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4화. 산을 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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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에서 눈치 채기 어려울 만큼 희미한 노란빛이 떠오르며 강력한 흡입력이 발생해 몸이 만 배는 무거워졌다.
“이럴 줄 알았지…….”
마지막으로 계단에 선 육우청의 고운 얼굴이 찌푸려졌다. 몸이 격하게 휘청인 그녀는 푸른빛을 뿜어 허상의 학 날개를 펼쳤다.
그러나 푸른 학이 아무리 열심히 날개를 펄럭여도 육우청의 발밑에서 느껴지는 흡입력은 줄지 않았다.
“계단에 중력 금제가 펼쳐져 있습니다. 선령력이나 어떤 보물로도 저항할 수 없고 육신의 힘으로만 올라가야 합니다. 상황이 급박해 먼저 가볼 테니 알아서 하십시오.”
한립과 육우청의 귓가에 냉염노조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 말을 듣고도 한립은 태연했지만 육우청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냉염노조는 열심히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대주천성원공을 수련해 육신의 힘이 남다른 그는 벌써 3, 40번째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웅산은 본래 힘이 강하지 않았으나 미리 준비를 해왔는지 신고 있는 신발에서 빛이 흘러나와 냉염노조와 그리 차이나지 않는 속도로 움직였다.
한립이 고개를 돌려 전송진 위의 곰보 노인 일행을 보았다. 전송진의 하얀빛이 어둑해져서 금방 발동을 멈출 듯했다.
“우리도 가지.”
한립은 빠르게 위로 올라갔고 육우청도 심호흡을 한 뒤 푸른빛을 흩어버렸다.
네 명의 수사들이 계단을 오르자 곰보 노인의 얼굴에 초조함이 떠올랐다. 그도 전송진의 상황을 짐작하고 더는 힘들여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얼마 후 전송진의 마지막 빛이 깜박거리다 사라졌다.
“쫓아라!”
몸이 가벼워진 곰보 노인이 번개처럼 날아올랐고 나머지 귀읍종 수사들도 그 뒤를 쫓았다.
쿵! 쿵! 쿵!
쪽빛 돌바닥을 벗어난 그들은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바위처럼 묵직하게 떨어져서 구덩이가 생겨났다.
서둘러 기어 나온 이들은 다치지는 않았으나 엉겁결에 엉덩방아를 찧어 꼴이 말이 아니었다.
이에 곰보 노인의 얼굴이 열을 받아 파랗게 변했고 그의 표정에 다른 귀읍종 수사들이 떨며 침묵했다.
“금공 금제가 펼쳐져 있나 보군. 너희가 얼마나 도망갈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내 손에 잡히면 가루가 되고 말 것이다.”
그는 살기등등하게 한립 일행에게 이를 갈며 쾌속으로 지면을 가로질렀다. 그 뒤로 귀읍종 수사들이 따르고 있었다.
빠르게 은백색 계단 아래 이른 그들은 머뭇거리지 않고 발을 디뎠다. 어깨가 묵직해진 곰보 노인은 이마에 굵은 주름이 잡혔다.
계속되는 금제에 짜증이 치밀었기 때문이다.
“모두 조심하라.”
“예!”
그를 시작으로 귀읍종 수사들이 힘겹게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한립 일행을 올려다보는 곰보 노인의 입가에 비웃음이 걸렸다.
그는 중력 금제의 영향을 그리 많이 받지 않는지 다른 이들과 거리를 벌리면서 급히 쫓아 올라갔다.
이에 유심히 지켜보던 냉염노조가 몸에 희미하게 별빛을 일으키고 속도가 빨라졌고, 웅산도 무슨 수를 썼는지 금빛을 반짝여 속도를 높였다.
고된 등산으로 땀에 흠뻑 젖은 육우청은 숨이 가빠 가슴이 빠르게 오르락내리락 했고 계단을 하나 오를 때마다 온몸이 후들후들 떨렸다.
