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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706화 (1,463/2,000)

1706화. 비검 정련

*

하늘 전체가 고요해지고 바람 소리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채채채챙!

그 속에서 날카로운 마찰음들이 느닷없이 크게 울려 한립의 시선을 끌었다. 허공에서 검해를 이루고 있던 검들이 다시 활동을 시작하고 있었다.

암홍색 빛이 드리운 검들이 잠에서 깨어난 상고 요수처럼 한립을 향해 달려들었다.

“만검화신(万劍禍身)!”

험악한 표정을 한 웅산의 외침이 들려왔다.

각양각색의 검들이 공명하면서 날아들어 진언보륜이나 중수진륜으로도 막을 수 없을 듯했다.

지금 한립의 머릿속에 드는 생각은 하나뿐이었다.

‘……달아나야겠다.’

그가 원한 것은 본명법보인 청죽봉운검을 회수하는 것이었고 목적을 달성했으니 여기서 무의미한 싸움을 지속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웅산이 후환이 될 수도 있었으나 일단 이 자리는 피하는 것이 나을 듯싶었다.

콰릉.

마음을 굳힌 한립은 법보들을 회수하고 두 손으로 수결을 맺어 뇌전들을 뿜었다.

금색 뇌진이 형성되어 발동되려 했다.

뇌진 발동 시간을 줄이려고 뇌붕의 힘이 아니라 직접 벽사신뢰를 발동했건만 그래도 한발 늦고 말았다.

촤륵!

암홍색 검기가 허공을 가르고 막 완성이 된 금색 뇌전을 흩어버렸고 찰나의 순간 다채로운 형태와 빛깔을 지닌 비검들이 한립을 뒤덮었다.

미미하게 안색이 달라진 한립은 당황하지 않고 소매 속에서 은색 방울을 날려 보냈다.

은색 파문이 퍼져나가 은빛 구역을 이루었다.

동시에 그의 입에서 7개의 고리가 날아올라 겹겹이 합쳐져 머리 위를 막아섰다. 칠요성환에서 요란한 별빛이 뿜어져 나와 장막을 이루고 별 무늬를 반짝였다.

두 개의 보물이 보호막을 이루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만검들이 밀려들었다.

짤랑짤랑.

은색 방울 소리가 끊임없이 울리면서 은빛 파문 구역이 수축했다.

칠요성환이 방출한 별빛 보호막도 날카로운 충돌음이 들릴 때마다 별빛이 하나씩 꺼져 점점 캄캄한 밤하늘이 되어가고 있었다.

미간의 주름이 깊어진 한립은 중수진륜과 진언보륜을 양옆으로 불러냈다.

수결을 맺은 두 손이 중수진륜을 때리자 검은 고리의 물의 도문이 빠르게 깜빡였다.

두터운 물의 기운이 고리 속에서 빠져나와 검은 수룡으로 변해 만검 속으로 헤엄쳐 들어갔다.

방대한 중수 흑룡이 만검 속에서 빈틈을 만들어냈고, 한립이 번득 그곳으로 몸을 날렸다.

“달아날 수 있을 듯싶습니까?”

냉소를 흘리는 웅산의 두 뺨에 기이한 붉은 기운이 감돌았다. 무리해서 만검철권을 발동하는데 그만한 대가가 따르지 않을 리 없었다.

그의 눈가와 코 그리고 귀에 진작 핏기가 보였다.

허나 한립을 죽이고 그의 비검 72자루마저 신검에 녹일 수 있다면 상응하는 보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막혀라!”

웅산의 명에 만검 속에서 중수 흑룡이 벌려놓은 통로 양쪽이 좁아지면서 한립을 압박해왔다.

채채채채챙!

핏빛 검기를 머금은 검기의 벽이 양쪽에서 좁혀오고 있었다.

아직 갈 길이 먼데 한립 전방의 검진이 봉합되어 중수 흑룡이 흩어지고 물의 기운이 중수진륜 속으로 돌아들어 왔다.

