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3화. 모이다
*
웅.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전신진반이 형성한 진법이 밝게 빛나면서 작은 호언 도인 허상이 떠올랐다.
“려 수사, 속히 해용도(海榕島)로 오게.”
적홍색 소인이 입을 열었다.
“해용도……. 선배님, 명한선부의 입구가 정말 홍월도 아래 있는 것인지요?”
움찔한 한립은 무상맹에서 임무를 수행하기 전에 모였던 곳도 해용도였던 것을 떠올리고 물었다.
“오, 맹 내에서 떠도는 소식을 들은 모양이구만! 십중팔구는 사실인 듯싶네. 어서 모여서 이야기하세.”
“알겠습니다. 당장 가지요.”
한립은 바로 연락을 끊고 전신원반을 회수해 날아올랐다.
* * *
흑풍해역의 창류궁 수사들도 대형 남색 선박을 타고 쾌속으로 어딘가로 향하는 중이었다.
“홍월도라, 그렇게 외진 곳도 아니면서 흑풍해역 중심에서 멀어 쉽게 눈에 띌만한 곳은 아니지.”
뱃머리에 선 낙청해가 혼잣말을 했다.
그 앞에 남색 화면에는 흑풍해역의 섬들이 별처럼 총총히 박힌 지도가 띄워져 있었다.
그 뒤로 깃털 관을 쓴 중년 사내 외에 3명이 더 있었다.
20, 30대의 백면서생은 우아한 자태로 남색 깃털 부채를 쥐고 있었고, 진중한 표정의 검은 수염을 늘어트린 노인은 거의 자신의 발끝만 바라보며 말을 아꼈다.
마지막 한 사람은 삿갓을 눌러써서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아 사내라는 것만 알 수 있었는데 두 팔이 어깨에서부터 잘려있어 전신이 몽둥이 같아 보였다.
남가몽과 구레나룻 거한 등은 그들보다 더 뒤쪽에 있었다.
“궁주님, 홍월도라면 제가 조사했던 곳인데 제가 아무래도 소홀했던 모양입니다.”
백면서생이 자책하듯 말했다.
“북한선궁이 심혈을 기울여 금제를 쳐놓았다면 자네가 아니라 누가 갔어도 똑같았을 테니 자책할 것 없네. 이번 소식을 누가 퍼트린 것인지 모르겠지만 사실이라는 직감이 드는군.”
“그 말씀은 드디어…….”
그 말에 백면서생이 움찔하면서 들뜬 기색을 드러냈고 고개를 숙이고 있던 검은 수염 노인도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는 여전히 말이 없고 엄숙한 표정이었으나 미미하게 눈빛이 달라진 게 보였다. 삿갓을 쓴 사내 역시 삿갓이 약간 흔들렸다.
그 뒤쪽의 남가몽과 다른 수사들도 흥분한 기색을 보였다.
* * *
흑풍해역의 또 다른 해역 위.
잿빛 장포를 입은 복릉종 수사들이 허공에서 꼼짝 않고 있었다.
“사형, 이번 소식의 진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외눈박이 거한이 봉천도를 향해 물었다.
“틈이 있어야 바람이 불어오는 법. 이런 소문이 도는 데에는 필히 그 원인이 있을 것이다. 오랫동안 찾아보아도 선부 입구를 찾지 못했으니 어차피 다른 길이 있는 것도 아니지 않더냐?”
강시 사내 봉천도가 무표정하게 답했다.
“하하, 사형의 말씀이 옳습니다. 저는 그저 이번에 선부 입구를 찾지 못해 동분서주한 것을 생각하면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 같아…….”
외눈박이 사내의 말이 끝나기 전에 봉천도가 먹구름을 일으켜 모두를 휘감고 빠르게 하늘 끝으로 사라졌다.
* * *
녹음이 푸른 어느 섬 위.
은포 여인 거령이 푸른 가면을 쓰고 떠 있었다. 앞에 띄워놓은 푸른 화면을 살피던 그녀의 얼굴에 웃음기가 스쳤다.
이때 멀리서 하얀 빛줄기가 날아들었고, 거령은 고개를 돌리기 전 가면을 벗어 거두었다.
하얀 빛줄기가 사라지고 각진 얼굴 노인이 나타났다. 이전보다 인원이 더 늘어나 있었다.
“거 수사, 소식은 들으셨겠지요? 선부 입구가 홍월도 아래 나타났다고 합니다.”
각진 얼굴 노인이 밝은 얼굴로 다가섰다.
“알고 있습니다. 이 소식 때문에 무상맹이 며칠간 떠들썩했으니까요.”
“믿을 만한 정보라 여기십니까?”
“무상맹에서도 진위를 의심하는 목소리가 있었으나 아무도 아니라는 증거를 대지 못했습니다. 확인을 위해서는 당연히 홍월도로 직접 가보는 것이 최선일 테고요.”