계단은 위로 갈수록 중력 금제의 위력이 세져서 피로가 누적된 그녀는 처음보다 3, 4배의 고통을 겪고 있었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그녀는 얼마 거리를 두지 않고 앞에서 올라가는 한립을 보고 멍해졌다.
그는 전혀 힘들어 보이지 않았다. 다만 표정이 약간 이상해서 마치 딴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류……. 한 오라버니.”
육우청이 부르자 한립이 또렷해진 눈빛으로 돌아보았다.
“왜 그러지?”
“중력 금제가 너무 강력해서 저는 더는 안 되겠어요. 저 때문에 기다려 주시지 않아도 되니까 얼른 올라가세요.”
그녀는 간신히 웃음을 지어 보였다.
한립이 말없이 그녀의 뒤를 보니 곰보 노인이 연달아 계단을 오르며 그들을 빠르게 따라잡고 있었다.
계단에 발끝이 닿자마자 다음 계단으로 넘어가는 식이었다.
“제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돼요. 저희와 원래부터 아무 원한도 없는 사이인데, 저같이 실력도 없는 수사를 신경이나 쓰겠어요? 따라잡혀도 별일 없을 테니 어서 올라가세요.”
육우청이 다시 그를 재촉했다. 그러나 한립은 갑자기 육우청 옆으로 내려와서 그녀의 허리에 손을 감고 들어 올렸다.
깜짝 놀라 굳은 그녀가 반항하려 할 때는 이미 그에게 안겨 있었다. 한립은 육우청을 든 채 그녀가 견디던 중력이 더해지는 것을 느끼며 몸을 움직였다.
버틸만한 수준이라서 텅텅텅 계단을 밟으며 속도를 높였다.
“한 오라버니…….”
육우청이 입을 뻐끔거리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동행하기로 약속했으니 능력이 되는 한에서는 보호를 해주겠네.”
한립은 앞만 쳐다보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그의 평범한 얼굴을 올려다보던 여인이 고개를 숙였다.
앞서가던 냉염노조와 웅산이 한립의 행동을 보고 의아한 기색이 스쳤다.
“냉염 수사, 퍽 정이 깊은 벗을 두셨습니다. 은천계단(銀天階段)에서 짐 덩이까지 안아 들고 대단합니다.”
웅산의 눈에 비웃는 기색이 스쳤고, 냉염노조도 눈살을 찌푸렸다.
은백색 계단의 중력 금제는 대단해서 원래 몸이 튼튼한 그도 몇 년간 준비를 해왔지만 한순간도 방심할 수 없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을 안고 올라오는 한립은 그들보다 두 배는 힘들 것이 분명했다.
냉염노조도 한립을 보는 시선이 약간 냉담해졌다. 한립은 차차 속도를 높여 거의 곰보 노인과 비슷한 수준으로 뛰어 올라갔다.
그걸 본 곰보 노인의 표정이 가라앉았고 앞서 올라가던 냉염노조와 웅산도 깜짝 놀랐다.
한립이 다른 사람을 안고서 속도가 줄기는커녕 배는 빨리 올라올 줄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렇게 반 시진이 지나갔다.
다들 계단을 절반 넘게 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한립은 가장 앞에서 올라가는 냉염노조와 웅산보다 겨우 이십여 계단을 뒤처져 있을 뿐이었다.
곰보 노인이 백여 계단을 사이에 두고 그 뒤를 쫓았다. 귀읍종의 다른 수사들은 훨씬 뒤에 있어서 이제 검은 점처럼 보였다.
중간에 이른 지금 은백색 계단의 중력은 그야말로 무시무시했다.
몇몇은 이전과 같은 속도를 내지 못하고 느려졌다.
그러나 냉염노조는 가장 앞에서 걸어가는 데도 아주 신비로운 모양새로 한발 한발 균일한 속도를 냈다.
