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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674화 (1,431/2,000)
  • 1674화. 어지러운 상황

    *

    “정말 감사드립니다, 선배님!”

    구레나룻 사내가 무척 좋아하며 인사를 올리고 아래로 내려가 시체를 분해했다. 그는 감히 꾸무럭거리지 못하고 중요한 재료 몇 가지만 챙겨 급히 돌아왔다.

    수사들이 선박에 올라타자 한립이 법결을 날려 출발하려다 아래를 훑었다. 잔잔하던 해수면에 격랑이 치면서 커다란 울림이 전해졌다.

    거의 동시에 수백 리 밖에서 새빨간 용암이 솟구쳐 올라 주변의 바닷물이 수증기가 되어 끓어올랐다.

    모설 일행은 깜짝 놀랐으나 한립의 태연한 표정을 보고 아무말도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겉으로는 표정 변화가 없었지만 한립도 신경 쓰고 있었다. 흑풍도까지 오는 동안 해일, 지진 등의 천재지변을 수시로 보았다.

    흑풍해역에 예전에도 이런 천재지변이 있었다 해도 이렇게 빈번하진 않았다.

    시선을 거둔 그가 청연주를 출발시켰다.

    잘게 진동한 선박의 날개가 몇 배로 커져 펼쳐졌고 선박은 푸른 빛줄기로 변해 긴 꼬리를 남기고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최근 흑풍도의 상황이 어떤지 알고 있느냐? 청우도와의 싸움은 계속 하고있는 것인가?”

    한립은 선박을 조종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선배님께 아룁니다. 해역 곳곳에서 이변이 발생한 뒤로 흑풍도와 청우도도 싸움을 멈추었습니다.”

    모설이 또박또박 대답했다.

    “네가 말하는 이변이 저런 해일이나 화산 폭발을 말하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모설의 말을 들은 한립은 고개를 끄덕이고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연히 다른 이들도 떠들지 못해서 선박은 조용하게 이동했다.

    청연주의 속도가 오래지 않아 흑풍성에 도착했다.

    “목숨을 구해주신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성함을 알려주시면 마음 깊이 새겨두겠습니다.”

    배가 성밖에 멈추자 모설은 일행을 대표해 감사 인사를 올렸다.

    “그럴 것 없다. 수련이 아무리 중요해도 목숨보다 중요치는 않다는 것만 명심하고 가 보거라.”

    한립은 이 말을 남기고 휭! 하고 성 입구 쪽으로 날아가 버렸다.

    세 사람은 그가 떠난 방향을 한참 응시했다. 잠시 후 구레나룻 사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모 수사, 선배님께서 도와주시기 전까지 우리가 버틴 것은 수사가 두 번이나 귀한 부적을 사용해 준 덕분이었습니다. 뇌인수의 재료를 팔아 얻게 될 영석은 우리 세 사람이 똑같이 나눌 것이니 염려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모설은 웃으며 구레나룻 사내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눈길은 성문 쪽에서 떠나지 않았다.

    “왜 그러시나요?”

    홍의 소녀가 그의 눈빛에서 뭔가 이상한 기색을 읽고 물었다.

    “아닙니다, 우리도 그만 가시지요.”

    모설은 성 밖의 다른 방향으로 날아갔다. 하지만 그의 시선 끝에는 여전히 중년인 선배가 사라진 성문이 자리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중년 선배의 행동과 언사가 아주 익숙하다는 느낌을 받아서였다. 그저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저런 선배를 이전에 마주친 적이 없었다.

    한립은 영석을 내고 빠르게 성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바로 성 중심부의 번화가로 가서 거대 광장에 이르렀다.

    주변 상가를 살피던 그의 미간이 주름이 생겼다.

    예전에는 흑풍성에서 가장 번잡하던 곳이었는데 이제는 오가는 사람이 얼마 없었고 상점에도 손님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게 여긴 그는 모설에게 들은 말을 떠올리며 인근의 재료 상점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십쇼! 손님, 따로 찾는 게 있으십니까? 본점이 규모는 크지 않아도 없는 것이 없습니다.”

    주인장으로 보이는 사내가 달려와서 함박웃음을 지으며 그를 맞이했다.

    작고 뚱뚱한 체구를 지닌 장궤는 금색 비단옷을 입고 머리에는 동그란 모자를 쓰고 있어 시골 부잣집에서 바로 걸어나온 것 같았다.

    한립은 보긴 드문 영초 몇 뿌리를 구하고 영석을 치른 다음 한담을 나누었다.

    “내 흑풍성을 몇 번 와봤네만 항상 시끌벅적하던 곳이 언제부터 이리 한적하게 변했지?”

