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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660화 (1,417/2,000)
  • 1660화. 도겁의 도래

    *

    한 달 또 한 달이 지나 몇 달 뒤.

    가부좌를 튼 한립이 손가락을 연꽃처럼 모아 펼치고 있었다. 화로 안에서 미세하게 치직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뚜껑이 들썩였다.

    수시로 다양한 빛이 비치는 밀실 안에 농염한 약향이 퍼져 있었다. 그의 옆에는 어떤 재료도 남아 있지 않았다.

    몇 개월 동안 한립은 새로운 재료를 시도할 때마다 실패해서 진실안으로 원인을 찾은 후에야 융합에 성공했다.

    지금 화로 안에 든 재료는 마지막 분량이었다.

    지난번에 마지막 재료를 융합하는 데 실패하고 진실안으로 복기를 해두어서 이번에는 문제가 없을 것이다. 유일한 걱정은 모든 재료가 섞인 뒤에 도래할 도겁이었다.

    재료를 다 써버렸는데 도겁에 저항하지 못해 연단이 실패로 돌아가면 수백 년 내로는 다시 기회를 잡을 수 없었다.

    노응초와 천조삼 같은 영약 재료는 약재밭에 종자와 묘목이 남아 있으니 다시 길러내면 된다지만 나머지 재료들은 선원석을 주고 구하려 해도 시간이 필요했다.

    특히 그중 몇 가지는 도우의 저물대에서 찾은 것이라 그런 기연이 또 찾아올지 알 수도 없었다.

    한립은 온 정신을 집중해서 화로 안의 변화를 주시했다. 강렬한 각종 약효가 한데 뭉쳐 있어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 표정이 더없이 평온해진 그는 두 손도 천천히 움직여 동작 하나하나에 최선을 다했다.

    법결들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화로 속으로 들어갔다. 유유자적해 보이는 것 모습과 달리 칼날 위를 걷고 있는 것만 같은 긴장감이 공존했다.

    한립은 연단술이 드디어 고비를 넘어서 새로운 경지에 이른 것을 감지하고는 쓱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쿠쿠쿵…….

    심호흡을 하고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온 그의 수결이 달라졌다. 화로 속에서천둥이 치는 것처럼 굉음이 들려오고 있었다.

    다양한 원기들이 요동치다가 결국에는 하나로 합쳐서 정순한 금빛으로 변화했다. 도단이 형성되려는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자 한립의 손짓이 빨라졌다.

    쿠아아아!

    화로 안에서 들려오던 소리가 거대한 짐승의 포효소리처럼 변했다.

    펑!

    금빛이 폭발적으로 빠져나오면서 뚜껑이 날아오르고 용 눈알 크기의 금색 단약이 떠올랐다. 금색 광채가 불길처럼 단약을 감싸고 파문을 일으켰다.

    단약 표면에 시간법칙 파동을 발산하는 금색 도문이 무려 두 개나 되었다.

    한립이 눈을 크게 떴다.

    처음 제련해낸 도단이 2품(品)이라니, 시간정립이 함유한 시간법칙의 힘이 그만큼 농염하단 소리였다. 어찌되었던 1품에 비해 2품 도단은 훨씬 효과가 좋다는 게 중요했다.

    그때 섬 상공의 쾌청하던 하늘에 무수히 많은 금빛 알갱이들이 몰려들어 거대하기 짝이 없는 구름을 이루고 출렁였다.

    멀리서는 하늘 전체가 금빛으로 물든 것처럼 보였고 방대한 법칙 파동이 방원 십여만 리의 천지영기를 자극했다.

    워낙 엄청난 천기 현상이라 백만 리 밖의 수사도 떨리는 가슴으로 금빛 구름이 있는 방향을 쳐다볼 수 없었다. 또한 금빛이 비치는 해역의 수사들은 묵직한 위압감에 눌렸다.

    동부에서 바깥 상황을 살펴본 한립의 표정이 불편하게 변했다.

    ‘경전에서 본 것보다 심하잖아.’