금빛을 방출하다 못해 피부가 금색으로 물들어가던 웅산은 몸에 무늬들이 떠올라 황금으로 만든 조각상처럼 보였다.
냉염노조 뒤에서 계단을 오르는 그의 이동속도도 안정적인 편이었다. 그런 그를 보고 냉염노조는 무척 놀라워했다.
‘어디서 연체술에 버금가는 비술을 구해온 것인지…….’
지난번 두 사람이 유한궁에 와서 계단을 오를 때는 이렇지 않았었다. 그동안 이를 악물고 준비를 한 것이 틀림없었다.
냉염노조의 시선이 그 뒤쪽으로 향했다. 그런데 한립이 그처럼 별빛을 두르고 육우청을 안은 채 꿋꿋하게 올라오고 있었다.
힘든 표정도 없이 그들을 쫓는 것이 아직은 여유로워 보였다. 게다가 눈을 꼭 감은 육우청은 잠든 것처럼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그걸 본 냉염노조는 가슴이 서늘해졌다. 한립의 육신의 힘이 그의 상상을 초월했기 때문이다.
마침 한립이 고개를 들어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고, 철렁한 냉염노조는 어색하게 웃어 보이고는 고개를 돌렸다.
담담하게 냉염노조에게서 시선을 거둔 한립은 은백색 계단 끝을 응시했다. 만개 정도로 보이는 계단은 이제 3천여 개밖에 남지 않은 듯했다.
현재 육신의 힘을 일부밖에 쓰고 있지 않아서 남은 계단의 중력 금제 증폭 정도가 균일하다면 무난하게 오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저…….
한립이 슬쩍 뒤를 살피자 곰보 노인이 몸에서 검은빛을 반짝거리며 쫓아오고 있었다.
곰보 노인은 육체의 힘은 그리 강하지 않아 그들을 따라잡지는 못해도 어쨌든 금선이라 어떻게든 정상에 오를 것은 확실했다.
계단이라는 특수한 환경을 벗어나면 분명 그들을 공격할 테고 말이다. 재빨리 생각을 마친 한립은 성광지력을 짙게 만들어 5할 정도 빠르게 발을 놀렸다.
냉염노조와 웅산은 한립의 속도가 확 늘어나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몇 호흡 만에 한립이 그들 뒤로 따라붙어 따라잡히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냉염노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와 손을 잡기로 약속했지만 바로 눈앞에 그가 학수고대하던 유한궁이 있었고 누구든 먼저 가게 할 수는 없었다.
파아앗!
그는 수결을 맺어 성광지력으로 피부에 막을 형성했다.
바로 진극막이었다. 체구가 커진 냉염노조가 굵은 다리로 더 빨리 계단을 올랐다.
웅산도 주문을 외는 중이었다.
금빛이 짙어진 피부에 금속 같은 광택이 흘러 완전히 걸어 다니는 황금 조각상이 되었다. 왜소하던 체구도 크게 불어나 건장한 황금 거한이 따로 없었다.
쿵쿵쿵!
묵직한 발소리가 연속적으로 들려왔다.
한립 일행이 동시에 속도를 높이자 곰보 노인은 저절로 뒤처지게 되었다. 곰보 노인은 화가 치밀었다.
수행이 그들보다 훨씬 높지만 아무 준비도 없이 맨몸으로 중력 금제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니 지금 속도가 최선이었다.
세 사람이 빠르게 위로 올라가는 것을 보자 그의 마음이 급해졌다.
팟.
그의 손에서 빛이 반짝이고 하얀 부적이 나타났다.
큰 힘을 지니고 있다는 신령 거령(巨靈)의 형상이 그려진 부적에서 강렬한 파동이 퍼져나갔다.
곰보 노인이 하얀 부적을 자신의 몸에 붙인 순간, 부적이 번득 사라지고 눈부신 하얀빛이 터져 나왔다.
