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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712화 (1,469/2,000)

1712화. 한발 늦다

*

또 반나절이 지났다.

몇 차례 더 신기루 환영이 나타났으나 한립이 진실안을 이용해 방향을 잡았다. 육우청의 지도에 나타난 바로는 통로가 전방 어딘가에 있어야 했다.

뱃머리에 선 한립은 좋지 않은 예감에 긴장했다.

신기루 환영은 이제 아무렇지 않았는데 마음속 깊은 곳에서 통로를 지킨다는 요수에 대한 경계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얼마나 오랜 세월 동안 통로를 지켰을지 모르는 요수라면 수행이 높거나 신기한 신통을 부리게 되었을 가능성도 충분했다.

그가 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 또 신기루 환영이 나타났다.

“통로 입구 전에 마지막 신기루 환영이에요. 방향을 유지하고 곧장 통과해주시면 돼요.”

육우청이 지도를 살피고 얼른 말했다.

웅!

고개를 끄덕인 한립이 청연주의 빛을 왕성하게 해서 전방의 녹지로 진입했다. 어쩐 일인지 이번에는 허공에 환영이 연달아 다섯 개나 이어졌다.

녹지 환영 다섯 개가 오각형의 꼭짓점처럼 자리하고 서로 호응해 광활한 구역을 만들었다.

그 모습에 한립과 육우청은 움찔해 선박을 멈추려 했지만 늦고 말았다. 선박이 번득 녹색 지대로 들어서고 모래사막의 풍경이 사라졌다.

물과 풀이 반복되던 이전 신기루와 달리 이곳은 녹색 그림자들이 자욱했다. 게다가 그들을 내리누르는 환술의 힘은 이전보다 열 배는 강한 듯했다.

“왜 갑자기…….”

화들짝 놀란 육우청이 말을 끝맺기 전에 강력한 힘이 그녀의 몸을 감쌌다. 눈이 풀려 멍해진 그녀는 어느새 환영에 의식을 제압당하고 말았다.

그녀보다 의식이 강한 한립도 환영의 힘에 저항하는 게 힘들어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그는 깊게 숨을 내쉬고 연신술을 발동하고서야 머리가 맑아졌다.

이때 곁에 선 육우청이 갑자기 발을 까딱이더니 눈에 광기가 차올랐다.

웅.

한립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 살의가 가득했고 당장 은색 장검을 불러내 실처럼 검빛을 머금게 했다.

흐릿하게 변한 은색 장검이 환영처럼 한립의 머리로 떨어졌다.

아직 검이 닿기 전인데 그 기세만으로도 바늘로 혼백을 찔린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응?’

강대한 의식을 지닌 한립도 굳은 얼굴로 낮게 신음을 삼켰다.

그녀와 줄곧 동행했지만 검술이 이 정도 경지인 줄은 전혀 몰랐다. 검의(劍意)만으로 혼백에 손상을 입힐 수 있는 경지라니!

허나 그에게 이 정도 의식 손상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다섯 손가락에서 푸른 검기들이 튀어 나가 은색 장검을 막고 맹렬하게 공격했다.

그런데 육우청의 손목이 유려한 곡선을 그리더니 은색 장검이 물고기처럼 휘어져 푸른 검기들을 피하는 것이 아닌가!

화려한 푸른빛을 일으킨 그녀가 빙글 돌아 시야에서 사라졌다.

움찔한 한립을 에워싸고 똑같이 생긴 다섯 명의 육우청이 나타나 음산한 살기를 담은 장검으로 그의 급소를 노렸다.

챙!

은색 장검 다섯 자루는 전부 한립 피부를 가린 별빛 막에 막혔다.

그 사이 한립은 전방의 진실안으로 다섯 육우청을 훑고 눈을 번득였다. 그의 입에서 굵은 금색 뇌전이 빠져나가 좌측의 육우청을 때렸다.

휘익.

그녀가 휘두른 장검이 은색 검막을 펼쳐 냈고 금색 뇌전이 치직치직 거리면서 연달아 달려드는 검 그림자들을 절반으로 줄었다.

곧 은색 검막도 부들부들 떨리다 쨍! 하고 깨져나가 그녀가 들고 있던 은색 장검이 터졌다. 은색 조각들 사이로 남은 금색 뇌전들이 파고들어 육우청을 강타했다.

콰쾅!

여인은 힘없이 날아올라 선박 위에 퍽! 떨어졌다. 그러자 즉시 나머지 네 명의 육우청이 몸을 부르르 떨고 사라졌다.

끙 앓는 소리를 흘리고 풀쩍 몸을 일으킨 육우청의 눈빛이 흉흉해졌다.

무언가 강력한 공격을 하기 직전 같았다.

파앗!

그때 그 주변에 굵은 사슬이 나타나 그녀를 번개처럼 감았다. 은백색 사슬은 실체가 있는 보물이 아닌 의식 사슬이었다.

움직임이 억제된 육우청은 더욱 미쳐 날뛰면서 있는 힘껏 몸부림치고 있었다.

