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663화 (1,420/2,000)
  • 1663화. 스승과 제자

    *

    쿠르르…….

    장천병과 진언보륜 간의 호응으로 강렬한 파동이 퍼져 동부를 뒤흔들었다. 진실안이 맹렬히 눈을 뜨고 수정 실 한 줄기를 쏘아냈는데 바로 시간정사였다.

    수정 실은 번득이며 장천병 안으로 들어갔다.

    후웅!

    빠르게 커져서 맷돌 크기가 된 장천병 표면에 수많은 녹색 주술문자들이 밤하늘의 별처럼 떠올랐다.

    녹색 주술문자들은 표면에서 떨어져 나와 병 속으로 몰려들어 녹색 구름을 이루고 출렁이고 있었다. 녹색 구름 안에서 희미하게 소용돌이 모양으로 변하더니, 특수한 기운 파동이 흘러나왔다.

    그리 강한 기운이 아니었는데도 장천병 인근 허공은 눈에 보일 정도로 왜곡되고 있었다. 한립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 현상을 관찰했다.

    파앗.

    장천병 안의 녹색 구름이 굵은 빛기둥으로 변해 허공을 찢었다.

    쿠르릉!

    찢겨나간 허공에 이전에 보았던 수정 장벽이 만들어져 있었다. 한립의 눈에 실망한 기색이 스쳤다.

    수정 장벽이라면 이전에 보았던 것이었다. 대단한 신통이기는 했지만 별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의 표정이 달라졌다.

    수정 벽에 녹색 소용돌이 무늬가 생겨났기 때문이다.

    우웅!

    수정 벽 위로 광채가 흐르면서 어떤 풍경들이 스쳐 지나갔고 소용돌이 무늬가 그 광채를 마구 빨아들여 크기를 키우고 있었다.

    얼굴만 하던 소용돌이가 순식간에 집채만 하게 커져 있었다.

    쿠쿵!

    기이한 흡입력이 소용돌이에서 흘러나와 한립의 몸을 뒤덮었다.

    ‘이건!’

    그의 몸은 어떤 영향도 받지 않았으나 머릿속의 의식의 힘이 빨려 들어갔다.

    순식간에 극심한 두통을 느낀 한립은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정신을 잃었고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알 수 없었다.

    차차 의식을 회복한 한립의 눈에 낡은 천장이 들어왔다.

    거미줄이 잔뜩 낀 대들보와 군데군데 구멍이 뚫린 지붕 탓에 하늘을 볼 수 있었다.

    귓가에서 어떤 소리가 수시로 멀리서 또 가까이에서 시끄럽게 들려오고 있었다. 한립은 온몸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아파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도 어려웠다.

    힘겹게 고개를 옆으로 비틀자 그제야 자신이 처한 상황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낡은 절간 같은 곳에 놓인 침상에 누워있었고 옆에는 노란 옷을 입은 소년이 무릎을 꿇고 앉아 고개를 숙이고 훌쩍이고 있었다.

    은은한 금빛의 피부에 짙은 눈썹과 큰 눈을 가진 소년이었다. 한립은 굉장히 당황스러웠다.

    ‘여긴 어디지? 밀실 안에서 장천병을 시험해 보고 있었는데? 어쩌다 이런 낯선 곳에?’

    밀려드는 생각에 머리가 쪼개질 것 같은 극통이 찾아들어 그가 머리를 부여잡고 신음했다.

    다행히 고통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이에 한 시름을 놓은 한립은 곧 경악스러운 경험을 했다.

    찰나의 순간 완전하지는 않고 단편적인 기억들 이었지만, 낯선 기억들이 그의 머릿속에 흘러들어 있었다.

    침상 옆의 소년은 한립이 낸 소리를 들었는지 고개를 들어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을 크게 떴다.

    “스, 스승님? 깨어나신 거예요?”

    “스승…….”

    한립은 그 말에 멈칫했다.

    ‘내가 언제 저런 제자를 두었단 말인가?’

    하지만 얼굴을 보고 있으니 묘하게 낯이 익었다.

    “스승님께서는 복이 많은 분이셔서 절대 이렇게 돌아가시지 않을 줄 알았습니다. 제가 대사께 부탁해 구해온 용단화(龍胆花) 두 송이를 달이고 있으니 얼른 가져올게요.”

    소년은 눈물을 쓱쓱 닦아내더니 서둘러 일어나 방 밖으로 나갔다. 한립은 멍하니 소년이 떠나는 것을 지켜보다 고개를 숙여 자신의 몸을 쳐다보았다.

    순간적으로 가슴이 철렁했다. 빼빼 마른 몸에 푸른 도포를 걸친 그는 마치 늙은 나뭇가지 같았다.

