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8화. 진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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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 십여 호흡 동안 지속하던 남색 빛기둥은 서서히 물러나 평정을 되찾았다.
“보아하니 봉인을 해야겠습니다. 각 세력에서 한 명씩 나서서 술법을 펼치는데 협력하면 모두 안심할 수 있을 듯한데 어떠십니까?”
고개를 끄덕인 봉천도가 건의했다.
“좋은 생각이십니다.”
낙청해가 바로 찬성하고 다른 이들도 반대하지 않았다.
소진한은 대표 격인 봉천도와 상의해 거령을 제외한 각 세력에서 한 명씩 나와 술법을 펼치고 구체적인 금제의 구성은 봉천도가, 관리 감독은 소진한이 담당하기로 협의했다.
한립 무리에서 나선 것은 욱양자였다.
여섯 명의 금선경 수사들이 허공에 떠올라 남색 빛의 문을 둘러싸고 주문을 외웠다.
그들의 몸에서 폭발적으로 각기 다른 색깔의 빛줄기가 흘러나와 무지갯빛의 빛의 창살을 이루고 입구를 봉했다.
격하게 흔들린 남색 빛의 문에서 육안으로 분명하게 볼 수 있는 충격파가 빠져나와서 사방팔방으로 퍼졌다.
쿠르릉!
이로 인해 무지갯빛 창살들이 흔들리면서 똑바로 바라보기 힘든 밝은 빛을 터트렸다.
물결처럼 잇달아 날아드는 충격파에 무너질 것 같던 무지갯빛 창살들이 수결을 맺은 금선 수사들의 빠른 주문 소리와 함께 점차 안정을 찾았다.
다만 남은 여파가 미완성의 창살을 빠져나가 수행이 부족한 이들은 부단히 뒤로 물러나다 등이 벽에 닿고서야 멈출 수 있었다.
이렇게 되니 질서정연하게 대오를 이루고 있던 수사들이 섞이면서 소란스러워졌다.
한립은 겨우 이런 여파에 밀려나지 않아도 되었으나 다른 이들의 주의를 끌지 않으려 일부러 벽 한쪽에 등을 부딪쳤다.
술법을 펼치는 여섯 사람을 보고 있는 그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호언 도인은 명한산하도가 총 8폭이라 하였는데 거령을 포함해서 이곳에 7 세력밖에 모이지 않았다는 것은 아직 한 곳은 도착하지 못했다는 뜻일까 하는 의문이었다.
까마득하게 오랜 세월을 살아온 금선 늙은이들도 그걸 모르지 않을 테지만 굳이 언급하지 않는 듯했다.
그가 여러 가지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익숙한 맑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류석 오라버니.”
그와 약간의 거리를 두고 서 있던 육우청이 미소를 머금고 힐끔거리고 있었다.
무질서한 동굴에서 금선경 수사를 제외한 이들은 제자리를 지키고 있지 않아 그녀도 티 나지 않게 이곳까지 올 수 있었다.
한립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기에 전음으로 답했다.
“과연 육 수사의 눈은 속일 수 없군.”
“여기서 뵙게 될 줄은 몰랐어요! 명한선부에 관심이 있으신가요?”
“보물이 많은 곳이니 당연히. 그런데 서로 다른 세력에 속해 있는 우리가 이렇게 접촉하면 안 될 것 같은데?”
“괜한 걱정이세요. 북한선궁은 그저 정보가 새는 것을 막고 잡일이나 시키려고 흑풍도 수사들을 여기로 데려온 건데요 뭐. 어차피 정보도 새어나갔겠다, 이제 우리는 그들에게 필요없는 존재에요. 또 동굴 안 상황이 복잡해서 우리를 눈여겨볼 사람도 없고요.”
육우청은 빠르게 말했고 한립은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오라버니께 꼭 해야 할 말이 있습니다.”
“말해 보게.”
“저도 명한선부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제가 오라버니의 세력을 따라 들어갈 수 있게 도와주시기를 부탁드려요.”
“흑풍도는 북한선궁 소속의 세력이 아닌가? 어째서 그들을 따라 들어가지 않고?”
“모르십니까? 명한산하도 한 장 마다 딱 12명의 수사만 선부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인원이 꽉 차서 북한선궁에서도 못 가는 수사들이 허다한데 겨우 흑풍도 수사에게 기회가 주어질 리가요.”
“그런 일이…….”
호언 도인에게 전해 듣지는 못했으나 대부분이 12명씩 모인 터라 사실이라고 생각되었다.
“육 수사, 우리가 몇 번 마주친 인연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도와주고 싶어도 그럴 수 없네. 우리도 인원이 찬 것이 보이지 않는가?”
한립은 완곡하게 그녀의 청을 거절했다.
