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9화. 잠시 이별
*
선박에 앉은 한립은 바깥의 귀곡성이 전혀 들리지 않는 것에 감탄했다. 그가 지닌 정풍주와 비슷한 효과에 그 위력은 열 배 이상이었다.
그의 시선이 자연스레 노란 선박에 박힌 타원형의 수정돌로 향했다.
“벽사수의 뼈로 만든 수정일세.”
운예가 그것을 보고 알려주었다.
“벽사수요? 길함을 불러들이고 흉한 일을 피하게 한다는 전설의 짐승이 아닙니까?”
한립이 놀라 눈을 깜빡였다. 그도 고대 경전에서 벽사수라는 이름은 읽어보았다.
태어날 때부터 음혼과 귀물의 천적이라 진선계에서도 명성이 높았다.
벽사수를 곁에 두면 화를 쫓고 복을 불러들인다고 하여 상서로운 짐승으로 불린 탓에 오래전 사냥 열풍으로 거의 멸종된 종이기도 했다.
“길한지는 모르겠고, 양기가 강한 짐승이라 호언이 그 뼈로 선박을 제련한 덕에 낙백량풍은 잘 건너왔지.”
운예가 미소를 머금었다.
“호언 선배님께서 낙백량풍을 건너느라 애를 많이 쓰셨습니다. 그런데 운 선배님, 백소원 수사는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요?”
“소원이는 설법대회 전에 촉룡도를 떠나 지금은 안전한 곳에서 수련하고 있네. 관심을 가져주어 고맙구만.”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백소원을 언급하자 한립은 몽천천과 자신을 따라나선 이들이 떠올랐다. 그간 신분이 노출될 것을 우려해 연락은 하지 않았다.
허나 어차피 모두 자신의 갈 길이 있는 법이었다. 자신의 비호를 벗어나 그들도 스스로의 길을 개척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3일은 금방 지나갔다.
한립이 보름 정도 날아온 거리를 노란 선박을 타고 겨우 3일 만에 돌아온 것이다.
“이곳이 흑풍해역!”
호언 도인이 습한 해풍을 맞으면서 중얼거렸다.
“북한선역 변두리에 있어 천지영기가 희박하고 자원도 다른 지역에 비할 바가 못됩니다. 현재 저희가 있는 곳은 흑풍해역 서쪽으로 이것이 전체 지도입니다.”
한립은 지도를 복제한 옥간을 꺼내 선배들에게 건넸다.
“흑풍해역도 면적이 상당하군.”
“외지다고 해서 면적이 작은 곳은 아닙니다. 규모로만 보면 웬만한 대륙과도 비견될 정도니까요.”
호언 도인의 말에 한립이 고개를 끄덕였다.
호언 도인은 옥간을 집어넣고 남색 화폭을 꺼내들었다. 산과 강이 그려진 풍경도였다.
“이건……. 명한산하도?”
한립이 탄성을 내뱉으며 남색 화폭을 유심히 보았다.
“려 수사, 이걸 아는가?”
“촉룡도 설법대회 전 비밀경매회에서 누군가 낙찰받아 가져가는 것을 보았었지요. 찢겨진 화폭을 누가 고가에 사가나 했더니 그게 호언 선배님이셨습니까?”
“설법대회전 경매에 명한산하도가 등장했었다고?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듣네. 이건 다른 곳에서 구한 그림이고, 자네가 본 것이 아닐세.”
“명한산하도가 1부가 아니었나 보군요? 이름만 들어도 명한선부와 무슨 연관이 있을 듯합니다.”
“그렇지, 이건 명한선부에 들어가려면 꼭 필요한 열쇠와 같네. 내가 알기로 총 8부가 있는데 북한선궁, 복릉종, 창류궁, 촉룡도에서 한 부씩 지니고 있고 나머지 4부는 바깥에서 흘러 다니지. 아마 자네가 경매에서 본 것이 그중 1 부일 걸세.”
호언 도인의 설명에 한립은 당시 상황이 이해가 되었다.
명한산하도에 숨겨진 용도를 알고 있었기에 정체 모를 홍포 여인이 높은 대가를 지불하고 가져간 것이다.
“아까 촉룡도에 1부가 있다고 하셨는데, 그럼 이게…….”
“그래, 이제 촉룡도에 명한산하도는 없네. 원래 백리도주가 보관해오던 것을 종문을 떠나면서 갖고 나왔지.”
호언 도인은 짓궂게 웃음을 흘렸다.
“당시만 해도 촉룡도는 창류궁, 복릉종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13분의 금선 도주와 구름같이 몰려든 진선경 수사들을 지니고 있어 북한선궁과도 대등하게 교류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구양도주와 다른 분들이 선궁과 결탁하지 않았으면 북한선궁이 아무리 세력이 커도 우리를 건들 수는 없었을 텐데요.”
한립이 고개를 저으며 탄식했다. 그 말에 호언 도인과 운예의 낯빛도 어두워졌다.
