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1화. 유비무환(有備無患)
*
한립은 허리춤의 천수대를 만지작거리면서 생각했다.
그가 지닌 1성 중수의 양은 적지 않았는데 그간 겨우 3할 만을 2성 중수로 변화시켜 중수진륜에 흡수시킬 수 있었다.
‘2성 중수는 언제까지 흡수할 수 있을 런지…….’
고개를 저은 그는 진륜을 넣어두고 손바닥을 뒤집어 붉은 진법 원반을 불러냈다.
호언 도인이 준 전신진반이었다.
3년이 지났으니 호언도인이 말한 3, 4년 후의 선부 개방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아직까지 연락이 오지 않았다.
“설마 무슨 일이 생긴 것인가?”
사실 그는 선부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북한선역의 다양한 세력들이 달려들 것은 당연했고 그중에는 그보다 수행이 높은 금선경 수사들도 많아서 무턱대고 보물을 쫓아 들어가기에는 너무 위험했다.
하지만 진언화륜경의 후속 공법이 호언 도인에게 있는 한 그냥 떠날 수도 없었다. 빙산의 일각이나마 시간법칙의 막대한 위력의 맛을 본 상태에서는 더더욱 떠날 수 없었다. 마음이 복잡해져 원반으로 연락을 취해볼까도 했지만 한립은 그런 생각을 금세 지웠다.
호언 도인과 운예가 선부 입구를 찾는 일이 순조롭지 않다고 해도 어차피 그가 도울 수 없다면 방해하지 말고 기다리는 것이 상책이었다.
흑풍해역이 그리 평화롭지 않다지만 그들과 함께 다니고 소진한을 마주치지 않은 한 큰 문제는 생기지 않을 것이다.
한립은 붉은 원반을 넣어두고 침음했다. 명한선부에 대해 고민하다 보니 자연히 교삼이 떠올랐다. 교삼과 윤회전은 명한선부를 노리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눈을 빛낸 한립은 허원단 재료들이 들어 있는 저물대를 꺼내 쳐다보다가 장천병을 회수하고 어딘가로 날아갔다.
같은 방향으로 수일을 날아간 그는 오몽도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황량한 섬에 도착했다.
낙백량풍 구역과 가까워져서인지 벌써 천지영기가 요동치고 돌풍이 일어나 성난 파도를 만들어냈다.
그는 의식을 퍼트려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곧바로 진법 깃발, 진법원반 등을 무더기를 꺼내서 섬의 사방팔방으로 날려 보냈다.
우웅.
잠시 후 노란 구름이 섬 주변을 둘러싸고 외부의 소음과 천지영기를 완전히 차단했다.
그 위로 얼마 지나지 않아 두꺼운 푸른 금제가 떠오르고, 그 바깥으로 하얀 광채가 모여들어 금제를 이루었다.
눈 깜짝 할 사이에 금제 8개가 작은 섬을 감싸 가장 바깥의 남색 빛이 쪽빛 바다와 구분이 가지 않았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고 섬 중앙의 평지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은색 화로를 불러냈다.
화르륵!
그의 몸에서 은빛이 빠져나가 화로 밑에서 은염 소인으로 변했다.
빠르게 준비를 마친 한립은 저물법기 안에서 대량의 허원단 재료들을 꺼내 옆에 정리해 두고 호흡을 골랐다.
그의 손길에 재료들이 하나씩 화로 속으로 들어갔다. 그는 마지막 남은 시간을 이용해 허원단을 제련할 작정이었다.
구체적인 용도는 몰라도 교삼의 행동으로 보아 선부에서 쓸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 선부로 들어가기 전에 무엇이든 준비해놓으면 또 다른 기연을 만나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교삼 덕에 허원단 제련에 능숙해진 그는 두 손으로 빠르게 수결을 맺어가면서 연단에 집중했다.
한립이 허원단 연단에 집중하고 있을 때, 먼 바다의 이름 모를 섬에서는 남색 장포를 입은 사내가 뒷짐을 지고 떠 있었다.
창류궁 궁주 낙청해였다.
초조한 듯 미간을 좁힌 모습이 평소의 차분하고 선한 분위기와는 달라 보였다. 그는 홀로 있지 않고 여인처럼 아름다운 청수한 청년 남가몽과 함께였다.
청년도 표정이 그리 좋지 않아 두 사람은 답답함 속에서 침묵을 지켰다. 이때 남색 빛줄기가 하늘 끝에서 날아들었고, 그걸 감지한 두 사람은 몸을 돌렸다.
순식간에 그들 앞에 이른 남색 둔광은 구레나룻 중년인이었다. 사내는 포권을 하며 예를 취하려 했으나 낙청해가 손을 저어 막았다.
“인사는 되었고 무언가 찾아내었습니까?”
