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7화. 윤회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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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립이 속으로 이런 이런저런 추측을 하고 있을 때 이십육이 멈추었다.
“도착한 것입니까?”
한립의 질문에 이십육이 수결을 맺자 검은 구슬이 강력한 빛을 발산해 두 사람을 감싸고 아래로 내려갔다.
먹처럼 새까만 바닷물의 냉기가 스며들어 점점 견디기가 어려워졌다.
한립은 손을 저어 검은 물을 밀어내려 했으나 음기가 가득한 바닷물은 여러 원기가 복잡하게 섞여서 말을 듣지 않았다.
해저에 이르자 이십육이 익숙하게 해저 골짜기 안으로 그를 안내했다. 검은 옥패를 꺼내 바닥을 비추니 쿠르릉 하고 검은 돌기둥들이 올라와 주술문자들을 반짝였다.
옆에 뒷짐을 쥐고 선 한립은 눈을 가늘게 뜨고 지켜보고만 있었다.
이십육의 주문이 계속될수록 돌기둥 다섯 개의 검은 빛은 짙어졌고 그 사이로 검은 통로가 형성되어 어딘가로 연결되어 있었다.
검은 통로가 오몽도의 비밀 공간과 비슷한 류 라는 것을 알아본 한립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의식으로 안을 살피려 해도 부드러운 힘이 가로막았다.
“이곳이 말씀드린 장소입니다. 맥십일 수사, 가시지요.”
이십육이 공손히 손을 뻗어 안내하는 자세를 취했다. 고개를 끄덕인 한립은 머뭇거리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고 그가 뒤따랐다.
겉으로는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어서 들어간 것이었다.
항상 조심스럽게 행동했고 철저히 알아보지 않고 위험에 뛰어드는 성격은 아니었으나 연신술이 걸린 일이라 이제와 발길을 돌릴 수도 없었다.
물론 그가 이렇게 대답하게 군 이유는 다른 것도 있었다.
시간법칙을 장악했고 진언보륜도 있는데다 금선경 괴뢰인 해 도인이 있으니 수틀리면 번개처럼 이십육을 제압하고 검은 구슬을 빼앗아 달아날 작정이었다.
공간 안으로 들어선 순간 알 수 없는 힘이 그를 감싸고 주변 풍경이 변해갔다.
긴장한 그는 선령력을 끌어올려 몸 안의 수많은 보물들을 언제든 분출할 수 있게 해두었다.
다행히 그가 걱정하던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고 눈앞이 밝아진 다음에는 오몽도 비경과 비슷한 울창한 숲이 우거진 공간이 나타났다.
비경 중간에 우뚝 솟은 검은 산봉우리에 동굴이 몇 개 뚫려 있었고 비경 전역에 이름 모를 금제가 펼쳐져 있어 의식을 몸 밖으로 방출할 수가 없었다.
한립은 남몰래 선령력을 움직여 금색 뇌전 빛을 반짝였다.
흑풍해역 모처에 준비해둔 뇌진과 연계가 닿아 언제든 이곳을 떠날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다.
그때 그의 옆에 이십육이 나타났다.
“벗이 저곳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십육은 먼저 검은 산봉우리로 날아갔다.
그를 따라 동굴 중 하나로 들어간 한립은 통로를 따라 단출히 꾸며져 있는 대청으로 들어갔다. 그 안에는 청석으로 만든 탁자와 의자 그리고 각종 도안들이 반짝이는 검은 병풍이 전부였다.
체구가 큰 사내가 붉은 장포를 입고 병풍 앞에서 등을 돌리고 서있었다. 그를 본 한립의 발걸음이 느려졌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걸음 소리를 들은 홍포 사내가 뒤를 돌아보았고 붉은 용머리 가면에는 ‘삼’ 자가 적혀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바로 교삼이었다.
“맥십일 수사, 교삼 수사십니다. 이분이 바로 수사의 임무를 수락한 분이시죠.”
이십육이 한립에게 소개를 해주었다. 교삼은 먼저 의자에 앉아 손을 뻗고 있었다.
“맥십일 수사, 우선 앉으시지요.”
“그럼 두 분 천천히 이야기 나누시지요. 저는 방해하지 않겠습니다.”
이십육이 교삼을 향해 공수를 하고 대청을 빠져나갔다.
“맥십일 수사, 신경 쓰지 말고 앉으셔도 됩니다. 수사가 관심 있어 하시는 일은 제가 해결해 드릴 테니까요.”
한립이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나가는 이십육을 보고 있자 교삼이 입을 열었다.
“잘 되었군요. 저도 빙빙 돌려 말하지 않겠습니다. 교삼 수사께서는 연신술 후반부 공법을 지니고 계십니까?”
