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670화 (1,427/2,000)

1670화. 화근

*

같은 시각, 교삼은 한립이 있는 곳과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모를 검은 통로를 거닐면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통로가 그리 길지 않아 곧 커다란 흑석(黑石) 대문 앞에 이르렀다.

교삼은 법결을 날려 천천히 대문을 열고 널따란 대청으로 들어섰고 그 중앙에 검은 피풍의를 걸친 누군가가 돌아서 있었다.

피풍의 소매에 십(十) 자 도안이 수놓아져서 그윽한 빛을 발했다.

걸음 소리를 듣고 돌아선 이는 중년 사내로 평범한 얼굴에 기다란 흉터가 왼쪽 이마에서 시작해 오른쪽 눈을 지나 뺨까지 이어져 있었다.

“여긴 무슨 일입니까?”

교삼이 서늘하게 물었다.

“당연히 수사에게 볼일이 있어 온 것입니다. 아직 아무도 당신의 행적을 발견하진 못했으니 걱정마시고요.”

흉터 사내가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 일은 어찌 되었습니까?”

“예상한 대로 홍원도 아래 있더군요. 흑풍도때문에 우리 쪽 인물들이 접근하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흑풍도요? 겨우 그들이 우릴 막을 힘이 있단 소립니까?”

“흐흐, 흑풍도 수사들 중에 금선경 수사가 있다면 어떻습니까?”

“설마…….”

웃음을 흘리는 흉터 사내를 보고 교삼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지금까지 상황을 보면 우리 짐작이 맞았던 것 같습니다.”

흉터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수를 쓰든 상관없으니 허원단(虛元丹)을 제련하기 전에 홍월도에 대해 알아내야 합니다.”

“저도 그러려던 참입니다. 그보다 이곳에 온 것은 다른 일을 확인하기 위해서인데, 듣자니 허원단 제련 임무를 막 윤회전에 들어온 신입에게 맡기셨다고요?”

흉터 사내가 무표정한 얼굴로 화제를 돌렸다.

“그렇습니다. 용오라 부르게 된 인물입니다.”

교삼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호오, 그래서 시간을 얼마나 주신 겁니까?”

미미하게 미간을 좁힌 흉터 사내가 흥미롭다는 듯 물었다.

“15년.”

“이런 말씀이 어떻게 들릴지 모르나, 서문 대사라 해도 15년 내로 허원단 제련에 성공할 거라 장담할 수 없습니다.”

“서문 대사께서 선역에 계시지 않고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20년이 채 남지 않았는데 다른 선택지가 있을 거라 보십니까?”

“이렇게 중차대한 일을 방금 입문한 자에게 맡기고 수사께서는 안심이 됩니까?”

흉터 사내가 끙 앓은 소리를 내며 반문했다.

“그래서 이곳을 떠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시간 내로 그자가 성공하지 못하면 어쩌실 생각입니까?”

“……그간 많은 일이 있어서 북한선역에 머무는 윤회자가 많지 않습니다. 촉룡도 사건으로 입은 타격이 크고요. 이 일은 오직 성공만 있을 뿐 실패란 절대 있을 수 없습니다.”

침묵하던 교삼이 단호하게 답했다.

“그자를 상당히 믿는 모양이군요. 진작 누군가를 파견해 오래 지켜보시기라도 한 것입니까?”

“접촉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상대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합니다.”

“그럼 어째서…….”

“모든 책임은 제가 질 것이니 걱정마십시오. 수사께서는 자신이 맡은 일만 잘 처리해 주시면 됩니다. 홍월도에 대해 철저히 파헤쳐 주세요.”

교삼이 흉터 사내의 말을 끊고 분부 조로 말했다.

“좋습니다. 책임을 지시겠다니 저도 더는 아무 말 않겠습니다.”

“이곳은 오래 머물 곳이 아니니 용건이 끝나셨으면 얼른 돌아가 보세요. 몇 년 내로 다시 만날 일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예, 이만 가보겠습니다.”

냉담한 교삼의 말투에 흉터 사내의 몸에 검은빛이 떠올라 그림자처럼 흩어졌다. 교삼은 몸을 돌려 한립의 동부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 * *

10년 뒤.

동부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한립은 조각상처럼 움직임이 없었다. 머리가 부드러운 빛에 둘러싸여 그의 얼굴도 흐릿하게 잘 보이지 않았다.

빛은 물처럼 부드럽고 편안한 느낌으로 흘러 보는 사람의 눈을 즐겁게 해주었다. 이때 눈꺼풀을 움직인 한립이 천천히 눈을 떴다.

머리의 빛이 미간으로 흡수되어 사라지고 그의 얼굴에 웃음기가 어렸다.

10년 동안 밤낮없이 수련한 끝에 연신술 4성에 어느 정도 성과를 이룰 수 있었다.

의식의 힘이 크게 늘지는 않았어도 어둠 속에 도사리고 있던 화근을 통제해서 방대한 의식을 막힘없이 운용할 수 있었다.

