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2화. 떠나다
*
쿠쿠쿵.
비경의 다른 구역에서도 굵은 금빛 기둥이 솟아올라 총 아홉 줄기가 비경의 상공으로 뻗어 나갔다.
금빛으로 물든 비경 전체가 수면처럼 일렁이면서 별안간 하늘을 뒤덮은 거대한 빛의 진법이 만들어졌다.
불경 소리와 함께 진법에서 금빛이 내려와 그걸 보는 수사들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허공의 먹구름은 금색 진법에 제압된 듯 더 이상 커지지 못했고 방대한 법칙의 힘이 비경을 벗어나지 못하고 안으로 갈무리 되었다.
교삼은 그걸 확인하고서야 긴장을 풀었다.
먹구름은 확장을 멈추었지만 주변의 천지원기들은 금빛의 영향을 받지 않고 몰려들어 점점 더 진하고 실체를 갖춘 먹구름이 생겨났다.
쿠쿵…….
강렬한 법칙 파동이 발산되어 빛의 진법을 연달아 때리고 있었다. 심하게 진동하던 금색 진법이 검은 구름에 가까운 구역부터 붕괴되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교삼은 두 팔을 풍차처럼 돌려 다급히 법결들을 던져 넣었고 금색 빛기둥이 더욱 왕성한 빛을 뿜으면서 진법을 지지했다.
다른 여덟 줄기의 빛기둥들도 매한가지였다.
후우웅!
부서지던 빛의 진법에 금색 주술문자들이 떠올라 얼기설기 엉켜 다시금 진법을 구축하고 이전보다 환하게 빛났다.
먹구름도 시간이 지날수록 강력한 파동을 뿜었으나 교삼과 다른 수사들의 술법에 안정을 찾아갔다.
먹구름이 빠르게 돌면서 중간의 소용돌이에서 줄줄이 검은 뇌전빛을 번득였다.
콰쾅!
무시무시한 소리와 함께 굵은 검은 빛기둥이 소용돌이에서 떨어져 한립이 폐관 중인 동부로 내리꽂혔다.
이때 한립의 동부 위에는 잿빛이 응결해 회색 산봉우리 허상을 이루고 있었다.
검은 빛기둥은 산봉우리 허상을 매섭게 뚫고 산을 관통해 그 속의 동부로 떨어졌다.
쿠콰콰쾅!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들리고 비경 전체가 한바탕 흔들리는 바람에 수많은 산이 암석 조각을 비처럼 떨구었다.
검은 빛기둥을 날린 먹구름은 점점 수축해 흩어지고 있었다.
순식간에 먹구름이 가신 하늘은 이전처럼 맑았고 비경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밝아졌다.
하늘을 가리고 있던 거대 금빛 진법도 덜덜 떨리다 점점 연해졌다.
교삼이 수결을 거두고 초조한 기색으로 한립의 동부가 있는 방향으로 쇄도했다. 같은 방향으로 날아가던 흉터 사내가 문득 눈썹을 끌어올리고 신형을 멈추었다.
쉭!
한립의 동부 문 앞에 멈춰선 교삼은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각종 빛으로 둘러싸인 동부 안은 의식으로 살피려 해도 그럴 수 없었다.
마음은 급했지만 함부로 뛰어들 수 없어 우두커니 서 있던 교삼 앞에 드디어 여러 금제가 걷히고 대문이 열렸다.
“교삼 수사, 안으로 들어오시지요.”
안에서 한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교삼은 평온한 상대의 음성에 약간 마음을 놓으면서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동부 객실로 나와 앉아 있는 한립은 얼굴이 창백하고 기운이 불안정해 보였다. 그 앞 탁자에 놓인 검은 옥함은 꽉 닫혀 있음에도 은은하게 법칙의 힘을 발산하고 있었다.
교삼의 시선이 옥함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수사께서 원하시던 물건입니다.”
한립이 미소를 머금고 손짓하자 교삼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옥함을 끌어다 조심스럽게 뚜껑을 열었다.
그 안에 든 용 눈알 크기의 검은 단약에 칠흑 같은 법칙 도문이 하나 가로지르고 있었다.
“허원단!”
눈을 부릅뜬 교삼의 말과 행동에서 격정적인 감정이 전해졌다.
“용오 수사께서는 정말 믿을 만한 분이셨습니다. 기간 내에 허원단을 제련해 내셨군요.”
교삼이 뚜껑을 덮고는 고개를 들어 한립을 보았다.
“겨우 기간 내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익숙하지 않은 약방이다 보니 재료를 다 소진하고서야 겨우 하나를 제련해 냈고요.”
한립은 고개를 저으며 썩 만족스럽지 않은 얼굴을 했다.
“재료야 다 써도 그만 남아도 그만이지요. 허원단만 제련해 내셨으면 된 겁니다.”
“양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연단을 하시느라 원기가 많이 상하신 모양인데 이 삼천단(蔘天丹)을 가져다가 요양하는데 쓰십시오. 제 작은 성의니 거절하지 마시고요.”
