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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666화 (1,423/2,000)

1666화. 거래

*

한립은 침상에 머리를 대자마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꼬박 하루를 자고 일어난 그는 원기 왕성한 모습으로 침실을 빠져나왔다.

그는 곧장 영초를 확인하러 약재밭으로 달려갔는데 잘 자라고 있어 안심했다. 거원 괴뢰에게 대부분의 녹색 액체를 영초 모두에게 부어 주라고 시켜서인지 모두가 꽤 많이 자라있었다.

‘오래지 않아 수확을 거둘 수 있겠어.’

그는 동부를 한 바퀴 돌아보고 밀실로 가 자리를 잡고 앞으로의 계획을 세워보았다. 당장 해야 할 일들을 마무리 지어 연신술의 나머지 공법을 찾는 일과 금선경지에 이르는 일뿐이었다.

흑풍해역 깊숙이 들어와 있는 그에게는 둘 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흑풍해역을 떠나야 한다는 마음이 들었다.

수백 년 동안 북한선궁의 수배령 때문에 시끌시끌하던 분위기도 많이 가라앉았고 도우과 싸울 때보다도 실력이 크게 늘어서 이제는 해 도인이 나서지 않아도 비슷한 강자를 상대할 수 있었다.

흑풍해역에서 수련하면서 얻은 바도 많았지만 답답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고심하던 한립은 결국 고개를 저어 당장 떠나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

한동안은 바깥의 상황을 지켜보는 게 좋을 듯했다. 무상맹 가면을 꺼내 임무란을 확인한 그의 표정이 확 달라졌다.

연신술을 찾는 임무에 누군가 회신을 해왔던 것이다.

웅.

수결을 맺자 임무를 이룬 글자들이 푸른빛을 머금고 반짝거렸다. 일각이 흐르자 푸른빛이 바깥으로 쏘아져 나와 회색 인영을 이루었다.

피풍의를 입어 전신을 가리고 푸른 고양이 가면을 쓴 상대의 가면 미간에는 ‘십육’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가면 안의 예리한 눈빛이 한립을 훑었다.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한립이 공수를 하고 먼저 인사를 했다.

“그리 예의 차리실 것 없습니다.”

회색 인영의 담담한 목소리는 어딘가 탁했다.

“임무를 수락하셨을 때는 제가 무엇을 원하는지는 알고 계시겠지요?”

“그렇게 돌려 말하실 것도 없습니다. 무상맹에서 온갖 비밀스런 거래가 이루어진다는 것은 서로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연신술의 후반부 공법을 찾고 계시다고요?”

슬쩍 떠보는 한립의 말에 회색 인영이 웃으며 답했다. 이에 한립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그렇다면 저도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수사께 후반부 공법이 있는 것입니까?”

“물론입니다.”

“그렇다면 거래를 하시지요. 대가에 대해서라면 결코 수사를 실망시켜드리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

“허허, 얼마나 대단한 대가를 지불하실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연신술 후반부 공법과 같은 보물을 쉽게 거래할 수 있을 거라 생각지는 않으시겠지요?”

“……무슨 말씀이 하고 싶으신 것입니까?”

회색 인영의 말에 한립이 미간을 좁히다 반문했다.

“정말로 연신술 공법을 얻길 원하시면 1달 후에 이곳에서 만나시지요. 얼굴을 마주보고 이야기하자는 뜻입니다.”

회색 인영은 위치를 알려주고 한립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은 채 연락을 끊었다. 회색빛이 반짝이고 인영이 사라졌다.

인상을 찡그린 한립은 천천히 가면을 벗었다.

잠시 후 흑풍해역 지도가 들어있는 옥간을 꺼내 확인하니 회색 인영이 말한 위치는 흑풍해역 변경이었다.

그는 한참을 고민하다 반나절 만에 결정을 내렸다. 옥간을 거두고 자리에서 일어난 한립은 당장 약재밭으로 향했다.

구역을 나누고 있던 금제들이 풀리며 각종 진법 깃발과 원반들이 돌아오고 푸른빛이 곳곳으로 날아가 각종 영초들을 흙과 함께 떠냈다. 모두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약재밭을 떠날 때는 안이 텅 비어 있었다.

반 시진 후, 섬 위로 날아오른 한립은 손을 뻗어 겹겹이 설치해 놓은 금제마저 분해해 여러 벌의 진법 법기들을 소매 속으로 회수했다.

수백 년간 수련하면서 별탈은 없었으나 오랜 시간 머물렀고 수정 알갱이를 제련하면서 일으킨 천기현상들이 있어서 안전을 위해 안 그래도 거처를 옮기려던 참이었다.

꾸우우!

마지막으로 섬을 돌아보고 떠나려던 한립의 귀에 무언가가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출렁.

물보라가 일고 바다 속에서 하얀 짐승이 고개를 내밀고 꾸우꾸우 울어댔다. 한립은 신형을 날려 저돈수가 있는 해수면 상공으로 내려갔다.

짐승이 그걸 보고 꼬리로 바닷물을 철썩철썩 때리며 신나했다.