“궁주께 아룁니다. 저희 7명이 맡은 구역을 샅샅이 뒤졌으나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구레나룻 사내가 잠시 머뭇거리다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그 말에 낙청해의 표정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남가몽은 주변 온도가 뚝 떨어진 듯 냉랭한 분위기를 감지했다.
“계속 수색을 해야 할지…….”
“계속하세요. 범위를 넓히되 어떤 흔적도 놓치지 말고 샅샅이!”
“예!”
낙청해의 명에 구레나룻 사내는 다시 왔던 방향으로 날아갔다.
“스승님, 혹시 정보가 잘못된 것은 아닐까요? 명한선부가 흑풍해역에 나타나지 않을지도 모르는 것 아닌지요?”
남가몽이 다가와 말을 붙였다.
“아니, 흑풍해역에서 그간 벌어진 기이한 현상이나 흔적들은 선부가 나타나려는 징조가 확실하다. 게다가 명한산하도가 이곳에서 무언가 감응을 했으니 선부는 반드시 강림할 것이야.”
“그럼 입구를 찾을 수 없는 걸까요? 선부가 세상에 나타났고, 명한산하도를 지니고 있으면 어렵지 않게 입구를 찾을 수 있어야 할 텐데요.”
“답은 하나다.”
남가몽의 의문에 낙청해가 눈을 번득였다.
“예? 그것이 무슨…….”
낙청해는 제자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남색 거울을 꺼내 법결을 던져 넣었다. 곧장 몇 배로 커진 거울이 눈부신 빛에 휩싸여 빠르게 화면을 만들어냈다.
화면에 깃털 관을 쓴 자홍색 얼굴의 중년인이 나타났다.
“번 사제, 상황이 어떤가?”
낙청해는 구레나룻 사내를 대할 때보다 온화하게 물었다.
“북한선궁쪽 인물들은 물론이고 흑풍도의 주요인사들이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저희들이 조사를 해보았지만 그들의 행방을 찾을 수 없었고요.”
깃털관 사내가 고개를 저었다. 그 말에 안색이 어두워진 낙청해를 보고 남가몽도 상황을 파악했다.
“스승님께서는 모든 게 북한선궁의 소행이라 여기시는 거군요?”
“소진한이 비술을 펼쳐 입구를 봉인해 두었을 테지. 그러지 않고서야 선부 개방일이 1년도 남지 않았는데 아직까지 입구를 찾을 수 없을 턱이 있느냐.”
“저는 명한선부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선부의 입구는 두 공간 계면이 교차하는 곳으로 그곳을 봉인해 숨기는 것은 단시간에 불가할 거라 생각됩니다. 동원된 물자와 인물도 상당할 테고요. 저희의 눈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을 겁니다.”
“허허, 무슨 특수한 수를 써서 미리 입구가 나타날 위치를 알아내 우리보다 먼저 움직인 것일지도.”
낙청해의 웃음소리가 서늘해졌고, 남가몽도 더이상은 할 말이 없어 입만 달싹였다.
“선부 개방일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듣고 있던 거울 속의 깃털관 사내가 물었다.
“……어떻게든 선부의 입구를 찾아야 하네! 사제는 북한선궁 인물들과 흑풍도 도주가 어디로 간 것인지 계속 찾아봐 주게. 증발한 것이 아니라면 사람들이 이동하면서 반드시 흔적을 남겼을 것이야. 어쩔 수 없다면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것도 허용하겠네.”
“예.”
깃털관 사내의 대답과 함께 그의 모습이 거울에서 사라졌다.
낙청해는 남색 거울을 줄여 소매 속으로 넣어두고는 그곳에서 오래 머물지 않고 둔광으로 남가몽을 휘감아 어딘가로 날아갔다.
* * *
그 시각, 거대한 파도가 치는 흑풍해역 어딘가에 열댓 명의 사람들이 의복을 휘날리며 바람 속에 떠 있었다.
잿빛 장포를 입은 사람들은 촉룡도, 창류궁과 함께 일대에서 유명한 복릉종 수사들이었다.
그들을 이끄는 수사는 강시처럼 생긴 봉천도와 복릉종 종주인 외눈박이 사내였고, 그 외에도 금선경 존재가 세 명은 더 있었다.
각진 얼굴에 귀가 큰 인물은 체구가 크고 살이 쪄서 멀리서 보면 살덩이로 보였고 나머지 두 사람은 평범한 체형인 대신 피부색이 특이했다.
먹처럼 새까만 자는 어두운 곳에서는 눈코입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였고 그 옆의 눈처럼 새하얀 피부를 지닌 자는 눈썹조차 백발이었다.
나머지 진선경 수사들도 수행이 낮지 않아 대부분 중후기 존재들로 보였다.
