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9화. 흩어지다
*
빛덩이 안으로 들어간 순간 한립은 고막이 웅! 떨리면서 시야가 하얗게 변해 오감이 상실된 느낌을 받았다.
이런 불편한 느낌이 오래지 않아 사라지고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갔다. 점차 감각을 회복한 한립은 귓가를 스치는 바람소리에 귀가 아파왔다.
그의 눈앞에 새하얀 설경이 펼쳐졌는데 폭설을 동반한 강풍이 용처럼 하늘과 땅을 뒤덮고 있었다.
손가락 한 마디 굵기의 푸른 보호막이 펼쳐져 눈바람을 밀어내는 데도 여전히 약간의 한기가 뼛속 깊이 스며들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먼저 들어간 북한선궁 등 다른 세력들은 보이지 않았다.
“너무 춥네요…….”
보호막을 일으킨 육우청이 속눈썹에 성에꽃을 얹고 그 옆에서 중얼거렸다.
진염종 쪽은 적홍색 장포에서 화염 문양의 허상이 흘러나와 뜨거운 열기를 발산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도 욱양자 등 금선 셋을 제외하면 얼굴이 파랗고 하얗게 질려 오들오들 떨기는 마찬가지였다.
“고 수사 괜찮으시면 산하도를 발동해 모두를 보호해 주시지요.”
욱양자가 호언 도인을 향해 청했다.
고개를 끄덕인 호언 도인이 명한산하도를 허공에 띄워 짙은 남색 보호막으로 일행들을 전부 감쌌다.
원형의 보호막 안에 들어가자 귀를 아프게 하던 날카로운 바람 소리와 참기 힘든 냉기가 차단되었다.
“남려족과 귀읍종 수사들이 보이지 않아요.”
운예가 호언 도인 옆에서 입을 열었다.
“하나는 귀도 종문에, 다른 하나는 변두리 야만족 아닙니까. 어찌 약속을 지킬 거라 믿을 수 있겠습니까? 다른 세력보다 뒤쳐질까봐 두려워 먼저 출발했나 봅니다.”
진운 장로가 조소했다.
“그렇게만 생각할 일은 아닙니다. 진비가 우리에게 먼저 제안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으니까요. 북한선궁, 창류궁, 복릉종 같은 거대 세력들이 돌아다니는 판에 우리 같이 전력이 부족한 곳은 다른 무리와 손을 잡아야 이득일 텐데 어찌 먼저 출발하려고 약속을 깬단 말입니까.”
욱양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지 고개를 저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호언 도인이 어떻게 생각하냐는 의미로 한립을 바라보았다.
“사숙님, 이곳 폭설에 희미하나마 공간의 힘이 섞여 있습니다. 혹시 그들은 저희와 다른 곳으로 전송된 것이 아닐 지요?”
“그래, 나도 그럴거라 생각했다. 어찌 되었든 우리도 이곳을 떠나자꾸나. 다들 경계심을 늦추지 말고 제 뒤를 따르며 절대 명한산하도 보호막 바깥으로 나가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한립과 대화를 나눈 후 호언 도인이 모두를 향해 말했다. 그런데 서둘러 길을 떠나려던 호언 도인의 귓가에 한립의 전음이 울렸다.
“저는 약속을 지켜 선배님과 명한선부에 들어왔습니다. 진언화륜경의 후속 공법 중 한 부를 지금 주실 수 있을 지요.”
“녀석아 노부조차 그리 믿지 못하는 것이냐? 이제 막 들어와서 아직 아무 일도 하지 않고 품삯부터 달라고 해?”
어이가 없는지 호언 도인이 불퉁거렸다.
“이곳에 함께 들어가기만 하면 우선 4성 공법을 주신다고 하신 것은 선배님이십니다.”
한립의 웃음기 어린 대답이 들려왔다.
그의 성격을 파악하고 있던 호언 도인은 크게 개의치 않고 명한산하도를 부리지 않는 손으로 저물대 하나를 건넸다.
“선부 안에는 위험한 상황이 많을 것이니, 안에 든 보물을 잘 챙겨 두었다가 위기에 사용하거라.”
호언 도인은 정색하고 남들 들으라고 이렇게 말했고 황송하다는 듯 그것을 받아든 한립은 의식으로 내용물을 확인하고 감동받은 눈빛으로 감사를 표했다.
다들 사숙이 후배의 안위를 위해 보물을 내주는 것이라 생각해서인지 의심하지 않았다.
“저희는 지금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것입니까? 제가 보기에는 다 똑같은 것 같은데요.”
저물대를 넣어둔 한립이 물었다. 영목신통으로 어느 방향을 살펴도 눈덮인 설원이라 방향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미간을 좁힌 호언 도인은 말없이 명한산하도를 보면서 거기서 무언가 실마리를 찾고 있는 것 같았다.
“저기에, 아무래도 출구가 있는 듯합니다.”
육우청이 돌연 손을 들어 한쪽을 가리켰다. 모두가 그녀가 가리킨 방향을 쳐다보았다.