“내가 가는 줄 알고 배웅을 나온 것이냐?”

저돈수의 매끈한 머리를 쓰다듬으며 한립이 웃음 지었다. 저돈수는 낑낑 거리면서 머리로 한립의 손바닥을 문질러 자신의 의사를 표현했다.

웃음기가 짙어진 한립이 맑은 빛깔의 단약을 하나 꺼내 던져 주자 저돈수가 얼른 입을 벌려 그것을 삼켰다.

“녀석, 네가 준 묵옥석은 요긴하게 썼다. 이것도 인연이라 할 수 있을 테니 단약은 내 이별 선물이라 해두마.”

한립의 말에 저돈수는 아연한 얼굴로 서운해 하는 티를 팍팍 내었다. 그런 짐승의 머리를 토닥여준 한립은 푸른 빛줄기로 변해 하늘 끝으로 종적을 감추었다.

저돈수는 멍하니 그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다 정신을 차리고 꼬리를 크게 저어 바닷속으로 돌아 들어갔다.

* * *

한 달 후, 흑풍해역 변경.

작은 섬에 푸른 장포를 입은 사내가 내려섰다. 호랑이 가면을 쓴 한립이었다. 어차피 무상맹 사람과 접촉하는 것이라 굳이 용모를 변화하지 않고 가면을 쓴 채 나왔다.

이곳은 흑풍해역의 진정한 변두리로 맑은 하늘에 검은 구름이 안개처럼 떠서 햇살을 막고 있었다.

그는 잠시 검은 구름을 올려다보다 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은은한 푸른빛을 일으켰다. 이곳이 회색 인영이 만나자고 했던 장소였다.

이틀 전에 이곳에 도착해 몰래 숨어 인근 해역까지 꼼꼼하게 수색을 하고서야 모습을 드러낸 차였다.

절세의 금술이 펼쳐져 있을 지도 모르는데 아무나 부른다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한립은 번쩍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나 어딘가를 응시했다.

회색빛이 하늘 끝에서 날아와 섬으로 떨어졌다.

잿빛 장포를 걸친 상대는 십육이라 적힌 고양이 가면을 쓰고 있었고 신형으로 보아 중년 사내로 추정되었다.

한립이 그를 살피는 동안 상대도 한립을 관찰하고 있었다.

“맥십일 수사시겠지요? 저는 이십육(狸十六)이라 합니다. 늦어서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고양이 가면 사내가 포권을 하며 정중하게 사과했다.

“괜찮습니다. 오래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허허, 다행입니다. 괜히 오래 기다리셨으면 더욱 죄송할 뻔 했어요.”

“기왕 도착하셨으니 바로 거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합니다.”

한립은 가면 아래에서 미간을 좁혔다.

상대의 언행이 무상맹을 통해 교신할 때와 달라서 무슨 사기를 치려는 것은 아닌지 더욱 경계하게 되었다.

“물론이지요. 허나 이곳은 이야기를 나누기에 적합하지 않으니 저를 따라 오시지요.”

고개를 끄덕인 이십육은 회색 빛줄기로 변해 전방으로 날아갔다. 한립은 표정이 어두워졌으나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반나절을 날아가는 동안 불만을 토로하지는 않았으나 일정 거리마다 의식을 방출해서 풀 한 포기도 놓치지 않고 살펴보았다.

날아가면 날아갈수록 검은 구름이 짙어지고 놀랄만한 음한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 아래 바다에서도 음기가 스멀스멀 올라와 뼈가 시린 냉기가 전해졌다.

화신기, 합체기 수사도 어쩌지 못하고 얼어 죽을 정도의 냉기였다.

주변을 돌아본 한립은 돌연 둔광을 멈추었다. 이십육이 그것을 감지하고 따라 멈춰 뒤를 돌아보았다.

“맥십일 수사, 왜 그러십니까?”

“이십육(狸十六) 수사, 이만하면 오래 이동을 한 것 같습니다. 대체 어디까지 가야 이야기를 하시기 편할지 모르겠군요. 저는 낯선 사람을 따라 아무 곳이나 가는 성격은 아닙니다만.”

“곧 도착하니 너무 조급해 마십시오. 이 일은 선계의 금술에 관련된 일이니 이곳이 흑풍해역 변두리라 하여도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됩니다. 공법이 우리에게 있는 것을 누군가 알아내면 어딘들 마음 편히 다닐 수 있겠습니까.”

“그런 뜬구름 잡는 이야기라면 그만하시지요! 여기 누가 있다고 우리의 이야기를 훔쳐 듣는다는 말입니까? 이곳에서 말씀을 나누지 않겠다면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한립의 목소리가 냉랭해졌다. 그 말에 이십육(狸十六)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사께서 무슨 걱정을 하시는지는 알겠습니다. 저도 솔직히 말씀 드리지요! 맥십일 수사께서 원하시는 연신술 공법은 제가 아니라 벗이 지니고 있습니다. 지금 전방 어딘가에서 수사를 기다리고 있고요.”

“벗이 지니고 있다고요?”