그와 마주 앉은 한립이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가 나가는 이십육의 뒷모습을 쳐다본 것은 그가 말한 것과 달리 교삼과 벗이 아니라 상하관계인 것 같아서였다.
“그렇습니다.”
교삼이 미소를 머금고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그의 손바닥에 회색 옥간이 떠올라 바로 한립 앞으로 날아갔다.
“…….”
한립이 무의식중에 옥간을 받아들고 의아한 눈빛을 보내자 교삼이 손을 펼쳐 살펴보라는 동작을 취했다.
한립은 재빨리 머리를 굴리고 옥간을 이마에 댔다.
강력한 금제로 의식을 바깥으로 방출할 수 없어 옥간을 살피려면 무조건 접촉을 해야 했다. 옥간에 기록된 내용은 앞부분의 몇 글자를 제외하고는 전부 모호하게 가려져 있었다.
앞 글자 몇 개만으로도 한립은 옥간의 내용이 그가 오매불망하던 연신술 후반부 공법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한립은 조심스럽게 금제로 덮여 있는 내용을 훑은 다음 옥간에서 의식을 회수했다. 다년간 금제를 연구해 온 그는 금제를 강제로 뚫으려 들면 옥간이 먼저 파괴될 거라는 것을 직감했다.
손을 저어 잿빛 옥간을 교삼에게 돌려준 한립이 입을 열었다.
“교삼 수사, 거래 조건을 분명히 말씀해 주시지요.”
“그 전에 맥십일 수사께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옥간을 받아 탁자 위에 내려놓은 교삼이 고개를 들었다.
“말씀해 보시지요.”
“연신술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제가 아는 것은 연신술은 선계의 금술이라는 겁니다. 의식의 힘을 강화할 수 있는 대신 이 비술을 수련한 자는 대부분 미쳐 버려서 살육을 일삼고 창생에 위해를 가해 선계의 혼란을 가져오지요. 그래서 선궁에서 누구든 연신술을 익히는 것을 엄금하고 있다 들었습니다.”
교삼이 예상 밖의 질문을 던지자 한립이 침음하다 답했다.
“오, 그것이 다입니까?”
“제가 아는 바는 여기까지입니다. 잘못된 부분이라도 있는지요?”
“그것들은 연신술에 대한 가장 기초적인 지식입니다. 제 짐작이 틀리지 않았다면 맥십일 수사께서는 연신술을 3성까지 익히셨을 거라고 생각되는데 누구에게 전수받으신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전수를 받을 당시 연신술에 대해 들은 바가 없으십니까?”
교삼이 고개를 내저으며 다시 물었다.
“오래전 우연히 연신술 전반부 법결을 구했고 비술에 이렇게 많은 제약이 따르는지 모르고 수련하였을 뿐입니다.”
한립은 영계의 하강 선인이 떠올랐으나 언급하지 않았다.
당시 하강이 연신술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지 않고 그저 연신술 3성 법결을 알려주었을 뿐이었으니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어떤 지도도 받지 않고 홀로 연신술을 익혀 지금의 경지에 이르렀단 말입니까!”
교삼은 충격을 받은 듯 몸을 부르르 떨었고 두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그게 문제가 됩니까?”
“아닙니다, 아니에요. 그저 수사와 같은 기재를 처음 만나보아 탄복하였을 따름입니다.”
미간을 찌푸린 한립의 질문에 교삼이 한립을 위아래로 살피면서 답했다.
“과찬이십니다. 다 운이 따라주어 이렇게 된 것뿐인 것을요.”
“수사께서 연신술에 대해 잘 모르시니 일단 거기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드릴 말씀을 이해하기 어려우실 테니까요.”
“감사히 듣겠습니다.”
연신술에 대해 말해주겠다는 소리에 한립이 호기심을 드러냈다. 그도 연신술의 내력에 대해 관심을 가져온 지 오래였다.
“맥십일 수사께서 말씀하신 내용도 사실입니다. 연신술을 수련하면 여러 가지 폐단이 뒤따르나 의식의 힘을 키우는 효과가 대단해서 오래전 선계에서 명성이 자자했지요. 그러나 연신술이 금술이 된 연유는 수련자가 이성을 잃고 살육을 일삼게 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더 중요한 이유는 연신술이 윤회전에서 유래한 공법이기 때문입니다.”
교삼은 담담한 목소리로 줄줄 설명을 늘어놓다 ‘윤회전’이라는 세 글자를 말할 때는 목소리가 신중해졌다.
“윤회전!”
한립도 깜짝 놀라고 말았다.
