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1화. 또 다른 공간
*
“이건 현천의 문양!”
냉염노조가 놀라 헛바람을 들이켰다.
“맞아요. 이 말라비틀어진 덩굴이 현천선등이었네요. 여기 맺혀 있던 무언가를 앞서 다녀간 사람이 잘라내서 덩굴이 시든 거예요.”
육우청이 쓴웃음을 지었다.
한립은 덩굴 어딘가를 가리켰고, 육우청과 냉염노조는 말라비틀어져 잘 보이지 않는 단면을 보았다.
“휴우, 우리가 한발 늦었네요.”
육우청은 아쉬운지 한숨을 내쉬었다.
현천의 물건으로 선천선기를 제련할 수 있었는데 이렇게 눈앞에서 귀한 재료를 놓쳤으니 속이 쓰릴 만도 했다.
냉염노조도 분한지 퍽퍽 발을 굴렀다.
“됐습니다. 어차피 누군가 가져간 것, 기분 상해봤자 어쩌겠습니까. 다 우리의 운이 부족한 탓이지요.”
한립은 담담한 목소리로 빵빵하게 부푼 저물대를 가지고 돌아온 도병들을 회수했다. 그가 무슨 말을 더하려는 순간 이변이 발생했다.
쿠콰앙!
약재원 상공의 별빛 금제가 반짝거리면서 굉음이 들려온 것이다. 놀란 세 사람이 고개를 들자 폭음이 들려오며 보호막에 균열이 가고 있었다.
“으하하, 짙은 영약의 기운이 느껴진다. 약재원이 분명해!”
바깥에서 혈한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팟!
얼굴이 하얗게 질린 냉염노조가 두 손으로 수결을 맺고 주문을 외웠다. 동시에 빛에 휩싸인 그는 땅속으로 스며들어 사라졌다.
그걸 보고 미간을 좁힌 한립도 술법을 펼치며 두 팔을 펼쳤다.
파앗!
그윽한 빛이 그와 육우청을 감싸자 그들의 모습도 사라졌다. 그 순간 별빛 금제가 깨지면서 사방으로 별빛이 튀었다.
한립과 육우청이 은신술을 펼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약재원으로 들어선 한 무리의 수사들은 혈한과 귀읍종 수사들이었다.
혈한은 허공에서 약재원을 둘러보고 얼굴이 굳었다. 다른 수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울타리 곳곳마다 영초들이 싹 사라졌고 심지어 뿌리와 영토마저 긁어가 사라지고 없었다.
“누가 먼저 다녀갔나 봅니다. 이런 죽일 놈들!”
혈한 옆에서 누런 얼굴의 중년 사내가 분개해 외쳤다.
다른 수사들도 표정이 좋지 않았고 혈한의 얼굴이 노기등등해진 것은 당연했다.
“다들 멍청하게 서 있지 말고 남은 것이 없나 수색하거라!”
혈한의 명에 수사들은 흩어져서 약재원을 돌아다녔다. 혈한은 허공에 서서 의식을 퍼트리고 약재원 곳곳을 샅샅이 훑었다.
약재원 구석 바위 뒤에 허상이 떠 있었다.
“…….”
그 안에 든 흐릿한 인영들은 한립과 육우청이었다.
한립은 신중한 얼굴로 손가락을 빠르게 움직여 법결을 날려 보냈고 그윽한 빛은 차차 허공에 녹아들어 아예 일체화되었다.
혈한의 의식이 그곳을 스쳤으나 그들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한립은 긴장을 풀지 않고 빠르게 수결을 바꾸어가며 은신술을 강화했다.
이때 혈한의 시선이 약재원 가장 깊은 곳의 제단으로 향했다. 손을 펼쳐 날린 검은빛이 재단 위에서 덩굴을 감싸 돌아왔다.
수사들은 주변을 뒤져도 아무것도 없자 다시 돌아왔다.
“이건 현천선등이잖아!”