‘하아…….’

한립은 빠르게 주문을 외고 연달아 빛줄기를 날렸다. 그 안에서 봉인의 힘을 지닌 부적들이 번득이고 있었다.

법결이 스며든 여인의 몸에 수정 고리가 겹겹이 나타나 옥죄었고, 푸른빛이 흩어진 육우청은 인형처럼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 모습에 한립은 고개를 끄덕였다. 칠요성환을 다루면서 개발한 구금신통이 꽤 쓸만해서였다.

그러나 방금 벌어진 일은 의문투성이였다.

만일 육우청이 무의식중에 불러낸 은색 장검이 영보급도 안되는 법보가 아니었다면 그도 그녀를 보호하면서 간단히 제압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녀가 보인 실력은 여정 중에 보인 것과 격차가 너무 컸다.

‘일부러 실력을 숨긴 것인가?’

한립은 쓰러진 여인을 지긋이 바라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선을 돌렸다. 이곳은 여전히 신기루 환영 속이어서 육우청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의식 사슬이 사라진 육우청의 미간으로 한립의 손끝에서 푸른빛이 날아들었다.

“으으…….”

앓는 소리를 내던 육우청의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려왔다. 깜짝 놀라 눈을 번쩍 뜨고 주위를 둘러본 그녀는 눈빛이 맑아져 있었다.

어지러운지 머리를 부여잡은 육우청은 주변 풍경을 보고 안도했다.

“한 오라버니께서 환영을 파훼해 주셨나 보네요. 마지막 신기루 환영이 이렇게 강력할 줄 누가 알았겠어요!”

육우청은 간담이 서늘한지 얼른 일어나 투덜거렸다. 한립은 그녀의 행동을 줄곧 관찰하면서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왜 그러세요?”

그의 이상한 시선에 육우청이 어리둥절하게 물었다.

“아무것도. 몸은 괜찮은가?”

한립의 말에 육우청은 얼굴을 굳혔다. 그녀는 가슴을 부여잡고는 몸이 저리고 아픈 것에 깜짝 놀란 듯했다.

“제가 어쩌다 상처를 입었죠?”

“환영 속에서 의식이 제압되어 나를 공격하더군. 그걸 막다가 어쩔 수 없이 그리되었네.”

“아, 괜찮아요. 제가 도움은 되지 못하고 한 오라버니에게 폐만 끼쳤네요.”

차분한 한립의 설명에 육우청이 당황해 미안하다는 얼굴을 했다.

“이동 방향은 맞는 듯하니 통로로 가기 전에 잠시 휴식을 취하도록 하세.”

한립은 다른 말은 하지 않고 전방으로 시선을 옮겼다. 청연주가 웅! 하고 멈추었다.

고개를 끄덕인 육우청이 갑판 한쪽에 가부좌를 틀고 단약을 삼켰다. 밝은 푸른빛이 반원형으로 그녀를 감싸 안았다.

한립은 여전히 의문이었다. 의식으로 세밀하게 관찰했지만 육우청이 연기를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정말 신기루 환영 내부에서 발생한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까?’

한립은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 했으나 마음속에 육우청에 대한 경계심이 높아졌다.

파앗!

소매 속에서 진법 깃발들을 날려 두꺼운 남색 보호막으로 선박 전체를 감싼 그는 붉은 단약을 불러냈다.

짙은 광채가 도는 단약은 교삼이 주었던 삼천단이었다.

육우청을 제압한 뒤 홀로 겹겹이 둘러싼 신기루 환영을 파훼하고 나오느라 선령력 소모가 심했다.

금선경 요수가 지키는 통로를 앞두고 반드시 빠르게 원기를 회복해야 했다. 단약을 삼킨 그는 가부좌를 틀고 운공을 해 약성을 녹이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 위로 붉은빛이 떠올랐다가 차차 가라앉았다.

* * *

명한선부의 어느 검은 사막 상공을 벽옥 마차가 번득 지나갔다. 한립이 막 통과한 흑암과벽이었다.

마차에 선 키 큰 사내가 하얀 나침반을 들고 붉은빛을 반짝이고 있었다.

“역시 연신술을! 흥, 본좌를 만났으니 절대 빠져나갈 수 없을 것이다.”

사내가 고개를 번쩍 들고 어딘가를 쏘아보면서 소리쳤다.

슁!

그가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는데도 벽옥 마차의 빛이 밝아지면서 주위로 푸른 돌풍이 몰려와 속도가 몇 배로 빨라졌다.

* * *

반 시진이 금방 지나갔다.

고요히 눈을 뜬 한립의 몸에는 다시 선령력이 충만했다.

잠시 후 육우청도 푸른빛을 거두자 한립이 주변 금제를 거두었다.

“가세.”

청연주가 다시 출발하고 한 시진 넘게 두 사람은 아무 말이 없었다.

사막 중심으로 갈수록 열기가 심해지는 것이 당연했는데 이제는 오히려 공기가 서늘해지고 있었다.

