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704화 (1,461/2,000)
  • 1704화. 검령도(劍靈圖)

    *

    한립은 즉시 조사당을 빠져나와 그 뒤쪽의 청석(靑石) 길로 들어섰다. 그는 산 쪽으로 반각을 더 올라가자 어느 비탈 위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곳에는 검은 바위에 고어로 두 글자가 적혀 있었다.

    검해(劍海).

    비탈 아래로 보이는 것은 풀이 무성한 토지였는데 은은하게 빛이 반짝이고 웅웅거리는 진동이 들려왔다.

    길게 자란 초목들 사이로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검들이 수직으로 서서 대부분 검 끝을 하늘로 하고 산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것들이 부딪치면서 맑은소리가 멀리까지 퍼져나가는 것이었다.

    이런 비검들 중에는 바늘처럼 작고 가는 것도 있었고, 웬만한 궁전의 문처럼 검신이 넓고 큰 것 그리고 뱀처럼 구불거리는 것도 있어서 정말 세상천지의 검을 모조리 모아 놓은 듯했다.

    검해가 만들어진 지 얼마나 오랜 세월이 지났는지는 모르겠으나 어느 한 자루도 녹슬지 않고 영기의 빛을 머금고 있었다.

    한립이 빠르게 검해를 훑다가 한참 만에 넓적한 거검 옆에서 눈길이 머물렀다.

    그곳에는 자신의 본명비검인 청죽봉운검 72자루가 질서정연하게 서서 다른 검들처럼 잘게 떨고 있었다.

    물론 그가 의식으로 불러들이는 통에 떨림이 약간 혼란스럽기는 했지만 무언가 강력한 힘이 막는 듯 그쪽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이에 그는 곧장 뛰어올라 검은 바위를 넘어 검해로 진입하려 했다.

    웅웅!

    그런데 그때 느닷없이 사방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파문이 일어 소리 없이 그의 의복을 찢어 가루로 만들어 버렸다.

    쿠르릉!

    바로 그때 고공에서 굉음이 들려왔고 고개를 든 한립의 동공이 수축되었다.

    검해 위로 금빛 테두리를 지난 하얀 구름 하나가 하얀 바위로 만든 팔각형의 바위와 8개의 금색 기둥을 받치고 있었는데 기둥 위의 황금용들이 아주 생생하게 조각돼 있어 무척 장관이었다.

    한립이 어찌된 일인지 알아보려 할 때 하얀 구름이 선홍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동시에 백석 제단 아래 구름은 불바다로 변했다.

    ‘저건!’

    구름이 사라지자 한립은 제단 아래에 왜소한 체구의 중년인이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다름 아닌 웅산이었는데 엄숙한 얼굴로 두 팔을 들고 우렁차게 주문을 외고 있었다.

    우웅!

    그의 머리 위로 방석 크기의 검은 철패가 떠올랐다.

    철패는 중간이 불룩 튀어나오고 양쪽 끝이 구부러져 있어 속세의 왕가에서 공신들에게 나눠주는 단서철권과 닮아 있었고 만검귀종(万劍歸宗)이라는 네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복잡한 주문 소리에 제단 아래 화염의 활동이 더욱 왕성해져 허공이 이글이글 끓었다.

    검해 속에서 수많은 비검들이 광풍이 부는 초원의 풀들처럼 나부끼면서 서로 부딪쳤고 그 날카로운 소리가 대지를 채웠다.

    한립은 그제야 이전 상황이 이해가 갔다.

    웅산은 무생검종에서 배운 신통으로 천 개의 검을 모았고 천봉취령검진을 펼친 것이다.

    ‘이 검진이 진정한 취령검진의 완성판이겠군.’

    그것은 하늘과 땅을 근간으로 허공에 뜬 제단을 화로 삼아 만검을 끌어들여 하나로 만드는 진법이었다.

    이 얼마나 기백이 넘치는 장면인가!

    “만! 검! 취! 령!”

    고공 제단에서 웅산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의 목소리는 천둥처럼 쩌렁쩌렁 하늘을 울리며 산봉우리를 뒤흔들고 구금된 검해의 무형의 검기를 불러일으켰다.

    스스스슷.

    검해에 수북하게 자란 풀들이 검기가 스칠 때마다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바람을 따라 흔들리던 비검들이 장군의 명을 받은 병사들처럼 검해 중앙으로 칼끝을 겨누고 꼼짝하지 않았다.

    웅산이 손끝을 칼처럼 사용해 허공을 가르면서 유려한 그림을 그려나갔다.

    그 흔적들이 응결해 만들어진 커다란 금색 주술문자가 번득 떨어져 단서철권을 담은 만검철권(万劍鐵券)을 휘감고 있었다.

    후우우웅!

    만검철권은 부들부들 몸을 떨며 상쾌한 소리를 내뿜었고 가느다란 무늬를 따라 휘황찬란한 금빛을 내뿜었다.

    쿠쿠쿵!

