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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695화 (1,452/2,000)

1695화. 정상

*

한립은 수태현원단이 거의 진령혈맥을 이용한 변신술과 맞먹는 효과를 보이는 것을 보고 눈을 반짝였다.

그가 천신만고 끝에 익힌 신통을 노인은 단약 하나로 펼친 것이다.

그 모습을 보고 냉염노조와 웅산이 냅다 속도를 높였다.

고개를 숙인 곰보 노인은 탄식했다. 귀한 단약을 이런 때 써버린다는 것이 무척 아까워서였다. 그는 눈을 빛내며 한 걸음을 내딛었다.

쿵!

단번에 두 계단을 오른 그는 성큼성큼 앞서 올라가고 있는 한립 일행을 쫓았다.

앞에서 가는 이들은 굳이 뒤를 돌아보지 않고도 무슨 일이 생긴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쌍방의 거리가 줄어들면서 둘 사이의 간격이 다시 백여 계단 밖에 나지 않았다.

스스슷.

그때 웅산이 가라앉은 얼굴로 중얼중얼 현묘한 주문을 외자 그의 황금색 몸이 더 커지며 머리카락이 사라지면서 대머리가 되었다.

마치 금색 승복을 입은 거구의 승려 같은 느낌이었다.

쿵!

황금 승려도 한 번에 두 개씩 계단을 오르면서 곰보 노인 못지않은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한립도 몸에 두른 성광지력을 강화해 전력으로 대주천성원공을 펼쳤다.

빠득! 빠드득.

무언가 터져나가는 소리가 들리며 그의 몸집이 꽤 커지고 배와 가슴에 18의 별빛이 반짝였다.

근골이 웅웅 진동하면서 주변에 파문을 일으켰다. 한립은 가볍게 한 계단씩 톡톡 치며 날 듯이 웅산을 따라갔다.

두 사람이 갑자기 속도를 낸 탓에 거의 나란히 올라가던 냉염노조가 약간 뒤처졌다.

그걸 본 냉염노조가 수결을 맺어 자신도 전력으로 대주천성원공을 운용해 배와 가슴에 18개의 별빛을 반짝이면서 체구를 키웠다.

이런 변화로 속도가 빨라졌지만 한립, 웅산 그리고 곰보 노인에 비해서는 속도가 약간 떨어졌다.

쿵! 쿵! 쿵!

곰보 노인은 여전히 육중한 발소리를 내면서 두 계단씩 뛰어오르며 점점 다가오는 중이었다.

마음이 급해진 냉염노조가 다급해 부적 네다섯 장을 꺼내서 몸 이곳저곳에 붙여댔다.

파파팟.

빛덩이들이 나타나 그의 몸에 스며들자 간신히 한립과 웅산의 걸음을 쫓을 수 있었다.

이제 정상까지 남은 계단의 숫자는 백여 개 뿐이었다.

가면 갈수록 계단은 가팔라졌고 중력 금제는 가중되어서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었다.

그들의 걸음이 차례로 느려지는데 그나마 한립과 웅산이 안정적으로 걸어 올라갔고 냉염노조는 지쳐 보였다.

별빛이 어둑해진 냉염노조가 헉헉거리면서 깜빡깜빡 힘을 잃어가는 부적들을 살폈다.

다행인 것은 곰보 노인의 상황도 좋지 않다는 점이었다.

검은 비늘이 빠르게 벗겨지면서 다시 얼굴이 창백해지고 다리도 후들후들 떨렸다.

“제길!”

곰보 노인은 벌컥 화를 냈다.

복용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수태현원단의 혈맥의 힘이 완전히 몸과 융합되지 못하고 사라지고 있었다.

냉염노조가 슬쩍 그런 노인을 보고 기뻐했다.

검은 비늘이 사라진 곰보 노인은 어쩔 수 없이 잠시 멈춰 섰고 냉염노조도 제자리에서 멈춰 강렬한 성광지력이 느껴지는 남색 단약을 꺼내 들었다.

두말할 것 없이 단약을 삼킨 냉염노조는 대주천성원공을 운용해서 약효를 녹이며 별빛을 다시 강화했다.

가볍게 숨을 내쉰 그가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계단을 올랐다. 이때 눈빛이 서늘해진 곰보 노인이 두 손을 들어 열 손가락을 튕겼다.

쉬쉬쉬쉭!

가느다란 검은 실 열 개가 허공을 가르고 사라졌다.

다음 순간 냉염노조 뒤의 허공에서 번득 검은 실들이 나타나 그의 등을 찔러 들어갔다.

이때 은백색 계단이 우웅! 울리고 밝은 노란빛을 떠올렸다. 막대한 중력이 삽시간에 검은 실들을 휘감았다.

이로 인해 검은 실들의 방향이 틀어졌으나 그중 세 가닥은 여전히 냉염노조를 향해 있었다. 냉염노조가 이를 눈치 채고는 기겁해 옆으로 피했다.

푸푸푹!

최선을 다했지만 중력의 영향으로 제대로 피하지 못해서 검은 실 3가닥이 보호막을 뚫고 체내로 들어왔다.

퍼퍼펑!

