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1화. 발작
*
콰르릉!
금색 구슬 안에서 천둥 번개가 치는 것처럼 요란한 소동이 벌어졌다. 한립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 순간 번득 해 도인이 등장했다.
화아앗!
활짝 펼친 그의 두 손에서 황금색 빛기둥이 뻗어 나가 한립의 체내로 흘러들었다. 정순한 선령력이 한립의 텅 빈 단전에 콸콸 쏟아져 들어왔다.
한립은 얼른 수결을 맺었고 금색 구슬의 떨림과 소음이 사라져갔다. 그제야 한숨을 돌린 그는 진언보륜을 치웠다.
금실들도 종적을 감추면서 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두 번의 도겁 빛기둥을 이겨낸 도단은 색깔이 더욱 선명해지고 발산하는 파동도 강렬해져 있었다.
한립은 당장 도단을 깊이 있게 살필 여유가 없었다. 도겁이 그리 길게 이어지지 않았지만 수많은 수사들의 주의를 끌었을 것이다.
그는 단약을 꺼내 삼키고 옥함을 꺼내 도단을 조심스럽게 넣어두고는 해 도인을 향해 감사의 표시로 고개를 숙였다.
“어서 빠져나갑시다. 이곳으로 날아드는 이들이 많습니다.”
해 도인은 이 말을 남기고 금빛으로 변해 한립의 몸 속으로 들어갔다.
바닥에 수북하게 떨어진 보물들과 은색 화로를 챙긴 한립도 의식을 퍼트려 자신의 정체를 들킬만한 물건을 놔두고 가지는 않는지 확인하고 동부를 날아올랐다.
널리 퍼져 있던 금색 구름은 사라지고 맑은 하늘이 나타나고 있었다.
손을 저어 동부와 섬에 퍼트려 놓은 진법 법기들을 모조리 회수한 그는 수결을 맺고 금빛 뇌전을 번득였다.
휘잉!
뇌전 전송진을 펼쳐 자리를 뜨기 직전, 멀지 않은 곳에 푸른 돌풍이 나타났다. 돌풍은 푸른 진법을 만들어 공간의 힘을 발산하고 있었다.
한립은 눈을 가늘게 떴다.
푸른 진법은 그의 뇌진과 비슷하지만 바람 속성의 힘과 공감의 힘을 결합한 수법이었다.
뇌진을 발동하기 전에 전송을 마칠듯 싶었고, 뒤늦게 떠나도 상대에게 행적을 들킬 가능성이 컸다.
쉭!
한립은 민첩하게 수결을 풀고 몸을 돌려 동부 쪽으로 쇄도했다. 무상맹 가면이 얼굴에 떠올라 그는 중년 거한의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가 방향을 튼 것과 거의 동시에 푸른 진법에서 검은 장포를 입은 수사가 나타났다. 긴 눈썹이 위로 쭉 뻗은 눈꼬리가 길어 예리한 인상을 주는 사내였다.
한립은 당황스런 표정을 지으면서 멈춰서 마른 사내를 돌아보았다. 인상을 찌푸린 사내도 그를 아래위로 훑고 있었다.
“인근 해역에서는 처음 보는 얼굴 같습니다. 저는 묘언(妙言)이라 하는데 주변에서 수련을 하다 천기현상을 보고 살피러 오는 길입니다. 수사의 존함을 알 수 있을 지요?”
한립은 미소를 띠고 살갑게 말을 걸었다. 웃고는 있었지만 속으로는 꽤나 의아해 하고 있었다.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진선경 후기 수사란 말인가?’
흑풍해역에서 진선 후기 수사는 흑풍도와 청우도 도주들뿐이라고 알고 있었다. 마른 사내가 주위를 둘러보고 시선을 다시 한립에게 고정했다.
“갈우 입니다.”
“아, 갈 수사께서도 이상 현상을 보고 살피러 오시는 길이십니까?”
한립은 상대의 딱딱한 말투에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상황을 감지하자마자 전송진법을 펼쳐 왔는데 먼저 오신 분이 있었군요.”
“허허허! 저야 워낙 가까이에 동부가 있어서요. 이상한 낌새가 있자마자 달려왔더니 그리 되었습니다.”
“그렇습니까…….”
천천히 몸을 돌린 갈우는 훌쩍 몸을 날려 동부로 내려갔다. 한립도 그를 뒤따르면서 주변을 수색하는 척했다.
흔적을 말끔하게 지워서 뭔가를 들킬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다. 흩어져서 동부를 둘러 보던 한립이 의아하다는 얼굴로 돌아왔다.
“아무래도 한발 늦었나 봅니다. 여기 있던 수사는 대체 뭘 하다 간 것일까요? 그냥 강력한 보물을 제련했다고 하기에는 천기현상이 예사롭지 않던데요.”