    굵은 금색 빛기둥이 만검철권에서 뿜어져 나와 하늘을 뚫고 폭죽처럼 터져 하늘에 화려한 금빛 장막을 드리웠다.

    장막 위로 어른거리는 수많은 환영과 그림자들에 눈이 어지러웠다.

    그중에는 금색 갑옷을 입고 거검을 휘두르는 거인이나 귀신처럼 움직이며 바늘 같은 비도를 뿌리는 자객 같은 이들의 환영이 가득했다.

    우아하게 하늘을 날아다니며 검무를 추는 여인과 손끝에서 자유자재로 검기를 날리는 긴 수염의 마른 노인까지 각기 다른 인물들이 다채로운 검을 들고 움직였다.

    환영들을 보는 한립의 눈동자도 금빛 장막의 현란한 환영들이 비추어서 금빛으로 반짝였다. 마치 그 환영 속으로 잠식되는 듯했다.

    그 자신이 장막의 일원이 되어 72개의 청죽봉운검을 휘두르며 검기와 푸른 연꽃을 휘날리는 기분이었다.

    그가 환영에 빠져듦과 동시에 제단 아래 불바다가 부글부글 끓더니 거대한 소용돌이로 변해 강렬한 흡인력을 발동했다.

    검해의 모든 검이 부름을 받아 바르르 몸을 떨면서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검해의 상공은 비검들이 내뿜는 다양한 빛깔에 혼잡했고 무형의 검기들이 허공을 갈랐다.

    쉬쉬쉬쉬쉭.

    “…….”

    한립은 검기에 의복이 잘려나갔는데도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하늘만 올려다보고 있었다.

    고공에서 천여 자루의 비검들이 불꽃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 새빨갛게 달구어졌다.

    비검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스산하게 울려 퍼졌다. 그리고 검의 연못에서 다양한 빛깔의 검원들이 빛덩이로 뭉쳐 날아올랐다.

    검원을 빼앗기니 비검들은 암담하게 변해 불꽃 속에서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불꽃 소용돌이가 한 번에 녹일 수 있는 양에 한계가 있는지 매번 천여 개의 비검만을 녹이고 다음 비검들을 녹였다.

    한립의 청죽봉운검은 뒤쪽에 있던 터라 아직 소용돌이와 거리가 있었지만 잠시 후면 어찌 될지는 자명한 일이었다.

    제단 위에 선 웅산이 인상을 찡그렸다 폈다.

    “검령도(劍靈圖)에 홀리다니 잘 되었다. 절세의 선검이 완성되면 네 녀석에게 위력을 시험해 보면 되겠구나.”

    그는 진작 한립이 온 것을 눈치챘으나 거대한 진법을 발동하느라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제단 중앙의 움푹 들어간 구역에 검원들이 한 덩이씩 차오르고 있었다. 웅산은 희색을 드러내며 두 팔을 교차해 기괴한 수결을 맺고 만검철권을 가리켰다.

    철패의 금색 무늬에서 광채가 흘러나와 그가 불러낸 금색 장검을 감싸고 소용돌이쳤다.

    또 다른 소용돌이가 형성되자 제단의 검원 구슬들이 날아올라 웅산의 본명비검인 금색 장검 속으로 스며들었다.

    즐겁게 웅웅거리는 장검의 검신에서 금색 파동이 흘러나와 물결쳤다.

    제단 위에서 장검이 검원을 먹어치우기 시작하고 아래쪽 불꽃 소용돌이는 새로운 비검들을 불러들여 검원을 추출했다.

    청죽봉운검을 포함한 뒤쪽의 비검들도 이제 소용돌이와의 거리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때 뻣뻣하게 굳은 자세로 하늘만 올려다보던 한립이 몸을 떨었다. 두 눈의 금빛이 차차 걷히고 대신 남색빛이 차올랐다.

    “대단한 진법도군!”

    한립의 얼굴에는 두려움이 아닌 반가움이 스쳤다. 금빛 장막의 환영들은 그가 예전에 얻었던 만검도와 비슷했다.

    만검도는 몇 배는 더 현묘한 이 진법도의 복제품일지도 모른다.

    방금 전은 금빛 장막의 환영을 보려고 일부러 의식을 개방하고 빠져들었던 것이지 그의 강대한 의식에 이런 것에 홀려 인사불성이 될 리 없었다.

    그 결과 무념무상의 상태에서 검진의 변화를 깊이 있게 깨우칠 수 있어서 검해를 이룬 진법의 구조나 운용 방식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했다.

    제단 위의 웅산은 한립이 정신을 차린 것을 보고 안색이 확 달라졌다.

    “어떻게 저럴 수가!”

    보통 진선 검수가 처음 만검령도를 보게 되면 7일 밤낮을 홀려 있는 경우도 흔했기에 놀랄 만도 했다.

    그도 처음 만검령도에서 빠져나오느라 의식 손상이 커서 천봉취령검진만 깨우치고 어쩔 수 없이 그냥 돌아갔다가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다시 돌아온 참이었다.

