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7화. 도움을 받다
*
멀리서 검은 그림자가 안개를 품고 거리를 좁혀 왔다.
쉭!
이미 예상했던 한립은 금빛 뇌전이 섞인 푸른빛을 전신에 불러내서 화살처럼 튀어 나갔다.
그도 빨랐지만 검은 그림자는 더 빨라서 쌍방의 거리가 확 좁아졌다. 양손으로 수결을 맺은 한립의 몸 안에서 날카로운 바람소리가 들려왔다.
푸른 비검들이 우르르 날아올라 뭉쳐지더니 푸른 빛덩이가 되어 그의 앞을 막았다.
얼어붙어 있던 푸른 거검 열댓 자루도 이때는 검은 얼음을 털어내고 푸른 빛덩이 속에 합류했다.
푸른 빛덩이가 빙글빙글 회전하며 거대한 연꽃으로 피어났다.
검은 그림자는 대량의 새까만 화염을 일으켜서 거대한 악귀 얼굴로 변해 흉흉한 면모를 드러냈다.
날카로운 이빨에 핏빛으로 물든 섬뜩한 얼굴이었다. 악귀 얼굴은 속도도 빨라서 몇 호흡 만에 그와 마주했다.
미간을 좁힌 한립이 빠르게 수결을 맺어 푸른 연꽃에서 벽사신뢰를 품은 거대한 검기들을 분출했다.
그러나 곧바로 한립이 경악할 일이 발생했다.
벽사신뢰를 함유한 검기들이 악귀 머리 바깥의 검은 안개에 눈녹듯이 스며든 것이다.
검은 안개는 극심하게 출렁이다 아무렇지 않게 변했고 악귀 머리는 자극을 받았는지 더욱 크게 포효했다.
포효 소리가 검은 음파를 이루어 수많은 주술문자를 머금고 푸른 연꽃을 강타했다.
웅웅!
덜덜 떨던 푸른 연꽃이 자기 그릇 깨지듯 조각나 72자루의 작은 검들로 나뒹굴었다.
한립도 음파에 몸이 떨려 오장육부가 작은 칼날로 난도질당하는 기분이었고 육체만이 아니라 의식도 진탕이 되었다.
그는 앓는 소리를 삼키며 동공을 수축했다.
검은 음파가 지닌 기괴한 힘을 그처럼 진극체를 익힌 수사가 아닌 보통의 진선경 후기 수사가 받아냈다면 오장육부가 터져 뼈와 살이 진흙처럼 문드러졌을 것이다.
크아악!
거대 악귀 얼굴의 입안에서 삼지창이 다시 빠져나와 창끝에서 검은빛을 방출했다.
귀를 찌르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세 줄기의 검은 빛이 허공에서 종적을 감추었다.
흠칫 놀란 한립은 당장 수결을 맺어 등 뒤로 진언보륜을 불러냈다. 고리가 빠르게 돌며 출렁출렁 금색 파문을 퍼트렸다.
시간도문이 아직 열댓 개 밖에 돌아오지않아 금색 파동은 전성기 때보다 희박했다.
금색 파문이 막 퍼지고, 한립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검은 실 세 줄기가 나타나서 그의 가슴을 노렸다.
금색 파문이 시간을 늦추는 데도 속도가 번개처럼 빨랐다.
한립이 최선을 다해 피해 보았지만 검은 실에 어깨를 내주어 작은 상처가 생겨났다.
‘윽!’
이상한 일은 상처에서 피가 흘러나오지 않고 검은 기운이 몽실몽실 뭉쳐있다는 점이었다.
한립은 다짜고짜 청죽봉운검 한 자루를 불러들여서 상처가 난 어깨의 살점을 사정없이 도려냈다. 살점은 떨어져 나간 즉시 검은 기운이 변한 새까만 화염이 화르륵 타올라 재로 흩날렸다.