그제야 한립의 창백한 얼굴이 눈에 들어온 교삼은 검은 옥함을 넣어두고 붉은 옥병을 꺼내 건네주었다.
“거절하지 않고 고맙게 잘 쓰겠습니다.”
한립은 옥병을 받아 의식으로 단약을 확인하고는 고마움을 표했다. 붉은 단약 몇 개가 진한 빛에 둘러싸여 은은히 영력파동을 품고 있었다.
“용오 수사께서 이번에 정말 큰일을 해주셨습니다. 감사를 드려야 할 사람은 저지요. 이번 임무는 수사께서 정식으로 윤회전에 들어오기 위한 시험이기도 했습니다. 정식으로 윤회전 사람이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허허 웃음을 지은 교삼은 붉은 옥패를 꺼내서 한립의 가면에 비추었다.
한립의 가면에서 하얀 빛이 빠져나와 지방 허상을 응결했고 아래쪽에 공헌점 60점이 늘어나 있었다.
“고맙습니다. 이번 임무를 마쳤으니 앞으로 천 년간은 자유롭게 활동해도 되겠군요?”
기분이 좋아진 한립이 확인하듯 물었다.
“물론입니다. 그럼 앞으로 어찌하실 계획인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연신술 구결을 얻었으니 당연히 동부로 돌아가 수련을 시작해야겠지요.”
“꼭 떠나셔야겠다면 막지 않겠습니다. 허나 이곳은 윤회전의 비밀 거점 중 하나로 무척 안전한 곳입니다. 만일 바깥에서 신분이 노출되시면 언제든 이곳으로 와서 몸을 피하십시오. 출입할 때 필요한 영패입니다.”
한립의 솔직한 말에 교삼이 검은 영패를 내주었다.
“그런 일이 생겨도 제가 홀로 낙백량풍을 뚫고 여기까지 올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영패를 받은 한립은 씁쓸하게 웃었다.
“허허, 제가 소홀했습니다. 이 정풍주(正風珠)는 약소하지만 제가 드리는 선물로 치시지요. 낙백량풍을 지나실 때 도움이 되실 겁니다. 그리고 이건 제 개인용 전신법반(傳信法盤)인데 도움이 필요하실 때 연락 주시면 제 능력이 닿는 한 거절하지 않겠습니다.”
교삼은 가볍게 웃으며 검은 구슬과 검은 원반을 꺼내 같이 주었다.
한립은 구슬이 이십육이 사용하던 것과 모양이나 기운이 완전히 같은 것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윤회전에서 만들어 보급하는 보물일 것이다. 검은 주술문자들이 밤하늘에 뜬 수천 개의 별빛같이 반짝이는 검은 원반도 보통 물건은 아니었다.
“잘 쓰겠습니다.”
한립이 인사를 하고 푸른 빛으로 날아올랐다. 비경 전방 허공에 검은 출구가 나타나 그를 내보내주었다.
검은 산봉우리에 선 교삼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조용히 그가 떠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때 옆에서 번득 흉터 사내의 신형이 나타났다.
“선부에 들어갈 때 데려가지 않으실 생각입니까? 허원단을 제련할 수 있다면 도움이 될 텐데요.”
“이제 막 윤회자가 된 수사를 완전히 믿을 수는 없습니다. 이번 임무는 무척 중요하니 신중을 기하는 편이 나을 거라 판단했습니다.”
흉터 사내의 질문에 교삼이 담담히 답했다.
“허원단은 구했으나 윤회전 내의 일손이 부족합니다. 백리염 수사는 행방이 묘연하고 호언 도인도 종적을 감추어서 소진한과 대항할 수 있는 인력이 없어요.”
“백리염 수사는 죽지 않았을 겁니다. 명한선부가 등장했으니 태을경 돌파를 원한다면 어쩔 수 없이 모습을 드러내겠지요. 소진한이야 정면충돌을 피하고 창류궁과 복릉종 쪽에서 알아서 하게 두면 그만입니다.”
“아, 방금 들어온 소식이 있습니다. 홍월도 인근에 괴인(怪人)이 출현했다고 합니다.”
흉터 사내가 퍼득 무언가를 떠올리고 말했다.
“어떤 괴인 말입니까?”
“금색 곤충을 부리는 은색 장포를 입은 여인이라는 것 밖에는 밝혀지지 않았고, 금선경에 이른 존재라 합니다.”
“은포 여인에 금색 곤충이라……. 3대 종문에 그런 인물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홍월도 인근에 나타났으면 그자 역시 명한선부를 노리고 있다고 봐야겠군요.”
교삼이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혹시 몰라서 사람을 붙여 놓기는 했는데, 그 자가 무슨 변수가 되기야 하겠습니까. 허원단도 구했겠다 계획대로만 하면 되겠지요.”
흉터 사내는 말을 마치고 검은빛으로 변해 허공에 녹아들어 사라졌다.
* * *
그 시각, 비경을 떠난 한립을 맞이한 것은 무시무시한 낙백량풍이었다. 그는 바로 정풍주를 발동하지 않고 몸에서 푸른 빛덩이를 응결해 음풍을 막았다.