몸속으로 파고든 실들은 즉시 폭발해서 냉염노조는 피를 줄줄 흘리며 엎어지고 말았다.

그의 비명에 한립과 웅산이 분분히 뒤를 돌아보았다.

곰보 노인도 이렇게 쉽게 그를 처리할 수 있을 줄은 몰랐는지 의외라는 얼굴이었다.

음산한 미소를 흘리던 그의 안색이 순식간에 달라졌다.

그의 머리 위에서 갑자기 쿠쾅! 하는 굉음이 울리며 항아리 굵기의 자홍색 뇌전이 압도적인 기세로 떨어졌다.

뇌전빛에 휩싸인 곰보 노인은 괴성을 터트렸고 그 소리는 금세 뚝 그쳤다.

요란한 뇌전빛 속에서 몸이 네다섯 갈래로 터진 곰보 노인은 작은 신영까지 타버렸기 때문이다.

한립은 연달아 일어난 놀라운 일들에 잠시 말문이 막혔지만 곰보 노인이 죽어 안심이 되었다.

“흥! 감히 여기서 공격을 하다니.”

그 모습에 웅산이 냉소를 흘리며 더는 쳐다보지 않고 위로 올라갔다.

한립은 그런 웅산의 뒷모습을 보면서 눈썹을 꿈틀했다.

‘이곳에 중력 금제 외에도 다른 현묘한 금제가 작용하고 있었구나.’

그는 바로 출발하지 않고 쓰러져 있는 냉염노조를 바라보았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기는 했어도 곰보 노인의 죽음에 안도하는 표정이었다.

그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핏빛 단약을 꺼내 몸을 보하고는 몸에 뚫린 세 개의 구멍이 사라지는 것을 보고 몸을 일으켰다.

한립은 그가 겉모습만 멀쩡해졌을 뿐 아직 부상에서 벗어나지 못해 다시 계단을 오르려면 약간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귀읍종 수사들이 멀찍이 떨어져 있어서 그들이 오를 때까지 회복할 시간이 충분하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한립이 몸을 돌려 계단을 오르려는데 아래쪽에서 아주 조그만 소음이 들려왔다.

‘이건……!’

그는 고개를 돌려 상황을 보고는 안색이 급변했다.

냉염노조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아래쪽 계단에 뇌전빛이 사라지고 망가진 시체 한 구가 놓여 있었다.

그것은 사람의 시신이 아니라 암홍색 목재로 이루어진 괴뢰의 잔해였다. 그리고 그 옆에 창백한 안색의 곰보 노인이 멀쩡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그 모습에 냉염노조와 웅산도 깜짝 놀랐다.

“체명괴뢰(替明傀儡)!”

한립은 암홍색 괴뢰 잔해를 보고 노인이 위기의 순간 그걸 이용해 목숨을 부지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곰보 노인이 단약을 꺼내 복용하자 차차 안색이 평온해졌다.

“이곳에 이런 금제까지 펼쳐져 있을 줄이야! 허나 사람을 죽일 방법이 술법 한 가지인 것은 아니지.”

차갑게 웃음을 흘린 곰보 노인이 한 걸음 한 걸음 계단을 올라갔다.

이에 냉염노조가 다급히 달아나려 했으나 발을 들어 올리자마자 얼굴이 붉어지며 피를 토하고 엎어졌다.

“한 수사, 살려주십시오!”

흙빛이 된 냉염노조가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한립을 올려다보고 외쳤다. 미간을 좁힌 한립은 움직이지 않았다.

육우청을 데리고 올라가는 것만으로도 꽤 힘이 드는데 냉염노조까지 더해지면 전력을 다한다고 해도 무사히 정상에 오를 것이라는 확신이 없었다.

냉염노조가 한립이 표정을 보고 절망하려다 갑자기 눈을 크게 떴다.

“대주천성원공의 후반부 공법이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대주천성원공 후반부를 갖고 있단 소리십니까.”

한립은 가슴 속의 흥분을 가라앉히고 전음으로 반문했다.

“지금은 없지만, 이번에 제 목숨을 구해주시면 공법이 있는 곳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유한궁에 후반부 공법이 있다는 소리시군요.”

“맞습니다. 대주천성원공 상반부가 적힌 돌판도 바로 여기서 지난번에 갖고 나간 것이고요. 당시 우연히 어떤 금제를 촉발해 위치를 찾아냈지, 아주 은밀한 곳에 숨겨져 있어서 제가 안내하지 않으면 수사가 혼자 그것을 찾아내기는 무척 어려울 겁니다.”

한립은 냉염노조의 필사적인 설명에 고민하는 기색을 보였다.

냉염노조는 웅산과 대화를 할 당시 지난번에 상당한 보물을 찾은 것처럼 말했고, 그에게도 대주천성원공을 어느 비경 안에서 찾았다고 이야기했었다.

거기다 선부의 바깥 금제를 파훼할 때 상반부 공법이 담긴 푸른 석판이 공명한 것도 이곳과의 연관성을 입증했다.

