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700화 (1,457/2,000)
  • 1700화. 마른 덩굴

    *

    잠시 이야기를 나누던 냉염노조와 육우청은 다시 흩어져서 각자 울타리 금제를 깨고 영초를 채집하는 데 집중했다.

    잘려나간 나무 밑둥을 한참 살피던 한립은 손끝으로 노란 진액을 찍어 향기를 맡아보고 머릿속이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눈을 반짝인 그는 푸른빛을 방출해 밑동과 그 아래의 뿌리를 흙과 함께 떠내 거두었다. 아직 나무의 정체를 몰라도 금선이 중시할 정도면 귀한 재료가 분명했다.

    비록 밑동만 남았어도 뿌리가 살아 있고 장천병을 지녔으니 되살려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한립은 다른 울타리로 가서 수결을 맺었다.

    쿠쿵!

    검기가 형성한 연꽃이 남색 금제를 감싸고 마구 꽃잎을 떨구었다. 십여 호흡을 버티던 금제가 펑! 터져 밭이 드러났는데 한립의 표정이 또 굳었다.

    그 안에 있던 영초들은 전부 뽑혀나가 뿌리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한립은 몸을 날려 다음 약재밭으로 가서 푸른 금제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일각 후, 펑! 하고 귤빛 금제가 터져 밭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러나 그 안의 영물도 뽑혀나가 깊은 구멍만 뚫려 있었다.

    한립은 고개를 저으며 약재밭을 둘러보았다.

    세 사람으로 인해 이제 대부분의 울타리 금제가 사라졌고, 드문드문 남아 있는 뿌리나 밑동을 냉염노조와 육우청은 버려두었지만 한립은 하나도 놓치지 않고 잘 거두었다.

    그는 시선을 돌려 약재밭에서 가장 깊은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있는 울타리는 면적이 상당히 넓어서 다른 약재밭의 몇 배였다.

    뇌전이 흐르는 두꺼운 보라색 보호막이 울타리를 감싸고 있어서 마치 거대한 짐승이 엎드려 밭을 지키는 것처럼 보였다.

    다른 구역과는 확연히 달라 보여서 마지막까지 놔둔 곳이었다.

    한립이 보라색 금제를 찬찬히 살피다 검결을 발동하려는데 멀리서 쿵! 하고 폭음이 들려왔다.

    육우청이 새로운 금제를 깬 것이었다.

    다른 곳보다 강력한 금제가 펼쳐져 있어서 영력 소모가 큰지 그녀의 얼굴이 약간 창백했다. 그러나 그녀는 안을 들여다보고 실망했다.

    누군가 뿌리까지 캐가서 땅에 구멍 두 개와 은빛 잔뿌리 몇 개만이 남아 있었다.

    육우청은 입을 비죽이며 걸음을 돌리려 했다.

    “대나무류의 영초일세. 다른 영약과 달리 뿌리를 잘 키우면 나중에 싹을 틔울 수 있어서 꽤 가치가 있지. 이렇게 낭비하다니 아까운 일이야.”

    언제 왔는지 한립이 옆에서 귀띔을 해주었다.

    “한 오라버니께서 아는 영초인가요?”

    “나는 모르겠군. 허나 남아 있는 뿌리만 해도 자태가 심상치 않고 약재밭의 주인이 이곳에 심어 두었으면 그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네. 안목이 있는 구매자를 만나면 높은 가격을 받을 수 있을 것이야.”

    한립의 말에 육우청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두 구덩이에 남아 있는 잔뿌리들을 조심스럽게 캐서 두 개의 옥함에 나눠 담았다.

    그녀는 옥함 중 하나만 넣어두고 나머지는 한립에게 건넸다.

    “여기요. 한 오라버니의 조언이 없었으면 귀한 것을 두고 갈 뻔했어요.”

    한립도 거절하지 않고 옥함을 받아들었다. 사실 은빛 잔뿌리들에 흥미가 있어 다가온 것이었다.

    쿠르릉!

    또 다른 방향에서 진동이 들려왔다.

    냉염노조가 비도 영보 12자루를 이용해서 남색 금제를 미친 듯이 공격하는 중이었다.

    별빛이 반짝이는 금제는 소형의 별빛 보호막으로 꽤 단단했다.

    한참을 공격해도 물결만 일고 깨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냉염노조가 초조한 기색으로 한립 쪽을 힐끗 보았다.

    고민하던 그가 결국에는 공격을 멈추고 날아올랐다.

    “한 수사, 저쪽 금제가 상당히 강력한데 도움을 좀 주실 수 있겠습니까?”

    냉염노조가 한립에게 다가가 공수를 했다.

    “사소한 일에 그리 예의 차릴 것 없습니다. 육 수사, 함께 가서 살펴보세.”

    담담히 미소를 짓는 한립의 말에 냉염노조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들은 냉염노조가 말한 별빛 보호막 옆으로 이동했다.

    한립은 눈을 반짝이면서 금제를 살폈다.

    그도 주의 깊게 봐두었던 금제였는데 냉염노조가 먼저 다가가기에 신경 쓰지 않았었다.

