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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686화 (1,443/2,000)

1686화. 대치

*

몇 마디를 더 주고받은 곰보 노인은 남려족 무리로 날아가서 네 명의 금선 수사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남려족 누런 얼굴 거한들은 멍하니 아무런 반응이 없었지만 새까만 피부의 노인과 혈색 좋은 노파는 달라진 표정으로 호언 도인 쪽을 잠깐 쳐다보았다.

그들을 따라 남려족 수사들도 더 이상 검은 장막을 공격하지 않았고 욱양자, 호언 도인도 일행을 이끌고 동굴 한쪽으로 이동해 자리를 잡았다.

갑자기 조용해지자 낙청해가 지긋이 호언 도인을 보고는 눈에 이채가 스쳤다.

“궁주님, 저 오합지졸 중에도 머리가 돌아가는 자가 생겼나 봅니다.”

백면서생이 걸어와 낙청해에게 말을 붙였다.

호언 도인이 이야기를 하기 전 금제를 펼쳐 소리를 차단했다고 하나 누가 보아도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었다.

“차라리 잘 되었네. 저들이 무턱대고 금제를 공격하는 게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우린 조용히 지켜보세.”

“맞습니다. 모든 세력이 모여 소진한이 어쩔 수 없이 금제를 풀게 하는 것이 바른 방향이겠지요.”

* * *

검은빛의 장막 뒤쪽으로 이어진 작은 굴은 안으로 들어갈수록 점점 커져서 바깥 종유석 동굴보다 작은 또 다른 공간을 이루었다.

북한선궁 수사들이 전부 그곳에 모여 있었다.

돌기둥을 하나씩 담당하던 구양규산 등도 술법을 멈추고 지면에 내려와 있었는데 진법은 아직 없어지지 않고 남색 빛의 문만을 가리고 있었다.

그밖에 육균과 육우청 그리고 몇몇 장로들을 포함한 흑풍도 복색을 한 수사들도 함께였다. 고개를 푹 숙인 흑풍도 수사들은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서있었다.

북한선궁 궁주 소진한이 안색이 파랗게 질려 검은 안개를 자욱하게 뿜으면서 흉흉한 기세를 고스란히 노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붉은빛이 도는 두 눈에 아무나 잡아 산채로 뜯어먹어 버릴 것 같은 포악함이 감돌았다.

“일이 어찌 돌아가고 있는 것인지 누가 해명을 해볼 테냐? 어떻게 정보가 새어나갈 수 있지?”

소진한은 천천히 동굴 내의 수사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하지만 북한선궁 수사들은 입도 뻥긋 못하고 있었다.

결국 그의 눈빛이 부궁주 설앵에게 닿았다.

“……궁주께 아룁니다. 선부 입구의 위치를 아는 자들은 철저하게 감시하였고 이곳에 전부 모여 있습니다. 주변 금제가 전신법기의 신통을 차단하니 이 안에서 정보가 새어나갈 수는 없습니다.”

설앵이 어렵게 입을 뗐다.

“그럼 저 바깥에 있는 것들은 어찌 알고 몰려들었단 말인가?”

“그건…….”

소진한의 매서운 눈길에 안색이 창백해진 설앵이 말을 잇지 못했다.

“중차대한 일을 믿고 맡겼건만 다들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어쩌자는 것이지?”

소진한이 다른 장로들을 훑으면서 나무라자 감히 그와 시선을 마주치는 자가 한 명도 없었다.

“지금 상황을 설명할 방법은 단 두 가지뿐입니다.”

옆에서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등에 장검을 매고 다니는 노월이었다.

“어디 한번 말해 보게.”

“첫째로 의심해볼 것은 저희가 파견한 인물 중 누군가가 정보를 흘렸을 가능성입니다.”

이 말에 소진한의 눈빛이 차갑게 번득였다.

“말도 안 됩니다. 이번 일을 위해 파견된 이들은 전부 북한선궁에 대한 충심이 대단한 수사들입니다. 결단코 그들이 정보를 흘렸을 리 없습니다. 거기다 우리 같은 금선도 이곳에서 금제 뚫고 흔적없이 외부로 소식을 전할 수는 없는 것을 모르십니까?”

눈살을 찌푸린 설앵이 참지 못하고 반박했다.

“설 부궁주, 저도 이곳에 모인 분들이 믿을 만하고 내부에서 정보가 샜을 가능성이 적다는 것을 압니다.”

노월이 가벼운 목소리로 답했다.

“그래서 다른 가능성은 무언인가?”

“선부 입구를 알아낸 윤회전에서 일부러 정보를 흘렸을 수도 있습니다.”

차분한 노월의 말을 듣고 모두 안색이 달라졌다. 소진한도 미간을 좁히고 곰곰이 생각해보고 있었다.