혈한이 마른 덩굴을 들고 살펴보며 깜짝 놀라 외쳤다.
“현천선등이요? 무늬로 보아 확실한 것 같습니다. 누군가 현천의 보물은 이미 훔쳐 갔나 봅니다.”
누런 얼굴 중년인이 얼굴이 어두워져 화를 냈다.
“대인, 이곳의 영초와 현천의 보물은 냉염과 함께 간 놈들이 가져간 게 틀림없습니다. 유한궁이 그리 넓지 않으니까 어서 쫓으시지요.”
“맞습니다.”
키 크고 마른 도사 복장의 수사가 의견을 냈고 다른 이들도 찬성했다.
그 말에 허상 속의 한립은 기뻐했다. 혈한 무리가 떠나기만 하면 그는 쥐도 새도 모르게 이곳을 빠져나갈 작정이었다.
솔직히 혈한이 두려운 것은 아니었다.
그의 실력에 안전하게 빠져나갈 수야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육우청이 문제였다. 아직 그녀가 알고 있는 선부 내 지도가 필요했다.
주변 수사들의 말에 혈한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약재원을 둘러보다 수결을 맺었다. 그러자 검은 빛덩이가 날아올라 꿈틀꿈틀 거대한 그물 형태로 약재원을 감쌌다.
“대인?”
키 큰 도사가 의문을 드러냈다.
“현천의 보물과 영초를 채취한 놈들은 멀리 가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이 아직 이곳에 남아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지.”
혈한은 뜨거운 눈초리로 사방을 쏘아보았다. 현천의 물건을 손에 넣어서 선기를 제련할 수 있으면 실력이 크게 늘 것이다.
“저희가 수색을 했지만 아무도 찾지 못했습니다.”
누런 얼굴 중년인이 미간을 좁히고 말했다.
“그들이 특수한 비술을 펼쳤을지 모를 일입니다. 대인의 말씀대로 사소한 것도 놓쳐서는 안 됩니다.”
키 큰 도사가 사방을 둘러보았다.
혈한은 수하들이 웅성거리든 말든 중얼중얼 주문을 외고 새하얀 탑을 꺼내 들었다.
“자미탑(紫薇塔)!”
오묘한 문양들이 새겨진 하얀 탑을 보고 주변 수사들이 눈을 크게 떴다. 처음에는 작던 탑이 사람만 하게 커져서 빙글빙글 회전했다.
그 속에서 하얀 파문이 흘러나와 퍼져 나왔고 천지영기들이 요동치면서 공명했다. 하얀 파문이 한립이 있는 곳까지 퍼졌다.
웅.
그들 주변의 그윽한 빛이 미세하게 떨리면서 모습이 노출되고 있었다. 한립은 재빨리 수결을 바꾸면서 급하게 주문을 외워 보았지만 모습이 드러나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이때, 또 다른 약재원 귀퉁이에서 펑! 하는 소리가 들리고 냉염이 당황한 얼굴로 튀어나왔다.
“냉염, 역시 너였구나!”
그를 쳐다보는 혈한의 눈길이 서늘해졌다.
냉염은 몸을 부르르 떨며 절망한 눈길로 무언가를 찾는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배신자에게는 죽음뿐이다. 죽여라!”
혈한의 말에 귀읍종 수사들이 냉염노조에게 달려들었다. 가장 맨 앞에 키 큰 도사와 누런 얼굴의 중년인이 있었다.
키 큰 도사는 두 팔을 휘저어 푸른 뇌전 덩어리들을 날렸고, 누런 얼굴 중년인은 핏빛 빛기둥을 쏘아 보냈다.
핏빛 빛기둥 속에 거대한 귀신 허상이 나타나 냉염노조를 향해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골염산인, 정명진인 당신들…….”
냉염노조가 둔광을 일으켜 뒤쪽으로 달아나면서 소리쳤지만 말이 끝나기 전에 다채로운 빛에 둘러싸이고 말았다.
