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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664화 (1,421/2,000)

1664화. 인과연(因果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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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덩이는 이원구의 머리 안에서 펑! 하고 갈라져 깨알 같은 문자로 변해 떠다녔다. 그 시작은 대연결(大衍訣)이라는 글자였다.

눈을 부릅뜬 이원구는 사지가 경직되어 바닥으로 쓰러졌다. 빛을 날려 소년을 받쳐 든 한립은 절 안으로 옮기려다 멈칫했다.

“이 몸은…….”

아까는 자세히 살피지 않아 몰랐는데 이원구의 몸은 기이한 체질을 타고났으나 아직 각성하지 못한 상태였다.

찬찬히 소년의 몸을 살펴보던 한립의 눈빛이 반짝였다.

“나와 이렇게 비슷한 여건을 지닌 너를 찾아낸 것도 인연이겠지. 한 번 더 도와주고 우리의 인연을 마무리 짓자구나.”

그의 손끝에서 빛덩이가 하나 더 날아들었다. 둘로 나뉜 빛덩이 중 하나가 펑! 터져 자잘한 문자들로 변했다.

그 시작은 탁천마공(托天魔功)이란 글자였다.

한립이 인계에 있을 때 만호자에게서 얻은 공법으로, 당시 만호자에게 전승할 사람을 찾아주겠다고 했으나 이제까지 적합한 인물을 만나지 못해 미뤄두고 있었다.

그런데 이원구의 특이체질이 마침 탁천마공을 익히기에 적합했다.

또 다른 빛덩이는 수축해서 소년의 몸에 숨어들었다. 영계에 있을 당시 수련했던 법성진마공으로 탁천마공과 맥을 같이 하는 공법이었다.

이원구가 이후 화신기에 이를 수 있다면 공법 구결의 봉인이 풀려 익힐 수 있을 것이다.

허나 수도의 길은 워낙 변화무쌍해서 두 공법을 남겨 주기는 했으나 이원구가 화신기에 이를 때까지 살아남으리라 보장할 수는 없었다.

물론 그것까지 한립이 신경 쓸 이유는 없었다.

한립은 소년을 보면서 감탄했다. 자신과 소년은 사실 처음 본 사이였으나 상대가 스승을 진심으로 아낀다는 것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그는 이원구를 절간 안으로 들여보내 주고 먼 곳을 응시하며 의식을 방출했다.

수십 리의 천지영기가 요동치면서 하얀 구름처럼 뭉게뭉게 뭉치고 있었다.

이전에 배워둔 의식의 힘으로 강제로 천지영기를 동원하는 비술을 발동한 것이었다. 의식 소모가 커도 이 몸으로는 이렇게 하지 않고 달리 날아갈 방도가 없었다.

하얀 천지영기의 구름이 하얀 빛줄기로 뭉쳐 그를 품고 빠르게 질주했다. 발아래로 산봉우리들이 쉭쉭 지나가고 있었다.

이원구보다 중요한 일은 이곳이 어디기에 그가 오게 된 것인지 알아내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우연처럼 보여도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계속해서 의식을 펼쳐 아래쪽을 살펴본 한립은 곧 미간을 찌푸렸다. 산봉우리들이 하나같이 평범해서 별다른 점을 찾을 수 없었다.

고개를 들어 좌측을 보니 줄곧 그를 따라던 진언보륜 허상의 도문이 절반 가까지 꺼져 있었다.

한립은 수결을 맺으며 하얀 구름을 더욱 농축해서 둔술의 속도를 높였다.

얼마 가지 않아 뭔가를 발견한 그는 아래쪽 산골짜기로 떨어져 내렸다. 산골짜기 깊은 곳의 절벽에 커다란 보라색 꽃이 피어 있었다.

세숫대야 크기의 커다란 꽃은 꽃잎이 크고 두꺼웠으며 보랏빛 색깔이 아주 고왔다.

꽃잎에 옅은 붉은 색 촉수와 같은 것들이 자라나 주먹 크기의 물방울을 맺고 있었는데 무척 달콤한 향내가 풍겼다.

번득!

하얀 구름 덩어리가 보라색 꽃 앞에 멈추었다. 한립이 놀란 눈빛으로 꽃을 바라보았다.

영기의 빛을 반짝이는 커다란 꽃은 혈정우와 유사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 손가락을 튕겨 가벼운 바람을 날려 보냈다.

이에 부르를 떨린 보라색 꽃잎의 촉수들이 번개처럼 튀어나와 그물을 이루고 그를 덮치려 들었다.

한립의 수행에 그런 수에 당할 리 없었다.

쉭쉭!

하얀 구름이 뒤로 물러나며 촉수들이 허탕을 치자 마구 허공을 갈기는 모습을 보니 무척 열을 받은 듯했다.

