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2화. 천계비(穿界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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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정교하게 설계가 되어 있는지 들어오기 전까지는 공간 파동을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내 추측이지만 원래는 한 번에 일방통행만 가능한 통로로 기관을 촉발하면 이곳으로 넘어올 수 있는 입구였는데 정원에 있는 문이 훼손되면서 이렇게 된 게 아닌가 싶네.”
“우릴 쫓는 자들도 직접 들어오지 않고는 찾지 못하겠어요.”
“그렇다고 안심할 수는 없지. 어떤 비술을 사용해 쫓고 있는지 모르지 않는가?”
육우청이 침묵하는 것을 보고 한립이 소매를 펄럭였다. 금빛이 그 속에서 빠져나와 금포 도인으로 변했다.
“한 수사, 제가 비록 괴뢰이고 수사를 주인으로 인정하기는 했으나 요 며칠 너무 자주 소환하시는 것 같습니다.”
해 도인이 힐끔 육우청을 보고 한립에게 전음으로 말했다.
“강적에게 쫓기고 있어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이번에 수사를 청한 것은 선원석을 내주어 만일에 대비하기 위함이고요. 수량은 충분합니까?”
한립이 쓴웃음을 지으며 저물대 하나를 건네주었다.
“몇 가지 비술을 제외하고는 쓸 만 하겠습니다. 남는 것으로 그럭저럭 이전에 입은 손상도 복구할 수 있을 듯하고요.”
해 도인은 덤덤히 저물대를 받아 수량을 확인했다.
“알겠습니다. 그만 돌아가서 쉬시지요. 제가 다시 수사를 부르면 중요한 순간일 겁니다.”
한립의 말에 해 도인은 답하지 않고 금빛으로 변해 소매 속으로 날아들었다.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육우청은 해 도인의 정체가 궁금했지만 눈치껏 묻지 않았다.
“이곳이 어딘지는 알아내야 할 것인데…….”
한립은 의식을 방출해 산맥을 조사하면서 시선으로 사방을 훑었다. 잠시 후 그는 의식을 회수하고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독립된 공간인 것 같네. 의식이 산맥 바깥으로 나가려 하면 곳곳에 장벽을 만나게 되는군.”
“그러면 어디부터 가보면 좋을까요?”
“이곳이 봉쇄된 구역이라면 출입구가 이곳 한곳만은 아닐 걸세. 저쪽 산봉우리부터 찾아보도록 하지.”
상의를 마친 두 사람은 바로 산맥 깊은 곳으로 날아올랐다.
한립은 처음에 길쭉하기만 했던 산맥이 위에서 보니 십(十) 자 형태로 교차해 중간 지역에서 갈라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어느 쪽부터 가보면 좋을까요?”
“양쪽 다 차이가 없으니 전부 수색해보는 수밖에 없겠군. 그럼 먼저 저쪽…….”
한립은 손을 들어 한곳을 가리키다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
청죽봉운검들이 요동치면서 안절부절못해 의식이 연계된 그에게 이상한 감정을 느끼게 했기 때문이다.
들뜸, 놀람 그리고 초조함이 뒤섞인 감정이었다.
팟.
침음하던 그가 청죽봉운검 한 자루를 손바닥 위에 불러냈다.
검은 곧바로 아래쪽 우측의 산맥으로 날아가려고 해서 한립이 의식으로 붙들지 않았으면 눈앞에서 한 자루를 놓칠 뻔했다.
“한 오라버니, 이건…….”
“어째선지 내 본명비검이 무언가 소환을 받아 산맥 쪽으로 날아가고 싶어 하네.”
한립이 검을 꼭 쥐고 산맥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영성이 가득한 비검이 그러는 것을 보면 무슨 기연이 기다리고 있는 것 아닐까요? 어차피 아무 곳이나 가보려 했으니까 비검의 뜻에 따라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그것도 좋겠지.”
육우청이 웃으며 하는 말에 한립이 잠시 고민하다 답했다. 그렇게 그들은 우측 산맥으로 날아갔다.
