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703화 (1,460/2,000)
  • 1703화. 검의 바다

    *

    “어떤 대죽을 쓴 것인지 정말 단단하네요.”

    “자정죽(紫精竹)의 한 종류일 것이네. 목재 중에서는 단단하기로 이름난 자재이지.”

    육우청의 말에 간단히 답하고는 다시 계단을 올라가 죽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방안의 가구는 단촐해서 대나무를 엮어 만든 탁자와 의자 그리고 한 사람이 몸을 누울만한 대나무 침상이 다였다.

    “이것 좀 보세요. 침상이 작은 게 어린아이가 쓰던 것 같지 않아요?”

    육우청은 자신이 쓰기에도 약간 작아 보이는 침상을 보고 말했다.

    “전해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무생검종은 제자를 받아들이는 규정이 엄격해서 다른 문파처럼 대량으로 제자들을 모집하지 않았다고 하네. 검종 제자들이 바깥으로 유람을 나갔다가 검수에 걸맞은 뛰어난 인재를 발견하면 산으로 데려다 키웠다고 하지. 모든 것을 인연에 맡긴 것이야. 이곳은 그런 제자들이 기초적인 단련을 하던 곳인 것 같네.”

    “저도 예전에 고서에서 이런 종문에 대한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는데 제자의 수가 몇 십 명밖에 안 될 만큼 규모가 작고 외부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았다고 하더라고요.”

    “이곳 제자들이 종문의 수사로 하산을 해 유람하려면 반드시 금선 이상의 수행을 지녀야 한다더군. 그렇지 못하면 평생 산문에서 수련만 하다 죽는 것이고. 가장 흥성했을 때에는 7명의 금선들이 하산해 유람했다는 구절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말이야. 물론 이런 이야기도 세월이 흘러 기억하는 이들이 드물겠지만…….”

    “한 오라버니께서는 어찌 그런 것들을 잘 아세요?”

    “나도 검수인지라 관련 경전을 많이 살펴봤기 때문일세. 무생검종에 대한 전설은 많으나 그중에서 가장 눈길이 가던 것은 종문 내에 있다던 무생검해(無生劍海)였지.”

    신기하다는 육우청의 물음에 한립이 대답해주었다.

    “무생검해가 뭔데요?”

    듣다 보니 육우청도 흥미가 이는 듯했다. 한립은 방문을 빠져나가면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무생검종의 개파 시조인 무생도인은 검을 모으는 괴벽이 있어서 생사를 가르는 결투가 아닌 승부에서도 상대를 이기면 검을 빼앗아 종문으로 가지고 돌아왔다는군. 이후에 거둔 제자들도 이것을 전통 삼아 선역을 돌아다니며 각지의 보검을 모아 종문으로 가지고 돌아왔는데, 이게 오래되다 보니 검을 모아두는 곳이 무생검해로 변해…….”

    그들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다시 산길을 따라올라 위쪽으로 통하는 돌계단 앞에 이르렀다.

    새하얀 돌들이 산 중턱에서 운해까지 이어져 있었고 그 시작점에 고어로 해검석(解劍石)이라 적힌 검은 바위가 놓여 있었다.

    한립은 해검석이란 글자 아래 하얀색으로 적힌 작은 글씨를 주시했다.

    “진선은 날아오르지 못하며 세상 모든 검이 고개를 숙이는 곳.”

    필체에서 느껴지는 기운이나 모양이 패루에 쓰여있는 ‘무생검종’과 같았다.

    “진선은 날아오르지 못한다는 것은 알겠는데 뒤에 구절은 이해가 안 돼요.”

    “무생검종은 본래 검수들의 성지이니 이곳의 검해보다 더 많은 선검들을 지닌 곳이 또 어디 있겠나. 세상에 이곳과 비할 곳은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한립이 말을 하고 있는데 상공의 운해가 진동하고 금빛 광채가 퍼졌다. 한립의 시선이 정상으로 향했다.

    “왜 그러세요?”

    “무언가 금제가 발동되어 본명비검들과의 감응이 끊겼네…….”