    한립이 검결을 맺어 푸른 연꽃을 만들었다.

    쿠콰콰쾅!

    강력한 검기들이 비처럼 쏟아져 내려 별빛 보호막을 갈랐다. 동시에 냉염노조도 기합을 넣고 비도 영보들을 키워 강력한 공격을 날렸다.

    아무리 금제가 강해도 두 사람이 맹공을 펼치는데 오래 버틸 수는 없었다. 펑! 터지면서 별빛이 난무하고 그들 앞에 울타리 속 밭이 나타났다.

    그 안에 사람 반만 한 열댓 개의 남색 영초들을 보고 한립이 움찔했다. 남색 수정으로 조각한 듯 반투명하게 빛나는 풀은 눈부신 별빛을 머금고 있었다.

    놀랍게도 이전에 다녀간 금선이 채취하지 않은 것이다.

    육우청은 놀란 얼굴을 했지만 냉염노조는 예상했다는 듯 표정 변화가 없었다.

    “이건……. 성휘초(星輝草)!”

    남색 영초를 알아본 한립의 눈에 희색이 스쳤다. 성광지력을 함유한 영초는 관련 단약을 제련하기에 최적의 재료였다.

    거기다 이곳의 성휘초들은 적어도 50만 년 정도 된 것들이라 한두 뿌리만 손에 넣어 단약을 제련해도 대주천성원공 수련시간을 줄일 수 있었다.

    바로 그때 빛줄기가 날아가 성휘초 열댓 뿌리를 전부 감싸고 냉염노조에게 돌아갔다. 한립은 그것을 보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에 제가 도울 일이 있으면 거절하지 않겠습니다.”

    냉염노조는 웃는 낯으로 감사를 표하면서도 영초를 나누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한립은 그런 그를 그냥 지켜보기만 했다.

    “냉염 수사, 이곳의 금제는 한 형과 수사께서 함께…….”

    육우청이 미간을 찌푸리며 따지려는데 한립이 손을 뻗어 막았다.

    “성휘초는 냉염수사께서 먼저 발견하셨으니 당연히 수사의 것이 맞습니다.”

    한립은 담담히 말하며 더 깊은 곳으로 걸어갔고, 육우청은 쌀쌀맞게 냉염노조를 쳐다보고 휙 몸을 돌렸다.

    냉염노조는 미소를 유지하면서 뿌듯한 얼굴로 그들을 쫓았다.

    냉염노조는 상대가 성휘초를 원하면 약간 나눠주면서 앞으로 자신의 것도 챙겨달라 부탁하려고 했다.

    하지만 한립은 체면을 생각해서인지 아무 소리 하지 않고 성휘초를 포기했다. 그렇다면 그로서는 더 잘된 일이었다.

    그들을 쫓아다니면서 이득만 챙기면 그만이었다.

    금방 마지막 밭에 이른 한립은 보라색 금제를 잠시 살피다 수결을 맺었다. 푸른 연꽃이 더욱 크기를 키우고 맹렬히 회전하며 꽃잎들을 날려 보냈다.

    푸른 연꽃잎들이 중간에서 굵직한 거검으로 변해서 보라색 보호막을 찍었다.

    한 자루 한 자루가 무시무시한 영력 파동을 지닌 검들의 공격에 허공이 다 진동했다.

    퍼퍼퍼펑!

    눈부신 뇌전 빛이 폭발하면서 거검들이 전부 튕겨 나왔고 바르르 떨던 보라색 보호막도 원래대로 돌아갔다.

    예상했던 것보다 더 단단한 금제에 한립은 미간을 좁혔다. 그걸 본 육우청이 합세했다.

    커다란 푸른 바람의 칼날들이 날아들어 금제를 공격했다. 냉염노조도 비도를 부려서 보라색 금제를 공격했다.

    세 사람이 동시에 공격을 퍼부어 위력이 상당한데도 보라색 금제는 큰 무리 없이 유지되었다.

    “평범한 방법으로는 깰 수 없겠습니다. 대오행섭령진광을 펼쳐 봐야겠어요.”

    한립이 영보 3개를 불러내자 냉염노조도 두말하지 않고 자신의 영보 2개를 꺼내 발동했다.

    곧 굵직한 오색 빛기둥이 하늘에서 떨어져서 오색구슬들을 뿜었다.

    쿠콰쾅!

    금제보다 대오행섭령진광이 더 현묘했던지 점차 보라색 보호막이 얇아졌다. 눈을 번득인 한립이 수결을 맺어서 열댓 자루의 거검을 날렸다.

    펑!

    보라색 보호막이 갈라져 내부가 노출되었다.

    질퍽한 습지에 흑자색 진흙들이 가득했고 가끔 크고 작은 거품 같은 게 부글부글 올라와 터지곤 했다.

    그 안을 가득 채운 열기가 묻어나는 보라색 기체에서 가느다란 뇌전들이 번득거렸다.

    겉보기에는 더러운 진흙이었으나 함유한 짙은 영력과 뇌전의 힘으로 볼 때 비범한 흙이 분명했다.