만검의 숲속에서 위기에 처한 그는 은색 방울이나 칠요성환만으로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 확실했다.

한립은 미세한 진동과 함께 별빛 장막에 수백 줄기의 칼자국이 남아 보호막이 종잇장처럼 얇아진 것을 보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의 손짓에 칠요성환이 별빛 보호막을 거두고 그에게로 돌아오고 은색 방울도 잘게 떨고 허공을 선회해 날아들었다.

화아앗!

다음 순간 한립의 몸에서 자금색 빛이 요란하게 반짝이면서 퍼져 겹겹이 자금색 비늘로 바뀌었다.

그의 두 어깨에 머리가 하나씩 더 자라고 양쪽 겨드랑이 밑으로도 팔이 더 개씩 더 자라나 있었다.

삼두육비의 괴인으로 변한 한립이 중수진륜을 소환해 방패처럼 한 손에 들고 다른 손으로는 청죽봉운검을 한 자루씩 움켜쥐었다.

그의 몸 안에서 오랫동안 발동한 적이 없는 현무 혈맥이 요동치면서 고풍스런 문양의 검푸른색 갑옷을 형성해 몸통을 덮었다.

안 그래도 단단한 몸을 지닌 그는 현선 공법까지 수련하면서 웬만한 방어용 영보보다 강한 육체 강화 수단들을 지니고 있었다.

진언보륜이 몸속으로 들어가 쾌속으로 역전했다. 번득 사라진 한립은 더이상 방어에 집중하지 않았다.

최상의 방어는 공격이라지 않던가!

팟, 팟, 팟!

그의 신형이 연달아 모호한 잔영을 남기고 검해 속을 통과했다.

여섯 개의 팔이 풍차처럼 돌아 다섯 자루의 청죽보운검들이 금빛으로 접근하는 비검들을 쳐냈다.

한립도 이런 식으로는 오래 버틸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렇게 많은 신통을 동시에 펼치려면 어마어마한 힘이 소모되었고 선령력이 바닥나면 그는 죽은 목숨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무모하게 검해를 돌파하고 있는 것은 멍청해서가 아니라 해 도인이 회복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원래 뇌진이 파훼되었을 때 해 도인이 나서려고 했는데 융합한 괴뢰 육체에 약간의 문제가 생겨 강력한 신통을 부리기에 어렵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일각이 지났을 때 검해를 가로지르는 한립의 속도가 줄어들었다.

검푸른 현무 갑옷에도 검에 긁힌 자국이 상당했고 굵은 여섯 팔뚝의 비늘이 여기저기 뜯어져 나가 상처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해 수사, 아직입니까?”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합니다. 반각은 더 버텨주셔야겠습니다.”

한립은 속이 쓰렸지만 더는 재촉하지 않고 이를 악물고 버텼다. 그러나 웅산은 반각은 커녕 한순간도 더는 그를 살려둘 수가 없었다.

한립의 의도를 간파해서가 아니라 그쪽에서 더는 술법을 유지하기가 불가능해서였다.

얼굴의 일곱 개의 구멍에서 핏물이 주르륵 흘러내리고 그의 얼굴이 붉게 변하다 못해 검게 물들고 있었다.

“죽어라…….”

남은 힘을 끌어올린 그의 얼굴이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쇄액!

웅산의 몸이 흐릿하게 변해 본명비검과 융합되더니 거대한 핏빛 검기로 변해 벼락같은 기세로 한립을 향해 튀어 나갔다.

핏빛 검기 자체도 극히 빨랐고 검해 속의 검기들이 분분히 공간을 내주어 한립 앞쪽으로 길이 뻥 뚫렸다.

‘이런!’

갑자기 앞이 탁 트인 한립이 핏빛 검기를 본 순간 피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구결을 암송해 연신술을 통한 정신자를 발동했다.

“……!”

그 순간 웅산의 머릿속에 불쑥 서늘한 코웃음 소리가 울리고 그는 의식이 얼어붙은 것처럼 짧은 순간 넋을 놓았다.