    “아휴, 이게 다 몇 년 사이 일어난 천재지변 탓입니다. 어째서인지 인근 해역이 아주 난리라서 재해 때문에 섬 몇 개가 통째로 사라졌다는 이야기도 돌구요. 이 때문에 많은 섬이 수사들이 오가는 것을 막고 있다고 합니다. 흑풍성은 아직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지만 손님이 끊겨 장사하는 저희는 죽을 맛입니다.”

    장궤가 손을 절레절레 저으면서 한탄했다.

    “예전에는 천재지변이 이리 잦다는 소리를 듣지 못한 것 같은데?”

    “이유야 저희 같은 사람들은 모르지요. 누구는 해저에 영맥이 요동을 쳐서 그런다고도 하고 또 누구는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보물이 등장할 조짐이라고도 하더라고요! 심지어 흑풍해역이 통째로 망할 거라고 믿는 이들도 있는데 무엇이 진실인지 어찌 알겠습니까.”

    뚱뚱한 장궤가 목소리를 낮추어 속닥거렸다. 한립은 전부 터무니없는 소리라 전혀 믿기지 않았다.

    “그건 그렇다 치고. 주인장, 외부로 통하는 흑풍성 전송진은 얼마 뒤에나 개방이 되지?”

    한립은 쓴웃음을 지으며 다른 질문을 했다. 그가 이곳에 온 주요 목적은 흑풍해역을 떠나기 위해서였다.

    금선경이 이르는 길이 막막한 와중에 이 외진 곳에서 무언가 기연을 기대하기란 어려웠다.

    “외부로 나가려 오신 것이면 실망이 크시겠습니다. 십여 년 전에 전송진이 한번 개방되고 육균 도주께서 천년 간 전송진을 봉쇄하겠다고 선포하셨거든요.”

    “전송진을 천년 간이나! 갑자기 왜 그런 결정을 내렸단 말인가?”

    한립이 얼굴을 굳혔다.

    “육 도주님이 그리하신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겠거니 하는 것이지요.”

    “고맙네, 그만 가봐야겠군.”

    재료 상점을 나선 한립은 조금 더 걸어가 다른 상점으로 들어갔다. 그는 뚱뚱한 장궤에게 들은 이야기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곳을 빠져나온 한립의 안색이 어두웠다.

    반시 진 후, 또 다른 거리에 선 한립은 크고 작은 상점 열댓 곳을 돌면서 전송진이 단시간 내로 개방될 일은 없으며 육균이 어떤 이유도 밝히지 않고 갑작스럽게 내린 명령이라는 사실만 알게 되었다.

    우두커니 서 있던 한립은 훌쩍 날아올라 도왕부 방향으로 향했다.

    도왕부는 이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아 검은 건물들이 늘어서서 새까만 짐승들이 도사리고 있는 것처럼 위압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건물은 각각 금제로 둘러싸여 있으면서 그 금제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금제들이 예전에 본 것보다 더욱 웅장하고 요란한 빛을 반짝이고 있어 내부를 들여다볼 수 없었다.

    도왕부 문 앞의 부신전은 그대로였으나 그 안에는 수사가 몇 없어 북적북적하던 때와는 차이가 컸다.

    부신전 앞에서 걸음을 멈춘 한립은 고개를 들어 도왕부를 쳐다보았다.

    암암리에 여러 명이 주시하고 있었고 그 의식들이 서로 교차해 접근하는 이를 경계하고 있었다.

    한립은 의문을 품고 부신전 안으로 들어갔다.

    갑자기 도왕부의 경비가 삼엄해진 것은 흑풍해역에 천재지변이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가 대전 안에 들어서려는데 멀리서 두 개의 둔광이 날아들어 도왕부 문앞에 내려섰다.

    그중 한 명은 삼십대 젊은 부인으로 도포를 입어 출가한 듯 보였으나 머리를 밀지 않았고 자태가 우아했다. 그녀와 함께 도착한 하얀 옷을 입은 등에 장검을 맨 사내는 눈빛이 매서웠다.

    백의 사내가 안으로 들어가려다 흠칫 놀라 주변을 살폈다.

    “노 장로, 왜 그러십니까?”

    젊은 부인이 이상하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길가를 훑은 사내는 아니라고는 했지만 꼬리가 날카롭게 올라간 눈썹이 들썩였다.

    누군가 몰래 그를 관찰하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너무 찰나라 착각인 것 같기도 했지만 사내는 방심하지 않고 의식을 방출해 인근을 샅샅이 훑고 인상을 찡그렸다.

    “그럼 가시지요. 시간이 없습니다.”

