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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675화 (1,432/2,000)

1675화. 강풍을 파고들다

*

흑풍성 도왕부 깊숙한 곳에 위치한 대전.

빛이 거의 들지 않는 대전 안에는 선반에 놓인 초만이 그윽한 향과 흐릿한 빛을 발했다.

그 어두운 대전 끝, 낮은 계단을 올라가면 평평한 단 위에 소진한이 앉아 있었다.

마치 수련 중인 듯 눈을 감고 검은 안개를 몸에서 발산하고 있는 그의 주위로 기이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 아래 노월과 젊은 부인이 서서 이마에 땀방울이 맺힌 채 예의 바른 자세로 서있었다.

얼마 후 소진한이 눈을 뜨자 검은 안개가 그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가 사라졌고 노월과 젊은 부인도 얼굴이 약간 편해졌다.

“일은 어찌 처리되었지?”

소진한이 물었다.

“전부 궁주님의 분부대로 처리하였습니다. 팔황유리진(八荒流離陣)을 보강해서 창류궁, 복릉종 무리들도 결코 입구를 찾지 못할 겁니다.”

노월이 공손히 답했다.

“우리의 주적은 윤회전일세.”

가늘게 뜬 소진한의 눈이 번득였다.

“맞습니다. 윤회전 것들도 머리 잃은 파리처럼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을 겁니다.”

무형의 압력을 느낀 노월이 창백해진 얼굴로 서둘러 덧붙였다.

“어떤 틈도 보여선 안 될 것이네!”

“안심하셔도 됩니다.”

노월의 대답에 얼굴을 푼 소진한이 손을 저었다. 노월과 젊은 부인은 예를 올리고 궁전에서 멀리 걸어 나오고서야 긴장을 풀 수 있었다.

“궁주님의 수행이 가면 갈수록 대단해지십니다. 이번 일만 성사되면 태을경이 멀지 않으셨겠어요.”

젊은 부인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이번 일에 실패란 있어서는 안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멀리 누각 창가에서 두 사람이 노월과 젊은 부인이 다녀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바로 육균, 육우청 부녀였다.

“아버지 이번 선부…….”

육우청이 무어라 말하려는데 육균이 표정이 급변해 딸아이를 흘겨보고 창문을 닫았다. 급히 어딘가로 향하는 아비를 육우청은 입을 다물고 그 뒤를 쫓았다.

육균은 누각 어딘가의 벽 앞에서 법결을 날려 거의 일고여덟 개의 금제를 풀고 숨겨진 문으로 들어갔다.

문 뒤에는 검은 돌을 쌓아 만든 작은 방이 있었다.

“육청아, 내가 몇 번이나 말했느냐. 저들의 수행이 높아 의식이 어느 정도까지 발달해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고 말이다. 말 한마디 행동거지 하나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도왕부 전체에서 이 흑유간(黑幽間) 말고는 안전한 곳은 없단다.”

“예, 알겠습니다.”

육균의 나무람에 육우청이 고개를 숙였다. 딸아이의 어깨를 토닥여준 육균은 방 안에 마련된 탁자 옆에 앉았다.

“아버지, 우리 흑풍도가 그간 북한선궁을 위해 많은 일을 해왔잖아요. 다른 것은 몰라도 청우도와 싸우느라 폐허가 된 섬만 36곳이나 되고요. 선부가 세상에 나타났는데 저희에게도 한자리를 내줘야 하는 것 아닌가요?”

육우청의 불평에 육균의 얼굴이 꿈틀했다.

“북한선궁이 어떤 세력인데 겨우 흑풍도가 눈에 들어오겠느냐.”

“…….”

대답은 없어도 육우청의 얼굴에도 분노가 떠올라 있었다.

“되었다. 그런 무리한 일까지는 바라지도 않고 이 일이 끝나면 그들이 약속을 지켜 더이상 흑풍해역 일에 간섭하지 않기만을 기원할 뿐이다.”

육균이 한숨을 내쉬었다.

* * *

콰릉!

보름 뒤, 오몽도 수만 리 밖 해역에 금빛 뇌전이 뭉쳐 한립이 나타났다. 도처를 살핀 그가 오몽도 방향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오몽도 인근 허공에 한립의 신형이 나타났다.

괴이한 천재지변이 오몽도까지 덮치지는 않았고 섬을 봉쇄한 금제도 여전히 발동되고 있었다.

한립은 침음하다 저물탁 하나를 꺼내 들었다.

파앗.

그의 손에서 푸른빛이 나와 저물탁을 감싸고 사라졌다.

오몽도 밀실 안, 낙풍이 맑은 빛에 휩싸여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연기처럼 각종 형상이 떠올랐다 사라지는 것이 어떤 비술을 익히는 중인 것 같았다.