한립이 난색을 표한 것은 당연했다. 조금만 늦었으면 이런 작은 상처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와중에도 거대 악귀 얼굴은 새까만 화염을 꿈틀거리면서 또 다른 공격을 준비하고 있자 한립은 재빨리 수결을 맺었다.
흩어져 있던 청죽봉운검들이 밝은 빛을 방출하고 굵은 금빛 뇌전으로 그물을 엮어 거대 악귀 얼굴 앞을 막아섰다.
거대 악귀 얼굴도 검은 안개 속에서 불쑥 열댓 개의 촉수를 뿜어 금색 그물을 후려쳤다.
촤륵!
금색 뇌전 그물과 접촉한 검은 안개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면서 순간 경로가 막힌 악귀 얼굴이 노호성을 터트렸다.
한립은 단번에 청죽봉운검들이 품고 있던 벽사신뢰를 모조리 방출해 잠시라도 악귀 얼굴을 막은 것에 안도하고 청죽봉운검을 소매 속으로 회수했다.
그는 제자리에서 빙글 돌아 은색 뇌전을 번쩍이는 거대 새로 변해 있었다. 열두 가지 경칩결 변신술 중 뇌붕 변신을 한 것이다.
뇌붕은 날개를 활짝 펼쳐 그 위로 수정 날개 한 쌍을 더 만들어냈다. 오랜만에 써보는 풍뢰시였다.
네 장의 날개를 동시에 펄럭인 한립이 뇌전빛을 반짝이고 자취를 감추었다.
낙백량풍은 알 수 없는 위협이 가득해서 함부로 뇌둔술을 쓰지 않고 있었는데 악귀 얼굴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노호성을 내지르던 거대 악귀 얼굴의 두 눈에 붉은 빛이 강해졌다.
검은 안개들이 뭉쳐 새까만 화염이 화륵 타오른 순간 악귀 얼굴도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낙백량풍 모처.
뇌전빛이 반짝이고 뇌붕이 나타났다.
“……!”
한립이 한숨을 돌리고 있을 때 머지않은 허공에서 대량의 새까만 화염이 흘러나와 거대 악귀 얼굴로 바뀌었다.
악귀 얼굴은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쉬쉬쉭!
세 줄기 검은빛이 믿기지 않는 속도로 쇄도했다.
동공을 수축한 뇌붕은 허공에서 데굴 굴러 은빛 뇌전으로 변해 겨우 검은 실을 피하고 번득 사라졌다.
거대 악귀 얼굴 역시 음산한 웃음을 낄낄 흘리며 검은 화염을 일으켜 그 자리를 떠났다.
한동안 한립과 거대 악귀 머리는 낙백량풍 안을 이동하면서 서로 쫓고 쫓겨다녔다.
한립이 뇌둔술을 펼치든 뇌진 전송을 하든 악귀 머리는 끈질기게 따라 붙어 떨쳐 낼 수가 없었다.
* * *
낙백량풍 모처의 허공.
은색 뇌전빛이 반짝인 뒤 뇌붕이 나타났다. 처음 변신을 했을 때보다 은색 뇌전이 절반은 줄어 있었다.
날개를 활짝 펼친 뇌붕이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천장 밖 허공에서 새까만 화염이 흘러나와 악귀 머리로 변했다.
그걸 본 한립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이대로 달아나기만 해서는 해결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비장의 무기인 해 도인의 힘을 빌리고 싶지 않았지만 방법이 없었다. 이런 생각을 읽었는지 체내의 해 도인도 당장 빠져나올 기세였다.
거대 악귀 머리도 무언가를 감지했는지 갑자기 동작을 멈추었다.
휘이익!
바로 그 순간 그 뒤로 휘황찬란한 노란 빛덩이가 날아들었다.
타원형의 노란 빛덩이는 형언할 수 없는 금제 파동을 두르고 있어 내부를 명확히 볼 수 없었다.
그 안에서 붉은빛이 튀어나와 주술문자들을 반짝였다. 주술문자들이 단단하게 뭉쳐 붉은 수정실을 이루고 빠르게 악귀 머리를 관통했다.