    웅산은 두 손을 포개서 선령력으로 검원 구슬들의 흡수를 더 빠르게 했다.

    채채채채챙.

    비검들은 용이 되기 위해 하늘을 거슬러 올라가는 이무기들처럼 솟구쳐 불꽃 소용돌이 속으로 부단히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한립은 고개를 들고 다른 비검들과 섞여 불꽃과 이제 백여 장 밖에 떨어지지 않은 청죽봉운검을 바라보았다.

    그가 바닥을 쾅! 박차 산봉우리를 뒤흔들고 운석처럼 검해로 쇄도했다.

    쿠쿠쿠…….

    검해가 된 상공에 진입하자 숨 막히는 무형의 괴력이 사방에서 밀려들어 그의 몸을 바닥으로 떨어트리려 했다.

    이에 그는 폭발적으로 소리를 질렀고 그의 몸에서 남색 현규들이 반짝반짝 빛을 발했다. 반투명한 막이 온몸을 뒤덮어 무형의 검기를 외부로 밀어냈다.

    쿵!

    느닷없이 강력한 괴력에 부딪힌 한립은 바닥으로 추락해 두 종아리가 땅속에 파묻혔다.

    깜짝 놀란 그가 고개를 들자 웅산이 제단 가장자리에서 만검철권을 조종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를 죽일 듯 노려보는 웅산의 눈에는 분노가 가득했다.

    웅산은 눈앞의 낯선 수사가 촉령도 려비우이고 그의 검원을 훔쳐 간 도둑이란 것을 깨달은 것이다.

    “천남제일검수!”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검원을 훔쳐 달아나더니, 결국 어떻게 되었군요? 이렇게 만나 내 손에 들어오지 않았습니까. 으하하하하!”

    그는 눈을 부릅뜨고 웃고 있었지만 전혀 웃는 낯이 아니었다.

    오랜 세월 수많은 세력에 밉보여 가며 겨우 모은 천 자루의 영검들과 검진이 려비우 때문에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 일로 촉룡도 동문들에게 비웃음을 당한 세월이 얼마던가! 이런 원수를 웃어넘길 수는 없었다.

    “당시 웅산 수사께서 제 본명비검을 제련하려고 하지만 않았어도 제가 검원을 훔쳐낼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촉룡도 동문 출신에 함께 무상맹에 몸을 담고 있는 인연을 생각해서 서로 불필요한 싸움은 삼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본명비검을 챙겨 그냥 떠날 수 있게 해주시지요.”

    한립이 몸을 똑바로 펴며 하늘을 향해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으나 날카로운 검기처럼 수많은 소음을 뚫고 웅산의 귀에 또렷하게 울렸다.

    “웃기는 소리! 그때는 네 놈의 본모습을 몰라보고 바보처럼 농락당했으나 지금은 아니다. 그 후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때가 아니라고 생각해 놔둘 수밖에 없었지! 오늘 제 발로 여기까지 찾아왔으니 본명비검과 함께 무상선검(無上仙劍)의 일부가 되어 속죄하거라!”

    “……수사께서 정 그리 나오시겠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도 제가 무정하다 나무라지 마셔야 합니다.”

    한립의 안색도 싸늘해졌다.

    “죽을 녀석이 말이 많구나! 실력으로 말하거라!”

    웅산은 이렇게 말하면서도 한립의 말을 듣고 이상하게 마음이 떨려왔다.

    크아앙!

    그때 한립의 몸이 불끈불끈 솟아나며 산만하게 커져 금털이 숭숭 난 거원으로 변했다.

    거원은 두 발로 땅을 박차고 올라 고공으로 치솟더니 순식간에 청죽봉운검이 있는 곳에 다다랐다. 그리고 망설이지 않고 울룩불룩한 팔을 내질렀다.

    쿠앙!

    구불구불 소용돌이 쪽으로 흘러가던 검룡(劍龍)이 거원의 주먹질에 휘어지면서 그 속의 비검들이 제멋대로 방향을 틀었다.

    번득 사람의 형상으로 돌아간 한립은 등 뒤에서 수정 날개를 활짝 펼치고 본명비검들을 향해 튀어 나갔다.

    그러나 그가 비검에 닿기 전 검진 위쪽에서 무형의 힘이 퍼져 나와 경로를 이탈했던 비검들을 다시 원상복구 시켰다.

    “이번에는 네 뜻대로 안 될 것이다!”

    냉랭히 중얼거린 웅산이 두 손으로 수력을 맺고 고공의 만검철권을 가리켰다.

    삭!

    웅산의 손끝에서 금빛 피 한 방울이 흘러나와 철패로 떨어졌다.

    붉은 안개에 둘러싸인 철패가 크게 진동하면서 하늘 위 금빛 장막으로 날아올랐다.

    쿠쿵.

    떨림이 금빛 장막으로 옮겨 간 듯 환영들이 금빛 비처럼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각각의 환영들이 검을 한 자루씩 들고 한립을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