그때 그 앞에 저물탁을 품은 푸른빛이 번득 나타났고, 빛이 가시고 팔찌가 툭! 떨어졌다.

낙풍이 서둘러 기운을 거두고 바닥에 떨어진 저물탁을 보았을 때 한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앞으로 백년 간 계속해서 섬을 봉쇄하고 내실을 키우거라.”

“예!”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난 낙풍이 포권을 했다. 그러나 딱 한 마디만 들려왔을 뿐 그 후로는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낙풍은 잠시 기다리다 바닥의 저물탁을 들어 내용물을 살피고는 얼굴이 밝아졌다. 저물 법기 안의 영석과 재료가 아주 많아서 오몽도 수사들이 몇백 년은 사용할 만큼 충분했다.

한립은 그때 이미 지기화신이 수련 중인 장소에 와있었다.

이번에 오몽도로 돌아온 것은 지기화신이 그간 정련한 중수를 거두어 가기 위함이었다.

한립은 허공에서 해수면의 거대 소용돌이를 내려다보고는 눈에 이채가 어렸다. 소용돌이는 족히 천 리에 이르렀고 이로 인해 산만한 파도가 만들어져 그 기세가 놀라웠다.

“설마…….”

한립은 문득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바로 소용돌이 속으로 뛰어들었다.

해저의 평평한 단 위에 지기화신이 눈부신 남색빛을 발산하여 커다란 빛덩이를 이루고 있었다.

머리 위에는 남색 빛의 실이 이전보다 배로 굵어져 수많은 주술문자가 반짝였다. 방대한 기운이 벌써 진선경 후기의 경지였다.

한립은 그걸 보고 크게 놀라지 않았다.

지난번에 보았을 때 진선경 중기의 최고봉이기도 했고 그가 수시로 수정 알갱이를 응결해 수련에 쓰라고 보내주었으니 수백 년 만에 진선경 후기에 이른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지난 몇 백 년 동안 지기화신이 응련해 온 중수도 다른 수사들이 수백만 년은 들여야 만들어낼 수량이었다.

그가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 지기화신이 남색 파동을 빠르게 흡수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한립을 돌아보았다.

“지니고있는 중수를 전부 내게 주거라.”

한립의 분부에 지기화신은 검은 보따리 두 개를 건넸다. 예전에 무상맹에서 구해주었던 천수대였다.

의식으로 내용물을 훑은 한립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천수대 하나는 중수로 가득했고, 나머지 하나도 절반은 차 있었다.

수행이 늘어남에 따라 중수 응련 속도도 빨라지고 있었다.

한립의 얼굴에 흡족한 표정이 떠올랐다.

이 두 보따리의 중수와 이전의 한 보따리까지 더해지면 충분히 전투 중에 위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천수대 두 개를 넣어 두고 비어 있는 다른 보따리 세 개를 지기화신에게 건넨 한립은 계속해서 중수를 응련하라 시키고 소리 없이 날아올랐다.

그는 다른 수사들의 이목을 피해 뇌진전송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구뢰목 전송진법은 오몽도로 오면서 벌써 회수해 두었다.

보름 가까이 지나 흑풍해역 변두리.

푸른 빛줄기가 더없이 빠르게 날아와 한립이 모습을 드러냈다. 전방은 낙백량풍 구역이라 새까만 음풍이 하늘과 땅을 잇고 있었다.

정풍주를 발동한 한립은 끝없이 펼쳐진 음풍 속으로 쏘아져 들어갔다.

주변의 음풍이 그를 향해 몰려들어도 정풍주가 대부분을 차단해 크게 영향을 받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적응기를 갖다가 별다른 문제가 없자 속도를 높여 전방으로 나아갔다.

천지영기가 막혀 있는 이곳에서는 선령력을 제대로 보충할 수 없기에 오기 전에 적잖은 선원석을 써서 무상맹을 통해 선령력 회복용 단약을 대량으로 구입해 두었다.

한립이 낙백량풍 속에서 앞으로 나아간지도 벌써 4, 5일이 지나갔다.

깊이 들어갈수록 음풍은 윤회전 비경이 있던 곳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심하게 몰아쳤다.

낙백량풍은 이전처럼 산발적으로 퍼져 있지 않고 한데 뭉쳐 거대한 검은 바람기둥을 이루고 흑룡(黑龍)처럼 포효했다.

거대 바람기둥은 정풍주가 파문을 발산하는 곳에 들어오면 위력이 크게 줄기는 했으나 그래도 대승기 수사의 일격에 맞먹는 위력을 냈다.

전신에 반투명한 진극막을 덮은 한립을 향해 흑룡들이 달려들었다가 바위에 부딪친 파도처럼 흩어졌다.

음풍의 물리적 힘은 신경 쓰이지 않았지만 그 안에서 휘휘 울어대는 의식을 뒤흔드는 소리도 처음보다 열 배는 강해져 있었다.

