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2화. 복용
*
한립이 우두커니 서서 말이 없자 해 도인도 그 앞에 떠서 침묵을 지켰다.
한참 후, 한립은 푸른 호랑이 가면을 불러냈다.
“…….”
잠시 가면을 바라보던 그는 곧바로 해 도인을 불러들이고 푸른 빛줄기로 날아올랐다.
며칠 뒤.
한립의 동부가 있는 상공에 흐릿한 그림자가 번득 나타났다. 두말할 것도 없이 한립이었다.
그는 섬에 설치해 둔 금제가 발동된 흔적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마음을 놓았다. 누군가 이곳을 알아내지는 못한 듯했다.
빠르게 금제를 통과해 안으로 들어간 그는 동부를 둘러보고 바로 밀실로 들어갔다.
파앗.
밀실 중앙에 선 그가 소매를 펄럭여 옅은 노란색 보호막을 펼쳤다.
그제야 푸른 호랑이 가면을 꺼내 쓴 한립은 무상맹 거래 화면을 띄워 임무를 발표하려다 멈칫했다.
무상맹 내에서 가면을 통해 누군가를 찾아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지만 호랑이 가면을 이용한 것도 꽤 되었으니 안전을 위해 기회가 되면 새로운 가면으로 바꾸는 것이 나았다.
생각을 마친 그는 연신술 후반부 공법을 찾는 임무를 등록했다.
연신술은 선계의 금술에 속했기에 직접적으로 연신술을 찾는다고 쓰지 않고 의식을 증폭시키는 데 도움 되는 공법을 찾는다고 서술했다.
연신술을 익혀 본 자이거나 이에 대해 알고 있는 자라면 한눈에 연신술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알아볼 것이다.
그는 보수를 아주 높게 걸어 놓고는 가면을 벗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처지에 무상맹을 통하지 않고는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지금 당장 흑풍해역을 벗어나는 것도 그에게는 모험이었다.
막 무상맹에 가입했을 때는 적잖은 기쁨을 주었는데 수행이 높아지다 보니 그가 필요로 하는 것들도 구하기 어려워져서 이전처럼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예를 들어 도단의 남은 재료들을 구하는데도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번에는 실망시키지 말아야 할 텐데.’
한립은 고개를 저으며 눈을 감고 연신술을 운용해 보았다. 방대한 의식의 힘이 의지대로 움직였다.
머리가 맑아지면서 어떤 불편함이나 충돌도 느껴지지 않아 이전의 발작이 꿈처럼 느껴졌다. 의식이 정상으로 돌아온 것에 안도한 그는 금색 부적들이 붙어 있는 푸른 옥함을 꺼내 들었다.
부적으로 봉인을 해두어도 희미하게 법칙 파동이 느껴졌다. 그 안에 든 것은 그가 천신만고 끝에 제련에 성공한 시간도단이었다.
옥함을 보던 그는 그것을 옆에 내려놓고 앉아 눈을 감았다.
3일 후, 눈을 뜬 그는 선령력이나 의식의 힘이 충만하게 차올라 있었다. 그의 소매 속에서 금색 뇌전 빛이 번득 빠져나와 해 도인으로 변했다.
“해 형, 이곳이 외지기는 해도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호법을 서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한립의 말에 해 도인은 고개를 끄덕이고 허공으로 스며들어 사라졌다.
밀실에 푸른 주술문자가 어린 두꺼운 보호막이 펼쳐지자 그는 옥함을 들어 올려 부적을 떼어냈다. 저절로 뚜껑이 열린 옥함 안에는 금색 도단이 들어 있었다.
손가락으로 도단을 집어 세밀하게 살펴보던 그는 거침없이 그것을 입에 집어넣었다.
다음 순간, 얼굴에 고통스러운 표정이 떠오르며 그의 몸에 금빛이 만발했다.
촤르릇!
진언보륜이 허공에 떠올라 눈부신 광채를 뿜으며 회전했고 360개의 시간도문들이 평소보다 훨씬 밝은 빛을 머금었다. 동시에 한립의 몸에 금빛 도문이 떠올랐다.
바로 도단 표면의 도문이었다.
몇 호흡 사이 금빛 광채가 번득이고 두 번째 도문이 떠올랐다.
화아아앗!
두 도문은 경쟁하듯 화려한 빛을 내뿜으며 한립의 전신을 금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휘황찬란한 빛 속에 꿈틀거리는 주술문자들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법칙의 힘을 일렁였다.
금빛 주술문자 속에 잠긴 한립은 두 눈을 꼭 감고 수시로 수결을 바꾸어가며 정신을 집중했다.
그렇게 5년이란 시간이 지나갔다.
