습에 거령의 두 눈에 불길이 치솟은 것은 당연했다.

    거대 애벌레 원영에 이어 선기까지 삼킨 금동의 몸에서 금빛이 확 늘어났다가 또 있는 듯 없는 듯 약해졌다가 했다.

    “버러지 같은 것이 지금까지 나를 속여 왔구나!”

    거령은 이제야 금동이 진정한 실력을 숨겨왔다는 것을 눈치챘다. 한립은 의미심장하게 서금선을 살피다가 금빛을 방출하면서 울룩불룩 몸집을 키웠다.

    금털이 수북하게 자라난 그는 거원으로 변해 원래 가던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여기까지 날아오면서 잿빛 영역이 수행을 억제하긴 했지만 순수한 육체의 힘은 제대로 억압하지 못한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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