한립이 별안간 손을 저어 청연주를 세우고 전방의 녹지를 바라보았다.

작은 마을 규모의 녹지에는 울창하게 수목이 자라고 평범한 풀과 꽃들이 섞여 있었다. 그 가운데 초승달 모양의 호수가 은백색으로 빛나 주변 사막과 이질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이번에는 신기루 환영이 아니라 정말 호수와 수풀이었다.

호수 중앙에 칠흑 같은 소용돌이가 회전하면서 휘휘 바람 소리를 내고 있었다.

공간 파동을 발산하는 소용돌이 깊은 곳에 하얀빛이 새어 나와 또 다른 세계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었다.

“공간통로!”

얼굴이 밝아진 육우청이 낮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한립은 검은 소용돌이가 아닌 호수 인근의 덤불을 보고 표정이 이상해졌다.

손을 저어 비행 보물을 회수한 그는 아래로 내려가고 육우청은 이제 습관이라도 된 듯 그를 졸졸 따라갔다.

바닥에 내려선 그녀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덤불 속에 배를 깔고 엎어져 있는 거목 크기의 짐승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수풀과 덤불에 가려져 위에서는 보이지 않던 짐승은 황소의 모습을 하고 털과 가죽은 오래된 옥석같이 파랗기 짝이 없었다.

네 발굽에 있던 발톱이 예리하게 번들거려서 아주 강력한 요수라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이미 머리가 몸과 분리되어 겁먹은 눈을 감지도 못하고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누군가 먼저 지나갔나 봐요. 하긴 이번에 선부로 들어온 거대 세력이 한둘인가요. 다들 어떻게든 새로운 영역을 수색하려 할 테니까 먼저 지나간 세력이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는 않겠죠.”

육우청이 놀란 기색을 지우고 고개를 끄덕였다. 한립은 푸른 소의 목에 남은 상처를 보면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거대 소의 상처는 아주 매끄럽게 연결되어서 누군가 가볍게 일격에 자른 듯 보였다.

주변 호수와 수풀에 싸움의 흔적이 없다는 것도 강력한 짐승을 누군가 압도적으로 제압했다는 증거였다.

금선경 요수를 일격에 참살한 자의 실력은 분명 엄청날 것이다. 한립은 잘린 소머리로 걸어가 단면의 핏물을 찍어 냄새를 맡아보았다.

“누가 죽인 것인지 아시겠어요?”

육우청이 그의 이상한 행동에 관심을 보였다.

“모르겠네. 누가 죽였든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요수는 죽었고 우리는 힘들이지 않고 통로로 진입하게 되었으니 좋은 일일세. 그만 가지.”

“맞는 말이네요.”

푸른빛을 발산해 핏물을 털어낸 한립은 검은 소용돌이 쪽으로 날아올랐고 육우청이 뒤따랐다.

“위험하지는 않아 보이는군.”

그들은 소용돌이 인근과 내부를 감응해보고는 푸른빛으로 변해 안으로 들어갔다.

눈앞이 환해진 한립은 주변 풍경이 어른어른하는 와중에 새로운 장소에 도착했다. 잠시 마음을 안정시킨 그는 주변을 살펴 붉은 흙이 가득한 대지를 살폈다.

붉은 땅에는 풀은커녕 살아 있는 생명체가 아예 살지 않는 듯했다.

육우청 역시 정신을 차리고 바람이 불어와 붉은 먼지를 일으키는 황량한 광경을 지켜보았다.

한립은 더 멀리 살피고 싶었으나 어떤 구속의 힘이 작용해서인지 의식을 아예 몸 밖으로 발산할 수가 없었다.

“명한선부는 도대체 얼마나 크단 말인가…….”

“어렸을 적 아버지께 들은 바로는 예전에는 이곳을 ‘명한선역’이라고 불렸대요. 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선부로 불리기 시작했지만요. 옛 이름이 선역이었던 만큼 그 규모와 지형의 복잡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죠.”

한립이 중얼거리자 육우청이 웃으며 말했다. 그 말에 답하려던 한립은 갑자기 그대로 표정이 굳었다.

“한 오라버니, 왜 그러세요?”

“아니, 아닐세. 갑자기 옛일이 생각이 나서…….”

깜짝 놀란 육우청의 반응에 한립이 손을 저으며 얼버무렸다.

육우청은 반신반의했지만 더는 묻지 않았고 한립은 몸을 돌려 붉은 황원 어딘가를 응시했다.

사실 그가 갑자기 말을 멈춘 것은 진언보륜 때문이었다.

갑자기 그가 특정 방향을 쳐다보자 진언보륜의 시간도문이 시간법칙을 감응한 듯 반짝반짝 빛난 것이다.

“의식을 방출할 수 없으니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일단 저쪽으로 가보세.”

“좋아요.”

한립은 머뭇거리지 않고 진언보륜이 감응한 방향을 가리켰고 육우청도 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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