“……흑풍도를 주시한 결과 북한선궁 인물들과 도주 육균 등 주요 인사들이 사라진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관사 한 명을 붙잡아 추혼술을 펼치고 나서야 그들이 며칠 전에 진작 종적을 감추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각진 얼굴의 귀가 큰 금선 수사가 공손히 보고했다.
“사형의 말씀대로 소진한이 선부 입구에 무슨 수작을 부려 놓은 것이 틀림없겠군요.”
외눈박이 사내가 그 말을 듣고 난색을 보이며 봉천도를 돌아보았다.
“우리가 방심했구나. 이번 선부의 출현은 의미가 남다른데 소진한이 이런 계략을 꾸밀 거라 짐작했어야 했어.”
강시 사내, 봉천도가 탄식하듯 말했다.
“대장로님, 종주님께 아룁니다. 저희 복릉종 외에 다른 세력들도 북한선궁 인물들을 찾고 있었습니다.”
“오, 어떤 세력들인가?”
각진 얼굴 금선의 보고에 봉천도가 눈을 번득였다.
“두, 세 무리가 움직이고 있는데 워낙 경계하는 탓에 가까이 접근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 창류궁도 있는 듯합니다. 오극궁주 중에 사극궁주 최찬을 본 것 같습니다.”
“입구가 사라진 것이 북한선궁의 짓인 걸 알았다면 다른 세력도 마찬가지겠지. 소진한이 이런 짓까지 벌였는데 다른 세력들이 가만있을 리 없어. 다른 세력의 동향은 일단 신경 쓰지 말게.”
봉천도가 손을 저었다.
“소진한! 북선선궁의 궁주라는 자가 어찌 이런 비열한 방법을 쓴단 말입니까. 사형, 이제 우리는 어쩌면 좋겠습니까?”
외눈박이 사내가 씩씩대면서 봉천도를 바라보았다.
“곧 선부가 강림할 테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입구를 찾아야 한다. 우리가 허탕치는 것은 큰일이 아니나 소진한이 그것을 차지하면 복릉종 전체가 위험에 처할 것이야. 촉룡도의 전철을 밟을 수야 없지 않느냐.”
봉천도의 낯빛이 차가워지며 서늘하게 답했다.
* * *
흑풍성 중심의 고급 객잔에 사내와 여인이 마주 앉아 있었다.
푸른 장포를 입은 사내와 하얀 장포를 입은 여인은 평범하게 생겼지만 풍만한 몸매를 가졌다. 그들은 술상을 받아 놓고 심각한 분위기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호언, 소진한이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어요. 시간이 없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백포 부인이 조급히 중얼거렸다. 남녀는 용모를 바꾼 호언 도인과 운예였다.
“흑풍성에서 기다리고 있어봐야 소용이 없을 것 같고, 다른 곳으로 가보도록 하지. 중차대한 일이니 반드시 선부 입구를 찾아야 하네!”
“하지만 우리 둘이서 드넓은 흑풍해역을 어찌 전부 찾아다니겠어요? 그러지 말고 려비우도 불러서 도우라고 하지요. 어찌되었든 둘보다는 셋이 나을 테니까요.”
“아니야, 그 녀석은 최대한 다른 세력들의 눈에 띄지 않게 하는 게 나아. 어떻게 입구를 찾을지는 내게 생각이 있고.”
호언 도인은 운예의 제안에 고개를 저으며 일어나 창밖을 쳐다보았다.
그런 호언의 뒷모습에 운예는 그가 한 입으로 두 말하는 사내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에 더는 무어라 하지 않았다.
* * *
흑풍해역의 황폐한 섬 위에 하얀 장포를 입은 수사들이 모여 있었다.
총 12명의 사내와 여인들은 장포에 흰제비가 수놓아져 있었고 두세 명이 모여 앉거나 서서 침묵을 지켰다.
그중 각진 얼굴의 노인이 금선경 수사로 우두머리로 보였고 나머지는 전부 진선들이었다. 간혹 먼 곳을 바라보는 그들은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오래지 않아 은색 빛줄기가 빠른 속도로 떨어졌다. 둔광은 바로 은포 여인이었다.
“거 수사, 오셨습니까?”
각진 얼굴 노인이 잘 보이려 미소를 띠우고 나아가 그녀를 맞이했다.
“찾으셨습니까?”
은포 여인 역시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아직은 없습니다. 저희 설 씨 가문이 오래전 흑풍해역에서 이주했어도 아직 곳곳에 눈과 귀가 많습니다. 그들에게 연락을 취해 함께 찾고 있으니 조만간 수확이 있을 것입니다.”
“선부 개방까지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전력을 다해 입구를 찾아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온갖 술수를 부려 여기까지 온 것이 의미가 없게 될 것입니다.”
은포 여인은 슬쩍 미간을 좁혔다 얼굴을 피고 온화하게 말했다.
“최선을 다할 것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노인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여인은 몇 마디를 더 나누다 은빛으로 변해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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