극히 멀리 떨어진 허공에 주먹만 한 물빛 빛덩이가 떠 있어서 폭설과 강풍 때문에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발견하기 어려웠다.
한립은 그녀가 태어날 때부터 대단한 영안을 타고났다는 것을 알아 이상하게 생각지 않았으나 분명 그가 둘러보았을 때는 없던 것이었다.
‘아마 막 생겨난 것이겠지.’
의미심장하게 육우청을 바라보는 호언 도인의 눈에 이채가 어려 있었다. 금선 수행을 지닌 그보다 먼저 무언가를 발견했다는 것이 신기할 수밖에 없었다.
일행은 원형 보호막의 비호를 받으면서 남색 빛덩이가 있는 곳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남색 빛덩이도 크게 보였다.
물빛의 공간 소용돌이가 그들이 막 이곳으로 진입할 때 겪은 것과 유사한 파동을 내뿜고 있었다.
소용돌이와 백 보를 앞두었을 때 이상한 일이 생겼다.
굵은 눈발로 가득 찬 허공이 맹렬히 진동하더니 새하얀 눈송이들이 뭉쳐 산만한 설룡(雪龍)을 이루고 그들을 향해 돌진해왔다.
쿠쾅!
남색 원형 보호막이 설룡의 몸통 박치기에 흩어져 강력한 바람 속에 일행들이 뿔뿔이 흩어져 비틀거리며 튕겨 나갔다.
설룡의 위력인지 아니면 방금 전 폭발의 여파인지 사나운 바람에 다들 몸을 가눌 수가 없었고 어딘지 모를 방향으로 떠밀려갔다.
푸른빛을 일으킨 한립의 등 뒤에서 뇌전 빛과 함께 청백색 뇌전 날개가 떠올라 광풍 속에서 펄럭였다.
한립은 호언 도인이 날아간 방향으로 이동하려는데 전방에 검은 그림자가 날아들었다. 이어서 무언가 부드러운 것이 그의 몸을 감싸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강력한 힘의 충돌에 풍뢰시의 도움을 받는 한립도 뒤쪽으로 밀리며 혼란스러운 기류에 휩싸여 어느 공간 폭풍 속으로 떨어졌다.
하늘과 땅이 빙빙 도는 가운데 자신을 꼭 끌어안은 인물이 누군지 확인하기도 전에 한립은 정신을 잃었다.
* * *
광활한 설원 위, 거친 바람이 휭휭 불었다.
이곳은 호언도인 일행이 도착한 곳에 비해 공간이 안정적이었고 하얀 첨탑들 사이사이로 암녹색 설송(雪松)들이 자라고 있었다.
하얀 첨탑들이 세워진 설송 숲 앞에 십여 명이 서 있었다. 그 맨 앞에 선 아름다운 여인은 바로 북한선궁 부궁주 설앵이었다.
다 같이 서 있기는 했지만 북한선궁 수사들이 비교적 모여 있고 촉룡도의 세 금선들은 그들과 약간 거리를 두고 있었다.
“설앵 부궁주, 선부는 오직 1년 간 만 개방됩니다. 어째서 소 궁주께서는 보이지 않는 것입니까?”
구양규산이 눈보라 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누가 명한선부 입구를 발설하지만 않았으면 그리 촉박했을 시간도 아니지요?”
설앵은 그를 돌아보지도 않고 냉담히 말했다. 그녀는 정보가 새어나간 것이 선궁 수사들이 아니라 외부인인 그들일 거라 의심하고 있었다.
그녀의 말에 구양규산도 코웃음을 치고 더는 아무 소리 하지 않았다.
“궁주께서는 뒤따라 들어온 자들에게 손을 써두러 가셨습니다. 그들을 공간 폭풍 속으로 몰아넣어 뿔뿔이 흩어지게 말이에요. 주제도 모르고 우리 일을 방해하려 들어도 각개격파하면 상대하기 훨씬 쉽지 않겠어요?”
설앵이 그를 곁눈질하며 하는 말에 촉룡도 세 금선의 눈빛이 흔들렸다.
* * *
잿빛의 황량한 사막에는 크고 작은 자갈과 조약돌들이 가득했고 하얀 눈이 덮여 있어 풀 한 포기 자라지 않았다.
사막 중앙에 눈이 녹은 물들이 모여들어 개울을 이루고 표면에 얇게 얼음이 맺힌 작은 연못으로 흘러 들어갔다.
그 개울 옆으로 어디서 날아든 것인지 설송 나뭇가지 하나와 정신을 잃은 남녀가 쓰러져 있었다.
건장한 체구의 사내는 바닥에 엎어져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았고 여인은 고운 얼굴을 지니고 있었다.
두 팔로 사내의 허리를 꼭 끌어안은 여인의 모습을 누가 보았다면 민망해 헛기침을 했을지도 모른다.
손가락을 꿈틀하고 먼저 깨어난 쪽은 바닥으로 엎어져 누워있던 사내였다. 몸을 돌려 땅바닥에 앉은 중년 사내는 의문이 가득한 얼굴로 주변을 살폈다.