한동안 난리를 치던 촉수들은 다시 수축해 꽃잎으로 돌아갔고 보라색 꽃은 움직임을 멈추었다.

‘기이하기는 해도 보기 드문 영초에 불과하다.’

한립은 그곳에 오래 머물지 않고 산골짜기를 빠져나와 전방으로 날아갔다. 그의 눈에 시간이 지날수록 놀라움이 짙어졌다.

커다란 보라색 꽃이 산맥 곳곳 지천에 널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수시로 한두 송이가 발견되었는데 아무도 꺾어가는 이가 없었다.

한립은 의혹을 품고 수결을 맺어 하얀 구름의 속도를 더 높였다. 보륜 허상의 도문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얼마 뒤 표정이 달라진 그가 희색을 드러내며 어느 산길로 내려갔다.

산길 옆으로는 누각과 정자 같은 건물들이 들어서 금제의 빛을 반짝였고 몇몇 둔광들이 곳곳에서 날아오르고 있었다. 능운자 도사의 기억에 따르면 이곳이 바로 철수문이었다.

그는 결정을 내리고 주문을 외웠다.

의식의 힘이 벌떼처럼 빠져나가 무형의 파동을 이루고 그의 몸을 겹겹이 덮어 주변의 천지영기를 불러들였다.

놀랍게도 그는 몸이 투명하게 변해 종문 내의 광장으로 내려섰다.

능운자 도사의 기억을 더듬어 오른쪽 산봉우리를 돌아보자 푸른 누각 하나가 다른 건물들보다 더 밝게 반짝였다.

그곳은 철수문에서 각종 공법과 경전들을 보관하는 장전각(藏典閣)이었다. 한립은 푸른 누각 앞에 멈춰 미간을 좁혔다.

누각 주위의 금제는 그리 고명하지 않아 원래 그였으면 소리 없이 잠입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법력도 거의 없고 몸도 허약한 늙은 도사라 금제를 파훼하기가 어려웠다.

바로 이때 멀리서 파공음이 들리고 누군가 장전각 앞에 내려섰다. 둔광이 걷히고 나타난 것은 머리를 산발한 결단 초기 중년 사내였다.

이목구비가 정갈하고 눈썹이 위로 쭉 솟은 모양이 꽤 오만한 인상을 주었다.

한립은 그를 보고 흠칫 놀랐다. 그의 몸이 이유 없이 부들부들 떨리면서 원망과 분노가 샘솟았기 때문이다.

산발 사내는 바로 능운자 도사를 공격해서 중상을 입힌 또 다른 장로의 아들이었다. 능운자 도사는 죽었으나 육체에 남은 일말의 의식이 상대를 보고 복수심이 불타오른 것이다.

“걱정 말거라, 내 너의 몸을 빌려 사용했으니 그 값은 치를 것이다.”

한립은 서늘하게 산발 사내를 훑으며 속으로 냉소를 흘렸다.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진 산발 사내가 서둘러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텅 빈 허공뿐이었다.

“에잇, 왜 이리 기분이 이상한 거지!”

그가 인상을 찡그리고 투덜거리며 푸른 부적을 금제 안쪽으로 쏘아 보냈다.

“어서 금제를 여시오! 장문인의 명을 받아 찾아갈 물건이 있습니다.”

금제 속에서 나타난 회색 머리카락의 노인은 일순 멸시하는 눈빛이 스쳤으나 겉으로는 온화하게 미소를 띠고 답했다.

“아, 왕 집사께서 오셨군요.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금제를 개방하겠습니다.”

영패를 꺼낸 회색 머리 노인이 금제를 비추어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어서어서 서두르지 않고 뭐 하는 겁니까!”

산발 사내는 괜히 회색 머리 노인을 타박하고 신형을 날려 안으로 들어갔고 노인은 썩 좋지 않은 표정으로 영패를 저어 금제를 원래대로 돌려놓았다.

아무도 금제의 균열이 봉합되기 전에 투명한 인영이 한 명 더 들어간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투명한 인영은 능운자 도사의 몸에 빙의한 한립이었다.

그는 회색 머리 노인과 산발 사내를 쫓지 않고 금제로 들어선 뒤로 의식을 퍼트려 보곤 얼굴에 미소가 어려 있었다.

멀리서 산발 사내가 성큼성큼 먼저 누각 문 앞에 도착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때 한립이 홱! 하고 고개를 돌려 산발 사내를 향해 미간에서 수정빛을 뿜었다.

슉!

투명하게 반짝이는 작은 검 허상이 그의 미간을 빠져나가 순간이동을 하듯 수백 장 밖의 산발 사내의 뒤통수로 쏘아져 들어갔다.

모든 과정이 한 호흡 만에 벌어졌고 아무런 기척도 없어 누구도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알지 못했다.

털썩.

산발 사내는 문지방을 넘으려 오른발을 들어 올리다 느닷없이 두 눈이 불룩 튀어나오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왕 집사, 괜찮으십니까!”

