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673화 (1,430/2,000)
  • 1673화. 우연한 만남

    *

    흑풍도 인근 해역, 수많은 산호섬에 붉은 해초가 자라나 고공에서 내려다보면 붉은 바둑돌이 놓인 바둑판처럼 보였다.

    그래서 이곳을 사람들은 기반해(棋盤海)라 불렀다.

    말이 흑풍도 인근이지 거리로는 수백만 리 떨어져 있고 중요 노선과도 멀어서 지나는 이들이 드물었다.

    그 대신 천지영기가 진하고 해저 산물이 풍성해 적잖은 요수들이 서식하는 탓에 사냥하려는 수사들이 요단과 재료를 노리고 몰려들었다.

    흑풍해역 어디서든 흔한 상황이었다.

    넓디넓은 해역에서 수사들이 점유하고 있는 섬은 많지 않았고 대부분의 망망대해는 요수들 차지였다.

    요수를 사냥하러 돌아다니는 수사들이 흔한 것처럼 강력한 요수를 만나 거꾸로 잡아먹히는 일도 흔했다.

    몇 명의 인족 수사들이 바로 그런 죽음을 당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구레나룻을 기른 중년 사내, 붉은 장삼의 소녀 그리고 검은 장포 청년이 푸른 선박을 타고 바람처럼 달아나는 중이었다.

    그 뒤로 남색 빛이 끈질기게 따라붙으면서 수시로 뇌전을 콰릉콰릉 번득였다.

    세 명의 인족 수사 모두 화신기 수행을 지녔고, 문양이 빼곡하게 새겨진 푸른 선박도 괜찮은 보물이라 속도가 느리지 않았다.

    하지만 흐릿하게 요수의 윤곽이 보이는 남색 빛이 더 빨라서 천천히 그들과의 거리를 좁혔다.

    “이렇게 가다가는 따라잡히겠다.”

    눈이 붉게 충혈된 구레나룻 사내가 다급히 외쳤다.

    “이제 어쩌면 좋죠? 이게 최고 속도인데요.”

    수결을 맺어 선박을 조종하던 홍의(紅衣) 소녀가 얼굴이 질려 물었다. 흑포 청년만이 긴장한 기색이기는 해도 그리 당황한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모 수사께서 진뢰부(眞雷符)를 한 장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그걸로 뇌인수(雷蚓獸)를 공격하시면 제가 동시에 극음조(極陰罩)를 펼쳐서 달아날 시간을 끌어 보겠습니다.”

    구레나룻 사내가 급히 말했다.

    “안 돼요, 백부님의 극음조는 음한한 속성이라 뇌인수의 뇌전의 힘에 쉽게 제압될 거예요.”

    홍의 소녀가 바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도 알고 있다만 지금은 다른 수가 없지 않느냐.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야지, 요수에게 따라잡히면 우리 셋은 갈기갈기 찢겨서 법보를 써볼 틈도 없을 것이다. 모 수사, 서둘러 주시지요!”

    구레나룻 사내가 재촉하자 흑포 청년이 이를 악물고 보라색 부적을 불러냈다.

    부적을 맴도는 보라색 뇌전은 아직 발동하기 전인데도 구레나룻 사내와 홍의 소녀를 전율하게 만들었다.

    “가라!”

    흑포 청년의 외침에 보라색 부적이 뇌전빛으로 변해 뒤쪽의 남색 빛덩어리로 날아갔다.

    콰르릉!

    보라색 부적이 찢겨나가며 열댓 줄기의 굵은 뇌전으로 변해 남색 빛덩이를 강타했다.

    퍼퍼퍼퍼펑!

    남색 빛덩이가 터져 안에 들어 있는 언덕 크기의 남색 요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거대한 구렁이를 닮은 요수는 비늘이 없고 주름진 남색 피부를 지니고있는 거대 지렁이였다.

    굵직한 뇌전이 뇌인수에 내리꽂혔다.

    날카롭게 울부짖는 뇌인수는 아기 울음소리 비슷한 것을 내면서 상처에서 남색 피를 흘렸다.