    한립은 곧장 몸을 돌려 돌계단을 박차고 한 번에 수백 계단을 올라갔다. 육우청도 그를 따라 계단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올라갈수록 습기가 차서 얼마 가지 않아 짙은 수증기들이 뭉쳐 구름을 이루었다. 운해 속에서는 그들이 의식으로 감응할 수 있는 범위가 제한되었다.

    “영목신통으로도 안개를 투과할 수 없으니 조심하게.”

    한립은 보호막을 펼치고 나아가며 당부했다.

    그를 따라가던 육우청의 눈에 그윽한 검은빛이 반짝이고 그녀의 안색이 급변했다.

    “조심하세요!”

    그러나 그녀의 말이 끝나기 전에 한립이 머리 위 짙은 안개에서 금색 검기가 가위처럼 교차해 떨어졌다.

    눈을 가늘게 뜬 한립은 검기의 주인을 발견했다. 그것은 체구가 크고 팔과 다리가 길쭉길쭉한 목재 괴뢰들이었다.

    빠르게 판단을 마친 그는 피하지 않고 앞으로 돌진하면서 검기를 미끄러지듯 지나 손바닥에서 푸른빛을 뿜었다.

    푸른빛이 장도처럼 괴뢰들을 갈랐다.

    그런데 괴뢰들의 머리가 돌연 180도 돌아가 한립을 쳐다보았다.

    동시에 그중 한 마리가 관절을 기이하게 꺾어 챙! 하고 장검으로 한립의 도를 쳐내고 다른 한 마리가 장검으로 그의 심장을 노렸다.

    발끝으로 계단을 박차고 아래 계단으로 피한 한립은 가슴이 서늘해졌다.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 두 괴뢰는 어떤 경지인지 알 수 없었으나 그들이 든 장검만은 대단한 보물임이 확실했다.

    금빛에 휩싸인 장도의 일격에 그가 푸른빛으로 만든 도기가 산산이 부서졌기 때문이었다. 이어서 그의 머리 위로 몇 줄기의 검빛이 떨어져 그물을 이루었다.

    한립은 한팔을 번쩍 들어 주먹을 날렸고, 주먹 끝에서 푸른빛이 빠져나갔다. 그러자 주먹 모양의 푸른빛에 그물이 뚫리는 것이 보였다.

    그는 다른 손을 펼쳐 검은 고리를 머리 위로 띄웠다. 맷돌 크기의 중수진륜이 밝은 빛을 머금고 금빛 검 그물을 순식간에 녹여버렸다.

    쉬쉬쉭!

    그때 한립 주위로 5개의 검빛이 날아들면서 이전과 똑같이 생긴 목재괴뢰 다섯 마리가 나타났다.

    휘잉.

    검끝이 접근하게 놔두지 않고 아래쪽에서 두 줄기 푸른 돌풍이 날아와 그들을 막았다.

    한립이 힐끗 보니 육우청이 푸른 깃털 우산을 들고 그를 돕고 있었다. 눈을 빛낸 그가 전방으로 손을 펼쳤다.

    머리 위의 중수진륜에서 바람소리가 크게 들리고 전방에서 날아드는 괴뢰를 향해 돌진했다. 괴뢰의 반응도 빨라 검결과 비슷한 수결을 맺고 다른 손으로 장검을 내질렀다.

    검 끝에서 거대 검기가 빠져나와 중수진륜을 공격했다.

    쿵!

    검기는 금빛 모래가 되어 흩어지고 장검을 든 괴뢰도 중수진륜이 내뿜는 검은 빛에 휘말려 부서졌다.

    2성 중수를 흡수한 중수진륜의 위력은 이전과 천양지차였다.

    나머지 네 개의 괴뢰가 그것을 보고 기괴한 각도로 고개를 돌려 한립을 보면서 미간에 괴이한 주술문자를 띄우고 장검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불길한 예감에 표정이 달라진 그는 상공의 구름이 폭우가 내리기 전처럼 격동하는 것을 보았다.