그런데 기쁘면서도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경전에 기록된 바로는 연신술 4성은 3성보다 난해하고 익히기 어려워서 어느 정도 성과를 이루는 데도 수십 년에서 백여 년이 걸릴 거라 적혀 있었다.

연단 임무도 있어서 연신술 4성을 수련하기에 시간이 충분치 않을 거라 여겼는데 아무런 어려움 없이 겨우 10년 사이 화근을 제거한 것이 신기했다.

‘연신술에 재능을 타고 났거나 지금의 체질이 비술을 익히기 적합하게 변한 탓이겠지.’

예전에 대연결을 익혔을 때도 그랬고 연신술을 익힐 때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일단 수련을 멈추고 남은 시간 동안은 연단을 해야했다.

한립은 교삼이 준 저물법기를 꺼내 안에 든 재료와 약방에 언급된 재료들을 비교해 빠진 것이 없는지 확인했다.

그는 재료들을 꺼내 연습 삼아 연단을 해보려다 갑자기 탄성을 내뱉었다. 그의 손 위에 한 번 분량의 재료가 떠올랐는데 그 중에 주먹 크기의 검은 수정돌이 하나 있었다.

주변의 광선을 모조리 잡아먹으면서 강렬한 법칙의 힘을 발산하는 검은 수정돌은 허원단 약방의 주재료인 흑수정(黑髓晶)이었다.

흑수정을 집어들자 그의 다섯 손가락에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괴이한 법칙의 힘이 강력한 부식 작용을 해서 현선의 몸을 지닌 그도 직접 닿으면 버텨낼 수 없었다.

푸른 빛을 일으켜서 검은 수정돌을 감싼 그는 다른 손에 검은 돌조각, 묵옥정을 불러냈다.

생김새도 비슷하고 발산하는 기운도 거의 똑같았지만 흑수정이 발산하는 기운이 묵옥정보다 몇 배는 강했다.

묵옥정과 흑수정 간에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교삼이 묵옥정의 출처를 물은 것도 흑수정 때문인 건가?’

어찌 되었든 그와는 상관없는 일이었고 허원단만 제련해 내면 그만이었다. 묵옥정을 넣어둔 그는 약방이 적힌 옥간을 꺼내 이마에 댔다.

보름 후.

가부좌를 튼 한립 주위로 재료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같은 재료들이 분량별로 모인 더미가 30개 정도였다.

파앗!

그는 별안간 눈을 뜨고 소매를 펄럭여 은색 연단로를 띄웠다. 입에서 은색 화염을 불어내자 화로 밑에서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

연단실의 기온이 급상승했다.

적정 온도에 이르자 한립은 고개를 끄덕이고 한 무더기의 재료들 속에서 재료 하나를 불러내 화로 속에 던져 넣었다.

동시에 그의 등 뒤로 금색 고리가 떠올랐다. 수정 실 한 줄기가 그의 손끝을 떠나 고리를 휘감고 강력한 시간법칙의 기운을 물씬 뿜어냈다.

바로 시간정사였다.

지금도 밝아 보였으나 가장 기운이 왕성했을 때와는 차이가 컸다. 보륜의 360개 시간도문도 아직 18개 밖에 빛이 돌아오지 않아 나머지는 어두웠다.

한립은 그것을 보고 눈을 반짝였다.

시간정사와 진언보륜은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어서 고리의 시간도문이 전부 회복되어야만 시간정사도 원래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 듯했다.

우웅!

금색 파동이 고리에서 흘러나와 화로와 주변을 잠식했다. 불길과 화로 안의 모든 것이 느릿하게 진행되었으나 보륜의 시간도문이 18개 밖에 밝혀져 있지 않아 그 효과에 제약이 있었다.

한립이 막 연단을 시작했을 때, 멀리 흑풍도에서는 백 년에 한 번 있는 전송진 개방일이 도래했다.

흑풍성 길가의 상점들은 이전보다 훨씬 스산한 분위기를 풍겼다.

중앙의 번화한 거리 몇 개를 제외하면 지나는 사람이 드물었고 많은 상점들은 손님이 없어 침체되어 있었다.

요사이 흑풍해역은 웬일인지 이상 현상이 빈번하게 발생해서 바다를 뒤집어 놓을 만한 해일이 일어나고 화산이 분출되거나 광풍이 몰아치고 폭우가 쏟아지는 일이 빈번했다.

적잖은 섬들이 이런 천재지변에 당해 사상자가 무수히 많이 생겨났다.

흑풍해역 수사들은 겁에 질려서 곧 흑풍해역 전역이 곧 멸망할 거라는 흉흉한 소문까지 돌고 있었다.

쉬지 않고 다투던 흑풍도와 청우도조차 이런 천재지변 때문에 잠시 쟁투를 멈춘 듯 보였다.

흑풍도가 직접 재해를 입은 것은 아니지만 흑풍성 안의 거래에 큰 영향을 미쳐 많은 사람이 관심을 보이던 전송진 개방일에도 인파가 몰리지 않았다.

웅웅!