악귀 머리를 감싼 새까만 화염도 붉은 수정실을 막을 수는 없었다.
쿠쾅!
굉음이 악귀 머리 안에서 울리고 새까만 화염이 난동을 부렸다.
쿠앙!
거대한 붉은 불기둥이 악귀 머리를 뚫고 나와 활화산처럼 작열하는 열기를 내뿜었다.
악귀 머리는 순식간에 붕괴돼 새까만 화염으로 변했고 날카롭게 울부짖으며 검은 안개 깊은 곳으로 흔적도 없이 달아나 버렸다.
한립은 두 눈에 남색빛을 일렁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검은 그림자 주위의 안개가 흐릿해졌을 때 희미하게 안에 있는 존재가 보였다.
머리가 아주 큰 사람의 형상을 한 무언가가 삼지창을 들고 있었다. 너무 순식간에 달아나 버려서 그 이상은 살피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파앗.
눈길을 거둔 한립은 노란 빛덩이와 거리를 벌리면서 칠요성환을 불러냈다. 일곱 개의 별빛 고리가 금세 진법을 이루었다.
노란 빛덩이가 검은 그림자를 격퇴해주었다고 자신을 도우러 온 사람일 거라고 믿을 수는 없었다.
한립의 주시 속에 타원형 빛이 걷히고 노란 선박이 나타났다.
목재로 만들어진 선박에는 타원형의 수정돌이 박혀서 특수한 법칙파동을 발산하고 있었다.
그 위에선 두 명 중 회백색 수염을 기르고 코끝이 빨간 노인은 허리춤에 푸른 술병을 찬 호언 도인이었다.
그는 등에 노란 천으로 감싼 기다란 물건을 매고 있었는데, 천이 의식을 차단하는 효과가 있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 오른편의 하얀 치마를 입을 매혹적인 몸매의 여인은 운예였다.
“호언 장로님, 운예 장로님!”
한립은 정말 의외여서 깜짝 놀라 그들을 불렀다.
“허허, 멀리서 누군가 싸우는 것을 감지하고 와봤더니 네 녀석일 줄이야!”
호언 도인이 웃음을 터트렸고 운예는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주고 말이 없었다.
“저역시 이곳에서 두 분을 뵐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얼른 칠요성환의 결계를 풀고 선박 앞으로 날아간 한립이 미소 지었다.
호언 도인과는 촉룡도에서 인연을 맺어 사제지간 같기도 하고 벗 같기도 한 친근한 사이였다.
그간 호언 도인의 소식이 있을까 남몰래 신경을 썼는데 이곳에서 우연히 마주치니 무척 반가웠다.
“너와 내가 인연이 있다는 뜻이겠지.”
“저 검은 그림자를 물리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립은 진지한 얼굴로 공수를 했다.
“한동안 오고 가고 한 사이에 이 정도야 뭘! 그런데 네 녀석은 어쩌다 음매(陰魅)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냐? 아직 잡아먹히지 않은 것을 복이라 생각하거라.”
별 일 아니라는 듯 손을 저은 호언 도인이 정색하고 물었다.
“저걸 음매라 부르는군요. 굉장히 강력하던데 정체가 무엇인지 호언 장로님께서는 아십니까?”
“음매란 이 근방에 사는 일종의 괴물로, 금선도 종종 잡아먹힐 정도로 강력한 존재다. 평소에는 낙백량풍 가장 깊은 곳에서나 가끔 마주칠 수 있는데 어째서 이곳에 나타난 것인지는…….”
한립의 질문에 답해 주던 호언 도인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한립은 눈썹을 끌어올렸지만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됐다, 되었어! 음매가 실력은 있어도 지능이 높지 않아 달아났으니 다시 돌아오지는 않을게다.”
“그럼 다행입니다. 운 좋게 두 분을 만나 제가 화를 면했습니다.”
“우리는 촉룡도를 떠난 몸이니 장로라는 호칭은 되었다.”