선부로 들어가는 것 자체가 위험을 무릅쓴 행동이라 수많은 금선들의 눈에 띄지 않게 움직여 호언 도인이 원하는 물건을 구할 수 있게 돕고 진언화륜경의 후속 공법을 받는 게 그의 유일한 목표였다.
호언 도인에게 부탁하면 그의 말을 들어줄 수도 있었지만 그러면 신분을 숨기기 위해 반드시 동행해야 하는 진염종 수사들과 틈이 벌어질 수 있었다.
“이런 어려운 부탁을 아무런 조건 없이 들어달라 떼를 쓸 마음은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흑풍해역에 터를 잡은 저희 가문은 북한선궁보다 먼저 입구의 위치를 발견했고, 당시 선부 내의 지도 일부가 기록된 비석 하나와 몇 가지 관련 정보를 얻었습니다. 저를 데리고 가주시면 오라버니께 위험이 가득한 선부 안을 안전하게 돌아다니시는데 도움이 될 정보를 공유하겠습니다.”
육우청은 한립이 무슨 걱정을 하는지 아는 것처럼 얼른 덧붙였다. 그 소리를 들은 한립의 눈빛이 밝아졌다.
선부 안의 상황에 대해 깜깜한 그로서는 상당히 유혹적인 제안이었다.
“거짓 없는 사실이겠지?”
“심마를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방금 제가 한 말에 한 글자도 거짓이 있다면 저는 오늘 심마에 당해 이곳에 뼈를 묻을 것입니다.”
육우청의 어투는 더없이 진지했다.
“알겠네. 이렇게 하지, 일행을 이끄는 분께 수사의 제안을 전해주겠네만 허락이 떨어질지는 장담할 수 없네.”
“류 오라버니께서 하시는 일인데, 제가 어찌 의심을 갖겠습니까!”
한립이 슬쩍 고개를 끄덕이자 육우청이 전혀 걱정되지 않는다는 듯 답했다. 한립은 빠르게 호언 도인에게 다가가서 육우청에게 들은 말을 전했다.
“뭐라? 선부의 지도가 있다고!”
호언 도인은 반가운 기색이 다분했다.
“제가 겪은 바로 쉽게 거짓말을 할 여인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데려가야겠지.”
“진염종 쪽에는 그럼…….”
“내가 알아서 하겠네.”
호언 도인의 확답을 들은 한립은 육우청에게 짧게 통지했다. 이에 육우청은 남몰래 고개를 끄덕인 후 흑풍도 수사들 틈으로 돌아갔다.
이때 빛의 문을 둘러싼 여섯 명의 금선이 술법을 마쳐 무지갯빛 창살들이 연결되면서 다채색 보호막이 철저히 빛의 문을 가렸다.
한기가 용솟음을 쳐도 꿈적하지 않는 것이 북한선궁이 전에 설치해 둔 봉인금제보다 효과적이었다.
“진법대사인 봉 수사 덕에 비범한 봉인 금제를 완성했습니다. 솜씨가 정말 놀라우십니다.”
소진한이 봉천도를 향해 공수했다.
“과찬이십니다.”
봉천도가 동굴 한쪽에 가부좌를 틀고 앉자 복릉종 수사들이 그 주변으로 모여들어 자리 잡았다.
그런 봉천도를 보는 소진한은 눈빛이 잠시 흔들리다 북한선궁 무리로 걸음을 돌렸다.
다른 세력도 각자 뭉쳐서 선부의 강림만을 기다렸다. 그리 넓은 동굴이 아니어서 다들 앉다보니 바닥이 꽉 찼다.
이때 호언 도인이 욱양자에게 다가가 몇 마디를 건넸다.
욱양자가 눈을 부릅뜨고 한립을 쏘아보다가 이어진 말을 듣고서는 서서히 표정을 가라앉혔다. 마지막에는 마지못해 고개도 끄덕이는 게 대화가 잘 풀린 듯했다.
그걸 확인한 한립은 한숨을 돌리고 눈을 감았다.
* * *
시간이 흘러 이틀이 지나갔다.
두 배는 커진 빛의 문은 표면의 무늬도 선명해져서 정말 다른 세계로 통하는 공간의 문처럼 보였다.
빛의 문에서 남색 빛덩이 하나가 떠올라 격렬하게 꿈틀거렸다. 그 속으로 보이는 흐릿한 통로는 어디로 통하는지 아주 아득한 느낌을 주었다.
동굴 안 수사들이 전부 일어나 뜨거운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빛의 문이 가볍게 떨리면 주변 허공이 진동해 동굴이 웅웅 울렸지만 다채색 보호막이 아직도 튼튼하게 버티고 있었다.
시간이 더 지나자 물결 같은 남색 빛이 출렁출렁 빠져나왔다.
공간을 왜곡시키는 기이한 물결에 이번에는 다채색 보호막이 달걀껍질처럼 부서져 나갔다.
욱양자 등 여섯 명의 금선 수사들이 몸을 떨면서 튕겨 나왔으나 그들의 수행에 미리 비술을 펼쳐 다치지는 않았다.