탑 안의 전송진이 밝은 빛을 뿜자 두 사람이 전송진 인근에 서 있었다. 그 중 한명은 깃털 관을 쓴 금포(錦袍) 중년인, 흑풍도 도주 육균이었다.

전송진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 희미하게 흥분이 느껴졌다.

또 다른 하얀 장포를 걸친 검미의 각진 얼굴 사내는 무리를 이끌고 지난번 흑풍도로 들어왔던 풍 씨 성의 사내였다.

그도 전송진을 보고는 있었지만 육균보다는 덤덤했다.

전송진에서 빛기둥이 솟아올라 전송탑 전체가 흔들렸다.

빛기둥이 사라지고 전송진에 출현한 이들은 20명이었는데 두 무리로 갈라져 꽤 거리를 두고 서 있었다.

전송진에 나타난 사람들 중 한 무리는 대부분 하얀 장포를 걸치고 의복에 금색 구름 모양 수가 놓여 있었다.

그들 중 가장 선두에 선 이는 각진 얼굴에 기다란 눈 높은 코를 지닌 입술 양 끝으로 은색 염소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한립이 이곳에 있었다면 북한선궁 소진한이 나타난 것에 화들짝 놀랐을 것이다. 그 뒤로 네다섯 명이 북한선궁 복색을 하고 있었다.

촉룡도에서 보았던 부궁주 설앵, 금선 노월 등이 어김없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밖에 촉룡도 복장을 한 세 명은 구양규산을 우두머리로 한 세 명의 금선 도주들이었다.

다른 무리는 전부 남색 장포를 걸치고 있어 역시 촉룡도 사건에서 등장했던 창류궁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선두에는 온화한 인상에 눈동자 깊은 곳에서 은은히 남색빛을 반짝이는 창류궁 대궁주 낙청해가 있었다.

그 뒤로 스무살 가량의 청년이 있었는데 외모가 청수해서 사내임에도 대단한 미색을 뽐냈다.

그들 외에 대부분이 촉룡도에 나타났던 이들이었다. 육균이 감격한 얼굴로 앞으로 나서 예를 올렸다.

“흑풍도 육균이 소 궁주님을 뵙습니다. 낙 궁주님과 다른 선배님들께서도 흑풍도까지 친히 와주시다니 저희의 크나큰 영광입니다.”

그 옆에 선 풍 수사가 한 걸음 나와 소진한을 향해 공손히 예를 올렸다.

소진한은 그들을 향해 그저 고개만 슬쩍 까딱이고는 일행을 이끌고 전송진에서 걸어 나왔다.

“육 도주가 참 예의가 바르군. 그렇게까지 할 것 없으니 편하게 하게.”

낙청해가 육균을 향해 대답을 해주고 역시 일행을 데리고 걸음을 뗐다.

육균과 풍 수사가 시종이라도 된 듯 서둘러 옆으로 비켜서자 다른 흑풍도 수사들은 감히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고개를 조아렸다.

“여기가 흑풍해역이란 말이지요? 천지영기가 부족하기는 해도 느낌이 나쁘지 않습니다.”

낙청해가 창밖으로 보며 말했다.

“촉룡도에서 뵙고 여기서 다시 수사와 마주칠 줄은 몰랐습니다. 이걸 우연이라 해야 할지.”

그런 낙청해를 힐끗 본 소진한이 입을 열었다.

“허허, 저라고 관란성에서 소 궁주를 다시 뵐 줄 알았겠습니까? 북한선궁이 이리 많은 수사를 이끌고 외진 해역으로 온 이유를 모르겠습니다만, 저희 창류궁이 도울 일이 있으면 괘념치 마시고 말씀해 주세요! 저를 포함해서 창류궁 수사라면 누구나 기쁜 마음으로 도울 것입니다.”

낙청해가 남색 눈동자를 반짝거리며 배시시 웃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창류궁 세력이 융성해 이전과는 지위가 달라졌다는 것을 다들 아는걸요. 오극 궁주께서 상아대륙에 머물고 계시고, 창류칠자(蒼流七子)의 위명이 자자합니다. 수사 곁의 어린 친구만 봐도 자질이 남달라서 부러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우리 북한선궁이 무슨 복이 있어 창류궁 수사들을 마음대로 부리겠습니까?”

소진한은 냉소하며 낙청해 뒤쪽의 수사들을 훑다 청수한 청년을 유심히 살폈다.

“아, 소개를 안 해드렸나요? 이 아이는 제 제자인 남가몽이라 합니다. 아직 부족한 점이 많아서 부끄럽습니다. 가몽아, 얼른 소 궁주께 인사를 올리거라. 이제 북한선역의 일인자시니 몇 마디라도 조언을 들을 수 있다면 평생의 복일 게다.”

낙청해는 얼굴의 인자한 미소를 유지한 채 뒤편의 청수한 사내에게 분부했다.

“후배 남가몽이 소 궁주님께 인사 올립니다.”

청수한 사내의 버들잎 같은 미간이 잠시 좁아졌으나 앞으로 나서 공수하고 인사를 올렸다.

그것을 본 소진한은 무표정하게 고개만 끄덕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