    ‘이게 어찌 된 일이지? 어쩌다 이렇게 나이가 들어 버린 것이야? 게다가 여긴 어디고 저 소년은 누구란 말인가!’

    수많은 의문이 샘솟았다.

    이해할 수 없는 것뿐이었지만 잠시 두고 봐야 할 듯했다. 아픔이 많이 가신 한립은 침상의 난간을 잡고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의식을 이용해 몸 상태를 살피고 미간을 좁혔다. 지금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이 늙은 신체는 절대 그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밖에 이 몸의 오장육부는 심각한 내상을 입고 극독에 중독되어 있었다. 이전의 수행이면 별 것 아닌 상처였으나 현재의 몸은 축기 후기의 수행이라 내상과 독을 억누를 수 없었다.

    죽을 때를 받아둔 몸이란 소리였다.

    쓴웃음을 지은 한립은 호흡을 고른 다음 손가락을 튕겨 몸에 얼마 남지 않은 법력을 일으켰다.

    촤릇.

    허공에 물방울이 뭉쳐 작은 거울을 만들고 하얀 수염을 기른 늙은 도사의 모습을 비추었다.

    피식 웃으며 물방울 거울을 흩어버린 한립은 생각에 잠겼다. 두통이 가시고 이전 기억들을 거의 찾을 수 있었다.

    시간법칙의 실과 진언보륜 그리고 장천병이 서로 공명을 하더니 그의 혼백이 수정 장벽의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와 이곳까지 이른 것이었다.

    “모종의 환술 속에 빠져든 것인가…….”

    이런 추측이 들자 마음이 훨씬 편해졌다. 고개를 움직여 주위를 살펴도 모든 것이 생생해서 전혀 환술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환술이 아니라면, 여긴 대체…….”

    한립은 머릿속에 생긴 기억의 파편들을 뒤져보았다. 기억은 분명 하얀 수염 노도사의 것이었다.

    노도사의 이름은 능운자였고 방금 방을 나선 황의 소년은 그의 하나뿐인 제자 이원구였다. 능운자는 어떤 영초를 발견했다가 누군가에게 중상을 입고 달아나 얼마 전 이곳에서 숨을 거두었다.

    한립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어쩌다가 그의 혼백이 죽은 자의 몸에 빙의해서 깨어났냐는 것이었다.

    “음?”

    갑자기 눈을 부릅뜬 그가 왼쪽을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아주 흐릿해서 있는 듯 없는 듯한 금색 고리가 있었다. 금색 고리는 그의 진언보륜으로 360개 시간도문이 미세하게 반짝이는 중이었다.

    이미 스물몇 개의 시간도문이 암담해진 고리는 시간이 흐를수록 하나씩 빛이 꺼지고 있었다. 한립은 무언가 알 것 같기도 했지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타탁.

    이원구가 빠른 걸음으로 돌아와 검은 탕약이 담긴 그릇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꽃향기가 나는 약이었다.

    “스승님, 이걸 좀 드셔보세요.”

    그릇을 내미는 이원구의 말에 한립이 약탕을 살폈다.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영기의 파동이 제법이라 축기기 수사가 구하기에는 귀한 약재가 분명했다.

    “거기 내려놓거라. 이따가 마시마.”

    한립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승님, 부상이 심하신데 더 쉬시지 않고요.”

    깜짝 놀란 이원구가 말리려 들었다.

    “내 몸은 내가 잘 아니 걱정할 것 없다.”

    손을 내저은 한립은 몸을 잠시 움직여 보다 바깥으로 걸어 나갔다. 시간이 지나 이 몸에 어느 정도 적응되어 있었다.

    이원구는 왠지 스승의 말과 행동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으나 그릇을 내려놓고 그 뒤를 쫓아나갔다.

    낡은 절간을 나서자 한립은 그곳이 산맥이 굽어다 보이는 상당히 경치 좋은 어느 산 정상에 지어져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영맥이 별로라 수시로 짐승의 울부짖음이 들려오는 것 외에 천지영기는 희박하기 짝이 없었다.

    한립은 정신을 집중해서 의식을 퍼트렸다.

    법력은 빈약해도 방대한 의식으로 수천 리 정도는 살필 수 있었는데 수천 리 전부가 다 산맥의 일부라 여기가 어딘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스승님, 괜찮으세요?”

    “원구야, 이곳이 어디더냐?”

    “스, 스승님! 이곳은 저희가 줄곧 수련을 해오던 목란산맥(木蘭山脈)입니다. 갑자기 왜 그런 걸 물으세요?”

    “잠에서 깨어나 머리가 복잡하구나. 아무래도 머리를 다쳐 그런 듯하구나.”

    “아…….”