    쿠르르릉!

    금색 구름은 굉음과 바람을 일으켰다.

    광활하기까지 한 금색 소용돌이가 일대에 형성되어 중심에서 요란한 금빛을 방출하고 있었다.

    무시무시한 법칙 파동이 소용돌이 중심에서 떨어져 동부를 감쌌다.

    금제를 펼쳐둔 동굴 벽에 금이 쫙쫙 가고 한립은 몸을 떨었다. 동굴 바깥에 번쩍 모습을 드러낸 해 도인의 무심한 얼굴에도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소용돌이 속에서 눈을 찌르는 금색 빛기둥이 떨어져서 동굴로 내리꽂히는 중이었다.

    수많은 주술문자를 품은 법칙 파동을 발산하는 금색 빛기둥은 강렬한 살의를 품고 있었다. 해 도인은 막을 생각 없이 가만히 떠서 보고만 있었다.

    빛기둥은 동굴 밖 금제나 심지어 동굴 그 자체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고 허상처럼 안으로 투과해 들어갔다.

    동굴 안의 한립은 그걸 감지하고 가슴이 철렁했다. 도겁이 이렇게 빠르게 강림할 줄은 몰랐다.

    서둘러 진언보륜을 불러내 금빛 파문으로 금색 도단을 보호한 그는 입에서 별빛 고리 7개를 뿜었다.

    고리들은 번개처럼 합쳐서 거대하게 변했다. 칠요성환이었다.

    고리에서 발산된 아득한 별빛이 장막을 이루어 밤하늘을 축소해 놓은 것 같은 그림을 만들었다. 엄지손톱 크기의 별빛 주술문자들이 법칙파동을 머금고 있었다.

    그가 다른 준비를 하기 전에 동굴 천장에서 금색 빛기둥이 신속하게 내려와 별빛 장막을 때렸다.

    후우웅!

    별빛 장막이 맹렬하게 빛을 뿜고 날카롭게 울며 공격을 막아보려 했다. 하지만 빛기둥은 별빛 장막을 투과해 정확히 도단 위로 떨어졌다.

    콰쾅!

    금색 도단이 빛기둥에 맞아 그 충격으로 흔들렸다. 발산하던 금빛이 빠르게 어두워지고 있었다.

    함유한 약성이 충격을 받아 불안정해졌고, 도단의 금색 도문 두 개가 소용돌이 쪽으로 빨려 올라갈 기미가 보였다.

    ‘이런!’

    한립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진언보륜의 시간을 늦추려고 했지만 빛기둥도 시간법칙의 힘을 품고 있어서 전혀 통하지 않았다.

    양손으로 수결을 맺어 있는 힘껏 도단 내부의 혼란을 가라앉힌 그는 진언보륜에서 시간의 힘을 방출해 도단의 금색 도문들을 붙들었다.

    그러나 도단의 떨림은 멈출 줄 몰랐다. 도단도 작은 병이 응결한 시간의 힘을 품고 있어서 진언보륜의 신통이 먹혀들지 않았다.

    금색 도단이 어찌나 심하게 떨리는지 그걸 들고 있는 한립의 몸까지 덜덜 떨렸다.

    단약은 무작정 힘을 많이 준다고 안정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세심한 힘의 조절이 중요해서 심후한 그의 수행도 그리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쿠르르릉!

    하늘에서 금빛 구름이 요동쳤다. 전보다 더 격렬하고 노기등등한 움직임에 천지가 진동했고 소용돌이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압력에 동굴 벽의 균열이 심해졌다.

    마음이 급해진 한립은 손가락을 빠르게 움직였다. 급속도로 커진 진언보륜의 시간도문 하나하나가 눈부신 빛을 쾌속으로 깜빡거렸다.

    우우웅.

    진한 금빛 광채가 고리에서 흘러나와 무수히 많은 주술문자와 강렬한 시간의 힘을 발산했다.