    “육 수사, 어서 이쪽으로!”

    그의 다급한 외침에 깃털 부채로 돌풍을 날려 길을 막고 있는 괴뢰들을 날린 육우청이 주저 없이 뛰어들었다.

    그녀가 막 중수진륜의 영향권에 들어왔을 때 구름 속에서 천둥소리가 울렸다.

    콰콰쾅!

    빼곡하게 검빛을 머금은 눈부신 금빛이 구름 속에서 수직으로 떨어졌다. 한립이 정상으로 날아오르려 했을 때 나타난 현상과 비슷했다.

    단지 비행 시 마주친 운해검진은 진선이 더 높이 날아오르는 것을 막겠다는 의지가 보였다면 지금은 단순히 적을 멸하겠다는 예리한 살기가 가득했다.

    게다가 검빛 속에 희미하게 금속 속성의 법칙 파동이 섞여 있었다.

    쿠쿵!

    검빛들이 폭포처럼 떨어져서 중수진륜과 부딪쳤다.

    “가라!”

    한립은 수결을 맺고 외쳤다. 중수진륜 물의 도문에서 밝은 빛이 흘러나와 수십 가닥의 검은 중수들이 교차하면서 거대한 소용돌이를 만들었다.

    금빛 검기들은 소용돌이 속에서 무참히 조각나고 있었다.

    그의 손짓에 중수진륜이 평범한 방패 크기로 작아져 긴 호선을 남기며 목재괴뢰 중 한 마리를 향해 날아갔다.

    그러나 목재괴뢰는 달아나지 않고 장검을 세워 검신에서 기다란 검빛을 뿜어냈다. 중수진륜과 검빛이 충돌하려는 순간 한립의 손가락이 휘었다.

    중수진륜이 검빛을 돌아 괴뢰의 머리에 떨어졌다.

    퍽!

    중수의 검은빛 속에서 머리가 깨진 괴뢰가 힘을 잃고 나뒹굴었다. 괴뢰가 들고 있던 금색 장검은 부름을 받은 듯 산 정상으로 달아났다.

    남은 목재괴뢰들이 장검을 단단히 쥐고 한립과 육우청에게 달려들었다.

    “여기서 이렇게 시간을 끌어서야…….”

    표정이 어두워진 한립은 중수진륜을 회수해서 손바닥 위에 놓고 체내의 진언보륜을 역전시켜 시간의 유속을 달리했다.

    순간 흐릿하게 사라진 그는 휙휙! 잔영을 남기면서 사라졌다 나타났다가를 반복했다.

    연달아 폭음이 울리고 남은 여섯 마리 중에서 네 마리의 머리가 분리되어 계단을 굴렀다.

    그것들이 쥐고 있던 장검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정상으로 날아갔다.

    다시 모습을 드러낸 한립은 가쁜 호흡을 내쉬었고 손에 든 중수진륜의 회전속도도 이전보다 느려 보였다.

    중수진륜과 진언보륜을 사용해 선원력 소모가 너무 컸다.

    두 마리 괴뢰들과 대치하던 육우청은 눈 깜짝할 사이에 괴뢰들이 전투능력을 상실하자 약간 안심하는 표정이었다.

    쿠콰쾅.

    그때 정상에서 굉음이 울리고 산봉우리가 흔들렸다. 한립이 안색이 달라져 급히 정상을 올려다보았다.

    “한 오라버니, 이렇게는 안 되겠어요. 여기는 제게 맡기시고 어서 비검을 회수하러 올라가 보세요. 제게 괴뢰들을 상대할 방법이 있으니까요.”

    “고맙네! 조심하게.”

    한립도 머뭇거리지 않고 발끝으로 계단을 찍어 짙은 안개 속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그가 사라지는 것을 보고 괴뢰들이 쫓으려 하자 육우청이 번득 이동해 그들 앞을 막아섰다.

    그녀의 표정은 이전과는 어딘가 달라져 있었다. 어딘가 멍한 눈빛을 한 그녀의 눈동자가 하얀 안개가 차오르는 것처럼 아득해져 갔다.

