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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668화 (1,425/2,000)

1668화. 의혹을 풀다

*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한립은 오랫동안 입을 열 수 없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교삼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윤회전에 들어오면 북한선궁과 적이 될 것을 염려하시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하하, 맥십일 수사께서는 흑풍해역에 오래 머무셔서 외부 세계의 사정에 어두우실 겁니다. 북한선궁의 세력이 큰 것은 사실이나 그들이 천하를 독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과 맞먹는 세력을 지닌 게 우리 윤회전만도 아니고요. 게다가 그들은 빛 속에 드러나 있고 윤회전은 어둠 속에 숨어 있는데 찾아내는 게 그리 쉽겠습니까?”

“증거가 있습니까? 수사의 말만 믿고 중요한 결정을 할 수는 없는 법이라 서요.”

“제 말이 사실인지 거짓인지는 차차 알게 되실 겁니다. 그리고 연신술을 3성까지 익힌 수사는 선궁에 발각되면 어차피 윤회전 인물로 간주되어 처리가 될 텐데 무엇을 꺼리십니까? 또 제가 잘못된 게 아니라면 수사께서는 얼마 전 비술의 발작을 겪으셨겠지요. 연신술 후반부를 익히지 못하면 아마…….”

교삼은 일부러 말을 끝맺지 않았다. 그 말을 들은 한립은 깜짝 놀랐다.

전력을 다해 의식의 힘을 숨기고 있었는데 상대가 자신의 이상을 알아챌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손끝으로 다기를 만지작거리면서 한립은 결정을 내려갔다. 교삼도 한립이 설득이 되어가고 있음을 알고 말을 이었다.

“자화자찬을 하려는 것은 아니나 우리 윤회전의 자원은 북한선궁 못지않습니다. 각종 단약과 재료, 비술과 공법 등 없는 것이 없어 수사의 수련에 분명 도움이 될 겁니다. 거기다 우리는 맥십일 수사를 일반 회원으로 가입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윤회전의 ‘윤회자(輪回子)’로 모시려는 것입니다.”

“윤회자요?”

움찔한 한립이 뭔가 싶어 물었다.

“윤회전의 가장 핵심적인 구성원이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아무나 윤회자가 되고 싶다고 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남다른 능력이 있는 동시에 특별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어야 하니까요.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윤회전의 선택을 받아야만 윤회자가 될 수 있습니다.”

“저는 평범한 사수에 불과해서 남다른 능력 같은 것은 없습니다. 잠재력은 더 말할 것도 없고요.”

“겸손하신 말씀이십니다. 도단사(道丹師)인 분이 스스로 능력이 없고 잠재력이 없다고 하시면 세상천지 누가 자신을 재능있다 칭할 수 있겠습니까.”

웃음을 터트리는 교삼을 보고 한립은 벌떡 일어나 칼날처럼 예리한 눈길을 보냈다.

교삼은 미소를 머금은 채 한립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한립의 예리한 시선이 차차 누그러졌다.

“그건 또 어찌 아신 겁니까?”

“노응초를 제게서 거래해 가셨고, 무상맹에 등록한 적잖은 임무들이 전부 도단과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조금만 조사를 해보면 어렵지 않게 밝힐 수 있는 사실이지요.”

웃으며 설명하는 교삼을 보고 한립은 입을 다물었다.

“얼마 전 흑풍해역에서 일어난 웅장한 단겁도 수사께서 일으키신 거라고 추측했습니다. 이렇게 많은 단서를 갖고도 수사가 도단사라는 것을 알아내지 못하는 것이 더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지난번 갈우란 수사도 윤회전 인물이었겠군요?”

“맞습니다. 당시 수사가 도단사라는 것을 알아챘지만 내색하지 않았지요.”

“하하, 윤회전의 실력이 과연 대단합니다. 어찌어찌 속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말입니다.”

자조적으로 웃으며 한립은 내심 마음을 놓았다. 윤회전은 그가 도단을 제련한 사실만 알았지 다른 일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는 듯했다.

도단사 신분이 알려진 것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상심하실 것 없습니다. 갈우 수사가 탐지에 능한 비술을 익혀 알아낼 수 있었던 것이니까요. 다른 사람이었다면 수사의 신분을 몰라보았을 것이고 오늘 연신술 후반부 공법을 구할 기회도 사라졌겠지요. 허허, 이게 다 맥십일 수사와 윤회전이 인연이 있다는 이야기가 아니겠습니까!”

“……저는 아직 윤회전의 구체적인 상황을 모릅니다. 교삼 수사께서 의문을 풀어 주실 수 있을지요?”

다시 자리에 앉은 한립이 침음하다 물었다.