    “뇌택식토(雷澤息土)!”

    흑자색 진흙을 본 한립이 낮게 읊조렸다.

    다양한 영초를 재배하느라 영토(靈土)에 대해서도 깊게 연구를 해와서 높은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뇌택식토는 뇌전 속성 영초와 영약을 키우기에 아주 좋은 진귀한 흙이었다.

    특히 오래전에 배합법이 실전되어서 그간 일부러 찾아다녔어도 보이지 않던 것을 오늘 보게 된 것이다.

    그는 손을 저어 도병 두 마리를 불러냈다.

    “흙을 퍼 담거라.”

    한립은 도병들에게 저물대를 하나씩 나눠주었다. 냉염노조도 그것을 보더니 표정이 달라져서 빛을 날려 주변의 흙들을 퍼담기 시작했다.

    미간을 좁힌 육우청만 더러운 흙을 건들기 싫은지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한립은 힐끗 냉염노조를 보고는 밭의 중앙을 살폈다. 그곳에는 반구형의 또 다른 보라색 보호막이 펼쳐져 있었다.

    그가 날아오르고 육우청이 따라나섰다. 냉염노조도 더는 뇌택식토를 신경 쓰지 못하고 서둘러 그들을 쫓았다.

    보라색 보호막은 바깥 금제와 똑같이 생겼고 두께만 얇았다.

    한립은 대오행섭령진광을 펼치지 않고도 청죽봉운검을 몇 번 휘둘러 보호막을 깼다. 그 안의 보라색 제단은 수정을 켜켜이 쌓아 만든 것 같았고 뇌전 무늬와 진법 도안이 새겨져 있었다.

    제단 위쪽에는 또 다른 보라색 보호막이 마치 뚜껑처럼 무언가를 가리고 있었다.

    “도대체 금제가 몇 개나 있는 건지 모르겠어요.”

    육우청이 투덜거렸다.

    한립은 제단 옆 바닥에 기대 있는 사람 형태의 괴뢰 두 마리를 보고 눈을 반짝였다. 금색의 괴뢰들이 풍기는 기운은 대주천성원공을 취하러 갔을 때 만난 구리 괴뢰와 똑같았다.

    그저 한 마리는 머리부터 발까지 수직으로 갈려 내부 구조가 훤히 보였고 다른 한 마리는 머리가 잘려 이미 작동하지 못하게 망가져 있었다.

    괴뢰에 남은 흔적이 그리 오래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얼마 전에 당한 듯했다.

    ‘과연 누군가 왔다 갔구나. 이곳에 무엇이 있었든 가지고 갔겠어.’

    다들 비슷한 생각을 하면서 표정이 어두워졌다.

    한숨을 내쉬던 한립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양쪽의 구리 괴뢰들을 자세히 살피고 그것들을 거두었다.

    두 괴뢰의 잔해 중 특히 머리가 잘린 쪽은 체내의 괴뢰 핵심이 파괴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었다.

    구리 괴뢰의 위력을 보았으니 해 도인이 수리할 수 있다면 앞으로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냉염노조는 은근히 열이 받은 듯했으나 곧 평정을 되찾았다.

    한립이 푸른 비검 두 자루를 날려 보라색 금제를 연달아 가르자 쉽게 보호막이 갈라졌다.

    내부를 본 그는 멈칫했다. 제단 위에 목재를 이용한 구조물이 설치되어 있고 그곳에 덩굴이 자라 있었다.

    ‘이건 가져가지 않았어!’

    덩굴이 길기는 한데 회갈색으로 말라붙어서 죽은 지 오래된 듯했다.

    “이건 무슨 덩굴일까요? 깊은 곳에 이렇게 숨겨 놓은 것을 보면 귀한 영약이었을 텐데 아깝게 오래전에 죽었네요. 기르는 데 실패했나 봐요.”

    육우청이 탄식했다.

    “사람의 뜻이 하늘의 뜻을 이기지 못한다고 우리보다 앞서 온 자도 이건 챙겨가지 못했군요.”

    냉염노조가 앞서 영초들을 캐간 자의 불행을 고소해했다.

    그들이 한마디씩 하는 동안 한립은 그저 말라비틀어진 덩굴을 아래위로 훑기만 했다.

    그러다 무언가를 발견했는지 그의 눈에 남색빛이 일렁였다.

    “한 오라버니, 왜 그러세요?”

    육우청이 그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겼지만 한립은 대답 없이 제단 위로 날아올랐다. 육우청과 냉염노조가 서둘러 그를 따라갔다.

    덩굴 옆에 내려선 그는 한 줄기를 잡아들고 자세히 살펴보면서 두 눈의 남색빛을 더욱 키웠다.

    그는 갑자기 탄식하며 생각이 많은 얼굴로 그것을 내려놓았다.

    냉염노조와 육우청도 뭔가를 깨닫고 덩굴을 들어보고는 표정이 달라졌다. 덩굴에 구불구불하게 이어진 무늬는 마치 글자 같아서 은과문이나 금전문과 닮아 있었다.

    마치 덩굴 자체가 천지대도의 화신과 같은 모습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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