    한립의 대답에 소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큰일은 아닐 것이니 너무 걱정은 말거라. 그보다 목란산맥은 어느 대륙 어느 선역에 위치한 곳이더냐?”

    “목란산맥은 목형대륙(木荊大陸), 금원선역(金源仙域)에 있습니다.”

    “금원선역…….”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는데 북한선역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해졌다. 그런데 그의 의식이 놀랍게도 이렇게 멀리까지 이동하다니!

    깜짝 놀란 한립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을 반짝였다.

    고개를 들어 왼쪽을 살피니 그를 따라 나온 진언보륜 허상의 도문이 이미 백 개 가까이 꺼져 있었다.

    “스승님, 일단 들어가셔서 푹 쉬세요. 상처만 다 나으시면 우리 함께 그 나쁜 놈들에게 복수하러 가요!”

    이원구가 붉게 충혈된 눈으로 이를 악물고 말했다.

    그와 능운자 도사는 철수문(鐵獸門)이라는 목란산맥에 있는 종문의 수사였다.

    능운자는 철수문 장로의 아들이었으나 자질이 떨어져 나이가 먹도록 결단기에 이르지 못해 종문 내에서 무시를 받았다. 그리고 이원구는 그가 바깥에서 주워 데리고 온 갓난아이를 제자로 들인 것이었다.

    능운자는 자신의 자질이 부족함을 알고 모든 수련 자원을 이원구에게 내주었지만, 그 역시 재능이 뛰어나지 못해서 아직 연기기 언저리를 맴돌고 있었다.

    두 사람은 스승과 제자이면서 부자지간과 같은 사이였다.

    능운자의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는 무시를 당하면서도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었는데 몇 해 전 그의 아버지가 강적과 싸우다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기댈 곳을 잃은 능운자와 이원구는 모든 수련 자원을 빼앗기고 아예 종문에서 쫓겨나 산수로 살아가고 있었다.

    자질이 부족한 이원구는 피나는 수련 끝에 최근 연기기 최고봉에 이르러 축기기 돌파를 앞두고 있었다.

    그와 스승은 경지를 뛰어넘을 때 도움이 되는 영초를 찾아서 몇 달 만에 그곳을 지키는 요수를 죽이다가 깊은 상처를 입고 말았다.

    바로 그때 철수문 수사들이 도착했고, 하필 무리를 이끄는 우두머리가 그들과 척을 진 또 다른 장로의 아들이었다.

    철수문 수사들은 다짜고짜 그들이 손에 넣은 영초를 빼앗으려 들었다. 당연히 능운자 도사는 영초를 빼앗기지 않으려 했고 극심한 중상을 입었다.

    당시 영둔부(影遁符) 한 장을 지니고 있어서 급히 빠져나오지 못했더라면 그들은 그곳에서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한립은 능운자의 기억을 살펴보다 두 사람의 상황을 알고 탄식했다.

    “수사의 삶이란 그런 것이다. 강자는 살아남고 약자는 죽는 법이지! 우리의 수행으로 그들과 맞서려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예…….”

    한립의 충고에 이원구가 고개를 숙였다. 의식으로 그런 소년을 훑어본 한립의 눈빛이 흔들렸다.

    뜻밖에도 소년은 어릴 적 그처럼 금속 속성이 빠진 오행속성을 두루 갖춘 사영근(四靈根) 수사였다. 그러니 아무리 열심히 수련해도 수행을 쌓는 속도가 느릴 수밖에!

    거기다 의식의 힘은 상대적으로 강해서 보면 볼수록 자신의 옛 모습이 생각났다. 이걸 우연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운명의 안배라고 해야 할지 말문이 막혀 왔다.

    “원구야, 그간 스승이 네게 도움은 주지 못하고 세상을 떠돌며 어렵게 살게 하였구나……. 내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네게 비술 한 가지를 전수해 주려 한다. 앞으로 열심히 익혀서 너에 대한 내 기대를 저버리지 말거라.”

    마음을 정한 한립은 말문을 뗐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스승님은 분명히 오래오래 사실 겁니다. 저는 비술이고 뭐고 다 필요 없으니 오래만 살아계셔 주세요.”

    깜짝 놀란 이원구가 손을 내저었다.

    “수사가 대도를 수행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하늘을 거스르는 짓이다만, 내 명이 다해 하늘이 더는 이를 용납지 않으니 어찌할 수 있겠느냐! 네가 내게 한 약속을 지켜 오늘의 한을 풀어 주려면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야 할 것이다.”

    얼굴을 굳힌 한립은 엄히 말했고, 이원구도 더는 거절하지 못했다. 한립은 곧바로 손을 뻗어 한 줄기 빛을 소년의 머릿속으로 쏘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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