그의 질문에 갈우는 슬쩍 돌아보고 아무 말이 없었다. 멀리 몇 개의 둔광들이 몰려있었다. 전부 진선 초기의 경지로 한립과 갈우의 수행을 느끼고 깜짝 놀라 멈춰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방향에서도 또 다른 수사가 날아들었다.
지금 몰려드는 수사들은 대부분 지선이 아닌 진선경 수사들이었다. 그가 없는 사이 흑풍해역의 형세가 복잡해지면서 외부 수사들이 상당히 유입되었다는 뜻이었다.
다들 요수 사냥을 하러 왔을 리는 없고, 고대 유적이라도 발견되었단 말인가?
흑풍해역이 영계보다는 나아도 수련 자원이 빈곤하기가 황란대륙보다 더해서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수사들이 모일 곳이 절대 아니었다.
“아무 것도 없는 것 같고, 다른 수사들이 몰려들어서 저는 먼저 가봐야겠습니다.”
미간을 좁힌 한립은 갈우에게 공수를 하고 둔광을 일으켰다. 순식간에 멀어지는 그를 지켜보던 갈우도 푸른 돌풍을 일으켜 번득 하고 사라졌다.
다른 수사들은 그들이 사라지고 나서야 섬에 다가왔다.
* * *
검은 안개가 깔린 해역에 금빛 뇌전들이 떠올랐다.
콰릉!
뇌전진법에서 빠져나온 한립은 의식을 퍼트려 보고 얼굴을 풀었다.
섬에서 멀리 떨어지자마자 뇌전진법을 이용해서 흑풍해역을 빙빙 돌아 이곳까지 이동해온 참이었다.
누군가 따라 붙었다고 해도 이 정도면 충분히 따돌렸을 것이다. 주위를 둘러본 그는 휙! 하고 바다로 뛰어들어 해저에서 가부좌를 틀었다.
해 도인이 주입해준 선령력을 억지로 빌려쓴 탓에 온몸이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는 서둘러 두 종류의 금제를 펼치고 단약을 복용한 채 운공에 들어갔다.
* * *
3일 후.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난 한립은 편안해 보였다.
이번 도겁을 경험하면서 시간의 힘에 대한 이해도도 높아져서 시간법칙을 깨우치는데 보탬이 될 것 같았다.
잠시 후 금제를 거둔 한립은 서둘러 동부 방향으로 날아올랐다.
“흐음…….”
날아가는 도중 한립은 갑자기 머리가 묵직해지는 느낌이 들어 표정이 어두워졌다.
“왜 그러지? 설마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것인가.”
몸 상태를 살피려 연신술을 발동하자 방대한 의식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수많은 칼날이 머릿속을 헤집고 다니는 것 같은 고통이 전해왔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그는 신음을 내뱉으며 두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렸고 쾌속으로 전진하던 몸이 우뚝 멈춰 서서 그대로 바다로 추락했다.
첨벙!
한립은 더더욱 강렬해지는 고통에 차가운 바닷물 속에서도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고 의식을 잃어갔다.
부지불식간에 그의 두 눈에 희미한 핏빛이 어려 있었다.
* * *
한립은 몽롱한 의식 중에서도 눈을 떠보려 애를 썼지만 이내 시야가 흐릿해지고 사방팔방에서 들려오는 고함과 울부짖음이 커졌다 작아졌다 하며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소음들이 마치 그의 머릿속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것 같았고, 피가 요동치며 가슴 속에 억눌러 놓은 분노가 솟구쳐 숨을 쉬기도 어려웠다.
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두 손을 허우적거리며 주먹을 휘둘렀다. 그래야만 마음의 동요를 가라앉힐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도 괴성을 지르면서 길길이 날뛰고 싶었지만 어떤 소리도 낼 수 없었고 머릿속에는 잡음만이 가득했다.
다행히 분노의 불길은 빠져나갈 구멍을 찾은 듯 그가 내지르는 주먹을 따라 조금씩 사라져 갔다. 한립의 머릿속에는 어떻게든 고통에서 벗어나야겠다는 본능만 남아 있는듯했다.
그때 주변의 잡음이 점점 더 강렬해지더니 가슴 속 분노가 차차 가라앉고 진득한 피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흐릿하던 시야가 하늘에 구름이 걷히듯 맑아져서 혈홍색 세상을 드러냈다. 어디를 보아도 눈에 들어오는 것은 핏빛뿐이었다.
마치 핏물이 바다를 이루고 그가 그 속에 빠져 있는 것만 같았다. 그의 곁에는 뼈가 부러지고 살점도 온전치 않은 시체들이 곳곳에 떠다니고 있었다.
그 순간, 무언가 날카로운 것이 머리를 찌른 듯 극통이 전해지면서 혈홍색 풍경들이 더욱 선명하게 변했다.
“……!”