“오, 다행히 윤회전에 대해서는 들어 보셨나 보군요!”
“아니요, 그냥 귀동냥으로 윤회전이란 곳이 있다는 이야기만 들어보았습니다. 계속 설명해주시지요.”
반색하는 교삼을 보고 한립은 손을 절레절레 저었다.
“윤회전에 대해 들어보셨으면 각 선역의 선궁과 적대 관계인 것도 분명 아실 겁니다. 오늘날 연신술을 수련하는 이들은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윤회전과 관계가 있기 때문에 그들이 엄히 추살령을 내려 둔 것이고요.”
“적대 관계라는 것까지는 알고 있습니다.”
“알려지기로 연신술은 윤회전의 개파 조사께서 창립하신 공법으로 선계에서 윤회전 수사의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아주 오래전 무슨 이유에서인지 공법의 전반부가 바깥으로 유출되었지만 후반부는 오직 윤회전 만이 지니고 있지요. 전반부 공법이 유출되었기 때문에 윤회전에서는 후반부 공법을 더더욱 엄격히 관리해서 이제는 윤회전 사람이 아니면 절대 전수하고 있지 않습니다.”
교삼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한립을 응시했다. 그와 눈을 마주친 한립이 물었다.
“연신술을 지니고 계신 교삼 수사께서도 당연히 윤회전 분이시겠군요?”
“그러합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교삼을 본 한립은 눈썹을 끌어올렸다. 촉룡도의 부도주이자 무상맹의 주요인사로만 알고 있었는데 갑자기 윤회전 사람이라니 놀라운 일이었다.
다양한 종파의 수사들이 무상맹에 가입해 활동했지만 대부분이 그처럼 일반 수사들이었다.
무상맹 고위층인 교삼이 윤회전 수사라는 소리는 곰곰이 곱씹어볼 가치가 있는 말이었다.
“연신술 후반부 공법은 구하기 아주 어려울 수도 쉬울 수도 있습니다.”
“그 말씀은…….”
“윤회전에 가입하시기만 한다면 옥간은 수사의 것이란 말입니다.”
교삼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한립은 손끝으로 돌 탁자에 놓인 다기를 만지작거리며 침묵했고 교삼은 그가 생각할 시간을 주었다.
그때 걸음 소리가 들리고 시종이 찻잔이 담긴 쟁반을 들고 나타났다.
투명하게 반짝이는 찻잔은 무슨 재질로 만들었는지 고급스러웠고 찻잔에 담긴 차는 향기가 진하지는 않았으나 하얀 김이 올라와 학의 형상을 취하고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허허, 자리만 권하고 아직 차를 내드리지 않아 실례를 범했습니다. 이 차는 윤회전의 백무령차(白霧靈茶)인데 맛이 괜찮습니다. 한 번 드셔보시지요.”
교삼은 쟁반 위의 차를 보고 웃으며 설명했다. 시종은 찻잔을 내려놓고 재빨리 물러났다.
생각할 거리가 많았던 한립은 차에 신경 쓰지 않고 있다가 교삼의 말을 듣고서야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하얀 김은 평범한 수증기가 아니라 농염한 선령기가 스스로 형태를 응결한 것이었다. 차 한 잔에 담긴 선령력이 한 달을 수련해야 얻을 수 있는 양과 맞먹는다는 것을 알아본 한립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건 영차(靈茶)를 넘어서서 선차(仙茶)라 불러도 모자람이 없었다.
그러나 낯선 곳에 와서 아무 것이나 받아마시는 성격이 아니기에 한립은 마음이 동했음에도 찻잔을 건드리지 않았다.
교삼은 그의 신중한 태도에 잔잔히 웃으며 자신의 찻잔을 들어 차를 음미하기 시작했다.
그와 마주 앉은 한립은 차분한 겉모습과 달리 굉장히 고민스러웠다. 촉룡도에서 벌어진 일은 아주 인상 깊었다.
촉룡도의 제1도주 백리염은 태을경을 한 걸음 앞둔 대단한 명망을 갖춘 인물이었음에도 윤회전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다른 금선 도주들의 반란을 겪고 북한선궁에게 억압을 당했다.
호언 노인도 윤회전과 관련이 있는지 백리염을 보호하려다 지금까지 생사불명이었다.
윤회전이라는 신비한 조직에 대해서는 몰라도 북한선궁 그리고 소위 천정이라 불리는 그 배후 세력과 척을 지고 있다는 것은 확실히 알았다.
그의 실력에 감당할 수 없는 강대 세력들이었다. 하지만 윤회전에 가입하지 않아 연신결 후반부 공법을 얻을 수 없다면 광증이 심해지는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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