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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690화 (1,447/2,000)

1690화. 설사자(雪獅子)

*

어두운 하늘과 얼음으로 뒤덮인 땅.

시야가 제한되고 의식으로도 영력 파동을 감지하기 어려워 어디서 무엇이 튀어나올지 알 수 없었다.

푸른 보호막을 두른 선박은 적당한 속도로 날아가고 있었다.

“괴상한 눈보라 때문에 내 영목신통이 제약을 받고 있군. 수사의 환동귀목으로는 더 멀리까지 볼 수 있겠나?”

“시도해 보았지만 그리 멀리까지는 볼 수 없었어요. 의식도 간섭을 받아서 몇 리 밖의 움직임을 알아내는 게 한계고요.”

한립의 질문에 육우청이 고개를 저었다. 한립도 그럴 거라 생각했다. 이상한 눈송이가 굵어질수록 제약이 심해져서 그도 백 리 내의 동정을 살피는 것이 다였다.

“뭔가가 있는 것 같은데.”

거의 백 리를 이동했을 때 한립이 눈을 반짝였다.

“궁전 아닌가요?”

눈보라로 가려진 멀리에 가옥과 누각의 천장이 보였다.

“가서 확인해 보세.”

한립은 선박의 방향을 틀어 그곳으로 향했다.

건물들 앞에서 선박을 회수하고 바닥으로 내려선 그들은 생각보다 눈이 깊게 쌓여 있지 않고 그 밑에 단단한 돌판이 깔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잠시 주위를 돌아본 한립과 육우청이 뽀득뽀득 눈밭을 밝고 넓은 광장으로 들어갔다. 광장을 지나 처음으로 만나게 된 것은 붉은 벽돌과 목재로 만든 패루였다.

두 기둥 사이에 지붕만 얹어진 문은 그리 크지 않았으나 쌓인 눈 때문에 편액에 쓰인 글자가 보이지 않았다.

두 기둥과 기둥을 가로지르는 들보에 새겨진 주술문자는 예전에는 영기를 듬뿍 머금고 있었을 것 같았는데 지금은 유실되어 남아 있지 않았다.

패루를 지나 백여 보를 더 걸어가자 그들 앞에 대전이 나타났다.

문 두 짝 중 하나는 보이지 않고 문으로 이어지는 돌계단과 지붕 아래에 깊게 갈라진 검은 흔적이 있어 누군가 장도로 내려치기라도 한 것 같았다.

“패루 기둥의 주술문자들은 그렇다 치고 돌계단의 주술문자들은 또 뭘까요?”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패루와 이곳 그리고 광장에 새겨진 주술문자들이 모여 초대형 진법의 진안 노릇을 하고 있던 것 같은데 이미 누군가 망가트려 버렸군.”

“누군가 우리보다 먼저 이곳에 와있을 거란 말이세요?”

놀란 육우청이 목소리를 낮추고 사방을 힐끔거렸다.

“아닐세, 진법의 영력이 완전히 흩어져 오래전에 파훼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이전에 선부가 강림했을 때 누군가 이곳에 와 금제를 깨고 보물을 찾아갔을 거란 소리야.”

“그렇다면 이곳에서 시간 낭비할 것 없이 그냥 지나갈까요? 시간이 많지 않잖아요.”

보물이 털렸을 거란 소리에 안심하면서도 실망한 육우청이 다시 입을 열었다.

“급할 것 없네. 선부 안에 숨겨진 보물이 상당하다면 이곳과 비슷한 방식의 진법 금제로 감춰져 있는 것도 있겠지. 일단 진법의 배치를 파악해 두면 나중에 많은 시간을 절약할 수 있을 것이야.”

“제가 그 생각은 하지 못했네요. 역시 경험이 많은 오라버니께서 생각이 깊으세요.”

육우청이 큰 깨달음을 얻었다는 얼굴로 미소를 짓자 한립은 하나 남은 문짝을 밀고 대전 안으로 들어갔다. 육우청은 발소리를 죽여 살금살금 그의 뒤를 쫓아갔다.

