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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713화 (1,470/2,000)

1713화. 궁전

*

한립은 푸른색 선박을 불러내 육우청을 태우고 붉은 황원을 가로질렀다.

고공에서 바람소리를 들으며 황원을 내려다보니 땅에서 보았을 때와 달리 언덕이나 작은 산 같은 굴곡이 보였다.

날아가면 갈수록 지형도 다양해져서 처음 보이던 언덕들 외에 골짜기같이 파인 곳도 보였는데 물이 흐르는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진작 말라비틀어진 것이 틀림없었다.

그들은 쉼 없이 날아가다 시야에 성처럼 생긴 홍토(紅土)로 만들어진 건물을 발견했다.

푸른 선박은 붉은 성에 가까이 다가가 성을 보호하도록 물길이 나 있는 강 앞에서 멈추었다.

강 역시 진작 말라붙었는지 땅이 쩍쩍 갈라져 있었다.

한립과 육우청은 강 너머의 성벽에 깊은 흔적들이 남아 있는 것을 보았다. 날카로운 무기에 갈린 것도, 충격을 받아 무너진 부분도 있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강을 가로지르는 돌계단을 지나 폐허가 된 성으로 향했다.

“…….”

한립은 이곳저곳을 둘러보다 돌계단 중간에서 마른 강바닥에 묻힌 짐승의 뿔을 발견했다. 이에 걸음을 멈추고 손을 저어 대량의 흙을 날려버리고 완전한 백골을 끄집어냈다.

육우청이 그걸 보고 놀라워했으나 한립은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뼈를 보니 산악 거원에 맞먹는 체구를 지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처음 흙바닥에서 비죽 튀어나와 뿔이라 여겼던 것도 짐승의 이빨 중 하나에 불과했다.

“무슨 짐승인지 알아보시겠어요?”

“기운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아 골격만으로는 모르겠군.”

육우청의 질문에 한립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속으로는 약재밭 인근 대전에서 보았던 벽화에 그려진 짐승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그는 벽화에 묘사되어 있던 참혹한 전투를 떠올리며 그게 이곳에서 발생했던 일은 아니었을까 추측해보았다.

하지만 그가 본 그림의 전투는 엄청난 규모로 건물은커녕 이 일대가 아무것도 없는 평지가 되어있어야 했다.

돌계단을 건너 성문 앞에 이르자 발밑에 편액이 떨어져 있었다.

“월하성(月河城).”

은백색으로 글씨가 새겨진 편액을 지나 성문으로 들어간 한립은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려 걸음을 멈추었다.

진언보륜이 더 강렬하게 반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성안을 둘러보았으나 무너진 건물과 담벽 그리고 그 속에 깔린 백골들이 전부였다.

그중에는 사람의 것도 있었고 요수의 것도 있었는데 생전의 모습을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오래된 뼈들이었다.

대로를 따라 안쪽으로 쭉 걸어 들어가자 비슷비슷한 풍경이 이어지다 멀리 산만한 금색 궁전이 하나 눈에 들어왔다.

다른 곳에 비해 보존이 잘 되어 있어서 지붕이 약간 내려앉고 벽에 금이 간 정도였다. 게다가 궁전 바깥에 금색 막이 있는 것처럼 금빛이 반짝였다.

그곳으로 다가가던 한립은 팔에 차고 있던 저물탁이 순간적으로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미간을 좁히고 멈춰서서 손에 청록색 옥함을 꺼내 들었다.

달칵.

그는 옥함을 열어 둥그런 회색 눈알을 들여다보았다.

“그게 뭐예요?”

옆에서 육우청이 궁금하다는 듯 다가왔다.

“태비라는 요수의 눈일세.”

한립은 간단히 답했고 육우청은 그가 길게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지켜보기만 했다.

태비의 눈알을 관찰하던 한립은 은은하게 광채가 나는 것 외에 별다른 변화를 찾을 수 없자 다시 금색 건물로 걸음을 옮겼다.

팟!

육우청과 거의 나란히 앞으로 향하던 한립은 궁전을 백 장 앞두고 느닷없이 그녀를 낚아채서 낮은 벽 뒤로 몸을 숨겼다.

궁전 문 아래에 은색 장포를 입은 여인이 비구니들이 들고 다니는 작은 칼인 계도(戒刀)를 든 채 수결을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 사람은…….”

육우청이 힐끔 여인의 모습을 확인하고 중얼거리자 한립은 손가락을 입에 대고 조용히 하라는 표시를 했다.

의식이 차단되는 공간이라도 상대는 금선 수사였으니 갑자기 무슨 소리가 들리면 알아차릴 수도 있었다.

그녀는 한립도 본적이 있는 거령이었다.

거령은 온전하진 않지만 고풍스러운 주술문자가 가득한 계도에서 금빛 광채를 뿜어내 궁전문의 특수한 원형 도안과 감응하고 있었다.

궁전의 금제를 풀고 있는 모양이었다.

거령이 손에 든 계도와 금색 궁전 문에서 전부 시간법칙 파동이 느껴졌다.