그의 주위를 맴돌던 검은 기운이 체내로 흘러 들어가 중압감이 줄었다.

“궁주님, 그간 저희가 일부러 그들이 가짜 입구를 찾게 유도해 왔지만 지금에 와 생각해 보니 일이 너무 순조롭게 풀렸습니다. 오랜 세월 선궁과 대치하던 윤회전이 아무런 의심도 없이 저희 계획대로 움직였지요. 그들이 저희의 계획을 눈치채고 속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딴 짓을 해온 것이 아닌가 걱정됩니다.”

노월은 잠시 멈추었던 말을 이었다. 여기까지 들은 북한선궁 수사들도 각기 다른 표정으로 이론이 분분해져 웅성거렸다.

“시끄럽다!”

소진한의 한 마디에 다들 찍소리도 못하고 입을 다물어 동굴 안에 정적이 감돌았다.

“이유가 무엇이든 다들 각자 맡은 바 소임에 충실하라.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하겠다.”

평정을 되찾았는지 소진한의 목소리가 담담해졌고 검은 기운도 완전히 사라졌다.

“예!”

북한선궁 수사들은 이구동성으로 답하고는 흩어져 바삐 움직였다.

구양규산 등도 9개의 돌기둥 위로 올라가서 가부좌를 틀고 진법을 조종했고 몇몇은 굴 입구로 가서 검은빛의 장막 곁에 주저앉았다.

그때 소진한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바깥을 바라보며 냉소를 흘렸다.

* * *

바깥 종유 동굴 안도 떠드는 이가 없어 조용했다.

호언 도인과 운예 뒤에 선 한립은 은밀하게 주위 사람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교삼 등 윤회전 수사들의 목표도 명한선부였으니 그처럼 무상맹 가면으로 변신을 하고 다른 무리의 틈에 숨어 있을 수도 있었다.

한 명씩 꼼꼼하게 훑으면서 빈틈을 찾았지만 아직까지는 윤회전 수사로 추정되는 인물은 없었다. 그러다 문득 멈칫하며 바깥쪽을 돌아보았다.

갑자기 마음 깊은 곳에서 떨림이 느껴졌다.

‘이건…….’

“무슨 일이냐?”

호언 도인이 그의 변화를 알아차리고 전음을 보내왔다.

“누군가 이곳으로 오고 있습니다.”

뜨끔한 한립은 의아한 기색을 지우고 역시 전음으로 답했다. 그 말에 동굴 입구를 바라본 호언 도인의 표정이 달라졌다.

빛이 반짝이고 은색 장포를 입은 여인이 나타나 종유 동굴에 모인 수사들을 훑으면서 당당히 걸어 들어왔다.

진염종, 귀읍종 심지어 남려족 수사들의 안색도 달라져 잠시 소란이 일었고 낙청해도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은포 여인을 본 한립도 깜짝 놀랐다.

상대는 기운이 있는 듯 없는 듯해서 그의 강력한 의식으로도 수행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소진한이나 백리염을 보았을 때나 겪었던 일이었다. 그녀를 살피던 한립은 갑자기 눈을 가늘게 뜨고 의식을 집중했다.

여인은 바로 거령이었다.

웅.

거령이 허리춤에 찬 기이한 무늬가 있는 금색 보따리에서 한 줄기 법칙 파동이 느껴졌고 느닷없이 남들은 알아차리기 어려울 정도로 미세하게 진동했다.

“…….”

여인의 손이 가볍게 보따리를 스치면서 은색 빛구슬을 흡수시키자 금색 보따리의 미동이 뚝 그쳤다.

마음에 큰 파문이 생긴 한립은 눈을 번쩍 떴지만 바로 고개를 숙여 표정 변화를 감추었다.

거령은 본격적으로 동굴 안 수사들을 살피면서 눈에서 은빛을 반짝였는데 멋모르고 마주 본 이들은 극심한 고통을 느끼고 서둘러 고개를 돌려야 했다.

수행이 약한 이들은 안색이 하얗게 질렸고, 심지어 누군가는 내상을 입었는지 끅! 신음을 흘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각 세력의 금선 수사들은 그녀를 타박하지 않았다.

“거령 수사께서도 명한선부에 관심이 있을 줄 몰랐습니다.”

낙청해가 미간에 힘을 주고 입을 열었다. 창류궁에서도 두 명의 진선 수사가 내상을 입었는지 얼굴이 하얗게 질려 서였다.

“익숙하지 않은 곳은 잘 안 다니시는 낙 궁주도 직접 얼굴을 비추셨는데, 왜 저는 오면 안 되기라도 합니까?”

