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710화 (1,467/2,000)
  • 1710화. 생사겁(生死劫)

    *

    “지도의 내용이 퍽 상세하군. 이걸 어디서 구했는지 물어도 되겠는가? 이것도 그 비석에서 얻은 것인가?”

    한참 후에 의식을 회수한 그는 다시 옥간을 돌려주었다.

    “네, 바로 이 지도 때문에 줄곧 무진사해에 도전해 보고 싶었어요. 물론 지도가 있어도 한 오라버니가 도와주시지 않으면 어렵겠지만요.”

    “힘닿는 데까지 돕겠네.”

    한립은 언제나 그렇듯 확언을 하지 않았지만 믿음직스러웠다. 청연주가 밝은 빛을 일렁이면서 망망사해(茫茫沙海)로 들어섰다.

    사막에 들어가자마자 몸이 통째로 구워지는 듯 입과 가슴이 답답해졌다.

    “육 수사, 일단 정확한 위치를 확인하세.”

    무표정한 한립이었으나 내심 깜짝 놀라면서 말했다.

    “알겠어요. 아직 정확히 어디쯤인지 모르겠지만 지도에 표시된 지형을 두세 곳만 찾아내면 방향을 잡을 수 있을 거예요.”

    육우청이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다.

    * * *

    같은 시각, 선계 어딘가에 있는 산맥.

    웅장한 산세를 가진 산봉우리가 우뚝 솟아 마치 거검이 하늘을 향해 칼끝을 겨누고 있는 모양 같았다.

    그 산 깊은 곳에 있는 고성(古城)은 건축 양식이 고풍스럽고 독특해 지붕과 처마의 끝 그리고 건물 곳곳마다 검의 형상을 한 볼록한 부조가 새겨져 있었다.

    대검, 중검, 세검, 단검 등 모든 종류의 검의 형태가 모여 건물을 이룬 듯했다.

    고성에는 많은 이들이 왕래하거나 하늘에서 날아들어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었다.

    고성의 어느 어두운 밀실 안, 청년 한 명이 검은 돌 제단에 누워있었다.

    청년은 숨을 쉬지 않아 마치 시체처럼 보였고 제단에는 심오한 문양들이 규칙적으로 새겨져 있었다.

    그런 청년의 머리 위로 암청색 화등잔 하나가 있었는데, 불길이 미약하고 수시로 깜빡거려서 위태로워 보였다.

    청년의 가슴에는 심오한 주술문자가 그려진 검은 부적 하나가 붙어서 특수한 파동을 발산했다.

    끼익.

    돌연 정적이 흐르던 공간에 대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걸어들어왔다.

    처음 들어온 백발노인은 하얀 피부에 혈색이 좋아 백발홍안(白髮紅顔)이라는 말이 잘 어울렸고, 그 뒤로 따라 들어온 중년인은 뺨에 진청색 흔적이 있고 두 눈에는 검은자보다 흰자위가 훨씬 넓어 괴이한 인상을 주었다.

    그들은 제단 앞에서 걸음을 멈춰서서 검은 부적을 들여다보았다.

    “오늘이겠지?”

    “맞습니다. 예전에 천신점괴를 본 결과, 바로 오늘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백발노인의 물음에 청안(靑顔) 사내가 푸른 주판을 꺼내니 주판알이 저절로 움직였다.

    “산이가 자질로는 우리 웅 씨 가문의 1대 제자 중에 가장 뛰어났건만 서출이라는 신분의 한계 때문에 어려서부터 곡절이 많았지 않았나. 그 때문에 고집이 생겨서 그간 가문의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 길을 개척하려 했지. 이번 겁을 이겨내면 굳이 그럴 필요 없다는 것을 스스로 깨우쳐야 할 것인데 말이야.”

    “그러게 말입니다. ……지금입니다.”

    백발노인의 탄식에 고개를 끄덕이던 청안 사내가 눈에 힘을 주었다.

    그의 말이 신호라도 되듯 제단에 누운 청년 가슴의 검은 부적이 화르륵 연소 되어 검은 불길로 변하고 제단의 무늬들이 새까만 빛을 내뿜었다.

    청년의 몸이 빛에 휩싸이자 백발노인이 즉시 손가락을 튕겼다.

    쉭!

    검은빛이 청년 가슴의 검은 불길 속으로 들어가 그것을 다섯 갈래로 나누더니 각각이 별 문양의 일부가 되는 오성(五星) 진법이 만들어졌다.

    휘이이.

    느닷없이 밀실 안에 음산한 바람이 몰려들어 귀곡성과 짐승의 울음소리가 낮게 깔렸다.

    백발노인과 청안 사내는 그런 것에 전혀 구애받지 않고 오성진법 만을 주시했다.

    촤륵.