    상처들이 깊지 않아 피부가 벗겨진 정도에 불과했다.

    뇌전 공격에 열이 받았는지 굵은 남색 뇌전을 방출해 온몸을 휘감은 뇌인수가 나머지 보라색 뇌전을 튕겨냈다.

    이때 거대 지렁이 머리 위로 검은 그물이 펼쳐져서 요수를 가두려 했다. 수정처럼 반짝이는 그물 가닥에 음기가 풀풀 날리는 검은 불길이 흐르고 있었다.

    치지지직!

    그물이 뇌인수를 덮쳐 조여들자 요수의 피부에 검은 상처가 생기면서 푸른 연기가 피어올랐다.

    뇌인수가 날카롭게 비명을 지르며 멈춰 섰다.

    “이때다, 어서 가자!”

    구레나룻 사내의 고함에 홍의 소녀가 급히 수결을 맺고 정혈을 내뱉어 푸른 선박에 스며들게 했다.

    웅!

    선박 표면의 문양에서 진한 빛이 새어 나와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검은 그물 안의 뇌인수는 방대한 몸을 꿈틀거리고 있었고 동시에 머리 쪽이 갈라지면서 커다란 입으로 변해 숨겨둔 하얗고 뾰족한 이빨들을 드러냈다.

    파치치칙!

    뇌인수 몸에 어린 남색 뇌전들이 입으로 집결해 커다란 뇌전 구슬을 이루었다.

    콰르릉!

    요수가 힘껏 분출한 구슬이 섬뜩한 뇌전 파동을 품고 검은 그물을 찢어버렸다.

    “윽!”

    얼굴이 창백해진 구레나룻 사내의 입가에 피가 흘러내렸다.

    “백부님!”

    “난 괜찮다. 어서 서둘러! 지금 도망치지 못하면 끝이다.”

    홍의 소녀는 구레나룻 사내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면서 빠르게 수결을 맺어 선박을 조종했다.

    곁의 흑의 청년이 손바닥에서 부드러운 푸른빛을 방출해 구레나룻 사내의 몸속에 기운을 불어넣어 주었다.

    안색이 한결 나아진 구레나룻 사내가 흑의 청년에게 고개를 숙이는데 하늘을 뒤덮은 남색 뇌전이 걷히고 뇌인수의 거대한 신형이 불쑥 나타났다.

    요수는 피부의 상처가 벌어지고 곳곳이 새까맣게 타서 남색 핏물이 범벅이었다. 뇌인수는 날카롭게 울면서 대차게 몸을 털며 남색 뇌전을 일으켰다.

    동시에 몸에서 흘러나온 핏물이 호응하듯 화륵! 타올라 화염으로 변했다. 뇌전과 화염이 만나 뿌연 안개를 이루고 거대한 요수의 몸을 둘러쌌다.

    펑!

    안개가 터지자 뇌인수를 찾을 수 없었다.

    “조심!”

    뒤쪽을 주시하던 흑포 사내가 표정이 확 달라져서 소리쳤다. 홍의 소녀와 구레나룻 사내도 의식으로 뒤쪽을 살피고 화들짝 놀랐다.

    스스슷.

    하지만 그들이 대책을 세우기 전에 전방에서 푸른 안개가 떠올라 선박을 에워쌌다.

    안개로 둘러싸인 선박은 늪에 빠진 것처럼 꼼짝하지 못했다.

    세 사람은 강력한 무형의 힘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자 가슴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전방의 안개 속에서 거대한 뇌인수가 나타났다.

    처음보다 훨씬 커진 거대 지렁이는 이제 작은 산만했고 방대한 몸집에서 내뿜는 기운도 연허기에 가까웠다.

    구레나룻 사내와 홍의 소녀는 절망했고 흑포 청년의 표정도 어두워졌다. 음산하게 그들을 쳐다보던 뇌인수가 입을 쩍! 벌렸다.

    파치치칙!

    남색 뇌전들이 뿜어져 나와 십여 개의 채찍처럼 선박을 난도질했고 동시에 남색 안개가 출렁이면서 세 사람을 휘감았다.