그러는 사이 곰보 노인은 열댓 개의 계단을 올라와 냉염노조와의 거리를 더욱 좁혔다. 곰보 노인이 가까워지자 냉염노조는 겁에 질려 다시 전음을 보냈다.

“제가 살기 위해 거짓을 말하는 거라고 의심하는 것입니까? 심마에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이게 거짓이면 심마에 당해서 죽느니만 못한 꼴을 당하게 될 겁니다.”

“좋습니다, 수사를 믿어드리지요. 여기서 잠시 기다리게.”

고개를 끄덕인 한립은 육우청을 그곳에 내려놓고 성큼성큼 내려갔다.

그녀가 줄곧 눈을 감고 있던 것은 부담스럽게 하고 싶지 않아서였지 정말 잠든 게 아니었다.

그녀도 일련의 사건들을 보았기에 얌전히 계단에 서서 그를 기다렸다.

올라갈 때는 힘들었던 길이 내려갈 때는 편했다.

한립은 금방 냉염노조 옆에 다다라 냉염노조를 들어 올렸다.

그걸 지켜보는 곰보 노인의 눈이 분노로 이글이글했다.

아직 거리가 남았고 아까 호되게 당해서 다시 공격할 엄두가 나지 않아 지켜보기만 해야 했다.

쉬지 않고 계단을 오르던 웅산은 한립의 행동에 어이없다는 눈빛을 보냈다.

한 명을 데리고 올라갈 때는 그런가 보다 했지만 이런 곳에서 두 명을 데리고 세 배의 중력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행위였다.

그가 생각할 때 진선경 수사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립은 냉염노조를 데리고 빠르게 계단을 올라 육우청도 안아 들었다. 양팔에 한 명씩 붙들고 올라가자니 어깨가 묵직하고 몸이 휘청거렸다.

후웅!

냉염노조와 육우청의 표정이 어두워지는데 심호흡을 한 한립이 주문을 외워 몸에서 자금색 빛을 불러냈다.

그 안에서 맑은 울음소리와 함께 천룡, 채봉, 청란, 뇌붕 등의 허상이 떠올라 그의 몸속으로 흡수되었다.

체구가 몇 배로 불어난 한립은 자금색 비늘이 자라난 몸에서 팔이 네 개나 더 자라났다.

그는 새로 생긴 흉악한 네 팔로 냉염노조와 육우청을 단단히 안고 이전과 비슷한 속도로 계단을 올라갔다.

곰보 노인은 정말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뒤쪽에서 들려오는 기척에 고개를 돌린 웅산도 입을 벌렸다.

“육신의 경지가 대단하십니다, 한 수사! 정말 놀라워요.”

냉염노조가 희희낙락하며 칭찬을 건넸다.

“그런 말씀은 되었고, 물을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한립은 열심히 걸어 올라가면서 담담히 말했다. 그에게 안겨 올라가던 냉염노조가 약간 민망해하며 답했다.

“말씀해 보시지요.”

“아까 저자를 혈한이라 부르는 것을 들었습니다. 당시 제가 성괴문 임무에 참가했던 것은 아시겠지요. 곰보 노인이 그때 나타난 혈한과 동일인입니까?”

한립은 전음으로 질문했다. 냉염노조는 표정이 굳어 한동안 말이 없다가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귀읍종 다른 수사들의 신분도 전부 가짜입니까?”

“한 수사, 이 일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 것이 나을 겁니다. 많이 알아서 좋을 것도 없을 테니까요.”

냉염노조는 의미심장하게 대답을 피했다.

“맞는 말씀입니다. 저도 그저 호기심에 물은 것이에요.”

한립은 미소를 짓더니 정말 더는 캐묻지 않았다.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도 그는 부지런히 움직여서 정상까지 계단이 3, 40개 밖에는 남지 않았다.

혈한이 멀리 뒤처져 있는 동안 웅산은 종점을 앞두고 있었다.

한립은 남은 계단을 신중하게 살폈다. 얼마 남지 않았지만 지금보다 더 힘든 길이 될 게 분명했다.

균일하던 그의 걸음이 한 걸음을 올라가고 한숨을 돌리고 다시 올라가는 식으로 바뀌었다.

웅산도 계단을 하나씩 오를 때마다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중력이 어찌나 강한지 아예 공기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약간 피로한 기색의 한립도 몸에서 자금색 빛과 별빛이 반짝거렸다. 육우청과 냉염노조가 그의 상황을 보고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한 수사, 우리 중 한 명을 남겨 두고 정상에 올라간 다음에 다시 내려오는 것은 어떻습니까?”

“그럼 시간을 너무 허비하게 됩니다. 아직 버틸만하니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냉염노조의 제안에 한립이 겨우 다섯 계단 앞에서 쉬고 있는 웅산을 보며 차분히 말했다. 그는 말을 마치고 한 계단을 더 올라갔다.

쿵!

계단이 얕게 진동했다.

눈꼬리가 올라간 웅산도 지지 않고 걸음을 뗐다.

몸이 덜덜 떨리는 한립은 숨을 고르면서도 몸의 기운을 조정했다.

이제 정상은 지척이었고 누구든 먼저 올라가는 자가 더 빨리 보물을 찾아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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