한립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어 거령과 멀리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무언가 엎드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작은 산만한 짐승의 몸에는 기괴한 문양이 가득했다.

등을 돌리고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한립의 뇌뢰에 예전에 죽였던 외눈박이 거인 태비가 떠올랐다.

화앗!

뭔가 안 좋은 느낌에 그가 들고 있던 눈알을 살핀 순간, 보일 듯 말 듯 하던 눈알의 광채가 눈을 찌를 듯이 강렬하게 뻗어 나왔다.

엎드려 있던 짐승은 즉시 몸을 돌려 납작한 코에 커다란 입을 지니고 커다란 눈이 하나뿐인 얼굴을 드러냈다.

그의 직감대로 예전에 보았던 것보다 몸집이 작은 태비였다. 태비는 포효를 내지르며 하나뿐인 눈에서 하얀 광선을 쏘아 한립과 육우청이 있는 곳을 공격했다.

“피해야 하네!”

한립이 육우청의 손목을 쥐고 휙! 고공으로 솟구쳐 광선을 피하고 금색 궁전 쪽 관도에 착지했다.

금색 궁전 앞 거령이 몸을 돌려 그들을 보더니 의외라는 얼굴을 했다. 그러나 곧 한립의 손에 든 회색 눈알을 보고는 얼굴이 파랗게 질려갔다.

“태비를 죽인 것이 네 놈이었구나! 내가 그 많은 시간을 낭비하게 한 놈이 바로 너였어!”

거령은 술법을 멈추고 한립을 노려보면서 원한을 담아 외쳤다. 듣고 있는 한립은 억울했다.

영환계에서 북한선역으로 되돌아오다 공간 난류에서 만나 격살한 태비가 거령이 아끼는 영수인 줄 그가 알았겠는가?

게다가 눈치를 보아하니 그녀는 태비를 무척 귀하게 여겼던 것이 확실했다.

“흩어져 달아나세!”

생각을 마친 그는 육우청에게 전음을 보내고 먼 곳으로 날아갔다. 깜짝 놀란 육우청도 바로 푸른 둔광을 일으켜 그와 다른 방향으로 달아났다.

“도망을 쳐?”

거령이 서늘하게 중얼거리다 손가락을 뻗어 하얀 밧줄을 날렸다. 굉장한 영력 파동을 발산하는 밧줄은 법칙의 힘을 함유한 선기였다.

머리카락처럼 가느다란 하얀빛으로 변한 밧줄이 한립의 뒤를 쫓았다.

“너는 저년을 죽여라.”

거령은 선기를 방출함과 동시에 곁의 작은 태비에게 명을 내렸다.

작은 태비는 한립을 증오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지만 거령의 명을 어기지 못하고 다른 쪽으로 펄쩍 뛰어 노란빛으로 사라졌다.

한립은 뒤에서 놀라운 기운을 지닌 뭔가가 순식간에 날아다니는 것을 느끼고 등골이 서늘해졌다.

팟!

이에 그는 등에서 금색 날개 한 쌍을 불러내 비행 속도를 높였다. 그러나 거령은 얼음장 같은 얼굴로 비웃음을 흘리며 수결을 맺었다.

하얀 밧줄의 속도가 맹렬히 빨라져서 흐릿한 허상으로 변해 단번에 한립을 따라잡고 여섯 가닥으로 갈라져 그를 붙들려 했다.

콰릉!

흠칫 놀란 한립의 풍뢰시에서 금색 뇌전이 번득이고, 그물 그림자를 간발의 차로 피해 앞으로 튀어 나갔다.

십여 리 밖에서 번득 나타난 한립은 표정이 어두웠다. 이곳에서의 제약이 유한경보다 심해서 뇌둔술을 발휘하고도 이만큼 밖에는 달아나지 못했다.

“겨우 뇌둔술로 내 손에서 벗어날 생각은 하지 말아라.”

돌연 거령의 목소리가 한립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 그는 화들짝 놀라 전신에서 금빛을 발산하며 진언보륜 허상을 불러내 회전시켰다.

흐릿하게 변한 그의 등에서 풍뢰시가 다시금 번득였다.

콰릉!

한립의 신형이 다시 사라지기 전까지 걸린 시간은 이전보다 훨씬 빨랐다. 십여 리 밖으로 이동한 한립은 그제야 몸을 돌려 그의 신형이 서 있던 곳에 거령이 있는 것을 보았다.

“가속 신통까지 쓰는구나. 허나 내게 걸렸으니 살아서 빠져나갈 순 없을 것이다!”

코웃음을 친 거령의 몸에서 은빛이 흘러나와 보일 듯 말 듯한 은색 날개 한 쌍을 응결했다.

날개를 활짝 펼치자 거령의 몸이 잔영으로 변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 모습에 안색이 달라진 한립은 몸 안의 역전진륜을 가속하면서 풍뢰시에서 뇌전을 반짝여 달아났다.

역전진륜의 보조를 받아 펼치는 뇌둔술은 평소보다 훨씬 빨랐다.

쉬익!