거령이 그를 힐끗 보더니 덤덤하게 말했다.

“명한선부가 우리 창류궁 소유도 아닌데 제가 거 수사의 걸음을 막을 이유가 없지요. 그저 후배 아이들에게 위세를 부리시는 것은 신분에 걸맞지 않은 행동이십니다.”

낙청해가 예를 차리면서 상대의 행동을 지적했다.

“낙 궁주께서나 신분에 걸맞게 후배들을 잘 가르치셔서, 아무에게나 함부로 눈알을 굴리지 않게 하시지요. 제가 대신해서 창류궁 수사에게 가르침을 내리기 전에요.”

비웃는 거령의 말에 창류궁 금선들이 대노해 따지려 들었으나 낙청해가 손을 펼쳐 막았다.

“허허, 거 수사의 말씀이 틀리지 않았습니다. 어린 후배들이 먼저 실례를 했으니 선배로서 그러실 수도 있지요. 보지 못한 동안 실력이 많이 느신 것 같은데 감탄스럽습니다.”

낙청해가 담담히 웃으면서 분위기를 풀었다.

검은 금제 쪽을 살피던 거령은 동굴 한쪽으로 가서 더는 낙청해를 상대하지 않았다. 이에 낙청해도 별일 아니라는 듯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호언 선배님, 저 여인은 정체가 무엇인지요? 낙청해 조차 그녀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지 않습니까.”

“거령이라는 이름의 수사일세. 좀처럼 보기 힘들지만 십여만 년 전에 금선 후기에 이른 일대에서는 유명한 인물이지. 오늘 보니 예전보다 수행이 훨씬 늘었어.”

한립이 전음에 호언 도인이 답을 주었다.

‘금선 후기.’

그도 예상했던 바였다.

“……고강한 수행을 지녔지만 각종 영수를 부리는데도 능해서 가장 경계해야할 것은 그녀가 지닌 기상천외한 영수와 영충들이라는 이야기가 있네. 게다가 악랄하고 고약한 성격에 감정기복마저 심해서 북한선궁에서도 웬만해서는 건들지 않지. 선부에서도 저 자를 마주치면 멀리 피해가는 것이 상책일 것이야.”

“예, 충고 감사드립니다! 선배님의 말씀을 잘 기억해 두겠습니다.”

한립의 눈빛은 고분고분한 어투와는 어딘가 다른 데가 있었다.

* * *

시간이 지나 반나절 뒤.

참을성이 부족한 이들은 벌써 안절부절못하고 있었고, 특히 귀읍종 무리의 안색이 좋지 못했다.

곰보 노인만 해도 종유동굴 입구를 쳐다봤다 검은 장막을 쳐다봤다 하면서 한시도 눈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휙!

동굴 입구에서 파공음이 들리고 나서야 곰보 노인 등의 얼굴이 밝아졌다. 잿빛 무리는 봉천도와 외눈박이 사내를 대표로 둔 복릉종 수사들이었다.

“허허허! 봉 장로님, 제 종주님. 제가 두 분을 얼마나 기다린 줄 아십니까?”

낙청해가 자연스레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을 맞이했다. 다른 동굴 안 수사들은 복릉종 무리를 보는 표정이 각기 달랐다.

“허허, 낙 궁주께서 일찍부터 와계셨나 봅니다. 이렇게 많은 실력자들을 이끌고 오시고 명한선부 안의 보물을 반드시 얻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느껴집니다.”

복릉종 종주인 외눈박이 거한은 억지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럴 리가요. 두 분이 계신데 그런 물건이 제 손에 들어오겠습니까. 이번에 저는 철없는 제자들을 데리고 들어가 견문이나 넓혀 주려 합니다.”

낙청해는 손을 내저으며 뻔한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항상 느끼지만 참으로 겸손한 분이십니다.”

낙청해와 대화를 마친 외눈박이 거한은 동굴의 다른 사람들을 살폈다. 봉천도는 종유동굴에 들어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건조한 눈길로 서있었다.

깔끔한 잿빛 장포로 갈아입은 그는 여전히 강시 같았지만 사슬을 칭칭 감고 있을 때보다는 정상인처럼 보였다.

별안간 봉천도의 시선이 거령에게 고정되었다.

“거 수사도 오셨습니까?”

봉천도는 조금 의외라는 어투였다.

“봉 수사.”

눈썹을 끌어올린 거령이 그에게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본 한립이 흠칫 놀라 남몰래 봉천도를 가늠해보았다.

등장하자마자 기고만장하게 굴며 낙청해도 안중에 두지 않던 거령이 강시 같은 사내 앞에서는 상당히 자제하고 있었다. 확실히 강시 사내의 수행은 대단해서 거령과 비슷한 느낌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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