정풍주 덕에 약화가 된 괴음(怪音)도 엄청나서 한립은 속도를 줄이고 연신술을 발동해서야 겨우 영향에서 벗어났다.

현재 그는 검은 바다를 가르는 작은 조각배 같았다.

* * *

며칠 후, 낙백량풍이 하늘과 땅을 잇는 거대 바람기둥으로 변해 시각을 가늠할 수 없었다.

한립은 정풍주가 발산한 검은 보호막을 두르고 용처럼 날아드는 바람기둥을 뚫고 날아가는 동시에 의식을 집중해 정신세계를 지켰다.

아직도 멈추지 않고 나아가고 있다지만 속도가 느려져 있었다. 귀곡성이 나날이 강해져서 함부로 의식을 바깥으로 방출할 수 없었다.

의식의 힘은 혼백의 연장선이라 낙백량풍을 직접 마주하면 괴음의 영향을 더 크게 받을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명청령안이 있어 눈동자 깊은 곳에서 남색 빛을 일렁이며 방향을 가늠해 나아갔지 안그랬으면 벌써 길을 잃었을 것이다.

휘이이…….

거대 바람기둥이 극히 빠른 속도로 날아들었고 한립은 물속의 물고기처럼 민첩하게 몸을 틀어 바람기둥을 피했다.

그런데 그 안에서 검은 그림자가 번개처럼 튀어나와 달려들었다. 검은 그림자의 속도가 빠르다고 해도 한립의 반응은 더 빨랐다.

그의 손끝에서 푸른 검기가 날아가 검은 그림자를 갈랐다.

사삭!

검기가 잘려나간 검은 그림자는 전신이 새까만 괴상한 뱀이었다. 사람과 엇비슷한 크기에 머리에 뿔이 세 개 달린 괴사(怪蛇)는 암홍색 눈을 지니고 있었다.

괴사는 잘려나간 직후 놀랍게도 꿈틀꿈틀 하나로 합쳐졌으나 부상당하기 전보다 음한한 기운이 줄어 있었다.

괴사는 회복한 뒤에도 달아나지 않고 쉭쉭 거리면서 사나운 눈빛을 보냈다. 그리 지능이 높지 못한 듯했다.

몸을 비틀던 괴사가 모호하게 잔영을 남기고 사라졌다가 한립의 등 뒤에서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한립이 피식 웃으며 손을 뻗었다. 그러자 새까만 괴사 위로 푸른 거대 손이 나타나 재빨리 그것을 낚아챘다.

푸른 거대 손은 몸부림치는 괴사를 꽉 쥐고 한립에게로 돌아왔다.

“이건…….”

괴사를 살펴보던 한립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음한한 기운이 응집해 만들어진 괴물은 실체가 없어 평범한 요수와는 달랐다.

낙백량풍에 진입하기 전 찾아본 수많은 관련 서적에서 심처에 괴이한 음수(陰獸)들이 살고 있고 상대하기 까다롭다고 적힌 글을 보았는데 이 새까만 괴사가 그것인 듯했다.

한립의 손이 미세하게 움직이고 푸른 거대 손이 꽉 괴사를 움켜쥐었다.

콰악!

새까만 괴사는 악력에 터져나가 검은 기운으로 변했다. 하지만 검은 기운은 아직 살아 움직이면서 다시 뭉치려 들었다.

미간을 좁힌 한립이 손가락을 튕겼다.

파칙!

벽사신뢰가 손끝에서 날아가 검은 기운을 때렸다.

치이익.

검은 기운은 천적이라도 만난 듯 즉시 흩어졌고 참혹한 비명이 어렴풋이 들리다 말았다.

한립은 그곳에 오래 머물지 않고 계속 전진했다. 괴사를 시작으로 수시로 음풍 속에서 음수들이 튀어나와 그를 습격했다.

실력이 강하지는 않아도 허와 실이 애매한 것들이라 상대하기 쉽지 않았다. 벽사신뢰가 음수들과 상극이 아니었으면 이동속도가 더 느려졌을 것이다.

“음?”

계속 날아가고 있는데, 한립 주위로 검은 바람기둥이 줄어들었다. 앞으로 나아갈수록 음풍이 줄어들다 나중에 가서는 완전히 사라졌다.

희미하게 검은 안개가 나부낄 뿐 음산한 기운도 줄어들고 음수들도 보이지 않았다.

‘벌써 낙백량풍을 지났다고? 아니야…….’

한립은 고개를 저었다.

낙백량풍에 진입한 지 보름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 가로질렀을 리 없었다. 이곳은 틀림없이 낙백량풍 내의 특수한 구역이었다.

안타까운 점이라면 그가 찾아본 경전에서도 이곳에 대한 기록은 없다는 것이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한립은 속도를 줄여 명청령안으로 주변의 동정을 파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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