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6화. 대천세계(大千世界)
*
웅산과 한립은 최선을 다해 위로 올라갔다.
마지막 열댓 개의 계단을 지나는 데만 일각의 시간이 걸렸다.
정상에 발을 올린 한립은 과도한 중력이 씻은 듯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쉭!
단번에 열댓 장을 쇄도해 앞으로 나간 그가 멈춰 섰다.
두 명을 데리고 있어 세 배의 중력을 견뎠기에 웅산보다 한발 늦게 도착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길게 숨을 내쉬며 혈한이 아직 5, 60개의 계단을 남겨 두고 흉흉한 눈빛을 보내는 것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피식 웃으며 냉염노조와 육우청을 내려주고 변신을 풀었다.
정상에는 문 위에 다락을 얹은 형태인 보라색 문루(門樓)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양쪽 기둥을 황금 용이 휘감고 올라가 각각 여의주를 물고 있는 모습이었다.
문루에 걸린 편액에는 거침없는 붓놀림으로 글씨가 아니라 한 폭의 빙원도(氷原圖)가 그려져 있었다.
한립은 보라색 문루와 그 양옆으로 길게 이어진 높다란 벽에서 어떤 금제의 파동도 느끼지 못했다.
용이 물고 있는 여의주도 선가의 보물은 아닌 듯했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천 리에 이르는 빙원을 그림으로 그려놓은 천리빙원도 만이 눈에 익었다.
한립이 주변을 살필 때 웅산은 이미 문루 앞에 이르러 화살처럼 안으로 쏘아져 들어갔다.
혈한이 열심히 오르고 있었기에 한립도 냉염노조, 육우청과 같이 안으로 튀어들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멀리 웅장한 궁전 건물 3개가 보였다.
유리 기와를 얹은 지붕과 붉은 칠을 해놓은 벽 그리고 처마 끝에 일렬로 놓인 다양한 짐승 조각들이 눈에 들어왔다.
품(品)자 형태로 배열되어 있는 세 개의 궁전들은 문루 쪽으로 향해 있었고 전부 지면에서 한참 높은 곳에 지어져 있어 마치 탑처럼 느껴졌다.
문루와 궁전들 사이의 광활한 백석 광장에는 아무런 장식도 없었다.
한립은 빠르게 광장과 궁전을 돌아본 뒤 아무래도 어디선가 본 것 같다는 생각에 미간을 좁혔다.
‘이런 것을 어디서 보았었지?’
그가 뭔가를 떠올리기 전에 웅산이 궁전 쪽으로 날아올랐다.
놀랍게도 궁전 위쪽 허공에 진입한 순간 공간이 왜곡되면서 그는 연기처럼 사라졌다.
한립은 명청령안을 일으켜 백석 광장이 뿌연 안개로 변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미세한 영기의 흐름이 느껴지는 안개는 고명한 금제를 가리기 위한 눈속임이 분명했다.
한립은 문득 문루를 돌아보았다.
‘광한궁(廣寒宮)!’
금제가 펼쳐진 계단과 광장의 환영진법 그리고 품(品)자 형태로 배치된 궁전까지 모든 것이 광한궁의 풍경과 비슷했다.
‘영계과 진선계의 비경이 무슨 연관이라도 있단 말인가?’
한립이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문루 바깥에서 육중한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급히 고개를 돌리니 혈한이 홀로 그들을 쫓아오고 있었다.
“이런, 어서 가야 합니다.”
냉염노조가 이를 악물고 소리치며 광장 상공으로 날아오르고 한립과 육우청도 서둘러 그를 따라갔다.
세 사람의 신형도 허공에서 순식간에 종적을 감추었다.
뒤늦게 도착한 혈한은 경솔하게 환영진으로 뛰어들지 않고 광장 변두리에서 천천히 관찰에 들어갔다.
명청령안을 거두지 않은 한립은 환영진 속 안개에 휘말려 주변 풍경들이 휙휙 바뀌는 것을 지켜보았다.
“따끈따끈한 만두…….”
“좋은 연지가 있습니다. 색깔이 곱고 향이 좋은…….”
어느새 그는 장사꾼들이 가득한 북적북적한 시장에 서 있었다.
그는 멍한 얼굴로 잠시 주위를 둘러보다 사람들로 가득한 길 한가운데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멀지 않은 곳에 성문이 보였는데 기거서 예쁘장한 여인 하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좌우를 살피는 중이었다.
바로 육우청이었다.
이때 창백한 얼굴의 냉염노조가 성문에서 걸어 나와 육우청을 보고 한립이 있는 곳을 가리켰다.