    한립의 조종에 금빛 광채는 수십 줄기로 갈라져서 반짝이는 실로 뭉친 다음 도단 도문 두 개를 휘감고 꽉 붙들었다.

    드디어 부들부들 떨던 도문들이 약간 안정되고 도단 내부의 원기 파동도 완화되었다.

    한립은 긴장을 풀지 않고 계속해서 도단을 안정시키면서 청죽봉운검들을 내보내 머리 위로 원형의 보호막을 펼치게 했다.

    검은 중수진륜까지 떠올라 그의 머리 위에서 열댓 배로 몸집을 키우고 있었다. 이걸 시작으로 한립의 몸에서 잇달아 보물들이 날아올랐다.

    파파파팟.

    도우에게 빼앗은 은색 방울, 뱀 모양의 괴검, 원합오극산, 음한한 속성의 선기 두 개 그리고 다른 위력적인 보물들이 총출동해서 그의 머리 위에서 맴돌았다.

    수백 년 동안 연화를 마쳐 자유자재로 부릴 수 있게 된 강력한 보물들이었다.

    웅! 웅! 웅!

    아낌없이 선령력을 주입하면서 강대한 의식으로 여러보물들을 동시에 발동해 한립의 주위로 보호막이 한층 또 한층 늘어나 거의 밀실 천장까지 쌓였다.

    다양한 법칙의 힘들이 동굴 안에 진동하고 있었다.

    쿠콰아아앙!

    막 마지막 보호막이 형성되었을 때 천장에서 굉음이 들렸다. 금색 빛기둥이 일으킨 광풍이 주변 해역에 언덕 높이의 해일을 일으켜 세계종말을 보는 것 같았다.

    뇌전 형태를 이룬 금색 빛기둥이 금제와 동굴 천장을 통과해서 가장 바깥의 별빛 장막에 떨어졌다. 칠요성환 보호막이었다.

    반짝 빛난 빛기둥이 장막을 뚫고 두 번째 청죽봉운검이 이룬 검기 그물 보호막을 강타했다. 날카로운 검기들이 아무리 베어도 빛기둥은 아무렇지 않게 지나쳤다.

    중수진륜도 전혀 빛기둥을 막지 못했다.

    법칙의 힘을 지닌 보호막들이 미친 듯이 출렁이면서 빛기둥을 막으려 해도 역부족이었다.

    그나마 법칙의 힘을 지닌 보물들은 통과한 빛기둥은 속도가 조금 느려져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한립의 표정이 시시각각 어두워졌다. 전력을 다해서 이렇게 많은 보물들을 발동했는데도 소용이 없단 말인가!

    첫 번째 빛기둥에 당하고 불안정해진 도단이 더 강력한 두 번째 빛기둥을 맞으면 부서져 버리는 것은 당연했다.

    ‘선계의 도단에 대한 배척이 이리 심할 줄이야!’

    그가 머리를 굴리는 동안 몇 개의 보호막이 더 뚫렸다.

    파파팟!

    금색 빛기둥의 하강 속도가 느려지고 있었다.

    “엇!”

    한립이 갑자기 탄성을 터트렸다. 그의 예리한 시각에 빛기둥이 이전보다 수축된 것이 포착되었기 때문이다.

    아무렇지 않게 보호막을 통과하는 듯 보여도 보물들 때문에 위력이 줄고 있었다. 전신에서 금빛을 일으킨 한립은 남은 보물들을 향해 정혈을 뿜었다.

    동시에 체내의 선령력이 물밀듯이 보물들로 주입되었다. 이렇게 된 이상 최후의 밑천을 전부 걸어 볼 수밖에 없었다.

    후우우웅!

    보물들이 즉시 강렬한 빛을 내뿜으면서 법칙의 힘이 증폭되었다.

    파팟.

    그러는 와중에도 빛기둥은 거침없이 보호막들을 뚫고 내려왔다. 한립은 남은 보물들이 하나씩 줄어들고 빛기둥이 도단에 빠르게 가까워지는 것을 보고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빛기둥이 약화되는 정도가 미미해서 이대로는 부족했다.