목소리를 낮춘 노인을 마주 보고 거령도 확답을 주지 못했다.
“일단 그러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저는 홍월도에 대해 아는 바가 별로 없는데, 흑풍해역의 현지 세력이었던 설 가는 다르겠지요? 설산 수사, 아는 바가 있으십니까.”
“홍월도는 본래 그리 유명한 섬은 아니었습니다. 저희 가문도 수만 년 전에 흑풍해역을 떠나서 많은 정보를 지니고 있지 않고요. 그저 꽤 이름난 지선이었던 홍월도 도주가 느닷없이 누군가에게 살해당해 그 후로는 홍월도가 아무도 관리하는 자가 없는 섬이 되었다는 이야기만 들었습니다.”
“그렇군요…….”
각진 얼굴 노인의 설명에 거령이 눈을 가늘게 뜨고 생각에 잠겼다.
“결정을 내리셨다면 서둘러 출발하시지요. 이게 사실이라면 다른 세력들도 움직이고 있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바로 출발하지요.”
여인의 대답을 들은 각진 노인은 손에서 하얀빛을 방출해 설 가 수사들을 이끌고 날아오르려 했다.
휙.
이때, 뒤에서 미약한 바람 소리가 들리고 노인은 배가 서늘해지면서 극통을 느꼈다.
몸에서 힘이 빠지는 것을 느낀 노인은 고개를 숙여 사발 굵기의 백사(白蛇)가 자신의 배를 빠져나와 자신과 똑같이 생긴 하얀 소인을 입에 물고 있는 것을 내려다보았다.
각진 얼굴 노인은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을 했다.
크게 티는 나지 않았지만 장포 아래 수십만 년 동안 제련해온 단단한 갑옷을 입고 있었는데 하얀 백사가 그것을 종잇장처럼 뚫고나온 것이다.
백사는 입에서 한줄기 화염을 내뿜어 원영 소인을 불살랐다.
차카칵!
노인의 원영은 타오르는 대신 하얀 얼음으로 꽁꽁 얼어붙었다. 백사가 얼어붙은 원영을 통째로 삼키고 등 뒤로 빠져나가자 노인의 몸이 그 반동으로 뒤로 돌았다.
냉정한 얼굴의 거령을 백사가 휘감고 쉭쉭 거리면서 무어라 떠들고 있었다.
“이런!”
“미, 미친! 뭐 하는 겁니까!”
“노조님!”
노조의 갑작스런 암습에 설 가 수사들은 분노하며 달려들었다. 여러 보물들에서 뿜어져 나온 빛이 홍수를 이루어 거령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들도 방비하고 있었음이 확실했다.
그러나 거령은 그들을 비웃으며 한 손으로 거목 크기의 검은색 곤충을 날려 보내 빛의 홍수를 막았다.
“어째서…….”
숨이 끊기기 전 각진 얼굴 노인이 거령을 노려보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너희 설 가를 끌어들인 것은 낯선 흑풍해역에 익숙한 길잡이가 필요해서였다. 이미 입구를 찾았는데 너희를 어디다 쓰지?”
거령이 대수롭지 않게 답하며 손가락을 튕기자 각진 노인의 미간에 푹! 하고 구멍이 뚫렸다.
거령의 시선이 다른 쪽으로 향했다.
보물들이 연달아 부딪친 금색 딱정벌레의 몸에서 쿠쿠쿵! 하는 폭음이 들려 왔지만 빛이 가시고도 곤충의 몸에는 작은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공격을 당한 금색 딱정벌레의 눈에 노기가 차오르더니 앞발 두 개가 빠르게 움직였다.
서걱!
수정빛 두 줄기가 날아가서 영보 2개를 진흙덩이처럼 갈라 망가트렸다. 그 모습에 설 가 수사들은 당황해 입을 다물지 못했다.
“충동적으로 행동할 때가 아닙니다. 저 악녀는 우리가 상대할 수 있는 적이 아니에요. 어서 흩어져 달아나세요! 한 사람이라도 살아남아야 합니다.”
길쭉한 얼굴의 사내는 연달아 방출한 영보도 버려둔 채 하얀 빛줄기로 변해 날아갔다. 다른 수사들도 꿈에서 깨어난 듯 급히 몸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하하, 그냥 남아 있지들 그래?”
그 모습에 거령이 서늘하게 웃으며 그들을 가리켰고 금색 딱정벌레의 앞발이 맹렬히 움직였다.
굵은 수정 빛 두 줄기가 웅웅 울며 각기 다른 방향의 설 가 수사들을 참살하러 날아갔다. 그 속도가 불가사의해 번득하면 곧바로 다른 수사의 등 뒤였다.
푸푸푹!