“그렇습니다. 워낙 중요한 일이라 스스로 나서기 어려워 제가 대신해 수사를 모시고 가는 길이었습니다.”

이십육(狸十六)의 말을 듣고 한립은 말을 아꼈다.

“제가 드린 말에는 한 치의 거짓도 없습니다. 이래도 믿지 못하시겠다면 어쩔 수 없이 이번 거래는 없던 것으로 하시면 됩니다.”

이십육은 두 손을 털며 자신은 상관없다는 듯 말했다.

“……좋습니다. 당신을 따라 가지요. 허나 앞으로 얼마나 멀리, 어디로 가는 지는 말씀해 주셔야겠습니다.”

“이제 다 왔습니다. 이 속도면 한 시진 내외면 도착할 겁니다.”

“…….”

이십육이 안도하는 것을 느낀 한립은 눈을 가늘게 떴다. 상의를 마친 두 사람은 다시 출발했고 반 시진 만에 전방에서 쿠르릉 거리는 굉음 소리를 듣게 되었다.

새까만 바람이 크고 작은 돌풍 기둥을 이루고 앞을 막고 있었는데 작은 것은 집채만 했고 큰 것은 만장 산 같이 우뚝 서있었다.

검은 돌풍이 요동치며 귀곡성과 짐승의 울음소리를 냈다. 웬일인지 그 소리를 듣자 머리가 어지러웠다.

흠칫 놀란 그는 공법을 운용해서야 겨우 마음을 바로 할 수 있었다. 금선과 비슷한 의식의 힘을 지닌 그가 이렇게 동요했다는 것은 큰일이었다.

‘설마 또 연신술 발작이…….’

심장이 철렁하고 있는데 이십육이 그를 돌아보았다.

“낙백량풍을 처음 보시는 겁니까? 위력이 대단해서 준비 없이 들어서면 우리 같은 진선경 수사도 오래 버틸 수 없습니다.”

“여길 지금 들어가자는 소리십니까?”

“그렇습니다. 그리 깊게는 아니고 제가 준비를 다 해왔으니 위험할 일은 없을 겁니다.”

이십육의 말에 한립은 상대가 말한 ‘준비’가 뭔지를 보려고 기다렸다.

이십육은 검은 구슬을 꺼내 들었는데 달걀 크기에 검은 빛을 발산하는 것이 무슨 현묘한 보물처럼 보이기는 했다.

주술소리와 함께 검은 구슬이 두 사람을 충분히 에워쌀 만한 검은 빛덩이를 내뿜자 한립은 귀곡성과 냉기의 영향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다.

“낙백량풍을 차단할 수 있는 보물을 준비해 두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저 한기나 막고 뭐 그런 거지요. 별 것 아닙니다. 자, 안으로 가실까요?”

한립이 검은 구슬을 바라보자 이십육은 길게 설명하고 싶지 않은지 검은 구름이 만연한 곳으로 날아갔다.

푸른빛을 일으킨 한립이 그의 뒤를 바짝 쫓았다.

들어갈수록 바깥에서 보다 더 왕성한 귀곡성이 울려 퍼져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낙백량풍의 정체에 대해 아시는 바가 있습니까? 마치 지옥에서 흘러나온 바람 같군요. 이런 특수한 보물 없이는 도저히 지날 수 없겠고요.”

한립이 지나가는 말로 물었다.

“허허, 저를 너무 띄워주십니다. 낙백량풍의 정체를 아는 이가 누가 있겠습니까? 그저 흑풍해역에 도는 소문에 의하면 음명계와 관련이 있다거나 그곳에서 새어나온 바람이라는 이야기가 있기는 합니다.”

“음명계라는 곳이 실재한단 말입니까?”

“뭐, 떠도는 이야기니까 실재하는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지요. 그저 소문이 그렇다는 겁니다.”

“낙백량풍은 규모가 상당해서 가로지르기는 불가능하고 흑풍해역과 외부는 오로지 흑풍도의 전송진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들었습니다. 금선경 수사도 통과하는 게 불가능한지요?”

“제가 알기로 많은 실력자들이 시도해보았지만 성공한 사례는 없다합니다. 몇 해 전에도 금선 선배 한 분이 낙백량풍을 가로지르려다 장장 수십 년을 갇혀 있다 돌아 나왔다고 하더군요. 깊이 들어갈수록 위력이 세져서 금선의 의식으로도 감당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금선경 수사도 지나갈 수 없다니 위력이 상상 이상이로군요.”

한립의 눈빛이 번득였다.

시간법칙도 깨우치고 해 도인도 곁에 있으니 가능하면 낙백량풍을 통과해서 외부로 나갈 생각도 해보았는데 그게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닌 것 같았다.

“음, 어쨌든 아예 막혀 있는 길은 아니니 태을옥선 급의 존재면 지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저 북한선역에 그런 존재가 있는지 모를 일이지만요.”

이십육은 탄식하듯 말했다. 두 사람은 그 뒤로 아무 말 없이 나아갔다. 어째서인지 상당히 안으로 들어왔는데 낙백량풍의 기세가 수그러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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