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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691화 (1,448/2,000)
  • 1691화. 전언

    *

    쉐액!

    한립이 곰곰이 생각하는 동안 기회를 노리던 비둘기 한수가 돌연 날개를 펼치고 날카로운 발톱으로 중년인의 목을 공격했다.

    전광석화 같은 움직임이었다.

    갑작스러운 기습에 모골이 송연해졌지만 중년인도 한두 해 싸워온 것이 아니라 가슴과 배의 남색 별 무늬 7개를 반짝이면서 목을 포함해 전신의 십여 곳에서 빛을 뿜었다.

    하얀빛이 떠올라 그의 몸을 가렸을 때 비둘기 한 수의 발톱이 목을 할퀴었다.

    채챙!

    날카로운 마찰음과 함께 비둘기 짐승의 발톱이 사내의 목부터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으나 하얀빛을 뚫지는 못했다.

    그를 지나치면서 얼음 비둘기가 훽 목을 꺾어 입에서 은빛 얼음실을 뿜었다. 섬뜩한 한기가 어린 실은 중년사내의 심장을 노리고 있었다.

    “흥!”

    눈을 번득인 사내가 요란한 하얀빛을 머금은 주먹으로 날아드는 얼음실을 강타했다.

    펑!

    얼음실이 터지는 순간 한기를 품은 하얀 안개가 팔을 타고 올라가 사내의 오른팔이 얼음으로 뒤덮였다.

    중년 사내는 팔이 저릿한 것을 느끼는 찰나 얼음을 처리하기 전 싸우고 있던 원숭이 한수 한 마리가 육중한 몸둥이로 박아 그를 날려버렸다.

    쿠쾅…….

    중년인이 동굴 벽에 부딪혀 박히는 바람에 벽에 균열이 생겼다. 하지만 얼른 팔로 벽을 내리쳐 반동으로 빠져나온 그는 심한 부상을 입은 것 같지는 않았다.

    “웅산 수사, 그렇게 계속 실력 발휘도 안하고 수행을 속이려면 앞으로는 따로 다니는 게 어떻습니까?”

    화가 난 중년인이 초췌한 노인에게 소리쳤다.

    “그게 지금 할 소립니까? 냉염 수사가 갑자기 이런 곳에 내려가 보자고만 안했어도 우리가 여기서 괜히 한수들과 싸우고 있겠냐는 말입니다.”

    초췌한 노인도 만만치 않게 심기가 불편한지 바로 쏘아붙였다.

    “아까 내려가 보자고 할 때는 수사도 좋다면서요! 비경의 보물찾기가 어디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될 일입니까? 그리고 한수 몇 마리 죽이고 지나간다고 뭐 큰일이라도 난답니까?”

    “저는 해야 할 일을 처리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하지만 수사가 이리 욕심을 부리니 말리지 못했을 뿐입니다.”

    동굴을 쩌렁쩌렁 울리는 다툼 소리가 한 명은 촉룡도 부도주였던 웅산, 다른 한 명은 한립과도 안면이 있는 냉염노조라는 것이 확실해졌다.

    그러나 한립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은 한 명은 귀읍종 수사인 척 이곳에 들어왔고, 다른 한 명은 남려족 수사 무리에 끼어있었으면서 지금 같이 있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이곳에서 우연히 만나 동행을 했다기에는 서로에 대해 잘 아는 눈치였다.

    “됐습니다, 됐어요. 이번 일은 어쨌든 제 실수니까 이곳에서 나가서 처음으로 찾는 보물들은 수사에게 먼저 선택권을 주겠습니다. 성가신 녀석들이나 어서 해치우고 빠져나가시지요.”

    냉염 수사가 금방 이성을 되찾고 말했다. 그 말에 웅산 역시 조용히 금색 장창을 불러들여 새로운 검결을 맺었다.

    “가라.”

    그의 기운이 갑자기 변해 진선 후기의 강력한 법력 파동과 함께 금빛 검기 허상들이 물결처럼 퍼져나갔다.

    웅산이 본 실력을 드러내 싸움을 마치고 뒤를 돌아보았을 때는 냉염노조도 마지막 원숭이 한 수의 머리를 주먹으로 내리쳐서 그 안에 숨겨진 한백과 함께 가루로 만들어 버렸다.

    “이번에는 북한선궁과 창류궁 등의 세력들에서 궁주 급들이 나서서 상황이 복잡해졌습니다. 앞으로는 이런 일로 시간을 끌지 않도록 하지요.”

    웅산이 그런 냉염노조를 향해 당부했다.