    젊은 부인의 낮은 목소리에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고 나란히 도왕부로 들어갔다.

    문을 지키는 시위들이 그들을 막아서지 않았다.

    한참 후 부신전에서 걸어 나온 한립은 도왕부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다른 방향으로 걸어갔다.

    얼굴은 평온했으나 마음은 요동쳤다. 젊은 부인은 모르는 얼굴이었지만 백의 사내는 그가 아는 자였다.

    바로 북한선궁 소속 금선 수사 노월이었다.

    ‘저자가 왜 흑풍해역에? 설마 나를 쫓아서!’

    이런 생각이 들자 심장이 쿵쿵 뛰었고 걸음은 반대로 향해도 의식은 등 뒤의 도왕부를 주시했다.

    체내의 선령력이 맹렬하게 돌며 누구든 나타나면 전력을 다한 일격을 날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수십 리를 걸어가고도 한립은 팽팽하게 당겨진 현처럼 긴장감을 풀지 않고 점점 속도를 높였다.

    한 시진 뒤, 푸른 둔광이 흑풍성 문 앞에서 날아올라 먼 해역으로 쾌속으로 날아갔다.

    둔광 속 수사는 한립이었다.

    단숨에 수만 리를 날아간 그는 금빛 뇌전을 일으켜 뇌전진법으로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콰릉!

    수백만 리 밖 고요하던 해수면 위에 천둥소리가 울려 퍼지고 금색 뇌전들이 뭉쳐 현묘한 진법을 이루었다.

    뇌전진법 가운데서 나타난 한립은 그 즉시 의식을 퍼트려 주변을 살폈다.

    그는 반경 만 리 내에 이상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한시름을 놓고는 고개를 돌려 흑풍도 방면을 쳐다보았다.

    노월이 흑풍해역에 온 것은 그가 아닌 다른 목적 때문일 가능성이 컸다.

    북한선역에서 그를 쫓고 있다지만 겨우 진선경 수사를 잡으려고 금선을 여기까지 직접 파견한다는 것은 과한 처사였다.

    그렇다고 해도 한립은 완전히 마음을 놓치 않았다.

    이제 금선경 수사와 마주쳐도 목숨을 부지할 실력을 갖추었다고는 하나 상대가 자신이 흑풍해역에 있다는 것을 알아내면 도망갈 길이 많지 않았다.

    그 밖에 노월이 대낮에 당당히 흑풍성을 드나드는 것을 보면 그 자와 흑풍도가 모종의 연관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한립은 예전에 흑풍해역으로 돌아올 때 마주쳤던 미심쩍게 행동하던 무리가 떠올랐다.

    ‘그들도 북한선궁 사람들이었단 말인가?’

    한립은 머리를 굴리며 검은 진법 원반을 꺼내 수결을 맺었다.

    웅!

    검은 빛이 둥글게 둥글게 퍼져 나와 음성을 전할 수 있는 전음(傳音) 진법을 이루었다.

    입술을 달싹여 한 문장을 전한 그는 잠시 기다렸다. 약 일각이 지났을 때 전음진법이 미세하게 반짝이다 말았다.

    전신진반은 윤회전 비경을 떠나기 전에 교삼이 준 것이었는데 그가 전한 소식에 상대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한립은 어쩔 수 없이 원반을 넣어두고 물결치는 바다를 내려다보며 생각에 빠져들었다.

    지금의 흑풍해역은 이 바다와 다를 바가 없었다.

    겉으로는 흑풍도와 청우도가 잠시 싸움을 멈추고 평화로워 보였지만 속은 암류(暗流)가 격동하고 있었다.

    윤회전만 해도, 북한선궁과 불구대천의 원수인 비밀 세력이 흑풍해역에 모습을 드러냈고 당근과 채찍을 동시에 써서 그를 끌어들여 이상한 단약을 제련하게 시켰다.

    그들이 도모하는 일이 무엇이든 간에 북한선궁 인물들이 흑풍도에 나타난 것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이런 혼란스런 상황에 이곳에 머무는 것은 그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고, 얼른 떠나는 것이 상책이었다.

    문제는 외부로 통하는 유일한 전송진이 막혀서 떠나려면 낙백량풍을 가로지르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의 의식의 힘에 정풍주가 보조를 하면 어떻게든 버틸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기는 했다.

    낙백량풍 깊은 곳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하기도 했으니 가로지르면서 탐사를 할 수도 있고!

    ‘…….’

    결정을 내린 한립은 둔광을 일으켜 날아가려다 갑자기 휙 하고 어느 방향을 응시했다. 침음하던 그는 푸른 빛줄기로 변해 그쪽으로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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