    커다란 안개 구슬이 급속도로 회전하며 그 안에서 콰르릉 거리는 천둥소리가 울려 퍼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때 요동치던 남색 안개 구슬이 우뚝 멈추었다.

    쿠콰쾅!

    구슬이 맹렬히 팽창해 터지면서 흑포 청년을 비롯한 세 사람이 빠져나왔다.

    붉은 거대 화염 검을 쥔 흑포 청년은 전신이 구릿빛 불길로 덮여 강력한 영력 파동을 발산하고 있었다.

    입가에 피가 묻은 그의 얼굴은 더없이 창백하고 의복은 찢겨 있었다. 구레나룻 사내와 홍의 소녀의 상황은 더 좋지 않아 옷이 거의 너덜너덜 했다.

    특히 구레나룻 사내는 온몸이 피범벅인 데다 왼팔이 팔꿈치까지 잘려나가 선혈을 콸콸 쏟아내는 중이었다.

    푸른 선박은 진작 부서져서 안개 속에 그 잔해가 떠다녔다.

    흑포 사내의 손에서 화염 검이 수축해 검 그림이 그려진 붉은 부적으로 돌아갔다.

    강렬한 영력 파동을 발산하던 부적은 별안간 재로 변해 흩날렸다. 애석한 표정의 흑포 청년은 휙 고개를 돌려 부적이 사라지는 것을 외면했다.

    “빨리 가시죠!”

    청년이 소리치며 푸른 빛줄기로 변해 쏘아져 나가고 구레나룻 사내와 홍의 소녀도 얼마 안 남은 기운을 끌어모아 날아갔다.

    세 사람이 순식간에 거리를 벌리는데, 뒤쪽에서 뇌인수가 튀어나왔다.

    배에 기다란 상처가 생겨서 부상이 심했지만 흑포 청년 일행보다는 훨씬 나은 상태였다.

    그들이 도망가는 것을 본 뇌인수의 얼굴에 사람처럼 냉소가 어렸고 거대한 몸을 꿈틀거려 다시 안개를 불러들인 요수는 쾌속으로 세 사람을 쫓았다.

    부상이 심해 이전보다 속도가 느려진 흑포 청년 일행과 달리 뇌인수는 안개를 뿜어내 여전히 빠르게 움직였다.

    거리가 좁혀질수록 세 사람은 초조했지만 방법이 없었다.

    지니고 있던 비상수단과 보물을 전부 써버려 서로의 눈에서 절망을 봐야 했다. 바로 그 순간, 하늘 끝에서 느닷없이 푸른 빛줄기가 쾌속으로 날아들었다.

    그 강대한 기운은 세 사람을 쫓는 뇌인수를 월등히 초월했다.

    “선배님! 살려 주십시오!”

    세 사람이 움찔해 한 목소리로 외쳤다.

    푸른 빛줄기가 멈칫하고는 그 안에서 가벼운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속도를 늦추는 빛줄기를 보고 흑포 청년 일행은 뛸 듯이 기뻐했다.

    뇌인수 역시 푸른 빛줄기를 보고 두려운 표정을 지었으나 얼마 떨어지지 않은 세 사람을 보고 눈빛이 다시 흉흉해졌다.

    요수가 돌연 둔광을 멈추고 입을 벌렸다.

    콰르릉!

    안개 속의 수많은 남색 뇌전들이 급속도로 몰려들어 거대한 뇌전 구슬을 이루었다.

    거대 뇌전 구슬을 뿜어낸 뇌인수는 바로 몸을 돌려 남색 안개를 휘날리면서 왔던 길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뇌전 구슬의 속도가 순식간에 세 사람을 덮치려는데 허공에서 코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항아리 굵기의 푸른 빛기둥이 수직으로 꽂혀 정확히 뇌전 구슬 맞추었다.

    푹!

    거대 뇌전 구슬은 썩은 나무토막처럼 흩어져 버렸다.

    달아나던 뇌인수가 그걸 보고 기함해서 전신의 안개를 더욱 풍성하게 일으켜서 어느 때 보다 빠르게 날아갔다.