그는 무상맹 가면으로 변신한 한립이었다.
그러나 그의 무릎에 기대 누워있는 여인 말고 다른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육 수사.”
손끝에 푸른빛을 일으킨 그가 여인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제야 그녀는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류석 오라버니? 여기는 대체 어디죠?”
눈앞의 사내의 얼굴을 확인한 그녀가 머리가 아픈지 관자놀이를 누르면서 멍하게 물었다. 그 말에 한립이 아무 말 없이 두 눈에 남색 빛을 일렁이면서 의식을 퍼트렸다.
“확신할 수 있는 건 아직 명한선부 안이라는 것뿐일세. 구체적인 위치는 나도 모르겠군.”
“다른 사람들은요? 어째서 저희만 여기 떨어진 걸까요?”
“기습을 받아 공간 폭풍에 휘말렸는데 다른 사람들도 전부 흩어진 것 같네. 이곳에는 우리 둘뿐이란 말일세.”
한립이 쓴웃음을 흘렸다.
그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육우청이 폭풍에 휘말리기 전 당황한 나머지 자신이 한립을 꼭 끌어안던 장면이 떠올라 두 뺨이 뜨거워졌다.
“아……. 그럼 이제 어쩌면 좋을까요?”
어색한 감정을 숨기려고 그녀가 서둘러 물었다. 그 말에 한립이 깊이 생각에 잠겼다. 원래대로면 다 같이 이동할 예정이어서 아직 호언 도인에게 구체적인 이야기를 듣지도 못했다.
갑자기 외딴곳에 떨어지자 그도 딱히 방법이 없었다.
“의식으로 살펴보았지만 영력 파동을 느낄 수는 없었네. 그저 이 방향으로 갈수록 기온이 떨어지더군.”
한립이 손을 뻗어 한 방향을 가리켰다.
“그렇다면 우린 그쪽으로 가는 게 맞을 것 같아요. 명한선부의 첫 번째 구역이 유한경(幽寒境)일 테니까요.”
“육 수사가 그것을 어찌 아는 것이지?”
“이상하게 생각지 마세요. 흑풍도는 진작 명한선부 입구를 발견해서 북한선궁에 명에 따라 오랜 세월 그곳을 지켜왔어요. 엄명이 내려져서 바깥에 이 소식을 알리지는 못해도 아버지께서 나름 관련 소식들을 모아오셨죠.”
육우청이 한립의 의아한 표정을 보고 해명했다.
“흑풍도의 도왕부에서 정보를 흘린 것인가?”
한립도 아무 근거 없이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흑풍도가 북한선궁을 위해 선부 입구를 찾고 오랜 세월 지켜왔으나 아무런 대가도 받지 못하고 12명의 진입 인원에도 끼워주지 않았으니 어떤 식으로든 보복하려 했을지도 몰랐다.
육우청이 어쩔 수 없이 우연히 마주친 한립에게 부탁해서 이곳에 들어온 것은 기연을 얻은 것이라 볼 수 있었다.
“제발 그런 말씀 마세요. 저희가 무슨 배짱으로 그런 일을 벌이겠어요? 선궁에게 발각되면 도왕부 전체가 망하게 될 텐데요!”
화들짝 놀란 육우청이 서둘러 손을 내저었다.
“별생각 없이 물은 것이니 그리 당황할 것 없다.”
허둥지둥 부인하는 육우청을 보고 한립은 더는 캐묻지 않았다. 솔직히 누가 정보를 흘렸든 그야 환영이었다.
호언 도인 일행보다 전력이 강한 북한선궁과 복릉종들이 있는 한 최대한 많은 세력이 명한선부 안으로 들어와 소란을 피워야 그 속에서 슬쩍슬쩍 이득을 취하기 편했다.
한립은 푸른 선박을 불러냈다. 네 개의 푸른 날개가 달린 청연주(靑鳶舟)였다.
“출발하세.”
먼저 선박에 올라탄 한립의 말에 육우청이 펄쩍 뛰어올라 그의 뒤에 섰다.
웅!
한립의 조종에 선박이 푸른 빛으로 변해 허공을 가르며 날아갔다.
고공에 첩첩이 쌓인 먹구름 때문에 시야가 어둑해서 분위기가 가라앉았고 가끔 살아있는 동물 같은 것이 보여도 큰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한립과 육우청은 선박에 서서 말없이 스쳐 지나가는 바람소리를 듣고 있었다.
반 각 정도 날아가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산발적으로 흩날리던 것이 시간이 흐를수록 눈발이 굵어졌다.
동시에 잿빛 사막도 뒤로 멀어지고 다시 눈과 얼음으로 덮인 광활한 빙원이 펼쳐졌다. 하늘의 구름이 청회색으로 변해 더 크고 묵직한 눈덩이가 펑펑 쏟아졌다.
이전과 다른 점은 눈보라가 치는 이곳도 추웠으나 보호막을 쳐도 뼈가 시릴 정도는 아니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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