호언 도인은 슬쩍 운예를 보고 한립에게 눈짓을 하면서 말했다.
“그것도 좋겠지요.”
한립도 윤회전에 들어갔고 호언 도인도 윤회전 인물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비사를 함부로 털어놓을 생각은 없었다.
“려 수사, 그러고 보니 북한선궁에서 수배 중이던데……. 나 때문에 괜히 말려든 것이 아닌가싶구만. 나와 가깝게 지내지 않았다면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을.”
호언 도인은 화제를 돌려 미안함을 담아 예의를 차리고 말했다.
“제가 북한선궁에 쫓기는 것은 그 때문이 아니라 다른 일이 있어서입니다. 그들이 언급하고 싶지 않아 수배령에는 다른 핑계를 대었을 뿐이고요.”
“그랬구만! 녀석, 몇 해 못 본 사이에 성격이 더 호방해졌어. 호오, 수행이 벌써 진선경 최고봉에 이르고, 어쩐지 음매를 상대로 오래 버티었다 했지!”
옆에 조용히 서 있던 운예도 호언 도인의 말에 한립을 아래위로 훑었다.
“운이 좋아 그리되었습니다. 제 보잘것없는 수행이야 두 분에 비하면 말할 것도 없지요.”
한립이 눈을 반짝이며 미소를 머금고 답했다.
“처음 보았을 때는 분명 진선경 초기였는데 겨우 몇백 년 만에 진선경 최고봉의 경지에 이르다니, 이런 수련 속도는 촉룡도가 아니라 북한선역 전체에서도 들어본 적이 없네.”
호언 도인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과찬이십니다. 기연이 따라주어 우연히 얻은 단약 덕에 빠르게 수행이 늘었습니다.”
한립은 내심 쓴웃음을 흘리면서 대충 둘러댔다.
“아, 그런가! 잘 맞는 단약을 복용하면서 수련을 하면 훨씬 효과가 좋기는 하지.”
호언 도인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한립이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장천병을 지녀 수행이 빠르게 느는 것은 좋았지만 합당하게 설명할 길을 강구하는 게 좋을 듯했다.
“그런데 두 분은 이곳에서 무엇을 하던 중이셨습니까?”
“촉룡도에서 운 좋게 탈출해 북한선궁의 추격을 피해 돌아다니다가 이번에 흑풍해역에 중요한 일이 생겨 오게 되었네. 전송진이 봉쇄되어서 낙백량풍을 가로지르는 길밖에 남지 않았지만.”
“그러셨군요.”
호언 도인의 설명에 한립이 생각이 많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려 수사는 어째서 이곳에 있는 것이지? 흑풍해역에서 나오는 길인가?”
갑자기 운예가 끼어들어 물었다.
“맞습니다. 흑풍해역이 요즘 조용하지 못해서 저는 빠져 나가려던 참이었습니다.”
한립은 시선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며 숨김없이 답했다. 그 말을 들은 호언 도인과 운예가 시선을 마주쳤다.
“흑풍해역은 상당히 외진 지역이라 알고 있는데 어째서 이곳에 있었던 거지?”
“사실 촉룡도에 몸담기 전에 흑풍해역에서 한동안 수련을 했었습니다. 촉룡도에서 떠나 선궁의 추격을 받다보니 번잡한 곳을 떠나야 했고 자연스럽게 이곳이 떠오르더군요!
흑풍해역에서 몇 백 년은 조용히 머무를 수 있었는데, 웬일인지 해역에 소란이 끊이지 않고 변고도 발생해 떠나야겠다고 마음 먹었습니다. 원래는 저도 전송진을 이용하려 했으나 봉쇄가 되어 낙백량풍을 가로지를 생각을 한 것이고요. 돌아보니 어리석은 생각이었습니다.”
한립은 자조적으로 사정을 늘어놓았다.
“흑풍해역에 무슨 변고가 발생했다는 것이냐?”
눈을 반짝인 호언 도인이 캐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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