그가 막 사라지자마자 거령의 신형이 잿빛을 머금은 다섯 손가락으로 그가 있던 자리를 찔러 들어갔다.

다섯 줄기의 잿빛은 허공을 찔렀고 거령은 당황한 기색 없이 고개를 돌려 다른 곳을 바라봤다.

금빛 뇌전이 반짝이고 한립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러자 거령의 날개가 다시 움직이고 그녀는 귀신처럼 사라졌다.

“……!”

한립도 몸에서 금빛을 뿜으며 날개에서 뇌전을 번득여 바로 뇌둔술을 펼쳤다.

콰릉! 콰릉! 콰르릉.

연달아 천둥소리가 울렸다.

허공에서 은빛과 금빛이 쫓고 쫓기면서 빠르게 이동했다. 은빛의 속도는 점점 더 빨라졌고 아무 소리도 없어 마치 귀신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은빛도 엄청난 속도였지만 금색 뇌전도 뒤지지 않았기에 추격전이 이어졌다.

천둥소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조밀하게 들려왔고 이제는 거의 간격도 두지 않고 계속되었다.

그들은 그렇게 이동하면서 부지불식간에 금색 궁전 인근으로 이동했다.

허공에서 은빛이 반짝이고 미간을 찌푸린 거령이 나타나 더는 상대를 쫓지 않았다.

한립 역시 십리 밖에서 금빛을 반짝인 후 나타나 그런 거령을 노려보았다. 거령은 따라붙지 않았고 그도 섣불리 이동하지 않았다.

역전진륜과 뇌둔술을 동시에 펼치느라 선령력 소모도 컸지만 더 큰 문제는 육신과 정신의 부담이 극대화되어 잠시라도 숨을 돌릴 시간이 필요했다.

“겨우 진선이 부릴 수 있는 잔재주가 한두 가지가 아니구나. 너를 이리 쫓기만 할 수 없으니 나도 뭔가를 보여줘야겠지?”

거령은 서늘하게 말하며 은빛을 반짝이고 허공에서 사라졌다. 그 말에 인상을 찡그린 한립은 금빛을 터트리며 뇌둔술을 펼쳤다.

그런데 그때 허공이 웅웅 떨려왔다.

난데없이 대량의 잿빛이 회색 구역을 만들어서 인근 하늘을 잠식하고 있었다. 회색 구역 안에서 잿빛 그림자들이 휘휘 날아다녀서 외부세계와 더욱 아득하게 멀어진 느낌이었다.

그 변두리에서 금색 뇌전이 떠올라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발버둥을 쳤다.

“영역!”

한립이 의문 가득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다 소리를 높였다.

무상맹 임무를 수행하면서 북한선궁 금선이 영역 신통을 사용하는 것을 보기는 했으나 그때는 위영역(僞靈域)이어서 지금의 회색 구역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그는 거대한 늪에 빠진 듯 공간법칙이 섞인 영역의 힘에 눌려 움직일 수가 없었다.

영역 안에서 춤추듯 움직이던 잿빛 그림자들도 악귀들처럼 사방팔방에서 그를 향해 몰려들었다.

괴이한 법칙의 힘들이 그런 잿빛 그림자들로부터 발산되었다.

잿빛 그림자들이 도달하기 전, 한립은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고 손과 발이 마비되는 느낌을 받았다.

“이게 대체 무슨 법칙이지?”

가슴이 서늘해진 그는 낮게 기합을 넣고 진언보륜을 띄워 시간법칙 도문에서 눈부신 빛을 뿜었다.

시간법칙의 힘이 한줄기씩 퍼져나가 그의 몸을 휘감았다.

진언보륜의 시간도문이 얼마 남지 않아서 방출하는 시간의 힘도 희박했으나 3대 지존 법칙 중 하나답게 영역의 힘을 밀어내고 몸의 마비도 서서히 풀어졌다.

정신이 맑아진 그는 수결을 맺은 양손을 휘저었다.

푸른빛이 반짝이고 거검이 그의 앞에 나타나 놀라운 기운을 품은 굵직한 뇌전들을 번득였다.

그를 중심으로 사방을 가른 거검에서 네 줄기의 거대한 검 그림자가 뻗어 나갔다.

쿠콰쾅!

동서남북의 잿빛 그림자들이 검 그림자에 휩쓸러 나뒹굴었다. 하지만 더 많은 잿빛 그림자들이 그를 에워싸고 달려들었다.

깊게 숨을 들이마신 한립은 평온하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청죽봉운검을 이용해서 수많은 잿빛 그림자들을 베어내며 더 이상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회색 구역의 중앙에는 거령이 뒷짐을 지고 서서 멀리서 수많은 잿빛 그림자들과 싸우고 있는 한립을 반짝이는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저건……. 시간법칙의 힘! 저놈이 시간법칙을 익혔을 줄이야, 게다가 약간이지만 법칙의 실을 응결해냈어! 으하하, 하늘이 나를 돕는구나!”

그녀는 크게 웃음을 터트리다 뭔가 곤란하다는 듯 생각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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