그들에게 다가가려던 한립은 뒤에서 누가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공자님! 방금 만든 증편 하나 맛보고 가세요.”
무의식중에 비켜서려던 그를 키 작은 사내가 대나무 찜통을 여러 개 들고 통과해 지나갔다.
키 작은 사내는 그가 아닌 분홍색 비단 장포를 걸친 부자 청년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이 환영 속에서 한립 등은 다른 사람들에게 없는 존재나 마찬가지였고 마음대로 몸을 투과해 지나갈 수도 있었다.
놀라운 것은 키 작은 사내의 표정이나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찜통 그리고 증편 냄새 같은 것들이 너무 사실적이어서 현실과 구분이 되지 않았다.
명청령안을 거두지 않은 그가 여전히 환영을 보고 있다는 것도 신기했다.
“냉염수사, 환영진이 괴이합니다. 영목신통을 펼쳐도 본모습을 드러내지 않는군요.”
한립은 냉염노조와 육우청 옆으로 가 입을 열었다.
“대천세계(大千世界)라는 진법인데 평생 보았던 어떤 환영진보다 불가사의한 진법입니다. 이름 그대로 한 세계와 비슷한 규모로 이곳에서 아무렇게나 돌아다니다가는 점점 경계를 잊고 영원히 빠져나가지 못하게 되지요.”
고개를 끄덕인 냉염노조가 설명해주었다.
“그렇군요. 그런데 웅산 수사는 못 보셨습니까?”
“지난번에 들어왔을 때는 이런 시장통이 아니라 요수들이 난동을 부리는 만황세계였습니다. 웅산 수사는 우리보다 먼저 들어갔으니까 다른 환영 속 세계에 갇혀 있을 확률이 큽니다. 이곳을 빠져나가야 다시 볼 수 있을 거예요.”
“이렇게 복잡한 환영진을 지난번에는 어떻게 빠져나가신 겁니까?”
“당시 함께 움직였던 8명 중에 진법에 정통한 고수들이 많았습니다. 밤하늘의 별의 위치를 관찰해서 한 걸음씩 진법을 빠져나가는 길을 찾았지요. 그래도 살아서 이곳을 빠져나간 것은 저와 웅산을 포함해서 넷뿐이었습니다.”
한립의 질문에 냉염이 쓴웃음을 지었다.
고개를 들어 보니 파란 하늘에 구름만 떠다녀서 날이 저물려면 한참 지나야 할 듯했다.
“별을 관측해서 방향을 찾고 그것을 기초로 환영진의 배치를 추정해서 진법을 빠져나갈 생문(生門)을 발견했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한 수사께서도 진법에 상당히 능한 것 같습니다.”
의외라는 냉염의 말에 한립은 답하지 않고 성문의 편액과 주변의 여덟 방향을 차례로 훑었다.
“편액에 동직문(東直門)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이쪽이 성의 동쪽이란 뜻인데, 이른 아침에 해가 반대 방향으로 떠 있으니 둘 중 하나는 거짓이겠지요. 지난번 수사의 일행이 별을 관측해 방향을 분별했다면 태양의 위치가 진정한 방위를 나타낼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니까 저쪽이 동쪽이란 말입니다.”
한립은 손을 들어 성문 반대편을 가리켰다. 그 말에 냉염노조와 육우청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런 것 같다고 답했다.
“방향은 찾았다고 치고 진열을 살펴봐야 하는데 제 영목신통은 통하지 않습니다. 육 수사, 자네는 어떤가?”
“처음부터 시도해보았는데 주변 사람들과 풍경이 사라지고 잿빛의 안개가 자욱한 것만 보였어요.”
육우청이 고개를 저었다.
“그럼 다른 법보를 이용하는 수밖에 없겠군.”
작게 한숨을 쉰 그가 머리 위로 손바닥을 펼쳐 금빛을 내뿜었다.
그러자 커다란 금색 눈알이 떠올랐다.
사실 그것은 법보가 아니라 진언보륜의 진실안이었는데 다른 이들의 이목을 가리려 모습을 달리했을 뿐이었다.
어차피 그가 시간 공법을 익히고 있다는 것을 모르면 진언보륜에 360개의 시간도문을 형성해서 이런 신통을 부린다고 추측하지는 못할 것이다.
육우청과 냉염노조는 눈알에서 느껴지는 법칙 파동에 표정이 달라졌지만 약속이라도 한 듯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한립은 그들의 태도에 만족해하면서 수결을 맺고 진실안으로 주변을 살폈다.
과연 영목신통을 펼칠 때와는 달랐다.
성벽과 나무, 사람들이 사라지고 투명한 영력 파동이 남았다.
