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8화. 선부(仙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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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하는 동안 호언 도인이 날려 보낸 금색 옥병이 한립 앞에 붉은 빛에 휩싸여 떠있었다.
은은하게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약향이 풍겼다.
“육합현단(六合玄丹)이다. 부상을 치유하는 데도 좋고 원기를 보하는 데도 도움이 되지. 낙백량풍을 거슬러 오느라 원기가 많이 상했을 것이니 가져다 쓰거라.”
“조금 전 두 분께 받은 은혜를 갚지도 못했는데 질문 몇 마디에 답하고 이런 것을 받아도 되겠습니까?”
한립은 고개를 저으며 옥병을 밀어서 돌려보냈다. 그걸 본 호언 도인은 아무 말 없이 옥병을 다시 넣었다.
한립은 흑풍해역 상황에 대해 대략적으로 이야기해주면서 흑풍도에 북한선궁 사람들이 나타난 것도 살짝 언질해 주었다.
호언 도인과 운예는 그 이야기에 눈빛이 흔들렸으나 예상하고 있었던지 크게 놀라지 않았다.
“두 분의 표정을 보니까 흑풍해역의 이변이나 북한선궁 인물들이 나타난 것이 그리 이상하지 않으신 듯합니다.”
이야기를 마친 한립이 둘을 보면서 씩 웃음 지었다. 그 말에 호언 도인은 하얀 눈썹을 끌어올렸고 운예는 노인을 쳐다보았다.
분위기가 갑자기 무거워졌다.
“답해 주시기 어려우시면 조금 전 질문은 없던 것으로 하겠습니다.”
“……허허, 려 수사가 이리 진솔하게 나오는데 나도 숨길 것은 없네.”
침음하던 호언이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호언!”
옆에서 운예가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괜찮네. 려 수사가 남도 아니고 또 이번 일에 도움이 될 지도 모르지 않나?”
호언 도인의 의미심장한 말에 운예도 더는 말리지 않았다.
“호언 선배님 무슨 뜻으로 하는 말씀이신지요? 하기 어려운 말씀이라면 굳이 말씀해주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한립은 귀찮은 일에 휘말릴 것 같다는 직감이 들어 미간이 좁아졌다.
“일단 내 말을 잘 들어 보게. 이번 일은 말이지, 자네에게 아주 큰 기연이 될지도 모르니까.”
“……말씀해 보시지요.”
“자네가 언급한 흑풍해역 각지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는 재해는 다 이유가 있어서네. 간단히 말해 선부(仙府)가 세상에 나타나려 해서 주변 영맥들이 요동치는 것이지. 북한선궁 사람들이 이곳에 나타난 것도 선부 때문이고, 우리가 흑풍해역으로 가려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 일세.”
호언 도인의 설명에 한립은 깜짝 놀랐다.
놀라운 소식이 번개처럼 그의 몸을 관통하는 기분이었고 이로써 그간 의아했던 것들이 전부 설명이 되었다.
흑풍도 청우도의 이상한 행동들, 북한선궁의 출현도 다 선부 때문이었다.
교삼이 그를 유혹해 윤회전에 가담하게 하고 큰 보수를 주어가면서 허원단을 제련한 것도 선부와 연관이 있을 확률이 컸다.
“이 선부의 이름은 명한선부로, 오래 전 명한선군이라는 선배께서 남기신 동부라네. 명한선군 선배께서 술법을 펼쳐 공간균열 속에 선부를 봉인해 두셨는데 그 후 몇 만 년에 한 번씩 북한선역 어딘가에서 선부가 출현하고는 했지. 그 안에 든 각종 보물과 단약, 공법, 선기들 때문에 매번 수많은 세력들간 치열한 다툼이 벌어졌네. 달리 말하면 명한선부는 북한선역 제1의 보물 창고나 마찬가지인 게야.”
호언 도인은 말을 하면서 한립의 표정을 살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린 처음 선부 이야기를 꺼냈을 때 순간 놀란 것을 제외하면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명한선부가 나타날 거란 이야기는 알아들었습니다. 선배님께서 말씀하신 기연은 제가 두 분을 따라 그 선부를 수색하면 찾게 될 보물을 말씀하시는 것이겠지요?”
“그렇지! 이런 기회는 아무 때나 찾아오는 게 아니네! 관심이 가나?”
“선배님의 말씀대로면 명한선부가 존재한 지 오랜 세월이 흘렀고 이미 몇 차례나 세상에 나타난 것 아닙니까. 안에 보물이 많다고 해도 벌써 동이 났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건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네! 선부 안의 기관 금제가 빼곡해서 보물을 가져가는 게 쉬운 일이 아니거든. 실력이 부족한 자가 들어갔다가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도 많아서 그들이 지닌 물건이 선부의 보물 일부가 되어 남아 있기도 하고. 지난번 개방되었을 때 누군가 선부 안에서 또 다른 공간을 찾아냈다고 하니, 그 안에서 어떤 막대한 기연을 얻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호언 도인이 웃으며 설명해도 한립의 표정은 고조되기보다 오히려 가라앉았다. 그 모습에 호언 도인도 괜히 설득하려 들지 않고 배시시 웃으며 기다렸다.