    진법 중앙 허공이 왜곡되면서 새까만 그림자가 꿈틀거리다 찢겨 공간균열을 만들어냈다. 그 순간 금빛 한 덩이가 공간균열을 통해 튀어나와 청년의 몸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자 창백하기 짝이 없던 청년의 얼굴이 점점 핏기가 돌면서 멈추었던 심장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내 머리 위의 등불도 훨씬 안정적으로 타올랐다.

    감긴 눈꺼풀 아래로 눈동자가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청년이 번쩍 눈을 떴다.

    “여긴? 난 이미 죽었을 텐데…….”

    청년은 얼떨떨한 얼굴로 눈동자를 굴리다 백발노인과 청안사내를 발견했다.

    “족장님, 넷째 숙부!”

    그는 안색이 확 달라지며 상체를 일으켜 앉으려 했다.

    “산아, 전혼술(轉魂術)이 방금 끝나 아직 움직일 수 없을 것이다. 편안히 누워서 잠시 쉬거라.”

    백발노인이 손을 뻗어 청년의 어깨를 가만히 눌렀다. 청년은 입술을 달싹이다 몸에 힘을 풀었다.

    “족장님,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인지요? 저는 이미 죽었는데 어떻게 가문으로…….”

    “이게 다 넷째 숙부 덕택이니라. 오래전 너의 운명에 생사겁(生死劫)이 있다는 것을 알아낸 숙부가 네가 가문을 떠날 때 몰래 원영에 전혼비술을 펼쳐 놓았던 것이지. 원영이 치명적인 손상을 입으면 자동으로 가문으로 돌아와 새로운 몸에 깃들 수 있게 말이다.”

    “그렇게 된 것이었군요.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넷째 숙부님이 아니었다면 저는 진작 목숨을 잃었을 것입니다.”

    “넌 내 친조카다. 당연한 일을 한 것이니 고마워할 것 없다.”

    “숙부님이 점술 신통을 타고나시기는 했어도 점괴를 보실 때마다 적어도 만년의 수행을 잃어버리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제 생사겁을 알아내셨다면 십만 년은 수행이 줄어드셨겠지요. 그런데 제가 어찌 신경 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청년은 여러 가지 감정들이 가득한 눈으로 청안사내를 올려다보았다.

    “네가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는데 그까짓 십만 년 수행이 무슨 상관이더냐. 나는 이제야 마음이 놓이는구나.”

    청안사내가 미소를 짓자 청년은 시선을 내리깔고 아무 소리도 하지 못했다.

    “산아, 북한선역에서 대체 어떤 적을 만났기에 이렇게 당한 것이냐?”

    옆에서 지켜보던 백발노인이 입을 열었다. 그 말에 청년의 눈빛이 날카로워졌으나 끝내 답을 하지는 않았다.

    “되었다, 되었어. 네가 말하기를 원치 않으니 나도 더는 묻지 않을 것이다. 그 일은 네 스스로 해결하거라.”

    “감사합니다, 족장님.”

    “이번에 힘들게 돌아왔으니 한동안은 가문을 떠나서는 안 될 것이야. 앞으로 우리는 네가 수행을 빠르게 회복할 수 있게 도울 것이다. 선궁에서 몇 차례나 연락이 왔으니 일단 너는 선궁으로 가서 맡은 바 임무를 다하고 다른 일은 천천히 생각해 보자꾸나.”

    “…….”

    백발노인의 말에 청년은 슬쩍 미간을 좁혔지만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백발노인과 청안사내가 시선을 마주치고 기뻐했다.

    * * *

    쿠콰콰쾅! 콰쾅!

    붉은 황원 위에서 붉은빛과 금빛이 요란하게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두 빛덩이의 격렬한 충돌은 하늘과 땅을 울리는 폭음을 발산했고 그 여파로 돌풍이 휘몰아쳤다.

    그들의 전투로 바닥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리고 붉은 모래 먼지가 피어올랐다.

    전투 중인 한쪽은 산만한 금색 딱정벌레 등에 올라탄 은색 장포의 거령이었고, 그녀의 상대는 불까마귀가 수놓아진 새빨간 장포를 입은 8명의 진염종 수사들이었다.

    그러나 호언 도인과 운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진염종 무리의 패색이 짙었다. 특히 욱양자 등 세 명의 금선 수사들은 의복이 너덜너덜해지고 얼굴에는 핏기가 사라지고 없었다.

    그들을 주축으로 진염종 수사들은 불꽃 형태의 진법을 이루고 각각 머리 위로 거대한 깃발을 휘날려 거령과 그녀가 탄 금색 딱정벌레를 노렸다.

    고온의 화염으로 허공이 지글지글 끓었으나 거령은 한가롭게 영충 위에 서서 청록색 호리병을 들고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녀 아래 영충이 앞다리를 휘저어 수정빛들을 비처럼 쏟아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화염과 수정빛이 쿵! 하고 폭발해 동시에 사라졌다.