경련이 일어난 사람처럼 몸을 떨던 노인의 몸에서 하얀 무늬가 떠올랐다.
노인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성큼성큼 세 사람을 쫓아 빠르게 움직였다.
“거령대력신부(巨靈大力神符)!”
한립은 육신의 힘을 강화해주는 부적을 알아보고는 눈썹을 끌어올렸다. 그러나 그는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발을 움직이는 데 집중했다.
부적의 위력이 세긴 하지만 오래 이어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한식경이 더 지나갔다. 바삐 쫓고 쫓기면서 적잖은 계단을 올라가서 이제 남은 것은 천 개 정도였다.
냉염노조와 웅산이 속도를 냈지만 결국 한립은 바로 뒤까지 쫓아왔다. 하지만 그들을 추월하지는 않았다.
하얀빛이 깜빡거리면서 숨이 거칠어진 곰보 노인은 초반에는 백여 계단 아래서 따라가다 이제는 2, 3백 계단은 뒤처져 있었기 때문이다.
점점 걸음을 옮기가 힘들어지는데 한립 등 세 사람은 여전히 빠르게 움직이자 노인의 표정이 음침해졌다.
고민하던 그는 결국에는 손바닥 크기의 검은 옥함을 꺼내 들었다. 봉인 부적을 떼어낼 때마다 빛이 번쩍번쩍해서 눈길을 끌었다.
곰보 노인은 입에서 검은빛을 내뿜어서 옥함이 발산하던 빛을 완전히 없애고 조심스럽게 뚜껑을 열었다.
달걀 크기의 검은 단약이 검은색의 광채를 흩날리고 있었다. 그 검은 광채 속에서 희미하게 요수 허상이 떠다녔다.
용과 비슷하면서도 용도 아닌 머리에 뿔이 솟고 등에 날개가 돋은 요수였다.
검은 단약의 정기가 가득 담긴 기운에는 법칙의 힘도 약간 섞여 있었다.
곰보 노인은 아까워 죽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단약을 삼켰다.
“저건 수태현원단(獸胎玄元丹)!”
웅산이 놀라 중얼거렸다.
“그게 어떤 단약입니까?”
뒤쪽을 주시하던 냉염노조가 냉큼 물었다.
한립이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는 선계에 올라온 이후 수시로 연단과 관련된 경전을 찾아보았다. 특히 촉룡도에 있는 동안에 수많은 관련 경전을 볼 수 있어서 그때 수태현원단이란 이름을 들어 보았다.
이름 그대로 천지의 기이한 짐승들의 태반 혹은 피나 알을 주재료로 제련하는 진귀한 단약으로 천부적으로 육신이 강한 요수의 힘이 녹아 있었다.
이 단약을 복용하면 육신의 힘이 크게 세졌고 일정 확률로 주재료로 쓰인 요수의 천부적인 신통을 부릴 수 있었다.
만일 태생적으로 법칙의 힘을 타고난 요수를 재료로 썼다면 도단처럼 일정 확률로 법칙의 힘을 깨우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 단약을 제련하는 데는 도단 못지않은 어려움이 따라서 정말 보기 힘든 단약이었다.
웅산은 입술을 달싹여 냉염노조와 한립에게 수태현원단에 대한 설명해주었고, 그 말을 들은 냉염노조의 표정이 달라졌다.
쿵!
곰보 노인의 몸에서 검은빛이 흘러나와 창백하던 얼굴을 붉게 만들었다.
으득. 으드득!
동시에 노인의 몸에서 근육이 튀어나오며 체형이 두 배 가까이 커졌다.
거구가 된 노인은 피부가 금속성의 광택이 흐르는 검은 비늘로 뒤덮인 데다 손가락에서도 날카로운 검은 발톱이 길게 자라났다.
반인반수의 모습이었다.
검은 기운이 자욱하게 꼈다가 사라지고 곰보 노인이 위풍당당한 자태를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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