“그런 제안을 해주셔서 무척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기대할 수 있는 바가 큰 만큼 위험도 뒤따를 것이 분명합니다. 저는 함께 하지 않겠습니다.”
한립이 고개를 들며 분명하게 답했다.
지금 가장 중요한 일은 금선경에 이르는 것이라 명한선부가 제아무리 대단해도 그런 위험을 감수할 수 없었다.
북한선궁에서도 적잖은 인물들을 파견하였을 테고 수행이 높은 금선경 존재들도 허다할 텐데 그의 신분을 들키면 선부가 그의 무덤이 될 터였다.
“선부 안에서 북한선궁 인물들을 마주칠까 걱정하는 것인가?”
호언 도인이 한립의 마음을 꿰뚫어 보았다.
“진선에 불과한 제가 북한선궁 인물들과 어찌 대적하겠습니까.”
말은 안 했지만 호언 도인과 운예도 북한선궁에서 쫓기는 처지라 그들과 명한선부에 들어가면 신분이 노출될 가능성이 더 컸다.
“그런 거라면 걱정할 것 없네. 자네가 무상맹에 들어간 것을 알고 있는데 무상맹 가면의 변신술은 현묘해서 금선도 쉽게 본모습을 알아볼 수 없으니까. 우리 셋이 산수로 위장해 들어가면 그들도 우릴 어쩌지 못할 것이야!
매번 명한선부가 등장할 때마다 수많은 세력이 달려들어서 이번에도 창류궁, 복릉종 등이 벌써 인원을 파견했지. 북한선궁의 세력이 커도 그들을 신경 쓰느라 우리 같은 산수들은 거들떠볼 틈도 없을 것이네.”
“창류궁과 복릉종에서도 흑풍해역에 수사를 파견했단 말씀입니까?”
“선부가 출현할 때마다 촉룡도를 포함한 세 종문은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모습을 드러내 왔네. 촉룡도는 사정이 어려워졌어도 나머지 두 종문은 건재하니 결코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겠지! 촉룡도 일로 두 종문이 북한선궁을 더욱 적대시하고 있으니 선부에서 둘이 손을 잡고 무슨 일을 꾸밀지도 모를 일이고.”
“그러니까 북한선궁은 그들이 무슨 짓을 꾸밀까 걱정해서 대비하느라 우리에게는 신경을 쓰지 않을 거란 뜻이시군요?”
“허허, 바로 그 말일세!”
호언 도인의 대답에 한립이 턱을 괴고 고민했다.
창류궁과 복릉종 그리고 윤회전이 선궁과 적대시하는 것은 사실이라 노인네의 말이 일리가 있었다.
교삼이 은밀하게 진행하던 일도 선부로 진입할 준비였을 것이다.
“거기다 선부 안에 넘쳐나는 게 보물이라 자네의 수행으로 한두 가지만 찾아 나와도 고비를 넘어 금선경에 이를 수 있을 것이네.”
“선부에 금선경을 돌파하는 데 도움이 될만한 보물이 있겠습니까?”
호언 도인의 은근한 꾐에 한립이 두 눈을 반짝였다.
“그건 나도 들어만 보았는데, 소문이라지만 거짓은 아닐게야. 예전에 선부에서 금선경 수행을 높여줄만 한 단약을 구해 나온 사람이 있으니까.”
“……선배님께서도 선부에 대해 그리 자세히 알지 못하시는군요. 그 안에 그런 보물이 있든 없든 저는 목숨을 걸고 찾아볼 생각은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이해하네. 우리 정도 수행에 이르면 목숨보다 귀한 게 없는 법이지. 허나 자네는 진언화륜경을 익혔겠지?”
침음하던 호언 도인이 뜬금없는 말을 했다.
“맞습니다.”
한립은 움찔했으나 무슨 말을 하려는가 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허허, 그 내력은 알고 공법을 수련하는겐가?”
“선배님께 가르침을 청합니다.”
“진언화륜경은 촉룡도 3대 공법이면서, 백리도주께서 오래전 진언문(眞言門)이란 종파에서 빼앗아온 공법일세.”
한립은 호언 도인을 말을 듣고 깜짝 놀라지 않았다.
진선계에 선역과 고계 진선들이 많다지만 인계, 영계와 마찬가지로 약육강식의 세계라는 것은 똑같았다.
매일 이름 모를 수많은 종문들이 망하고 새로 생겨나 서로 공법을 뺏고 빼앗기는 것도 흔한 일이었다.