    “그럴 만도 합니다. 지난번 선부 개방 때까지 수색한 구역이 전부 명한선부 가장 외곽의 유한경 경내였고 선부의 핵심 구역은 따로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으니까요. 외부에서도 그리 많은 보물이 발견되었는데 내부에는 얼마 진귀한 보물이 있겠습니까. 그러니 각각의 세력이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하겠지요.”

    냉염노조가 탄식하듯 말했다.

    “무상맹과 십방루의 신분을 가장해 들어왔어도 언제든 위험한 상황에 처할 수 있다는 것은 따로 경고하지 않아도 되겠지요?”

    “잘 알고 있습니다. 허나 너무 걱정은 마세요. 그곳은 아주 은밀한 장소에 숨겨져 있고 당시 함께 그곳을 발견한 다른 이들은 전부 죽지 않았습니까. 누구도 우리보다 먼저 그곳을 찾을 수는 없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일단 그곳으로 가서 각자 원하는 물건을 얻은 후에는 따로 행동하는 것으로 합시다.”

    얼굴을 푼 웅산의 말에 냉염노조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를 마친 그들은 동굴에서 지면으로 뚫린 균열을 통해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우리도 따라가세.”

    한립은 육우청에게 한 마디를 해주고 절벽의 통로를 빠져나가 그들의 뒤를 쫓았다. 육우청은 일순 머뭇거리는 기색이 스쳤으나 그를 따랐다.

    수행이 한립과 냉염 노조 등 보다 훨씬 떨어지는 육우청은 기운까지 숨겨야 해서 자꾸 뒤로 쳐졌다.

    “오르게.”

    한립은 다시 청연주를 방출해 그녀를 태우고 소매 속에서 검은 물덩이를 불러냈다. 그윽한 검은빛이 퍼져 선박 주위로 보호막을 만들었다.

    그 안에서 영력 파동이 물을 만난 불처럼 사그라들어 어떤 기운도 빠져나가지 못했다.

    한립은 물의 법칙에 중수를 더해 스스로 창안한 은신 신통이 쓸만 한 것에 고개를 끄덕였다. 선박은 흐릿한 그림자처럼 냉염노조와 웅산의 뒤를 은밀하게 쫓았다.

    “저들을 왜 쫓으시는 건가요?”

    육우청이 작게 물었다. 수행과 의식의 힘이 떨어지는 그녀는 그들의 대화를 듣지 못했던 것이다.

    “지난번 선부 개방 때 보물이 숨겨진 곳을 찾아두었다고 이야기를 나누더군. 우린 이곳이 처음이라 아는 바가 적고 여긴 수사가 지닌 지도에 표시된 구역이 아니니 무턱대고 돌아다니는 것보다 저들을 쫓는 것이 나을 걸세.”

    “저희가 운이 나쁘지 않네요!”

    그 말에 육우청이 미소를 머금었다.

    * * *

    그 시각, 선부의 모처.

    끝없이 펼쳐진 빙원에 높낮이가 다른 언덕들 사이로 설산 하나가 구름을 뚫고 솟아 있었다.

    팟.

    이때 산봉우리 앞 허공에서 파동이 일고 반투명한 하얀 소용돌이가 떠올랐다.

    잠시 후 그 안에서 벽옥으로 만든 마차가 빠져나왔다.

    커다란 옥돌을 통으로 조각해 만든 마차 위에는 키가 큰 사내의 신영과 창을 든 금갑괴뢰 두 마리가 타고 있었다.

    하얀 광채에 가려져 용모가 보이지 않는 사내가 어딘가를 쳐다보았다.

    “너무 늦지는 않았구나.”

    그의 발끝이 마차를 지그시 밟았다.

    * * *

    냉염노조와 웅산은 한 번도 멈추지 않고 사나흘을 날아갔다.

    광활한 빙원을 지나 산봉우리가 보이기 시작했는데 그 위에도 얼음과 눈이 가득해서 아름답게 반짝였다.

    가끔가다 금제가 파훼되지 않은 궁전이 나와도 두 사람은 멈추지 않았다.

    “꽤 멀리까지 가려나 봐요. 부디 실망스럽지 않은 장소로 안내해줘야 할텐 데요.”

    “가보면 알겠지.”

    육우청의 가벼운 탄식에 한립이 고개를 끄덕였다.

    쾌속으로 사나흘을 날아왔는데도 유한경이 어찌나 넓은지 끝이 보이지 않았다.

    한립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그냥 유명한 유적 정도로 생각했는데, 유한경만 해도 흑풍해역에 맞먹는 면적이라면 선부 전체는 소형 계면과도 맞먹을 정도로 거대하다는 소리였다.