“물론입니다. 윤회전은 다른 종문과 달리 고정된 세력 범위가 없고 비교적 느슨한 조직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각각의 구성원들은 특수한 전신 보물을 통해 연락하며 특정 장소에 머물러야 한다는 구속이 없어 수사와 같은 산수 분들에게는 편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듣고 있자니 무상맹과 비슷합니다.”

교삼의 말에 한립이 턱을 쓸며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들은 교삼이 머뭇거리며 눈빛이 흔들렸다.

“왜 그러십니까?”

“아닙니다, 수사께서는 이제 외부인이 아니니 숨길 것도 없겠습니다. 선계 선역들에 많은 거대 세력이 존재하지만 아주 세밀한 곳까지 전부 관리할 수는 없어 중소 세력들에 의지하기도 하지요. 우리 윤회전도 무상맹을 하부 조직 중 하나로 두고 있습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그랬군요.”

한립이 아연해져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의 말을 듣자니 많은 의문이 해소되었다.

무상맹 고위층이던 교삼이 윤회전 회원인 것도 결국에는 두 조직의 뿌리가 같아서였다.

“윤회전과 무상맹의 관계는 무상맹 내에서도 아는 이가 거의 없습니다. 윤회전 내에서도 핵심 구성원인 윤회자들만 알고 있고요. 천정과 척을 지고 있다 보니 이 일이 새어나가면 무상맹은 대대적인 토벌을 당할 테니까요. 맥십일 수사께서도 반드시 비밀을 지켜주셔야 합니다.”

“안심하셔도 됩니다. 이렇게 중요한 일을 어찌 함부로 발설하겠습니까.”

심각한 교삼의 어투에 한립도 복잡한 얼굴로 약속했다. 한립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중대한 사실을 알려주는 것은 그를 믿어서라기보다는 윤회전에 가입하라는 강요에 가까웠다. 이런 비밀을 알고 가입을 하지 않겠다고 답하면 무사히 이곳을 떠나게 그냥 두겠는가?

“편의를 위해 윤회전 사람들도 외부에서 일을 볼 때 무상맹 가면을 씁니다. 구성원들끼리 연락도 취하고 거래도 하고 임무 등록할 때도 무상맹 회원일 때와 같고요.”

“윤회전도 무상맹처럼 가입을 하기 위해서는 대가를 치러야 할테지요?”

“그렇습니다. 윤회전 구성원은 천년마다 한 번씩 임무를 수행해야 합니다. 임무를 수행하고 싶지 않다면 상응하는 선원석을 지불하거나 다른 자원으로 대체할 수 있기도 하고요.”

“듣다 보니, 무상맹 고위급 회원은 반드시 윤회전 사람이고 윤회자를 포함한 윤회전 구성원은 무상맹 고위급 신분을 겸하고 있다는 이야기로 들립니다.”

“대충 그렇게 생각하시면 맞을 겁니다. 윤회전에 대해서 당장 알려드릴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말을 마친 교삼이 찻잔을 들어 입을 축였다.

“교삼 수사께서 정성을 다해 초청해주시고 윤회전에 대한 정보를 이리 많이 알려주셨으니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겠지요. 윤회전에 가입하겠습니다.”

한립이 그동안 들은 정보를 정리해보고는 고개를 들고 대답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제가 사람을 잘못 보지 않았어요. 산수로 생활하는 것이 자유롭기는 하지만 더 높은 경지로 올라가기 위해서 자원이 부족할 때가 많지 않습니까? 윤회전에 가입하신 것은 정말 현명한 선택이십니다.”

탁! 찻잔을 내려놓은 교삼이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반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는 다 같은 윤회전 사람이니 많은 가르침 부탁드리겠습니다.”

드디어 한립이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숙였다.

“흐허허, 그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무엇이든 이해가 가지 않는 바가 있으면 제게 물어 주세요. 수사와 같은 도단사와 가깝게 지낼 수 있다니 제 쪽에서 바라 마지않을 일입니다.”

교삼이 장난스럽게 웃음을 터트리고 한립도 담담히 웃으며 공수를 했다. 윤회전에 가입하기로 동의하자 두 사람의 관계가 훨씬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이게 수사의 새로운 가면입니다. 오늘부로 수사의 새로운 호칭은 ‘용오(龍五)’입니다. ‘맥십일’ 신분은 남겨두셔도 폐기하셔도 됩니다.”

교삼이 손을 저어 미간에 오(五)자가 적힌 붉은 사자머리 가면을 꺼내들었다. 고개를 끄덕인 한립이 붉은 사자머리 가면을 받아서 살폈다.

안 그래도 푸른 소머리 가면 대신 다른 신분이 필요했는데 잘 되었다. 그런데 수결을 맺어 가면에 푸른빛을 불어 넣어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붉은 가면은 무상맹의 다른 가면과 달리 윤회전 독문 법결로만 발동할 수 있습니다.”