“뭐 이런 안 좋은 소리를 하자고 꺼낸 이야기는 아니었고, 진언화륜경이 겨우 3성으로 끝나는 공법이 아니라 총 9성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네.”
“예?”
그 말에 한립의 안색이 달라졌다.
진선 후기 최고봉에 이른 그로서는 금선에 이른 후에 익힐 공법에 대해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시간법칙에 관련된 다른 공법이 없는지 알아보았었는데 진언화륜경에 후속 공법이 더 있다는 것은 놀라운 정보였다.
“백리 선배님께서는 어째서 촉룡도에 전반부 3성의 공법만 놔두고 대외적으로도 진언화륜경이 3성까지라고 알리신 것입니까?”
“진선계에서 시간법칙과 연관된 공법은 극히 드물어서 수련을 마치면 금선경에만 이를 수 있어도 대단한 보물로 여겨진다. 진언화륜경 3성 공법도 촉룡도의 3대 보물이었는데 누군가 총 9성까지 구결이 있는 줄 알았다면 화를 불러들였을 것이야.”
한립의 질문에 호언 도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사실입니다.”
“백리 도주도 당시 공법을 온전히 구하지 못해 앞쪽 6성까지의 공법만 가져오셨고, 지금은 그게 내 수중에 있네.”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면 돌려 말하실 것 없습니다.”
“나와 함께 명한선부에 들어가서 나를 도와 어떤 물건을 찾아내는 데 성공하면 내가 지닌 공법을 준수해 주지.”
웃고 있는 호언 도인을 보고 한립은 또 침묵했다. 호언 도인은 그가 거절하지 못할 것을 안다는 얼굴로 뒷짐을 지고 서있었다.
“호언 선배님의 말씀이 사실이라면 제안을 고려해 보겠습니다만, 그 전에 선배님 수중에 진언화륜경의 나머지 공법이 있다는 것을 확인해야겠습니다.”
한립이 고심 끝에 이렇게 말하자 호언 도인이 옥간을 꺼내 수결을 맺어 몇 군데를 짚고 던져 주었다.
“……맞습니다. 진언화륜경의 후속 공법입니다.”
한립이 곧바로 의식을 불어넣고 고개를 끄덕였다.
옥간에 적힌 내용은 몇 줄에 불과했으나 진언화륜경 앞 3성을 익힌 그가 후속 공법을 알아보는 것은 당연했다.
“허허허, 그럼 우리와 같이 함께 하는 것으로…….”
“잠시만요. 약속드리기 전에 두 분께 먼저 확인할 것이 있습니다.”
한립이 호언 도인의 말을 끊었다.
“말해 보게.”
“저는 일개 산수로, 실력도 두 분 보다 한참 부족한데 어째서 데려가려고 하시는 것인지 말씀해주십시오.”
“그건 자네가 묻지 않아도 이야기해줄 생각이었어. 명한선부에 들어가는 것은 아까 말했다시피 어떤 물건을 취하기 위해서인데, 그 과정에 려 수사의 진언보륜 신통이 있으면 성공확률이 커져서 그러하네.”
호언 도인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반드시 얻어야 할 보물이 있다면 싸움을 피할 수 없겠네요. 위험한 여정이 되겠습니다.”
한립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위험이야 물론 따르겠네만, 진언화륜경이 얼마나 귀한 보물인데 그 후속 공법을 얻으려면 어느 정도 위험은 감수해야 하는 것 아니겠나? 물론 우리의 능력이 닿는 한에서 자네를 안전하게 지킬 거라 약속하지.”
호언 도인은 운예와 눈을 마주치고 잔잔히 웃음 지었다. 그래도 한립의 얼굴은 펴질 줄 몰랐다.
“이렇게 하세, 성의를 표하기 위해 나를 따라 선부에 들어가기만 해도 진언화륜경 4성 공법은 알려주겠네. 물건을 손에 넣은 다음 5성과 6성 공법도 넘겨주기로 하고 말이야.”
호언 도인의 말에 한립은 말없이 그 제안을 묵인했다.
“이제 다른 문제는 없겠지?”
“없습니다.”
“좋네! 허허, 약조한 것으로 알지. 일을 마친 다음 약속은 지킬 테니 걱정하지 말게.”
“선배님과 알고 지낸 세월이 있는데 어찌 그런 의심을 하겠습니까.”
한립도 이제야 빙긋 웃어 보였다.
“자, 그럼 타자고! 낙백량풍 속에서 오래 머물러서 좋을 게 뭐겠나.”
호언 도인의 말에 한립이 선박에 오르고 노란 타원형 빛덩이가 다시 검은 바람 속을 질주했다.
빛덩이가 발산하는 특수한 파동이 낙백량풍을 억제해서 검은 바람이 전혀 안으로 스며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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