한립의 동부가 위치한 섬은 여전히 금제로 둘러싸여 있어 누군가 지나가도 그곳에 섬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없었다.
이른 아침, 평온하던 해수면에 갑자기 물결이 일더니 섬 쪽으로 가까워졌다.
촤앗!
물보라 속에서 몸을 드러낸 하얀 짐승은 섬 주변을 배회했다. 백옥을 조각한 듯 새하얀 몸을 지닌 요수는 한립과 일면식이 있는 저돈수였다.
화신기 수행을 철저히 굳힌 그는 8개의 다리를 매끄러운 노처럼 저어 바닷속에서 누구보다 빠르게 이동할 수 있었다.
한립의 도움으로 단번에 화신기에 이른 뒤 줄곧 거처에서 폐관 수련을 해왔는데 얼마 전에 수행을 안정시키고 다시 한립을 만나기 위해 찾아온 길이었다.
저돈수는 그리 강력한 요수는 아니었지만 천성적으로 영기의 파동에 민감해서 평소에 이런저런 광석과 재료들을 모아두는 것을 좋아했다.
이번에 오랜 세월 소장해 두었던 물건들을 모조리 들고나온 이유는 간단했다. 인족 수사에게 보상을 받기를 원해서였다.
섬을 한 바퀴 돌았지만 앞을 무형의 장벽이 막아 더는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게 막고 있었다. 그것은 부드러우면서도 건드리면 큰일이 날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장벽이었다.
이에 짐승은 함부로 장벽을 건드리지 않았다. 인족 수사가 신비한 술수를 부려 놓았을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쿠르르.
저돈수가 섬을 바라보다 꼬리를 저어 떠나려 할 때, 엄청난 위압감을 지닌 기운이 인근 해역을 뒤덮는 것을 느꼈다.
몸을 떤 짐승은 전율을 느끼면서 꼼짝하지 못했다. 인근의 천지영기가 혼란스러워지더니 크고 작은 금빛 소용돌이를 이루었다.
사람 머리통만 한 작은 것부터 밭떼기처럼 큰 것까지 수많은 소용돌이가 금색 주술문자를 품고 해역을 뒤덮었다.
소용돌이들이 모여 금빛 구름이 가득해 보였기에 이전에 도단을 제련하며 겪은 단겁과 비슷하면서도 중압감이 더 심했다.
강렬한 법칙의 힘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소용돌이 속에서 퍼져나가다가 한 곳으로 몰려들었다. 별안간 모든 소용돌이가 사라지고 길이가 십 리에 달하는 금색 실이 떠올라 하늘을 가로질렀다.
보석처럼 반짝이는 금색 실은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렸고 그 주위로 주술문자들이 튀어나와 윙윙 울어댔다.
쿠릉! 쿠르릉!
빛의 실이 발산하는 강력한 시간 법칙에 바다가 울부짖었다. 가느다란 실에 이전에 존재했던 수많은 금색 소용돌이의 위압감이 고스란히 뭉쳐 있었다.
우우웅!
금색 실이 바르르 떨리고 튀어나오던 주술문자들이 빠르게 빛을 잃었다. 찰나의 순간 주술문자가 전부 사라지고 허공에는 빛의 실만이 남아 있었다.
강렬한 시간의 힘을 발산하던 실은 이전과 달리 천지와 자연스럽게 부합하는 현묘한 느낌을 주었다.
실이 가볍게 요동쳤다.
아까와는 정반대로 공간이 얼어붙은 것처럼 모든 것이 멈추었다. 진언보륜의 시간을 늦추는 효과와 비슷하면서 또 뭔가 달랐다.
이때 아래쪽 동부 안에서 금빛이 반짝였다.
허공의 빛의 실이 급속도로 줄어들어 그 속으로 사라지고 인근 해역의 천기현상이 사라져 버렸다.
자유를 되찾은 저돈수가 멍하니 섬을 바라보다 좋아하며 바다로 잠수해 산호섬으로 헤엄쳐 갔다. 이 괴이한 천기현상은 영향을 미친 범위가 좁아서 다른 수사의 이목을 끌지는 않았다.
* * *
그 시각, 선계 모처의 공간.
크고 작은 금색 구름이 가득한 공간은 어디를 쳐다보든 금빛으로 반짝였다.
구름은 아래위로 움직이며 다양한 형태를 만들어 냈는데 사람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기상천외한 모양이었다.
그중 한 구름 덩어리 위에 금색의 거대 비석이 우뚝 솟아 금빛을 머금고 있었다.
금색의 그림과 글귀 그리고 주술문자들이 빼곡하게 새겨진 비석은 어두워졌다가 밝아졌다가 하면서 강렬한 시간법칙의 힘을 발산했다.
쿠아아!