이에 핏빛 검기가 한립을 코앞에 두고 멈칫했고 그 찰나의 순간이 전투의 승패를 결정지었다.

체내의 진언보륜을 역전한 한립은 등 뒤의 풍뢰시를 펄럭이는 동시에 청란혈맥을 격발해 핏빛 검기 옆으로 스쳐 지나가며 다섯 개의 비검에서 검빛을 발산했다.

쿠콰쾅!

핏빛 검기가 터져 나오며 강렬한 기파에 한립이 피를 뿜으며 만검의 홍수 속으로 나가떨어졌다.

동시에 폭발한 핏빛 검기 속에서 검은 철 조각들이 튀어나와 허공에서 다시 철권으로 뭉쳐지고 있었다.

허공에서 하얗게 질린 웅산이 머리를 산발한 채 비틀비틀 모습을 드러냈다.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그는 심장이 으깨져 있었고 전신에 검에 갈린 암홍색 상처가 가득했다.

겉보기에는 멀쩡해 보였지만 온몸이 검기에 난도질당해 무수히 많은 살점으로 갈라진 상태였다.

웅산은 숨이 끊어지는 와중에도 장검을 쥐고 만검철권 쪽으로 걸음을 떼고 있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몸에서 살점과 핏물이 후두둑 떨어져나와 검은 철패 곁에 이르렀을 때는 온전치 못한 뼈만 남았을 정도였다.

파삭!

검을 쥐고 있던 손의 뼈마저 조각조각 흩날리고 골격 속에서 금색 원영 소인이 피로한 기색으로 떠올라 멀찍이 서 있는 한립을 바라보았다.

“이게, 내 운명이란 말인가…….”

이 말을 끝으로 원영마저 금빛 알갱이로 흩어져 사라지고 말았다. 웅산의 마지막을 지켜보던 한립은 내심 탄식했다.

그는 웅산에게 별다른 원한이 없었고 심지어 검수라는 면에서 같은 길을 걷는 자로서 인정하는 마음도 있었다.

상대가 과거의 원한에 집착하지만 않았어도 아예 싸움 자체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웅산의 죽음에 고공의 검진이 완전히 통제를 잃었다. 모든 비검들이 무생검해 속으로 떨어져 내렸다.

가장 먼저 웅산의 저물탁을 챙긴 한립은 만검철권까지 손에 넣고 제단 위로 올라갔다.

깨진 도자기를 엉성하게 붙여 놓은 것처럼 금이 가 있는 철패를 들고 한립은 망설였다. 금빛 장막의 만검도를 연구했기에 이곳에 펼쳐진 검진을 어떻게 펼치는지 알고 있었다.

문제는 이 만검철권이 아직도 진법의 주축으로서 역할을 해서 검 제련을 마칠 수 있느냐였다.

잠시 고민하던 그가 철패를 옆에 두고 가부좌를 튼 채 단약을 삼켰다.

한참 후 자리에서 만검철권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길게 숨을 내쉬어 혼탁한 기운을 내보냈다.

“어찌 되든 한번 시도는 해봐야 후회가 남지 않겠지.”

한립은 어딘가를 응시하며 검은 철패를 제단 위로 띄웠다.

그의 손가락들이 복잡한 수결을 맺자 제단 아래에 아까 보았던 핏빛 불구름이 나타났다.

* * *

같은 시각, 명한선부 모처.

벽옥 마차가 고공을 질주하고 있었다.

기다란 마차 앞에 앉은 키 큰 사내가 든 나침반에 붉은빛이 깜빡였다.

“흠? 설마 버러지 같은 윤회전 것들이…….”

사내가 의문을 표하든 말든 그 뒤에 긴 창을 든 금갑괴뢰들은 멍한 얼굴로 전혀 반응이 없었다.

* * *

무생검종 산허리에 선 육우청이 등 뒤로 은색 장검을 쥐고 산 정상을 올려다보았다.

“…….”

짙은 구름 때문에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는데 점차 굉음이 가라앉고 엄청난 파동도 옅어졌다.