대전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천장에 몇 군데 구멍이 뚫려 눈송이가 들어오다가 지면에 닿기 전에 흩어져 사라지고 있었다.

후문으로 나와 고개를 드니 다른 대전과 3층 누각 하나가 보였는데 역시 상당히 부서져 있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제 가지…….”

선박을 불러낸 한립이 육우청을 불러 다시 전방으로 나아갔다. 깊이 들어갈수록 눈발도 거세지고 건물들도 많아졌다.

그중 규모가 가장 큰 것은 처음 본 대전의 열 배 이상인 경우도 있었고 시종들이 머물던 것으로 보이는 작은 누각이나 탑들도 있었다.

전부 이전에 선부로 들어왔던 이들이 다녀가서 금제가 제거되어 있었다.

한립은 예상하던 바라 별생각이 없었으나 육우청은 입술을 내밀고 아쉬워했다. 내내 어떤 사람이나 요수도 마주치지 않아 한적한 비행이 되었다.

한립은 앞쪽의 산골짜기에 또 다른 건물들이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선박을 산골짜기 입구에서 멈춘 그들은 좌우에 우뚝 솟아 있는 눈 덮인 돌 사자상들을 발견했다.

한립이 선박에서 내려 왼쪽의 돌 사자상으로 다가가 쌓인 눈을 걷어내고 복잡한 주술문자가 새겨진 것을 확인했다.

이전에 보았던 것과 다르지만 비슷한 것으로 판단되었다.

“여기도 금제가 망가져 있네요. 이 안은 둘러볼 것도 없겠어요.”

육우청이 시무룩하게 말했다.

그 말에 무어라 대답하려던 한립이 인상을 찡그리고 그녀의 어깨를 잡아채 뒤로 보낸 다음 빠르게 물러섰다.

놀랍게도 골짜기 입구 우측에 엎드려 있던 돌 사자상이 부르르 몸을 털고 일어나서 그들을 향해 커다란 앞발을 휘두르고 있었다.

두껍게 쌓인 눈이 후두둑 떨어져 눈과 얼음으로 이루어진 짐승의 실체가 드러났다. 어째서인지 한립도 이 설사자(雪獅子)가 공격을 개시하기 전까지 존재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었다.

신중한 눈빛으로 주먹을 쥔 한립이 푸른빛을 응결해 내질렀다.

휘잉!

푸른 주먹 허상이 눈보라를 뚫고 떨어져 내리는 설사자 앞발을 향해 날아갔다.

파사삭!

설사자의 앞발이 주먹 허상과 부딪쳐 터져나갔고 그로 인해 얼음 조각들이 튀었다.

주먹을 거두기 전 한립은 미간을 좁혔다. 날카로운 한기가 침식해 주먹 끝 관절 부위에 하얀 서리가 맺혀 있었다.

흠칫 놀란 그가 주먹을 거두는 사이 설사자의 부서진 앞다리에 남색 소용돌이가 생겨나 주변의 눈보라를 끌어 모으고 있었다.

눈보라들이 뭉쳐서 순식간에 앞발이 절반이나 돌아와 있었다.

“저건 진법이나 괴뢰가 아니라 선부 비경 특유의 한수(寒獸)예요! 몸 안의 한백(寒魄)을 부수기 전에는 끝없이 눈보라를 흡수해 죽지도 다치지도 않는 존재지요.”

육우청이 짐승의 정체를 알아보고 한립에게도 알려주었다.

“한백? 그게 무엇이지?”

“짐승이 몸에 품고 있는 극한의 수정돌로 요수의 요단과 같은 것이라 보면 됩니다. 보통 두 눈 뒤에 숨겨져 있고요.”

그녀의 설명에 한립이 설사자의 짙은 쪽빛 눈을 응시하다 의식을 움직였다. 푸른 비검이 나타나 번득 설사자의 왼쪽 눈을 노렸다.

지능이 그리 높지 않은지 검빛이 기습해오는 데도 설사자는 아직 회복이 다 되지 않은 앞다리를 쳐들고 달려들었다.