그런데 교차점에 이르렀을 때 한립이 우뚝 멈추고 그들이 들어온 반원형 문쪽을 돌아보았다.
“육 수사, 내게 치마를 한 벌을 내줄 수 있겠는가?”
그의 갑작스러운 요구에 육우청은 의아했지만 바로 치마를 꺼내서 건넸다.
그걸 받아든 그는 거원 괴뢰 두 마리를 불러내 그중 한 마리의 손에 묶어 주고 다른 한 마리에게는 자신의 의식 표식을 심어 좌측 산맥으로 내려가게 했다.
육우청이 곧장 눈이 밝아져서 감탄했다.
“역시 한 오라버니께서는 생각이 깊으시네요. 이렇게 해두면 적들이 여기까지 저희를 쫓아 들어와도 추격을 따돌릴 수 있겠어요.”
“운이 좋아 그들이 정말 저쪽으로 간다면 기관을 건드리든 아니면 괴뢰와 싸우든 우리가 알 수 있을 것이네.”
한립은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육우청은 정말 궁금해졌다. 얼마나 많은 경험을 쌓아야 이렇게 주도면밀해질 수 있는 것일까?
“이제 다시 출발하지.”
한립은 육우청을 불러 우측 산맥으로 계속 날아갔다.
두 사람이 우측 산맥에 가까워지자 한립이 들고 있던 비검이 스스로 강력한 힘을 발휘해 그를 끌고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숲에 이르자 한립의 소매가 부풀어 오르면서 푸른 비검들이 앞다투어 빠져나와 아래쪽으로 쇄도했다.
놀란 한립이 소매를 막고 의식연계로 청죽봉운검들을 불러들이려 했지만 이미 날아가 버린 수십 자루의 검들은 통제를 잃은 것처럼 그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
그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비검이 날아간 방향으로 향했다. 육우청도 주저하지 않고 그 뒤를 따라갔다.
바닥으로 하강한 한립은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비검들과의 의식연계가 끊기면서 위치를 파악할 수 없게 되어서였다.
초조함을 억누른 그는 자신이 잡초가 무성한 버려진 정원 속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누렇게 마른 풀과 키 작은 나무들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푸른 벽돌을 깔아 만든 오솔길은 오랜 세월 흙과 나뭇잎이 쌓여서 이제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의식을 방출해도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는데 그의 손과 소매 속에 남은 다른 비검들이 격동하면서 자꾸 어디로 날아가려 했다.
그는 힐끗 부풀어 오른 소맷자락을 보고는 손을 풀어 들고 있던 비검을 놔주었다.
쉭!
비검은 즉시 정원 깊은 곳으로 쏘아져 나갔고, 한립은 의식으로 단단히 비검들의 위치를 고정하고 추격에 들어갔다.
그런데 괴이한 일이 벌어졌다.
장애물을 마구 관통해 사라진 비검이 정원 깊은 곳의 검은 묘비를 뚫고 들어가더니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네모반듯한 검은 묘비는 세월의 흔적으로 곳곳이 파이고 이끼가 껴있었다. 어떤 글씨도 쓰여 있지 않은 묘비는 아주 평범해 보였다.
한립은 명청령안으로 그것을 살펴 진한 공간파문이 흘러나오는 것을 보았다. 그가 미간을 좁힌 채 손을 뻗어 만져보아도 검은빛은 반짝이다가 원래대로 돌아갈 뿐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이제야 그를 따라잡은 육우청이 묘비에 시선을 주었다.
“이건…….”
“알아보겠는가?”
“제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천계비(穿界碑)일 거예요. 저희 도왕부에도 하나가 있거든요.”
“천계비? 무얼 하는데 쓰는 물건이지?”
“전송진법과 유사한 공간 법보에요. 그저 단방향 전송밖에 되지 않아서 보내고 나면 이걸 통해 돌아올 수는 없어요.”
“이걸 발동하는 방법은?”