당황한 회색 머리 노인이 다가와 신속히 산발 사내를 일으켜 세우려 하다 안색이 급변했다.

산발 사내는 이미 숨을 쉬고 있지 않았다.

노인은 놀란 마음을 가라앉히고 의식을 방출해 금제를 중심으로 누각 내부를 샅샅이 뒤졌지만 어떤 이상도 발견할 수 없었다.

“여봐라! 거기 누구 없느냐!”

회색 머리 노인의 고함에 장전각 내에서 몇 명의 수사들이 달려왔다. 상황을 본 그들도 대경실색한 얼굴로 난리법석을 떨기 시작했다.

한립은 그들이 그러든 말든 개의치 않고 수사들을 지나쳐 장전각 안으로 들어갔다.

총 3층으로 이루어진 건물의 1층과 2층에는 인문지리 서적, 여행기 같은 잡다한 경전들이 대부분이어서 따로 지키고 있는 사람이나 설치된 금제도 없었다.

공법 경전이 보관된 3층만이 꽤 정교한 금제로 둘러싸여 있었다. 한립은 그런 공법 경전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고 1, 2층의 경전들을 빠르게 훑기 시작했다.

바깥에서 일어난 변고에 수사들이란 수사들은 죄다 뛰어나가서 누구를 마주칠까 봐 걱정할 이유도 없었다.

서책을 읽어나갈 때마다 목형대륙에 대해 많은 사실을 알 수 있었지만 딱히 도움은 되지 않았다.

좌측의 진언보륜 허상은 이미 시간도문이 4분의 1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시간도문이 전부 꺼지면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몰랐으나 이전의 경험으로 대충 짐작은 할 수 있었다.

한참 만에 그가 책장을 넘기던 동작을 멈추고 누렇게 변한 서책 하나를 오래도록 응시했다.

대륙을 유람하고 다니던 수사가 남겨 놓은 시답잖은 이야기들이었는데 삽화 하나가 그의 시선을 빼앗았다.

머리카락과 눈썹이 없는 금색 소인이 머리에는 기다란 금색 촉수 두 줄기가 자라나 있고, 온몸에는 갈고리 형태의 날카로운 가시들이 비죽비죽 솟아있는 그림이었다.

이전의 서금충왕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이날 금혁산맥(金焱山脈) 인근을 돌아다니다 놀라운 전투를 목격했다. 만 리에 이르는 산맥이 무너져 내리고 대지가 내려앉는 선인들의 전투라 급히 둔광의 방향을 돌려 겨우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이 요충이 싸우고 있던 두 선인 중 하나는 견문이 얕아 어떤 존재인지 정체를 알아볼 수…….”

여기까지 읽자 한립의 눈이 밝아졌다. 이 금색 곤충은 그가 알던 서금충왕일까 아니면 또 다른 서금충왕일까?

북한선역에 이르러 도우와 마주친 뒤 잃어버린 서금충왕의 소식을 이곳에서 보게 되다니 의외였다. 관련 기록을 외우고 책의 뒷부분도 읽어보았으나 서금충에 대한 내용은 없었다.

실망스러웠지만 그는 쉬지 않고 다음 권을 뽑아 들어 살폈다.

몇 장을 넘겨보다 보라색 꽃에 대한 설명을 발견했다.

“서령화(噬靈花), 향기로 생물들을 유인해 잡아먹는 육식 식물. 단약을 제련하면 함유한 기혈을 약성으로 이용할 수 있지만 기이한 시독(尸毒)을 지니고 있어 그것을 제거하기가 쉽지 않다.”

보라색 커다란 꽃이 영기가 넘쳐흐름에도 아무도 채취하는 사람이 없는 이유가 있었다. 그가 다른 서책을 펼쳐 보려는데 위쪽에서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간도문이 전부 꺼져 밝게 빛나며 점점 실체화되고 있었다. 놀란 한립은 얼른 바깥을 살폈다.

그의 귀에 들려오는 소리를 바깥에서는 전혀 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게다가 진언보륜이 쾌속으로 회전하면서 내뿜는 기세도 주변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별안간 검은빛이 고리 중심에서 흘러나와 진언보륜을 잠식했다.

휘이잉!

회전하는 진언보륜을 따라 검은 소용돌이가 이전에 보았던 장벽을 만들어 냈다. 한립이 무슨 반응을 보이기 전에 강대한 흡인력이 그의 의식을 몸에서 끄집어냈다.

극통을 느낀 한립은 무력하게 몸에서 빠져나와 검은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

그가 마지막에 본 것은 능운자의 육신이 비술의 영향에서 벗어나 모습을 드러내었다가 붕괴해 빛으로 흩어지고 있는 모습이었다.

한립의 시야가 까맣게 변하면서 의식이 흐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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