검빛이 연꽃처럼 피어나며 앞발 전체를 가루로 만들고 그대로 왼쪽 눈을 뚫고 들어가 머리를 두 쪽으로 갈랐다.

챙강!

한립은 청죽봉운검 칼끝에 사람 머리통만 한 쪽빛 수정돌이 박힌 것을 보았다.

날카로운 칼끝이 수정돌을 관통하지 못하고 손가락 한 마디 만큼만 파고들어 있었다.

수정돌에서 새하얀 기류가 흘러나와 주변의 눈보라로 설사자의 머리를 메우는 중이었다.

한립이 설사자가 회복할 기회를 줄 리 없었다. 그가 검결을 맺자 푸른 비검이 웅! 떨면서 금빛 뇌전을 방출했다.

콰릉!

금색 뇌전 그물이 펼쳐져 설사자의 쪼개진 머리를 뒤덮었다.

새하얀 기류가 차단된 짐승의 머리가 폭발한 것은 물론 한백도 산산조각이 났다. 한백이 지탱해 주지 않는 짐승의 몸은 바닥으로 쿵 떨어져서 눈더미로 흩어졌다.

“정말 대단하세요!”

한립이 손짓해 푸른 비검을 소매 속으로 회수하는 것을 보고 육우청이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그녀는 빠르게 눈더미로 걸어가서 쪼그려 앉아 무언가를 찾아보다 일어났다.

“너무 위력적인 공격에 맞아 한수의 한백이 전혀 남지 않았어요.”

“그걸 가져다 어디다 쓰려고 그러는 것이지?”

실망한 여인의 표정에 한립이 눈썹을 끌어올렸다.

“극한의 성질을 지니고도 음산한 기운은 품고 있지 않아서 만년한수 보다는 못해도 비슷한 작용을 하거든요. 어쨌든 흑풍성에 가져가면 많은 영석으로 바꿀 수 있는 물건이에요.”

육우청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한립은 몸을 돌려 건물들 쪽으로 걸어갔다.

산골짜기의 길이 좁은 데다 허리까지 눈이 쌓여 있어 영력을 운용해 눈을 밀어내면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육우청도 그를 따라 하며 따라간 지 반 각이 흘렀을 때 그들은 평지에 가까운 광장에 이를 수 있었다.

아까처럼 건물들이 세워진 곳에는 눈보라가 크게 들이치지 않아 눈이 많이 쌓이지 않았다.

산골짜기 내의 건물들은 좁은 면적을 거의 다 차지할 만큼 웅장하고 화려했다.

많은 기둥과 지붕에 현묘한 주술문자가 새겨져 있었으나 전부 부서지고 안에 있던 보물도 싹 털린 뒤였다.

반 시진을 돌아다니면서 일일이 확인해도 망가진 보물과 자질구레한 물건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마지막 누각을 지나 한립은 산골짜기 끝에 있는 얼음 절벽을 마주했다.

절벽 아래가 움푹 파여 있어 그 깊이가 얼마나 되는 지 알 수 없었다.

한립은 남색 빛이 일렁이는 눈으로 그 아래를 내려다보다 고개를 젓고는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육우청이 입을 떼려다가 어차피 그도 이곳에 오래 머물 것 같지 않아 그냥 따라갔다.

한립은 아래로 통하는 길을 내려가면서 지면과 양쪽 벽이 다 단단한 남색 얼음으로 이루어져 있어 거울처럼 매끈하다는 것을 알아 차렸다.

내부는 아주 고요해서 두 사람의 걸음 소리 말고는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한립은 서두르지 않고 가끔 걸음도 멈춰가며 사방팔방을 살폈다.

이런 일이 서너 번 반복되자 육우청도 궁금증을 참지 못했다.

“왜 자꾸 멈췄다 가시는 거예요? 이 안에 뭐가 있나요?”