마음이 급한 한립은 연달아 물었다.
“제가 한번 해볼게요.”
육우청이 앞으로 나서서 팔각형의 검은 옥패를 불러냈다. 기괴한 나선형의 무늬들이 겹겹이 새겨진 옥패였다.
“이건 도왕부에서 사용하는 천계비 열쇠인데 듣기로는 천계비나 이 열쇠 모두 조상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것이라고 했어요. 이 열쇠가 이것에도 통할지는 저도 모르겠지만요.”
설명하면서 그녀는 수결을 맺어 옥패에 법결을 던져 넣었다.
푸른빛을 머금은 옥패의 나선형 무늬들이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검은빛이 빠져나와 천계비를 비추었다.
천계비에서도 감춰져 있던 나선형 무늬가 떠올라 꿈틀꿈틀 움직이다가 손바닥 크기의 검은 소용돌이를 형성하고 빙글빙글 회전했다.
소용돌이는 커졌다가 작아졌다가 했는데 마치 확장하려는 힘과 수축을 하려는 힘이 서로 다투는 것 같았다.
“설마…….”
“열쇠가 이곳의 천계비와 완전히 맞지는 않네요. 저를 도와 선령력을 옥패로 더 주입해주세요.”
한립은 곧바로 손바닥을 육우청이 들고 있는 옥패 쪽으로 펴고 몸 안의 선령력을 밀어 넣었다.
웅웅!
찰나의 순간 옥패가 분출하는 검은빛이 빛기둥이 되어 거의 묘비를 감싸고 출렁였다.
그러자 묘비 중간에 있던 소용돌이가 억압에서 벗어나 커지고 있었다. 천계비의 검은 소용돌이가 급격하게 커질수록 기이한 흡인력이 한립과 육우청을 끌어당겼다.
화아아앗.
한립은 하늘과 땅이 뒤집히듯 방향감각을 잃고 눈앞이 새까맣게 변했다가 밝아졌다.
‘……!’
그가 안정을 찾기도 전에 소매 속 비검들이 폭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전보다 몇 배는 맹렬한 반응이었다.
쉬쉬쉬쉭…….
소매 속에서 수십 개의 푸른빛이 튀어나와 긴 꼬리를 남기고 운해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한립은 쓴웃음을 지으며 황망하게 텅 빈 소맷자락을 보다 고개를 들었고 그곳에는 구름에 가려진 산봉우리가 하나 있었다.
온갖 수목들이 자라나 녹음이 푸른 산은 그가 전에 있던 곳과는 전혀 달랐다.
격차가 너무 심해서 환영에 속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되었지만 명청령안과 진실안으로 살펴보아도 명백히 존재하는 공간이었다.
우웅.
공간이 왜곡되고 뒤늦게 나타난 육우청이 입을 열었다.
“한 오라버니, 우리가 천계비 안으로 진입하는 데 성공한 건가요?”
“아마도 그런 듯하네. 내 본명비검들은 전부 산 쪽으로 날아가 버렸고.”
한립은 산 정상을 가리켰다.
청죽봉운검과의 의식연계가 끊겨서 불안했는데 천계비를 지나 도착한 이곳에서는 사라진 비검들을 전부 감응할 수 있어 오히려 안심이 되었다.
“여기까지 왔으니 십방루 쪽에서도 쫓기 쉽지 않을 거예요. 검들이 산으로 향했다니 얼른 챙겨서 진염종 수사들을 찾으러 가요.”
“가세.”
한립이 먼저 푸른빛으로 변해 솟구치는데 얼마 가지 못해 머리 위의 구름이 무형의 압력을 방출했다.
이어서 반투명한 검빛들이 빼곡하게 나타나 장관을 이루었다.
이에 육우청의 얼굴이 창백해졌지만 한립은 전신에서 남색 빛을 일으켜 돌진했다.
그는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배 같았다.
쿠르릉!
하늘이 떨리면서 공간 전체가 부서질 듯 흔들렸다.