    팟!

    검은 깃발 선기를 뚫은 빛기둥이 다음으로 원합오극산에 떨어졌다. 이제 정말 남은 보물이 얼마 되지 않았다.

    한립이 길게 숨을 내쉬자 몸에 35개의 금빛 점이 떠올라 빙그르르 돌기 시작했다. 체내의 선규를 격발해서 잠재력을 끌어 쓰는 비술을 펼칠 작정이었다.

    무리해서 비술을 쓴 대가로 회복하는데 수백 년의 시간을 허비해야 할 것이다.

    웅웅웅!

    공간이 돌연 진동했다. 고개를 든 한립은 어안이 벙벙해져서 원합오극산을 바라보았다.

    잿빛을 머금은 극산이 파동을 방출해 형성한 장벽이 거의 무적에 가까운 돌파력을 보였던 빛기둥을 막아내고 있었다.

    잿빛과 금빛이 번쩍번쩍 힘겨루기를 하면서 잠시 동안 빛기둥이 아래로 내려오지 못하고 있었다.

    한립은 살짝 벌어진 입을 다물고 수결을 풀어 비술을 멈추고 기뻐했다.

    ‘원합오극산이 도겁 빛기둥을 막아내고 있어!’

    극산의 잿빛에서 기이한 법칙의 힘이 발생해 금색 빛기둥을 막아내는 중이었다. 뇌겁의 힘을 상쇄해주는 원합오극산은 비승의 겁을 위해 제련한 것이었으니 도겁에도 효과를 보이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원합오극산에 아직 그가 알아내지 못한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번뜩 도우가 떠올랐다.

    영계에 있을 때만해도 원합오극산은 이렇게 강력하지 않았고 선기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런 물건을 도우가 심혈을 기울여 다시 제련한 것을 보면 처음부터 도겁을 막는 효과를 지닌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허나 지금은 원합오극산의 정체나 추측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원합오극산이 빛기둥을 간신히 막고는 있지만 도겁의 위력이 너무 강해서 점점 극산의 잿빛이 어두워지는 실정이었다.

    빛기둥이 수축하는 속도는 비교적 느릿했다.

    눈을 가늘게 뜬 한립은 다른 보물들의 조종을 포기하고 오로지 원합오극산에 모든 힘을 쏟아 부었다.

    투타타탕!

    빛을 잃은 보물들이 바닥으로 떨어졌지만 눈길도 주지 않았다. 도단 제련을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였는데 마지막 한 걸음을 앞두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허공에 잿빛과 금빛이 충돌하면서 동굴이 울리고 사나운 천지원기의 파동이 퍼졌다.

    우열을 가리기 힘든 두 힘은 시간이 지날수록 서서히 약화되었다. 그러나 한립은 난색을 표했다.

    선령력이 얼마 남지 않아 선원석으로 보충해도 오래 버티지 못할 듯했다. 게다가 빛기둥에 저항 중인 원합오극산이 함유한 법칙의 힘이 거의 바닥나고 있었다.

    한 손에 선원석을 쥐고 체내의 선령력을 보충하면서 다른 손으로는 부단히 수결을 맺어 극산에 선령력을 주입했다.

    잿빛 산봉우리가 바들바들 떨리면서 신속하게 빛을 잃어갔다. 몇 호흡 지나지 않아 법칙의 힘을 품은 잿빛이 사라질 것이다.

    다행히 금색 빛기둥도 극히 일부만 남아 있었다. 잿빛이 꺼지는 그 찰나, 빛기둥이 번쩍 도단으로 떨어졌다.

    콰쾅!

    극심하게 떨리던 도단에서 두 도문이 반짝거렸다.

    선령력이 바닥을 보이고 있던 한립은 간신히 진언보륜에서 금빛을 뿜어서 수십 가닥의 실로 도단을 꽁꽁 감싸 주먹 크기의 구슬로 만들었다.

    창백해진 한립은 선령력이 고갈되어 더는 아무 조치도 취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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