바로 그때, 비석이 금빛 광채를 방출하면서 날카로운 진동 소리가 하늘을 울렸다. 비석 아래쪽 빈자리에 새로운 글귀가 생겨서 반짝반짝 빛을 발하다 어두워졌다.
그러고는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가 있었다.
거대 비석 전방 허공에 파동이 일고, 금색 빛의 점들이 뭉쳐 한 쌍의 눈을 이루었다.
“오, 시간법칙을 깨우친 사람이 한 명 늘었구나…….”
흐릿한 목소리는 여인의 것인지 사내의 것인지 알 수 없었고 어떤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금색 거안(巨眼)은 아무렇지 않게 비석을 훑더니 다시 알알이 빛의 점들로 흩어져 사라졌다.
* * *
밀실 안, 짙은 금빛에 둘러싸인 한립 뒤로 진언보륜이 서서히 회전하고 있었다.
그의 머리 위에는 팔뚝 길이의 금색 실이 천천히 꿈틀거리며 떠 있었는데 크기는 훨씬 줄었지만 발산하는 시간이 힘은 전혀 줄지 않아 밀실을 가득 채웠다.
달리 말해 한립과 그의 몸에 어른거리는 금빛을 제외한 밀실 안의 모든 것이 정지한 것 같은 상태였다.
‘드디어!’
조용히 눈을 뜬 한립은 고개를 들어 머리 위의 수정 실을 보고 기뻐했다. 시간법칙을 깨우치기까지 꽤 곡절이 있었다.
도단을 연화시키는 데만 몇 해가 지나갔고, 그 힘을 빌려 시간법칙을 터득하느라 또 몇 해가 흘렀다.
그 사이, 일어났던 의외의 사고들은 미리 준비를 충분히 해두어서 잘 넘어갔다.
진귀한 단약도 충분히 지니고 있었고 진언보륜을 통해 시간법칙을 깨우치려고 시도했던 경험들이 쌓여서 실제로 도단의 힘을 빌려 법칙을 장악할 때 큰 도움이 되었다.
시간법칙을 다루기 시작하자 모든 것이 달라져서 시간이라는 특별한 힘에 대해 감각이 달라지고 진언화륜경도 다르게 해석이 되었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진언보륜을 소환해 만드는 금색 공간을 자유자재로 다루게 된 것이었다.
시간법칙을 깨우치는 순간, 온 세상의 시간의 흐름을 그 흔적이나마 감응한 것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한립은 마음의 격동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금색 실을 보며 눈을 반짝이던 한립은 곧장 수결을 맺었다.
팟.
금빛 실 표면에 빛이 반짝 사라지고 밀실의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갔다. 수결을 바꾸어가며 금색 실을 길게도 짧게도 만들어 보고 매듭을 지어보기도 했다.
실의 형태 변화에 따라 발산되는 시간의 힘도 변화했다. 그걸 본 한립의 얼굴이 다시 상기되었다.
‘시간정사(時間晶絲)의 현묘함을 철저히 익히려면 시간 좀 걸리겠어.’
한립은 담담히 미소를 짓고는 수결을 변화해 금색 수정 실을 아예 거둬들이려 했다. 시간정사를 펼치는데 드는 선령력 소모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 뭔가를 떠올린 그가 동작을 멈추고 손바닥에 녹색 병을 불러냈다.
오랜 세월 여러 번 정체를 알아내려 했지만 장천병에 대해 많은 것을 알아낼 수 없었다. 시간의 힘을 깨우쳤으니 지금이야말로 장천병의 비밀을 알아낼 수 있을지 궁금했다.
한립이 길게 숨을 내쉬며 금색 실을 움직이려는데 이변이 발생했다.
장천병이 돌연 요란한 빛을 방출해 녹색 태양처럼 변하더니 그의 손을 떠나 떠오른 것이다. 동시에 한립의 등 뒤의 진언보륜도 쾌속으로 회전했다.
쉭! 하는 소리와 함께 금색 수정 실이 꼿꼿하게 변해서 진언보륜 안으로 쏘아져 들어갔다.
웅!
평소보다 10배는 밝게 빛나는 진언보륜에서 모든 시간도문들이 빛을 머금었고 고리 중앙에 금빛이 흘러들어 진실안을 만들었다.
진실안이 아직 눈을 뜨지 않았는데도 금색 주술문자들이 요동치고 있었다. 안색이 달라진 한립은 가만히 서서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장천병, 진언보륜 그리고 시간정사까지 모두 그의 통제를 벗어나 있었다. 한립은 마음속 깊이 기대감이 차올랐다.
장천병이 이전에 이변을 일으킬 때마다 그에게 적잖은 기쁨을 안겨다 주었는데 이번에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누가 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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