힘껏 고개를 내저어 서서히 정신을 차린 한립은 몸 구석구석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고, 아직도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들어 자신이 어느 섬 위에 서서 격랑이 치는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한립은 혼란한 상황에서도 섬을 떠난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떠올리려 노력했다.
‘기억이…….’
그는 기억을 떠올리려다 다시금 극심한 고통을 느끼고 고개를 저었다. 생각하기를 포기하자 고통이 한결 가라앉았다.
그리고 문득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갑자기 뒤를 돌아보았다.
그가 서 있는 섬은 구멍이 숭숭 뚫려 난장판이 되어 있었고 특히 중앙에는 거대한 산맥의 중간이 뚝 끊겨 섬을 관통해 바닷물이 스며드는 거대한 호수가 생겨나 있었다.
이에 놀란 눈빛으로 의식을 발동해 주변을 살폈다.
그런데 섬을 중심으로 해저 표면에 구멍이 가득했다. 어찌나 깊게 파였는지 갈라진 해저에서 용암이 새어 나오다 굳어 있었다. 그곳은 마치 격렬한 대규모 전투가 벌어진 전장 같아 보였다.
만 리 내의 다른 섬들도 아예 무너져 바다 아래로 가라앉았거나 그가 서 있는 섬처럼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섬들과 바닷속에는 적잖은 요수의 시체들도 보였다.
그중에는 합체기 요수들에 심지어 대승기 존재들도 있었는데 어찌나 참혹하게 죽었는지 대승기 수행의 커다란 교룡도 여덟 조각으로 뜯겨 겁에 질린 눈으로 바다를 피로 물들이고 있었다.
“이게 무슨…….”
눈이 휘둥그레진 한립 곁으로 금빛이 내려와 황금색 장포를 걸친 중년인의 모습으로 변했다.
“해 수사, 이곳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아십니까?”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시는 겁니까? 지금 보고 있는 광경은 수사가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제가요?”
움찔한 한립은 불쑥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동하던 중에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바닷속에 들어갔다 수면 위로 나왔다 하며 모든 것을 파괴하였습니다. 심마라도 들린 사람처럼 이지를 상실해서 제가 어떻게 깨우려 해도 반응이 없더군요.”
“제가……. 미쳐 날뛴 지, 얼마나 지났습니까?”
“눈이 별안간 붉게 물들어서 바다로 뛰어들어서 정신을 차리기까지 향 하나가 탈 시간이 지나갔습니다.”
해 도인의 대답에 한립이 어두운 얼굴로 말을 잃었다. 설명을 듣고 있자니 잃어버린 기억이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둔광을 펼쳐 날아가던 도중 극심한 두통을 느끼고는 그의 마음을 가득 채운 것은 살육에 대한 열망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누가 암암리에 손을 써둔 것은…….”
여러 가지 가능성을 따져본 한립은 고개를 저었다.
“……연신술이로구나.”
현재 그의 수행에, 금선이라 해도 아무런 흔적도 없이 그를 이리 만들 수는 없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원인은 연신술이었다.
표정이 시시각각 달라지던 그는 머뭇거리다 연신술을 운용해 보았다. 급작스러운 두통에 작게 신음을 흘린 그는 연신술을 멈추고서야 고통이 가라앉았다.
‘연신술이야, 연신술이었어!’
예전에 만난 선인 하강은 연신술을 3성까지 익히면 3, 4만 년간은 걱정 없이 보낼 수 있을 거라 했는데, 그는 이미 연신술을 3성까지 익힌 데다 만 년밖에 지나지 않았다.
‘하강이 거짓말을 한 것일까? 아니면 다른 원인이 의식의 위기를 앞당긴 것인가?’
한립은 심호흡을 하며 평정을 되찾았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문제가 발생했으니 대책을 찾지 못하면 이성을 잃고 살육 괴물이 되고 말 것이다.
오늘 일은 시작에 불과했다.
운 좋게 아주 외진 해역이었고 발작 시간이 짧아 누군가의 주의를 끌지 않았으나 앞으로도 그럴 거란 보장은 없었다.
발작 시간이 점점 길어지고 간격이 좁아지다 영원히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었다. 하강이 말했던 대로면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연신술 4성을 익히는 수밖에 없었다.
촉룡도에 있을 때도 선계의 연신술에 대해 은밀히 조사했지만, 당시에는 아직 시간이 2, 3만 년 더 있을 거라고 여겨 급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때 알아낸 바로는 북한선역에는 연신술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었고 연신술 자체를 아는 이들도 드물었다.
촉룡도 전공전에 연신술이 있기는 했지만 금서로 분류되어 도주급 외에는 열람이 불가했고 그마저도 3성 공법까지 밖에 비치돼 있지 않았다.
한립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촉룡도 같은 거대 종문에서도 연신술 후반부를 찾지 못했다면 흑풍해역에 있는 그는 어디 가서 그런 비술을 구해 와야 한단 말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