한립은 대답 없이 그녀를 돌아보고 가볍게 고개를 젓더니 계속 자기 할 일만 했다. 육우청은 답답했지만 어쩔 수 없이 따라갔다.

중간쯤 내려왔을 때 한립이 걸음을 멈추고 이번에는 허리를 숙여 지면에 손을 가져다 댔다.

“아래에서 기척이 느껴지는군.”

이 말에 육우청이 뭐라 답하기 전에 한립의 손바닥에서 밝은 빛을 응결했다.

콰직!

맨들 맨들한 얼음 바닥이 갈라져 균열이 거미줄처럼 퍼져 나갔다.

뒤로 몇 걸음 물러난 한립의 바로 앞까지 얼음 바닥이 아래로 주저앉아 타원형의 통로가 드러났다.

통로에서 바람이 흘러나오는 것이 더 넓은 공간으로 연결된 것이 분명했다.

한립은 즉시 아래로 내려갔고 육우청은 무슨 일이냐고 묻기도 전에 그의 움직임을 놓쳤다.

그녀도 뛰어내리는 수밖에는 다른 길이 없었다. 두 사람이 시간차를 두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한립은 발밑의 흙이 약간 축축한 것을 보고 고개를 들어 두꺼운 얼음 천장을 확인했다.

과연 지하에 별도의 공간이 있었다.

“여기가 대체 어디죠? 느낌이 이상해요.”

“일단 조용히 따라오게.”

한립은 손가락으로 입을 가리며 조용히 하라는 표시를 했고 육우청은 곧장 입을 다물고 얌전히 그를 따라갔다.

어두컴컴한 통로를 따라 아래로 백여 장 정도를 내려가던 한립이 멈춰 섰다. 앞쪽에서 미약하게 빛이 들어오고 쾅쾅 둔중한 폭음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어둠 속에서 시선을 마주친 두 사람은 기운을 감추고 통로의 끝부분으로 접근했다.

바깥을 내다본 한립은 자신이 거대한 지하 종유 동굴에 위치한 절벽 통로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동굴 중앙에서 폭음과 검빛이 난무하는 가운데 두 명이 몇 마리의 육중한 한수들과 격전을 펼치는 중이었다.

한립은 그들의 복장이 익숙하다는 생각에 눈을 가늘게 떴다.

체구가 큰 중년 사내는 해골 무늬 수가 놓인 넉넉한 검은 장포를 입고 있는 귀읍종 수사였고, 체구가 작은 초췌한 노인은 검은 천으로 만든 소매가 짧은 옷을 입고 머리에 두건을 해서 남려족 수사와 복장이 비슷했다.

선부에 들어오기 전에 진비라는 노인과 지팡이를 든 이들만 주의 깊게 살폈기에 그들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초췌한 노인은 작은 체구에 어울리지 않는 괴력으로 몸집보다 두 배는 큰 금색 창을 휘두르면서 금색 부채로 부단히 빛을 쏘아댔다.

두 마리 설사자 한수의 앞발이 떨어질 때마다 금색 부채에 막혀 상처가 생기거나 몸이 절단되었다.

그리고 귀읍종 중년인은 맨주먹으로 얼음 원숭이 한수 두 마리를 퍽퍽 쳐대면서 싸우고 있었다.

주먹 끝에서 맺힌 하얀 기운 속에 은은하게 남색 별빛이 반짝였다.

두 사람이 우위를 점하고 있었지만 한수들은 두려움이 없었고 부상을 당하면 빠르게 회복해서 싸움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게다가 네 마리의 한수 외에 궁전 폐허 위로 얼음 조각상 같은 비둘기 한수도 남색 눈을 번득이면서 그들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었다.

빈틈이 생기면 기습하는 역할이었다.

비둘기 짐승은 다른 짐승들과 달리 얼음 속성 법칙의 힘을 품은 은색 얼음 실을 쏘아대서 진선 수행을 지닌 두 사람도 허투루 여길 수 없었다.

두 수사와 여러 한수와의 전투를 지켜보던 한립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이렇게 공교로울 데가! 저들을 여기서 만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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