“자네가 본 것은 표면적인 현상일 뿐일세. 종문은 예전부터 흔들리고 있었어. 13 금선 도주들 간에 암암리에 갈등이 끊이지 않아서 백리도주께서 버티고 계시지 않았더라면 진작 창류궁과 복릉종이 우리를 앞서 나갔을 걸세…….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으니 이런 이야기는 그만하지.”
냉소를 흘린 호언 도인은 입술을 달싹이다 열손가락을 빠르게 움직여 남색 법결들을 날렸다.
그러자 동그란 단 형태의 진법 허상이 떠올라 눈부신 빛을 발산했다.
호언 도인의 손에서 명한산하도가 날아가 진법 허상 중앙으로 떨어졌다.
웅!
남색 빛이 화폭을 잠식에 안개를 일으켰다. 이에 주변 온도가 급격히 떨어지고 해수면이 얼어붙어 갑자기 겨울이 된 것 같았다.
한립은 잠시 몸을 떨어졌지만 금방 멀쩡해졌다. 강한 냉기라도 그에게 심각한 해를 끼칠 순 없었다.
명한산하도를 중앙에 품은 진법이 웅웅 진동하면서 강한 빛을 퍼트렸다. 그리고 진법과 화폭이 호응해서 무언가를 감응하듯 깜빡였다.
한립은 뭘 하는 건지 궁금했지만 엄숙한 호언 도인의 표정을 보고 방해하지 않았다. 운예와는 그리 가까운 사이가 아니라서 당연히 그녀에게도 묻지 않았다.
호언 도인이 수결을 풀며 팔을 내리자 남색 진법 허상이 흩어지고 명한산하도도 빛을 잃고 돌아왔다.
“호언, 어때요?”
“흔적으로 보아 선부가 나타나려면 대략 3, 4년의 시간이 남은 것 같아.”
운예와 호언 도인의 말에 한립은 남색 화폭이 그저 열쇠만은 아니란 것을 눈치챘다.
“그럼 위치는요?”
“거리가 멀어서인지 아직 구체적인 위치는 감응못하는데,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지도를 따라 몇몇 군데로 이동해 시도해보는 것이 좋겠군.”
“그러는 수밖에 없겠네요.”
“려 수사, 약간이지만 시간이 남았는데 어쩔 생각인가? 우리를 따라나설 텐가 아니면 혼자 준비할 시간이 필요한가?”
호언 도인이 고개를 돌려 한립에게 물었다.
“제 수행이 두 분에 미치지 못하니 준비를 좀 해야겠습니다.”
“하긴 위험한 일들이 많을 테니 잘 대비해 보게!”
한립의 대답에 호언 도인이 수긍하며 붉은 진법 원반을 건넸다.
“안전한 곳을 찾아보고 무슨 문제가 생기면 이 봉화반(烽火盤)으로 내게 연락하게.”
한립은 불꽃 모양이 새겨진 원반을 받아 잘 챙겨 넣었다. 호언 도인은 선궁 에게 절대 들켜서는 안된다며 여러번 당부를 하고 운예과 같이 떠났다.
한립은 그곳에서 잠시 머물다 푸른 빛줄기를 일으켜 다른 방향으로 날아갔다.
보름 후.
오몽도 인근 허공에 푸른빛이 반짝이고 한립이 떠올랐다. 오몽도는 금제로 둘러싸여 여전히 봉쇄 중이었다.
그가 시선을 돌리며 다른 방향으로 향했다.
오몽도에서 머지않은 해역에 거대 소용돌이가 천둥소리를 내면서 수만 리의 바닷물을 끌어들이는 중이었다.
해저로 내려간 한립은 남색 금제 안에서 지기화신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남색 수정실이 화신 머리 위에서 서서히 움직이고 있었다. 주변의 바닷물이 밀려들어 빠르게 중수 방울을 이루었다.
화신의 양손 사이에는 사람 머리통 크기의 검은 중수가 모여 빙글빙글 회전했다.
같은 검은색 중수였지만 한립은 차이를 알아보았다. 응결된 것은 1성 중수를 넘어선 2성 중수였다.
푸른 허상으로 변해 금제 안으로 날아든 한립이 그 안에 가부좌를 틀고 자리를 잡았다.
겨우 3, 4년 밖에 시간이 없는데 다른 적당한 장소를 찾기도 그렇고 여기서 일을 보기로 정한 것이다.
그의 손짓에 2성 중수 덩어리가 화신의 손을 떠나 날아들었다. 무게가 1성 중수보다 훨씬 무거워서 몇 백 개의 산봉우리를 응축해 놓은 것 같았다.
한립은 눈을 감고 의식을 방출해 2성 중수 덩어리가 내뿜는 짙은 물 속성 영력을 느껴보았다.
마치 대양을 마주한 듯한 착각이 들었다.
‘쓸 곳이 많겠어.’
흡족한 얼굴로 눈을 뜬 한립은 나머지 1성 중수 전부를 2성 중수로 응련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가 지웠다.