    * * *

    다시 사흘이 훌쩍 지나갔다.

    눈 쌓인 산들이 사라지면서 전방에 드넓은 해역이 펼쳐졌다.

    마치 밤하늘처럼 새까만 바닷물은 무척 끈적끈적해 보였고 눈보라가 몰아쳐도 파문조차 일지 않았다.

    거대한 검은 거울이 놓여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냉염노조와 웅산은 주저하지 않고 새까만 해역 깊은 곳으로 날아갔지만 한립은 해안가에서 잠시 멈추었다.

    한립은 멀어져 가는 그들을 보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이미 누군가가 쫓는다는 것을 눈치 채고 일부러 유인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육 수사, 이 검은 해역에 대해 아는 바가 있는가?”

    “흑풍도에서 얻은 정보에 이런 곳은 없었어요.”

    한립의 물음에 육우청이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계속 따라가 보실 건가요?”

    그녀도 음침한 해역을 마주하자니 불안한 것 같았다.

    “며칠을 따라왔는데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네. 어딜 가려는 것인지 한번 가보세.”

    한립의 조종에 청연주가 빠르게 냉염노조와 웅산이 사라진 방향으로 날아갔다.

    * * *

    하루하루 시간이 지나갔다.

    ‘어디까지 가려는 것인지…….’

    두 사람을 쫓은 지 어느덧 열흘이 되어가는 터라 그동안 다른 보물을 노렸으면 적잖은 수확을 얻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던 한립이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왜 그러세요?”

    육우청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전방 해역에 하얀 안개가 드리웠다.

    그 안에서 하얀 수정빛들이 은은하게 반짝이는 것이 퍽 기이했고 엄청난 한기가 퍼져 나와 기온이 뚝 떨어졌다.

    “이건…….”

    육우청이 움찔했다. 앞에선 냉염노조와 웅산이 하얀 안개를 보고 멈춰서 기뻐하고 있었다.

    “하아, 우리가 드디어 찾았습니다.”

    냉염노조가 들떠서 외치는 소리에 웅산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누가 따라오거나 숨어 있지 않은지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진작 선박을 멈춘 한립은 육우청과 함께 조용히 숨죽였다.

    드디어 도착이었다.

    냉염노조와 웅산은 그들을 발견하지 못한 듯 망설이지 않고 하얀 안개 속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속도를 높이자 한립도 수결을 맺어 청연주를 빠르게 움직였다.

    하얀 안개 속으로 들어가자 한기가 바늘처럼 꽂혀서 중수로 이루어진 검은 보호막과 선박 자체의 보호막을 뚫고 들어와 갑판에 하얀 서리가 맺혔다.

    한립이 수십 개의 남색 깃발들을 선박 곳곳에 날려 진법을 하나 더 펼치고서야 한기가 적당히 차단되었다.

    “아!”

    아까부터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육우청이 입을 열었다.

    “왜 그러지?”

    “방금 유한경에 관련된 한 가지 소문이 생각났어요! 강력하기 짝이 없는 한기를 품은 유한무해(幽寒霧海)라는 해역에 유한궁(幽寒宮)이 감춰져 있다는 이야기요. 유한경에서 제일가는 보물창고라서 명한선부에 들어왔던 수사들이라면 전부 찾고 싶어했는데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해요. 설마 이곳이…….”

    “유한궁!”

    흥분한 육우청의 이야기에 한립도 눈이 번쩍 뜨였다.

    냉염노조와 웅산이 열성을 다해 이야기를 나누던 것을 생각하면 육우청의 추측이 맞을 수도 있었다.

    희망을 품고 그들을 따라 깊이 들어가니 하얀 안개가 짙어져서 방향은 커녕 천지도 구분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냉염노조와 웅산은 마치 익숙한 길을 가는 것처럼 오른쪽으로 갔다가 왼쪽으로 꺾었다 하면서 빠르게 움직였다.

    한 시진 넘게 이동하던 그들이 멈춰 서자 그들을 주시하던 한립도 이동을 멈추고 안개 속에 숨었다.

    머지않은 곳에는 그리 크지 않은 검은 섬이 있었다.

    섬을 두른 검은 광채는 가느다란 바늘을 빼곡하게 꽂아 만든 것처럼 생겼고 그 겉으로 검은 기류가 물처럼 흘러 누가 보아도 장관이었다.

    그 보호막 속으로 흐릿하게 보이는 거대한 궁전은 규모가 상당해 보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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