“시간이 되었습니다. 더는 술법을 지속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봉천도의 무덤덤하던 시선에도 열기가 어려 있었다. 그의 말에 다들 술법을 중단한 순간 쿠르릉! 하는 굉음이 들려왔다.
남색 빛의 문이 갈라지고 요란한 남색 빛을 발산하는 빛덩이로 뭉쳐져 그 깊은 곳에 굽이굽이 이어진 산맥과 강, 궁전, 누각 등의 허상이 빼곡하게 담겨 있었다.
유유히 회전하는 남색 빛덩이 속에서 광선들이 나부꼈다.
그 안에 하얀 안개가 자욱하게 낀 산과 물 그리고 건물들의 모습은 선경이 따로 없었다.
“선부가 나타났습니다!”
누군가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 이에 각 세력의 수사들은 하나같이 들뜬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저게 말로만 듣던 명한선부로구나.’
한립은 의식으로 남색 빛덩이를 훑으려다 귀 바로 옆에서 폭약이 터진 것 같은 충격을 받고 의식을 회수했다.
분명 깜짝 놀랐음에도 겉으로는 아무런 티를 내지 않았다.
주변 수사들의 반응을 살피니 대다수가 의식으로 그 안을 엿보려다 호되게 당한 듯 보였다.
금선경 수사에 맞먹는 의식의 힘을 지닌 한립도 실패했는데 진성경 수사들이 그러는 것도 당연했다.
“낙 수사와 봉 수사께서 먼저 들어가 보셔야지요?”
웃음을 터트리며 소진한이 입을 열었다.
“여태껏 고생해서 입구를 지키고 계셨는데 처음으로 명한선부에 들어갈 자격은 선궁에 있지 않겠습니까. 봉 수사의 의견은 어떠십니까?”
만면에 웃음을 띤 낙청해의 조롱에 봉천도의 딱딱한 강시 얼굴에도 냉소가 어렸다.
“다들 예의 차리기 바쁘신 것 같으니 제가 먼저 가겠습니다.”
소진한이 대답을 하기 전, 거령이 대뜸 나서서 명한산하도를 펼쳤다. 대량의 빛이 흘러나와 그녀를 감싸고 빛덩이 속으로 날아올랐다.
그녀의 신영이 남색 빛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던 한립의 눈빛이 복잡해졌다.
바람처럼 사라진 여인을 보고 다른 수사들도 조급해졌다. 그때 소진한이 설앵 등 북한선궁 수사들을 돌아보았다.
“나를 따르라, 나머지는 이곳을 지킨다.”
그의 손에서도 명한산하도가 날아올라 짙은 남색 빛이 설앵을 포함한 8명의 선궁 수사들과 구양규산등 3명의 촉룡도 금선들을 휘감아 빛덩이 속으로 들어갔다.
남은 선궁 수사들과 흑풍도 인물들은 모두 바깥에 남아 있었다.
북한선궁 무리가 들어가고 낙청해도 봉천도에게 예의를 차리는 말을 몇 마디 남기고 창류궁 수사들을 불러 명한산하도에서 흘러나온 빛으로 그들을 감싸고 날아올랐다.
창류궁 인물들이 전부 사라지고 봉천도의 눈짓에 외눈박이 종주가 복릉종 무리를 데리고 출발했다.
거령이 비경 안으로 들어간 후에 거대 세력들이 차례로 사라지자 동굴 안 수사들의 수가 거의 반으로 줄었고 분위기도 이전처럼 차분하지 않았다.
귀읍종 곰보 노인은 먼저 남려족 수사들과 대화를 나누고 호언 일행에게 다가왔다.
“고 수사, 남려족이 먼저 들어간 후에 우리 귀읍종도 따라 들어가려 합니다. 안에서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을 터이니 모여서 함께 움직이시지요?”
“반가운 말씀이군요. 마침 제 뜻도 그러했습니다.”
곰보 노인의 동행 제안에 호언 도인이 화답했다.
“그럼 저희 먼저 출발하겠습니다.”
곰보 노인은 남려족 수사들이 벌써 남색 빛덩이 속으로 들어간 것을 보고 얼른 종문 수사들 쪽으로 돌아갔다.
“우리도 들어갑시다.”
귀읍종 수사들이 진입한 후 호언 도인도 일행들을 향해 말했다.
욱양자의 시선에 진염종 수사들이 한곳에 모여들었는데 어느새 한립 옆으로 다가온 육우청을 보고 다들 불만스러운 눈길을 보냈다.
“선부 비경은 보물과 재료가 많은 만큼 위험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곳이니 안으로 들어가면 흩어지지 말고 모여 다녀야 합니다.”
호언 도인이 당부를 마치고 화폭을 펼쳐 딱 12명을 휘감고 남색 빛덩이 속으로 날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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