집중해서 관찰한 그는 기운의 흐름을 기억해 두고 진실안을 거두었다.
“한 수사, 뭔가를 발견하셨습니까?”
“대략적인 배열을 살피기는 했는데 그 안에 허와 실이 섞여 있습니다. 수사께서 옛 기억을 살려 안내를 해주셔야 정확한 출구를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최선을 다할 것이니 걱정할 것 없습니다.”
한립의 대답에 냉염노조의 얼굴이 밝아졌다.
“이 길을 따라 6리를 가다 보면 낡은 저택이 나오는데 그 안에 우물이 있습니다. 우물 바닥이 바로 진법의…….”
한립은 냉염노조와 육우청을 데리고 진법의 자취를 하나씩 찾아다녔다.
냉염노조는 그의 말을 귀 기울여 듣다가 예전에 살펴보았던 진법의 배치와 비교해서 진짜와 가짜를 가려내었다.
굽이굽이 골목을 돌아다니던 그들은 결국 서당으로 보이는 장소에 이르렀다.
육우청은 돌아다니는 사람들에게 자꾸 멍하니 시선을 빼앗겨서 종종 한립이 의식 비술을 이용해 종종 깨워주어야 했다.
서당 안에서는 한창 수업이 진행 중이라 훈장님의 가르침을 받는 어린아이들의 책 읽는 소리가 낭랑하게 들려왔다.
그 서당 문밖에 백 년은 넘게 살아온 것처럼 보이는 굵직한 나무가 서 있었다. 한립 일행이 보고 있는 것도 바로 그 나무였다.
“지난번 환영진의 출구는 어떤 만황요수의 유골이었습니다. 이번에는 그때와 완전히 달라서 저도 확신할 수는 없군요.”
냉염노조가 늙은 나무 아래에서 고심했다.
“이곳의 영력 흐름이 다른 곳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이곳이 맞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립은 한 손으로 수결을 맺고 나머지 손으로는 거침없이 늙은 나무를 쳤다. 동시에 머리 위의 금색 눈알이 잘게 진동하면서 파문을 흩날렸다.
금빛 속에서 나무가 사람이 지나다닐만한 남색 소용돌이 통로로 바뀌었다. 이에 냉염노조가 다가가 살펴보고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이전에 지나갔던 것과 똑같아요.”
“그럼 가시죠, 시간이 없습니다.”
한립의 말에 냉염노조가 먼저 남색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갔다. 연이어 육우청이 들어가고 한립이 마지막에 움직였다.
일각 후, 백석 광장의 다른 쪽 끝에서 파문이 일고 한립 일행이 비틀거리며 떨어졌다. 냉염노조가 몸을 가누며 주변을 살폈지만 웅산은 보이지 않았다.
“찾을 것 없습니다. 웅산 수사는 진법대사이고 이전에 와본 경험이 있으니 우리보다 빨리 빠져나와 궁전으로 향했을 겁니다.”
한립이 궁전을 보면서 말했다.
눈에 남색빛을 일렁이며 뒤를 돌아보니 안개가 격렬하게 꿈틀거리고 있는 게 혈한도 환영진 안으로 들어간 듯했다.
“혈한이 갇혀 있는 동안 어서 가야 합니다. 일단 대주천성원공이 있는 곳으로 가시지요.”
한립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냉염노조가 세 개의 궁전이 있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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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 궁전이 가장 가깝고 뒤의 두 궁전들보다 약간 컸다.
궁전 앞의 18개의 기둥에는 음각으로 주술문자들이 새겨져 있었는데 그 기교가 아주 고풍스러웠다.
무늬가 가득한 자금색 대문의 왼쪽 문짝이 바깥으로 살짝 열려 있었고 강렬한 화염 공격을 받은 듯 약간 타들어 가 있었다.
“여긴 그냥 함정입니다. 들어가면 괴뢰 두 마리 때고는 아무것도 없어요.”
냉염노조가 힐끗 열린 문을 보고는 중앙 궁전을 빙돌아 오른쪽으로 서둘러 걸어갔다.
“중앙 궁전의 금제는 이전에 오셨을 때 일행분들이 파훼한 것인가요?”
말을 아끼던 육우청이 갑자기 물었다.
“환영진에서 네 사람이 살아남았다던 이야기 기억하십니까. 그중 나머지 둘이 저 궁전 안에서 죽었습니다.”
냉염노조의 말에 육우청의 얼굴이 약간 하얗게 질렸다.
우측 궁전은 약간 작은 것을 제외하면 중앙 궁전과 생김새와 재질이 비슷했다. 유일하게 다른 점은 문이 굳게 닫혀 있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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