멀지 않은 곳에서 눈을 번득인 한립이 은신술을 풀어 버렸다.
“가세!”
육우청의 허리를 낚아챈 그의 몸에서 금빛 뇌전들이 뭉쳤고, 뇌전들은 그들을 품고 번득 위쪽으로 날아올랐다.
혈한이 깜짝 놀라 급히 몸을 돌렸다.
“네놈들도 근처에 있을 줄 알았다!”
파치칫!
그가 냉소하며 수결을 맺어 상공의 검은 그물의 굵기를 늘렸다. 동시에 검은 실들이 뱀처럼 그물에서 뻗어 나와 금빛 뇌전을 휘감으려 들었다.
구불구불 움직이는 실들의 속도는 놀랍게 빨라 잔영을 남기면서 금빛 뇌전보다 빠르게 움직였다.
최선을 다해 피하면서 위쪽 그물로 가까워지던 금빛이 검은 실들에 의해 칭칭 감겼고, 그 속에서 발산된 법칙의 힘에 구속의 기운이 담겨 있어 한립과 육우청이 모습을 드러냈다.
동공을 수축한 한립은 긴장하는 기색 없이 등 뒤로 금빛을 반짝였다. 그러자 금색 고리 하나가 떠올라 회전하면서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는 은은한 금빛을 머금고 흐릿하게 사라져 계속해서 검은 구슬 쪽으로 치고 나갔다.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검은 실도 따라잡지 못했다.
몸을 돌린 혈한이 손을 쓰기도 전에 한립이 육우청을 데리고 검은 그물 코앞까지 이르러 있었다.
놀란 기색이 어렸던 혈한의 얼굴이 차분해졌다. 검은 그물은 강력한 구금 효과를 지녔고 질겨서 금선 수사도 가둘 수 있었다.
‘제깟 놈이 그래 봐야…….’
혈한은 손바닥을 뒤집어 은색 탑을 거두고 검은 그림자로 변해 날아올랐다. 바로 그 순간 한립의 몸에서 강력한 기운이 폭발해 거의 금선의 경지에 이르렀다.
파치치칫!
그의 몸에서 새롭게 흘러나온 금빛 뇌전은 이전 것보다 훨씬 굵고 법칙 파동까지 은은하게 발산했다.
커다란 집게발 하나가 한립의 몸에서 불쑥 나와 거대한 가위처럼 검은 그물을 자르고 있었다.
서걱!
구멍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두 사람이 통과하기에는 충분했다.
한립은 그 틈으로 빠져나가 환영처럼 흐릿하게 멀어져갔고 하늘 끝쪽에서 느닷없이 번득하더니 완전히 종적을 감추었다.
혈한이 검은 그물 바깥까지 쫓아 나왔다가 그가 달아난 방향을 응시했다.
“제길, 모두 쫓아라!”
* * *
산봉우리 좌측의 숲속.
금빛이 떨어져 흩어지자 한립과 육우청이 나타났다.
“어째서 멀리 달아나지 않으신 거예요?”
육우청이 조금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무리를 이끄는 자는 금선일세. 나 혼자였다면 속도로 지지 않겠지만 자네를 데리고서 달아날 자신은 없네. 일단 해역에 이르면 숨을 곳이 마땅치 않아 그들을 피하기 더 어려울 테고.”
고개를 든 한립은 고공을 주시하면서 설명했다. 그 말에 육우청은 그가 자신을 버리고 가지 않은 것에 안도했다.
“그렇다고 여기에 숨어 있을 수만은 없겠지. 기운을 감추려면 섬의 다른 곳을 알아봐야 할 것이야. 그렇지, 기운을 감출 만한 보물을 지니고 있나?”
“네, 아버지께서 주신 게 있어요.”
육우청은 손바닥을 뒤집어서 하늘거리는 얇은 옷을 꺼내 걸쳤다.
하얀 옷은 옅은 빛을 반짝이다가 육우청의 옷에 녹아들었고 동시에 그녀의 기운도 있는 듯 없는 듯 가려졌다.