수많은 검빛들이 부서지면서 수정 조각처럼 쪼개져 거대한 동굴을 만들어냈다.
그걸 본 한립은 쏜살같이 그 구멍 속으로 몸을 던졌다.
그러나 그가 동굴에 진입하기 전에 상공의 구름층이 내려앉으면서 은빛 검기로 구멍을 채우고 한립을 찔러 들어갔다.
얼굴을 굳힌 그는 서둘러 한 손을 저었다.
음각으로 구멍이 뚫린 검은 고리가 휙! 날아올라 은색 검기들과 충돌했다.
채채채채챙!
날카로운 충돌음이 귀를 찔렀다.
중수진륜은 여러 번의 제련을 거쳐 2성 중수까지 흡수한 상태라 위력이 엄청났다. 고리 위 물의 도문이 빛을 발해서 검은 태양처럼 보일 정도였다.
한립의 조종을 받은 중수진륜은 맹렬하게 회전하면서 검빛들을 가루로 만들었다. 하지만 검기를 아무리 부숴도 고공의 구름층이 점점 내려와서 더 조밀한 검빛을 만들었다.
한립은 주변 공간이 왜곡되며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감지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그는 이대로 구름층을 뚫고 정상으로 올라가려면 부상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명한선부에서 어떤 위험한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판에 청죽봉운검의 안위가 걱정되기는 하나 중상의 위협을 감수할 수는 없었다.
그는 다시 지면으로 내려와 육우청 옆에 섰다.
“얼마나 오랜 세월 동안 축적된 검기인지 알 수 없을 만큼 두터운 층을 이루고 있네. 날아갈 수 없으니 걸어 올라가야겠어.”
“우리의 속도면 얼마 걸리지 않을 거예요.”
두 사람은 돌조각들이 깔린 길을 따라 산 아래로 향했다.
한립이 강제로 뚫고 올라가려 하지 않자 내려앉았던 구름층이 서서히 올라가 원래 상태로 돌아갔다.
산 입구에 다다른 그들은 돌기둥으로 만들어진 패루에 금전문으로 적힌 글자를 바라보았다.
“무생검종(無生劍宗).”
힘 있는 필체는 단아한 품격을 잊지 않았고, 글자의 끝은 날카로운 검으로 마무리를 한 듯 수려하게 뻗어있었다.
한립은 형언할 수 없는 검의 의지를 느낀 것 같아 무의식중에 한 걸음 물러섰다.
무생검종은 백만 년 전에 행적을 감추어서 아무도 종문이 어디 있는지 몰랐는데 어찌 이곳에 있단 말인가!
‘본명비검들이 이곳으로 날아간 이유는 종문에 남아 있는 진법의 영향을 받아서일지도.’
검빛 구름과 무생검종으로 사라진 비검들을 연관해 생각하자 이런 추측이 가능했다.
그는 육우청을 데리고 패루를 지나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이리저리 휜 산길은 산을 휘감고 있는지 가는 동안 많은 건물을 볼 수 있었다. 전부 금제의 비호를 받지 않는 평범한 곳이었다.
오랜 세월이 흘러 건물들은 형편없이 망가져 있었다.
정상으로 향할수록 숲이 음산해져서 새와 짐승 소리가 끊기고 모종의 살기 같은 게 느껴졌다. 푸른 대나무 숲을 지나던 한립은 걸음을 멈추고 청록색 대나무 건물을 쳐다보았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산길에서 벗어나 그곳으로 향했고 육우청도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그를 바짝 따라갔다.
한립의 눈에 대나무마다 오래전에 생긴 듯한 검의 흔적이 있는 것이 들어왔다. 건물 옆에 이른 그는 청자색 두꺼운 대나무 줄기를 쥐고 당겨보았다.
우득 소리가 나기는 했지만 줄기는 부서지지 않았다. 그는 눈썹을 끌어올리며 힘을 더했다.
펑!
대나무가 폭발하듯 터지면서 쇠처럼 날카로운 파편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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