    “거령 수사, 진염종과 당신은 아무런 원한이 없는데 다짜고짜 기습한 연유가 무엇입니까!”

    욱양자가 금색 영충을 노려보다 소리쳤다.

    “명한선부에 들어왔으면 다들 보물을 노리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 그런데 나 혼자서 전부 돌아다니기는 힘들잖아! 그래서 선부로 들어올 때 너희들 몸에 표식을 남겨 두었지. 괜히 바삐 다닐 것 없이 보물을 찾아 돌아오는 녀석들만 찾아 죽이면 되게 말이야. 이렇게 효율적인 방법이 어디 있겠어, 그렇지?”

    거령이 천진난만한 얼굴로 고개를 들고 밝게 웃어 보였다.

    그 후안무치한 소리에 욱양자 일행은 열이 뻗쳐 피를 토할 뻔했다. 게다가 표식을 심어 두었다는 말에 등골이 서늘해져서 의식으로 몸을 살피느라 다들 정신이 없었다.

    “가라.”

    입꼬리가 휜 거령이 작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

    그러자 그녀의 양옆 허공에 수십 장 크기의 거대 애벌레와 새하얀 구렁이가 나타나 욱양자 일행을 향해 쇄도했다.

    비대한 몸집을 지닌 푸른 애벌레가 새하얀 구렁이보다 빨라 먼저 그들 앞에 이르렀다.

    푸푸푸푹.

    애벌레의 입에서 푸른 실들이 뿜어져 나와 그물로 변했다. 투명하게 반짝이는 푸른 실 그물에서 은은하게 법칙 파동이 발산되어 욱양자 일행을 긴장하게 했다.

    “금조변(金鳥變)!”

    욱양자는 두 손으로 빠르게 수결을 맺고는 입에서 정혈을 토해 머리 위 커다란 깃발로 날려 보냈다.

    웅.

    깃발의 기운이 밝은 금빛으로 물들어 금색 불기둥을 분출했다. 다른 수사들도 정혈을 분출해 같은 술법을 사용했다.

    여덟 줄기의 빛기둥이 상공에서 융합되어 머리에는 봉황의 벼슬을 얹고 깃털이 긴 금색 불새로 변해 위용을 뽐냈다.

    끼아아악!

    금색 불새가 날개를 쫙 펴고 푸른 실 그물로 뛰어들었다. 실 그물은 상극을 만난 듯 화륵 타올라 푸른 연기를 남기고 흩어졌다.

    그 모습에 거령이 미미하게 눈꼬리를 움직이자 새하얀 구렁이가 진염종 수사들 인근에 이르러 입에서 굵은 하얀색 빛줄기를 뿜었다.

    사사삿.

    빛줄기는 소리 없이 얼음 조각을 품은 뿌연 안개로 변했고, 하얀 안개가 퍼지는 곳마다 꽁꽁 얼기 시작했다.

    푸른 애벌레는 첫 번째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분노에 차 쉭쉭 거리다가 이번에는 수많은 실을 화살처럼 쏘아 보냈다.

    거령 아래 금색 딱정벌레도 두 앞발을 휘둘러 산만한 수정빛을 날렸다. 번득하고 날아든 두 줄기 금색 수정빛이 냉염종 수사들을 찍으려 하고 있었다.

    세 마리 영수들의 협공은 실로 놀라웠다.

    욱양자가 수결을 바꾸었고 나머지 수사들도 심각한 얼굴로 술법을 보조해 모두의 머리 위에서 깃발이 눈부신 빛을 발산했다.

    금색 불새가 전신의 불길이 거세져 날아올랐다.

    * * *

    무진사해를 청연주가 질주해 꽤 깊은 곳까지 들어왔다.

    한립과 육우청은 얼굴이 붉었는데 그나마 한립은 평소와 비슷했지만 육우청의 두 뺨은 새빨갛게 변해있었다.

    작열하는 열기 속에서 뱃머리에 선 한립은 영목 신통으로 주변의 동정을 살폈다.

    “음?”

    우측 전방을 바라보던 그의 시야 끝에 흐릿하게 녹색빛이 보였다. 마치 사막 한가운데 물이 샘솟아 식물들이 자라는 듯했다.

    “이게 말로만 듣던 신기루 환영인가 봐요.”

    “드디어 나타났군.”

    “신기루 환영이 강력하다지만 정확한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지나는 수밖에 없겠어요. 저는 관련 신통을 대처하는데 능하지 못하니 한 오라버니께 도움을 청할게요.”

    육우청이 잠시 머뭇거리다 한립에게 부탁을 해왔다. 한립은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선박의 속도를 높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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