잇달아 보호막이 얇은 종이처럼 뚫려 참혹한 비명들이 터져 나왔다. 설 가 수사들은 예외 없이 보호막과 함께 빛알갱이로 흩어져 사라졌다.
미소를 머금은 거령이 은빛을 내뿜어 설 가 노조 시체를 끌어왔다.
“음, 금선 수사의 충만한 기혈이 느껴져. 급할 것 없으니 천천히 먹어치워 주마.”
여인은 시체를 훑으며 입맛을 다셨다. 그녀는 그것을 치워버리고 금색 딱정벌레를 불러들여 어딘가로 날아올랐다.
* * *
며칠 뒤, 해용도.
푸른빛이 하늘을 가르고 날아들어 섬 위에서 우람한 사내로 변했다.
새까만 피부의 평범한 용모를 지닌 중년 거한은 한립이 새롭게 변신한 모습이었다. 그가 눈동자 깊은 곳에서 남색 빛을 일렁이는 동안 아래쪽 섬 모처에서 웅웅 진동이 일었다.
달걀 형태의 남색 빛의 장막이 갈라지면서 한 사람이 통과할 만한 입구가 만들어졌다.
“천우 왔느냐? 들어 오거라.”
한립이 무슨 말을 하기 전에 전음이 들여왔다. 입꼬리를 꿈틀한 한립이 남색 보호막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입구가 사라졌다.
그리 넓지 않은 보호막 아래 공간은 기온이 높아 후덥지근했다.
안으로 들어간 한립은 그곳에 모여 있는 낯선 수사들을 보고 움찔했다.
검은 장포를 입고 검은 수염을 기른 노인은 다른 이들과 대화를 나누다 그를 향해 웃음 지었고, 그 옆에는 노란 치마를 입은 여인이 함께 서 있었다.
한립은 그들이 자신처럼 모습을 바꾼 호언 도인과 운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제가 늦게 도착해 사숙을 오래 기다리게 하였습니다. 죄송합니다.”
한립은 공수하며 그들 뒤를 힐끗 쳐다보았다.
호언 도인과 운예 뒤로 도인 복장을 한 9명의 수사들이 서있었다.
붉은 도포를 맞춰 입은 수사들은 한 눈에 보기에도 같은 종문 소속이었다. 얼굴에 괴이한 붉은 기운이 떠오른 수사들이 짙은 불 속성 영력파동을 발산했다.
그중 머리카락과 눈썹이 전부 새빨간 고령의 노인, 웃통을 벗은 거구의 사내 그리고 사십 대로 보이는 중년 미부인이 호언 도인, 운예와 마찬가지로 금선경 수사였는데, 노인의 수행이 다른 이들보다 약간 높았다.
“천우야, 내가 소개를 해주마! 이분들은 고운대륙 진염종(眞焰宗) 수사 분들이시다. 이번에 명한선부로 들어가 함께 기연 조화를 찾아볼 분들이시지. 종주이신 욱양자 수사와 진운 장로, 노란 장로시다. 여기 천우는 저희 조카 벌 되는 후배로 영특하고 실력도 나쁘지 않아 이번에 선부에서도 분명 보탬이 될 아이입니다.”
호언 도인이 변한 검은 수염 노인이 허허 웃으면서 서로를 소개해 주었다.
“진염종 선배님들과 수사분들이셨군요. 저는 고천우라 합니다.”
눈을 빛낸 한립은 자연스럽게 미소를 띠고 인사를 했다. 진염종에 대해서는 그도 들어보았다.
고운대륙 구석에 있는 종문은 촉룡도에 버금가는 거대 세력 중 하나로 불 속성 신통에 능했지만 어째서인지 드러내놓고 바깥 활동을 하지 않았다.
촉룡도에 변고가 발생하기 전에도 고운대륙의 크고 작은 세력들은 음으로 양으로 촉룡도에 줄을 대면서 서로 경쟁을 해왔는데 최소한의 원칙만 지키면 촉룡도도 상관하지 않았었다.
현재 촉룡도가 어떤 상황인지 잘은 몰라도 나무가 넘어가면 그곳에서 생활하던 원숭이들도 뿔뿔이 흩어진다는 말이 있었다.
촉룡도라는 거목이 꺾였으니 주변의 여러 세력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그리고 호언 도인이 돌연 그런 종문 중 진염종을 끌어들인 행동에서 그들에게 묻어가겠다는 의도가 엿보였다.
“젊은 수사들의 성장은 항상 놀랍군요. 고 수사, 아직 선부의 입구가 어디 있는지 확실해진 것이 아니니 긴장할 것 없네.”
욱양자는 고개를 끄덕여주고는 눈길을 거두었고, 웃통 벗은 거한 진운과 중년 미부인 노란은 한립을 보는 듯 마는 듯했다.
금선인 그들이 한립을 크게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한립 역시 개의치 않고 호언과 운예 뒤로 가서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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