    하늘 위의 푸른 빛줄기에서 이번에는 서늘한 웃음소리가 들리고 푸른 뇌전빛이 뇌인수의 남색 안개를 따라잡았다.

    뇌전빛은 번득 산만한 푸른 검기로 변해 남색 안개를 관통했다.

    쉭!

    그러자 안개가 흩어진 것은 물론 안에 들어 있던 뇌인수의 몸이 두 동강이 나서 갈라졌다.

    이에 세 사람은 입을 다물지 못하고 둘로 나뉜 요수의 잔해가 남색 핏물과 내장을 쏟으며 바다로 첨벙! 떨어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푸른 둔광이 사라진 자리에 각진 얼굴에 눈썹이 짙은 중년인이 서 있었다.

    “목숨을 구해주신 큰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선배님! 조금 전에는 너무 급하여 무턱대고 구해주십사 청한 것이니 이해해 주십시오.”

    흑포 청년이 서둘러 다가가며 꾸벅 예를 올렸다. 뇌인수를 일격에 참살한 상대는 적어도 대승기 수사였고 그 이상일 가능성도 다분했다.

    중년인은 세 사람을 보다가 흑포 청년에게 물었다.

    “흑풍도 수사들이더냐?”

    “맞습니다. 저희 셋 다 흑풍도에 머물고 있고, 저는 어릴 적부터 흑풍성에서 자라 그곳 사정에 훤합니다. 선배님께서 흑풍성에서 필요하신 게 있다면 제가 최선을 다해 심부름을 해드릴 수 있습니다.”

    중년인의 물음에 흑포 청년이 바로 답했다.

    “말하는 것이 꼭 길잡이 같구나.”

    중년인이 슬쩍 미소를 머금고 눈을 반짝였다.

    “역시 보는 눈이 있으십니다. 제가 한동안 길잡이 노릇을 하긴 했습니다.”

    “그래? 이름이 무엇이냐.”

    “저는 모설이라 하옵고, 여기 두 사람은 방서 수사와 방미 수사라 합니다.”

    흑포 청년도 공손한 미소를 띄우고 말했다.

    중년인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는 한 달 넘게 열심히 길을 재촉해 흑풍도 인근에 도착한 한립이었다.

    그는 예전에 그의 길잡이였던 모설이 아니었으면 굳이 멈춰서 도와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흑풍해역에서 수사와 요수가 싸우다 서로 죽고 죽이는 일은 너무 흔해서였다. 당시 결단기 수사였던 소년이 화신기 청년이 되어 나타난 것이 새롭긴 했다.

    영석과 공법을 주어 돕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무척 진척이 빠른 편이었다. 모설은 당연히 변신한 그를 알아보지 못했고 한립도 상대에게 신분을 밝힐 생각이 없었다.

    모설 일행은 낯선 선배의 이상한 태도에도 감히 말을 붙이지 못하고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이곳은 안전하지 않고 나도 흑풍성으로 가는 길이니 너희들을 데려가 주마.”

    한립은 저물대를 쳐서 손바닥 크기의 푸른 선박, 청연주(靑鳶舟)를 불러냈다

    그의 법결을 흡수하고 급속도로 커진 선박 양편에 네 장의 푸른 깃털 날개가 자라나서 갓 부화한 아기새처럼 파닥거렸다.

    “와, 너무 귀엽습니다.”

    홍의 소녀가 눈이 동그래져서 자기도 몰래 소리쳤다.

    잠시 부상을 살피고 있던 구레나룻 사내가 표정이 변해서 소녀를 향해 눈살을 찌푸렸다. 소녀도 자신의 실례를 깨닫고 얼굴이 붉어져 고개를 들지 못했다.

    “상관없으니 타거라. 날개는 금제가 형상화된 것에 불과하다.”

    온화하게 미소를 지은 한립이 말했다.

    모설과 홍의 소녀가 급히 선박에 오르는데 구레나룻 사내가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선배님,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염치가 없으나 저 뇌인수는…….”

    그의 시선은 바다에 떨어진 요수 시체를 향해 있었다.

    “난 필요 없다. 필요하면 가져가거라.”

    한립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담담히 말했다.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