    그녀는 손을 저어 푸른 깃털 부채를 거두고는 대신 은백색 장검을 들고 고개를 들었다.

    “왜 갑자기 검을 쓰고 싶어졌지.”

    웅얼거리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의혹이 가득했다.

    * * *

    안개로 덮인 곳을 벗어난 한립은 자신이 아직도 산허리까지 밖에 오르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돌계단은 끝없이 이어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안개를 지나자 어떤 장애물도 없이 빠르게 계단을 오를 수 있었다.

    정상에 이른 그는 푸른 돌조각들을 깔아 만든 산길을 따라 중심으로 향했다.

    멀리 도관과 비슷한 양식의 건물들이 보이고 그 뒤로 푸른 옥 같은 대나무들이 자라고 있었다.

    그리 크지 않은 도관은 하얀 벽에 검은 기와를 얹고 사이사이 조각상을 넣어 놓은 양식이 아주 예스러웠다.

    한립은 그런 것을 감상할 여유가 없었기에 도관에 별다른 금제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검은 대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도관 내부의 구조는 간단해서 열댓 개의 대전에 몇몇 조각상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았다.

    그 중 단약을 제련하던 곳으로 보이던 곳에는 열기가 식은 연단로와 다양한 용기가 놓인 선반들이 보였다.

    한립은 물건들이 쓸만한 것들인지 분별할 시간이 없어 소매를 휘둘러 모조리 쓸어 담아 버렸다.

    도관 가장 뒤쪽 뜰은 거리가 꽤 있었고 중간에 하얀 돌을 깔아 만든 넓은 길이 이어져 있었다.

    한립은 길을 따라서 이동해 어느 대전 앞에 멈춰 섰다.

    대전 문밖에 앉아있는 여덟 마리의 목재괴뢰들은 그가 산허리에서 보았던 것들과 똑같았다.

    그는 대전의 창문과 섬돌에 복잡한 문양이 새겨져 있어 방어 금제가 펼쳐진 것을 알아보았다.

    그저 진법의 관건이 되는 부분들에 칼자국이 나 있어 얼마 전에 망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대전 문 위 검은 편액에 조사당(祖師堂)이라는 세 글자가 적혀 있었다. 선가의 조사당은 하계의 조사당과 이름은 같지만 실제로는 매우 달랐다.

    하계의 조사당은 선조와 선배들의 명패를 모시고 봉양하는 곳이라면 선계의 수사들은 수명이 워낙 길다 보니까 대부분 선조와 선배들의 보물을 모셔두는 곳인 경우가 많았다.

    이런 물건들은 꼭 강력한 보물이 아니더라도 사문의 어른들이 수행하는 동안 항상 지니고 다녔던 물건도 되었다.

    이런 물건들은 오랫동안 종문에 머물면서 점점 종문과의 연계가 밀접해져서 장로들이나 선가의 장문들은 조사당에 물건을 남기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다.

    종문의 정기가 축적되어 이런 보물들이 스스로 영성을 띄게 된다는 전설도 있었으니 말이다.

    무생검종의 조사당 안도 양쪽에 두 줄로 향을 피워 놓기 위한 등불이 설치된 것이 다였다.

    이미 불이 꺼진 등불 밑에는 네 개의 작은 상이 놓여 있었다.

    “각각 한 세대를 상징한다고 치면 무생검종은 겨우 4대를 이어져 오다 실전된 것이로구나.”

    한립은 어쩐지 마음이 헛헛해졌다가 그들이 제자를 거두는 방식으로 떠올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상에 명패가 놓인 것 외에 첫 번째 상에는 자단목으로 만든 쟁반이 텅 비어 있었다.

    “무생검종이 멸문할 때 무생도인은 아직 작고하지 않았던 것 같군.”

    채채챙.

    그가 생각에 잠겨 있는데 조사당 뒤편에서 맑은소리가 들려왔다. 그리 크지 않은 소리였는데 기이하게도 아주 멀리까지 퍼져나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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