교삼은 의아해하는 한립을 향해 옥간을 날려 보냈다.

옥간을 받아 이마에 가져다 댄 한립은 얼마 지나지 않아 눈을 뜨고 새로운 주문을 외면서 법결을 날렸다.

웅.

사자 머리 가면에 붉은빛이 떠올라 붉은 화면을 응결해냈다. 그걸 본 한립은 곧바로 수결을 바꾸어 화면을 흩었다.

“겉보기에는 특별해 보이지 않아도 윤회전에서 특별히 제작한 가면이라 무상맹 고계 가면이 지닌 모든 기능 외에 연신술의 기운을 숨겨 주는 작용도 합니다. 완벽하다고 장담할 순 없지만 천정의 순찰 사자들도 쉽게 연신술의 기운을 감지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교삼의 보충 설명에 한립의 두 눈이 환해졌다.

한립이 붉은 가면을 넣어두고 고개를 숙여 보이자 교삼도 그 뜻을 알고 일어나 탁자의 회색 옥간에 법결들을 던져 넣었다.

옥간 표면의 잿빛 기운이 검은색으로 바뀌면서 흩어졌다. 그걸 보는 한립의 가슴이 뛰었다.

“윤회전 규정에 따라 가입한 수사는 연신술 구결 한 부를 받을 수 있습니다. 연신술 4성 구결이 적혀 있으니 이후 뒷부분이 필요하시면 따로 대가를 지불하고 바꾸어 가실 수 있습니다.”

교삼은 옥간을 건네면서 설명해 주었다. 옥간을 받으면서도 한립은 쓴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옥간에 연신술 후반부 구결 전부가 적혀 있는 줄 알았는데 4성 공법뿐이라니, 윤회전이 거래를 썩 잘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지금의 그에겐 연신술 4성 구결로 충분했다.

그는 바로 옥간을 이마에 대고 의식을 불어넣어 금제가 걷힌 부분의 구결을 확인했다. 구결은 길지 않아 몇 천 자 정도라서 몇 번을 반복해서 읽으니 금방 외워졌다.

길게 숨을 내쉬며 눈을 감은 한립은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

교삼은 손을 모으고 앉아 그저 한립을 살펴보고 있었다. 족히 일각이 지났을 때 한립은 눈을 뜨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돌처럼 가슴에 얹어있던 연신술을 드디어 내려놓을 수 있어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용오 수사, 윤회자로서 반드시 알아봐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가 눈을 뜨기를 기다렸다가 교삼이 노란 옥간을 날렸다. 그것을 받아 이마에 가져다댄 한립은 잠시 후 옥간을 내리고 수결을 맺었다.

웅.

주술 소리와 함께 붉은 가면이 빛을 발해 화면을 만들었다. 한립은 거침없이 화면 구석의 작은 비석 도안을 건드렸다.

퐁!

은은한 빛이 비석 도안에서 흘러나와 사람 키만 한 하얀 비석 허상으로 변해 있었고 그 위에 금전문으로 ‘지방(地榜)’이라는 글자가 크게 새겨져 있었다.

그 아래 나열된 금색 글자들은 공법, 비술, 약방 등이었다.

이런 공법과 약방 위쪽으로 은색의 작은 글자로 주석이 달려 있었고 마지막은 가격으로 보이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산악연체결(山岳煉體訣), 흙 속성 현선 공법, 산악의 정기로 몸을 정련해서……. ……금선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 1백 50점!”

“태허영목(太虛靈目), 대성하면 천지를 꿰뚫어 보고 투시할 수 없는 것이 없다, 2백 점!”

“원령단(元靈丹) 약방…….”

“지금 수사께서 보고 계시는 것이 윤회전 지방입니다. 오로지 윤회자에게만 공개가 되는데, 종문에서 오랜 세월에 거쳐 수집한 공법과 비술 약방이니 그 가치는 따로 말씀드리지 않아도 아시겠지요? 표기된 점수는 교환에 필요한 공헌점으로 윤회전 임무를 수행해 획득할 수 있습니다.”

“윤회전에 가입한 보람이 있군요. 이중 어떤 공법도 세상에 등장하면 서로 차지하려 다툴만한 것들입니다! 저야 지금은 그저 무엇이 있는지 볼 수만 있지만요.”

“그렇지 않습니다. 윤회자가 된 사람에게는 연신결 한 부 외에도 공헌점 1백 점이 지급됩니다. 무엇을 골라 교환하실지 천천히 골라보세요.”

교삼은 붉은 옥패를 꺼내서 한립 앞의 비석 허상에 비추었다. 붉은빛이 날아가 비석 하단에 작은 글씨로 일백(一白)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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