그녀 곁에는 부서진 목재 괴뢰들의 잔해가 나뒹굴고 있었다.

꽤 오래 머뭇거리던 그녀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산정상에서 점점 멀어져 갔다.

* * *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제단 위의 한립은 푸른빛에 휩싸여 굵은 땀방울을 흘리고 있었다.

72자루의 청죽봉운검이 제단 중앙의 뚫린 부분에 특수한 배열로 떠서 서로 금색 뇌전을 주고받았다.

그 아래 활활 타오르는 화염 속에서 각양각색의 검원 구슬이 떠올라 비검 속으로 흡수되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청죽봉운검이 발산하는 기운은 강해졌다. 한립은 한시도 비검들에게 눈을 떼지 않았고 긴장감은 더욱 짙어졌다.

마지막 수십 개의 검원들이 검신으로 스며들어 금빛 뇌전들이 그것들을 집어삼키려 할 때 고공에서 콰직!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일났군…….’

고공에 있던 만검철권의 갈라진 틈에서 눈을 찌를 듯한 금빛이 터져 나와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웅산을 통해 철패가 붕괴하면 어떻게 될지 알았기에 한립은 서둘러 청죽봉운검을 제단에서 불러들여 멀리 벗어나려 했다.

파칫!

하지만 소매를 빠져나간 그의 법력 파동이 본명비검에 닿지 못하고 뇌전과 검기가 혼합된 기운에 부서졌다.

몸이 저릿해진 한립이 주춤하는 사이 그의 저물탁에서 길쭉한 옥패가 빠져나와 만검철권으로 날아갔다.

“저건…….”

눈을 가늘게 뜬 한립은 기억을 되뇌었다.

성괴문 장로 제형에게서 얻은 물건으로, 당시 그는 무생검종의 칠살검진을 펼쳤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저 이상한 옥패는 무생검종의 물건이 분명했다. 옥패가 스스로 빛을 밝히고 투명하게 변해 숨겨져 있던 고어 네 글자를 드러냈다.

“무생검담(無生劍膽).”

금색 문자가 떠오른 하얀 옥패는 만검철권과 천천히 융합되어 하나가 되어갔다.

쿠릉!

제단 상공에 이유 없이 짙은 먹구름이 몰려들어 그 속에서 자색 뇌전빛을 번득였다.

제단 주변 기둥 위의 황금용 8마리가 눈을 번득이며 움직이기 시작했고 입을 벌려 입에서 새빨간 화염을 뿜어 불바다를 만들어냈다.

감각을 회복한 한립은 즉시 제단에서 떠올라 거리를 두었다. 화염이 화르륵 제단을 집어삼키고 고공에서 보라색 뇌전이 떨어졌다.

뇌전과 화염 속에서 청죽봉운검은 아예 보이지 않았고 의식으로도 그 안을 엿볼 수 없었다.

만검을 정련해 선검을 주조하는 화로인 제단이 진정한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립은 멀찍이 떨어져서 복잡한 시선으로 화염과 뇌전 속을 주시했다.

* * *

그렇게 3일 뒤, 기둥 위의 황금용들이 여전히 입에서 화염을 분출하고 있어서 제단을 뒤덮은 불바다는 처음보다 더욱 넓고 깊었다.

허공의 먹구름 속에서 청자색 뇌전이 콰르릉! 떨어져 화염 속으로 섞여 들어갔다.

불바다 인근에 떠 있던 한립은 전투로 입은 부상을 대부분 회복했는지 안색은 좋아 보였는데 약간 초조한 기색이 감돌았다.

본명비검 정련 과정은 이미 그의 손을 떠나서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냥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인 것은 혈한 등이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뒷산 아래쪽 도관에는 검은 옷을 입은 아리따운 소녀가 돌아다니고 있었다.

바로 육우청이었다.

그녀는 한가롭게 산책을 하듯이 낡은 누각 앞에 서 있다가 이끼로 뒤덮인 오래된 우물 앞에 쪼그려 앉아 있거나 했다.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면서 살피는 그녀의 눈빛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득함이 어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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