“어느 정도 거리만 벌리면 알아차릴 수 없겠어.”
한립은 의식으로 찾아내려 실험을 해보고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무상맹 가면과 은신 비술을 발동해서 기운을 철저히 가린 뒤였다.
두 사람은 약재원 반대편의 숲 깊은 곳으로 걸어갔다. 그 시각 네 명의 신영이 고공에서 멈추었다.
“기운이 여기서 끊겼습니다.”
골염산인이 얼굴을 찡그렸다.
“우리가 찾아낼 줄 알고 숨었나 봅니다.”
체구가 커다란 거한이 냉소했다.
“어쨌든 그들을 찾아내지 못하면 혈한 대인께 좋은 소리를 듣지는 못할 겁니다.”
또 다른 십방루 수사가 걱정스레 입을 열었다.
“흐흐,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제게 사람을 찾기에 좋은 신통이 하나 있습니다.”
정명진인이 음흉한 웃음을 흘리며 손바닥 크기의 자금색 솥을 꺼냈다. 솥뚜껑에 기다란 코에 기괴하게 생긴 짐승 조각이 새겨져 있었다.
검은 향료를 하나 그 안에 집어넣고 불을 피운 정명진인은 묵묵히 주문을 외면서 두 손가락으로 짐승을 가리켰다.
파앗!
번쩍 눈을 떠 붉은 보석 눈동자를 드러낸 짐승은 기다란 코를 들어 주변을 훑고 한립과 육우청이 향한 방향을 가리켰다.
코에서 짙은 하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후령정(嗅靈鼎)이 그들을 찾았습니다. 수사가 남긴 기운, 냄새 등 흔적을 찾는데 뛰어나고 특히 여인들의 향기에 민감한 녀석이지요. 허나 감지할 수 있는 시간이 길지 않으니 어서 쫓읍시다.”
정명진인의 말에 나머지 세 사람이 기뻐하면서 연기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쫓아갔다.
이때 한립 일행은 산길을 따라 걷다 황폐한 정원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정원은 탑과 누각이 무너져 내리고 그 틈으로 푸른 이끼와 덩굴들이 자라 있었다.
반월형의 정원 출구 역시 반쯤 무너져서 잡초들이 자라난 오솔길로 이어졌다.
“누군가 뒤에서 쫓고 있군…….”
한립이 문득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기운을 감추었는데 어떻게 찾아낸 거죠?”
“우리가 비술로 기운을 감추었듯 그들도 추격에 특화된 비술이 없으리란 법은 없네. 이제 달아나는 수밖에 없는 것인…….”
말을 하던 한립의 표정이 갑자기 이상해졌다.
“왜 그러세요?”
육우청이 겁을 먹고 물었다. 한립은 대답 없이 반월형의 문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그곳을 살폈다. 육우청도 그를 따라가 각각 눈에 검은색과 푸른색 빛을 머금었다.
“이상한 점이라도 발견하셨나요?”
“수사의 눈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면 내 착각인가 보군. 가세!”
한립은 고개를 저으며 그녀와 같이 반원형 문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우웅.
그 결과 공간에 왜곡이 생기면서 평평하던 창호지를 손가락으로 찌르는 것처럼 주름이 잡혔다.
흠칫 놀란 한립이 뒤로 물러나려다 고꾸라질 뻔하고 몸을 가누었다. 육우청은 완전히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는데 손이 빠른 한립이 그녀를 부축해 주어 우스운 꼴을 면했다.
“여긴 대체…….”
육우청이 몸을 바로 세우고 놀란 눈빛으로 주변 풍경을 살폈다. 수백 리에 이르는 산맥이 그들이 있던 작은 섬과 연결되어 있었다.
뒤를 돌아 반쯤 허물어진 문이 아직 존재하는 것을 본 그는 바깥 풍경과 이곳이 완전히 다른 것에 혀를 찼다.
“문 뒤로 다른 공간이 존재했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