시간이 충분하지 않아 지금은 일단 지기화신이 정련을 해내는 걸로 만족하고 선부 일이 끝난 다음에 고려해보는 게 나았다.
한립은 중수를 지기화신의 손 사이에 돌려놓고 다른 일에 대해 생각했다.
선부 개방일까지 남은 3년 동안 비술을 익히기에는 시간이 촉박하고 빠르게 실력을 높여 살아남을 확률을 키울 방법은 보물이나 선기에 공을 들이는 것뿐이었다.
칠요성환처럼 남에게 빼앗아온 선기들은 그가 만든 것이 아니라 다시 제련하기 쉽지 않고 남은 것은 청죽봉운검과 중수진륜이었다.
쉬쉬쉬쉭.
소매 속에서 72자루의 푸른 검이 빠져나와 가느다란 금색 뇌전을 타닥거렸다. 청죽봉운검의 방대하고 예리한 기운에 주변에 물결이 쳤다.
음매 괴물과 싸우느라 기운이 약간 상했는데 다행히 웅산의 첨봉검진을 통해 삼킨 수백 개의 검원들로 위력도 늘었고 며칠 동안 몸에 넣어두고 보양을 했더니 대충 회복되었다.
한립의 손을 들어 검은 고리도 옆에 띄웠다. 눈부신 검은 물빛을 머금은 고리는 중수진륜이었다.
두 보물 사이를 오가던 그의 눈빛이 중수진륜에게 머물렀고, 청죽봉운검들은 회수되었다.
청죽봉운검이 본명법보이기는 하나 더는 위력을 상승시키기 쉽지 않은 상황에 다시 제련에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었다.
중수진륜은 스스로 공법을 이용해 만들어낸 위선기로 아직 성장할 여지도 많고 실패해도 그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다.
마음을 정한 한립은 숨을 고르고 수결을 맺었다.
휘릭!
빙글빙글 돌기 시작한 중수진륜의 도문이 빛을 발하면서 파문을 일으켰다.
그간 한립도 수행이 늘고 중수진륜을 전투에 활용하면서 보물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져 다시 제련하기 힘들지 않을 것 같았다.
그는 위진륜 제련법이 적힌 옥간을 꺼내 이마에 가져다댔다. 한립은 장장 3일 동안 연구한 끝에 눈을 뜨고 필요한 재료를 꺼내 지면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하룻밤을 꼬박새워서 완성된 것은 복잡한 진법이었다.
진법 안에 반짝이는 8개의 고리 도안을 본 한립은 중앙으로 가 자리 잡았고 중수 정련을 멈춘 지기화신이 그의 앞으로 와서 마주 앉았다.
수결을 맺은 한립의 입에서 푸른 원영의 불길이 뿜어져 나왔다. 동시에 지기화신도 입에서 남색 불길을 내뿜어 푸른 원영의 불길과 결함했다.
화르륵!
두 화염이 뭉쳐 커다란 구슬을 이루고 중수진륜을 활활 달구었다. 중수진륜 위로 떠오른 주술문자들이 웅웅 울고 있었다.
한립은 주문을 외면서 열손가락으로 법결을 날렸다.
발동이 된 진법의 8개의 고리 도안이 흐릿하게 변해 각각 현묘한 금색 주술문자를 일으켜 허공에서 구슬 허상으로 뭉쳤다.
수결의 변화에 따라 구슬 허상이 터져 남색 불길을 토해냈다. 진법 전체가 활활 타고 있었다.
* * *
별안간 1달의 시간이 흘러갔다.
진법 위에서 남색 불길에 휩싸인 중수진륜은 투명하게 변해서 남색 얼음 결정처럼 반짝였다.
그러나 남색 빛이 수시로 늘어났다 줄었다 하며 언제라도 고리 형태를 벗어나 액체로 풀어질 것 같은 아슬아슬한 느낌을 주었다.
동시에 진륜의 물의 도문이 찬란한 광채를 뿜으며 강렬한 법칙 파동을 퍼트렸다.
그걸 본 한립은 준비해 놓은 여덟 가지 재료들을 떠오르게 했다. 종류는 달라도 모두 짙은 남색의 물 속성 법칙의 힘을 지닌 재료들이었다.
진법에 퍼져 있던 화염들이 차츰차츰 8개 고리 도안으로 돌아가 뭉쳤고, 몇 호흡 만에 여덟 줄기의 불기둥을 이루었다.
한립이 손짓해서 모든 재료를 각각의 불기둥에 던져 넣었다.
주문소리가 들리고 불기둥들이 엄청난 고온으로 재료들을 녹여 남색 액체 덩어리로 만들었다.
덩어리 속에는 남색 주술문자와 진한 법칙의 힘이 녹아 있었다.
그걸 본 한립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수결에 변화를 주었다. 불기둥 속에서 여덟 개의 액체 덩어리가 빠져나와 중수진륜이 들어있는 불구슬 속으로 스며들었다.
한립은 길게 숨을 내쉬며 더욱 긴장된 얼굴로 수결에 집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