검은 바람은 밀어낼 수 있어도 넋을 잃게 만드는 귀곡성은 그대로 전해졌다. 뒷짐을 진 한립은 그 소리를 들으면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의식의 힘이 아주 안정적으로 변해서 외부의 귀곡성에 흔들림이 없었다. 의식 폭주의 화근을 제거했다는 것을 확인한 그는 소매 속에서 잿빛 산봉우리를 불러냈다.
한립은 원합오극산을 보고는 흡족한 기색을 비췄다.
허원단을 제련하면서 마지막 단계의 단겁을 원합오극산으로 가볍게 막을 수 있었다. 이번 실험으로 다른 어떤 선기보다도 단겁을 막는 데는 원합오극산이 유용하다는 확신이 생겼다.
단겁에 호되게 당해서 안색이 창백한 척했던 것은 교삼을 속이기 위한 연기에 불과했다.
재료를 다 써버렸다는 말도 사실이 아니었고, 저물탁 속에 아직 7번은 더 연단할 재료가 남아 있었다.
허원단의 약방과 도단 약방 상이에 연관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 연구해볼 생각이었다.
연단을 통해 남은 재료로 허원단을 더 제련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때가 되면 윤회자인 교삼이 절실하게 원하던 단약에 대체 무슨 특별한 점이 있는지도 알게 될 것이다.
한립은 정풍주를 꺼내서 이십육이 했던 대로 수결을 맺었다. 구슬에서 퍼져나간 검은 파문이 낙백량풍을 밀어냈다.
그걸 지켜보는 한립의 눈빛이 흔들렸다.
낙백량풍 깊은 곳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했고 의식 문제를 해결한 지금은 충분히 시도해 볼만 했다.
하지만 결국 그는 호기심을 억눌렀고 푸른 빛줄기로 변해 빠르게 흑풍해역을 향해 날아갔다.
하루가 지나 흑풍해역 모처로 빠져나온 그는 정풍주를 거두고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보물 덕에 낙백량풍의 영향을 받지 않았는데도 그 속에 오래 있다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그 순간 표정이 달라진 한립이 서둘러 붉은 가면을 쓰고 화면을 띄워 임무란을 확인했다.
희색을 드러낸 그는 선원석이 든 작은 주머니를 통해 임무란 중간의 소용돌이 진법 속에 던져 넣었다.
잠시 후 선원석은 몇 가지 재료로 바뀌어 있었다. 영초 두 가지와 요수 재료 두 가지 그리고 나머지는 색색깔의 수정돌들이었다.
금혼단 제련에 필요한 재료들을 구한다고 임무를 등록해 두었더니 이렇게 빨리 구하게 될줄은 몰랐다.
한립은 꼼꼼하게 재료들을 살피고 종류별로 잘 나누어서 보관했다.
금혼단 제련과정은 복잡하지 않아 현재 그의 연단 실력에 진언보륜의 시간의 힘이 더해지면 한 번 분량의 재료로도 충분했다.
둔광을 일으킨 한립은 느긋하게 날아가기 시작했다.
교삼에게는 당장 연신술을 수련할 것처럼 말했지만 의식 폭주의 위협에서 벗어났으니 더 급한 일은 금선경에 이르는 것이었다.
윤회전에 들어가 윤회자가 되었어도 북한선궁의 수배를 받는 것은 여전했고 잡히면 더 곤란한 처지에 놓이게 될 것이 뻔했다.
오직 실력을 쌓아야만 위기를 벗어나 다른 일을 모색할 수 있었다.
금혼단이 있으면 혼백의 탈바꿈 과정도 무사히 지날 수 있을 테니 이제 마지막 선규만 뚫으면 되었다.
이 간단한 한 발자국을 떼지 못해서 고금 이래 수많은 진선경 후기 수사들이 같은 경지에 묶여 있었다.
한립도 한숨이 절로 나왔다.
금선경에 이를 방법을 오랫동안 모색해 왔고 대주천성원공의 완전한 공법을 찾는 것도 해결방법 중 하나였다.
무상맹에 높은 보수를 책정해서 금선경에 이르는 데 도움이 되거나 마지막 선규를 뚫는 방법에 대한 정보를 구했으나 지금까지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파앗.
한립은 수결을 맺어 가면에서 나온 붉은 빛에 휩싸였다. 붉은 빛이 가신 자리에는 각진 얼굴에 짙은 눈썹을 지닌 중년인이 서있었다.
그가 속도를 폭발적으로 높여 번득 사라진 방향에는 흑풍성이 있었다. 그런데 십여 만 리를 날아가던 한립은 우뚝 멈춰 섰다.
쏴아아!
고요하던 바다가 갑자기 솟아오르면서 산처럼 높은 파도들을 이루고 서로 충돌해 물보라를 치고 있었다.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지진과 비슷한 이상 현상은 평소 흑풍해역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바다를 내려다보던 한립은 더는 신경 쓰지 않고 전방으로 날아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