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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659화 (1,416/2,000)

1659화. 단겁(丹劫)

*

며칠 뒤, 한립은 파도가 심하게 치는 어느 해역 위에 떠 있었다. 이전에 임시 동부를 만들 곳으로 선정했던 해역과 비슷하게 외진 곳에 위치했다.

의식을 퍼트려 적당한 섬을 찾은 한립은 잿빛 암석과 흙으로 이루어진 황량한 산봉우리 중턱에 동부를 마련했다.

검기로 암석 조각을 대충 서걱서걱 썰어내서 만든 초라한 동굴이었다. 안으로 들어간 한립은 진법 깃발 수백 개를 날려 다양한 색깔의 금제들로 동부를 착실하게 가렸다.

외부에서는 이제 동굴이 보이지 않았다.

기본적인 작업을 마치고 바닥에 앉자 금빛이 빠져나와 해 도인으로 변했다.

“해 수사, 외부인이 잘 드나들지 않는 곳이지만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서 폐관하는 동안 호법을 서주셔야겠습니다. 누군가 침입하면 최대한 막아주세요.”

“금선경을 초월하는 존재만 아니라면 막을 수 있을 테니 마음 놓으셔도 됩니다.”

해 도인은 금빛 뇌전을 일으켜 허공에 녹아들 듯 사라졌다. 표정은 그대로였어도 한립은 그걸 보고 깜짝 놀랐다.

그의 의식의 힘으로도 해 도인의 위치를 감응할 수 없었던 것이다.

연신술을 운용해 방대한 의식을 퍼트려서야 인근 허공에 있는 듯 없는 듯 존재하는 미약한 뇌전 파동을 겨우 찾아낼 수 있었다.

다른 임시 동부까지 마련해서 금제를 겹겹이 펼치고 들어 앉은 이유는 도단 제련을 위해서였다. 경전에는 도단이 형태를 갖출 때 단겁(丹劫)이 발생한다고 적혀 있었다.

단겁은 도단이 함유한 정순한 법칙의 힘이 일계의 천지 법칙을 뛰어넘어서 계면의 배척을 받아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도단이 강림하면 뇌겁 이상의 엄청난 소란이 벌어져서 아무리 구석진 곳에서 연단해도 누군가의 시선을 끌지 모른다.

원래 있던 동부는 약재밭이 있어 들키면 빠르게 자리를 뜨기가 어려웠다. 이곳은 문제가 생겨도 해 도인이 시간을 끌어주는 동안 떠나면 그만이었다.

* * *

3일 밤낮 동안 정좌를 하고 있던 한립이 번쩍 눈을 뜨고 은색 연단로를 불러냈다.

화르륵.

그의 손에서 날아간 은빛이 화로 아래에서 은색 소인으로 변해 강렬한 화염을 내뿜었다.

여러 재료들까지 정갈하게 밀실 바닥에 깔아둔 한립은 머릿속으로 수도 없이 되뇌인 도단 제련 과정을 확인했다.

쿠릉!

만반의 준비를 마친 그의 손에서 법결이 날아가 은색 화염이 더욱 강성해졌다. 화로 안으로 가장 먼저 들어간 것은 시간정립, 수정 알갱이였다.

공기까지 끓게 만드는 열기 속에서 수정 알갱이가 녹으면서 표면이 매끄러워졌고 내부의 금빛 실들이 시간법칙의 파동을 발산했다.

다음은 새하얀 삼인 천조삼이 푸른빛에 휩싸여 날아들었다.

푸른 거대 손 두 개가 나타나 삼을 꾹 쥐어짜 하얀 즙을 화로 속으로 떨구었다.

치지직…….

하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자 한립은 재빨리 수결에 변화를 주고는 불 조절에 들어갔다.

하얀 즙이 꾸덕꾸덕하게 바뀌어 시간정립을 둘러쌌다. 작은 함 속에 든 은색 가루가 떠올라 서서히 움직였다.

어떤 요수의 뼈를 곱게 갈아놓은 가루 같아 보였다.

한립의 한 손은 푸른빛을 뿜어 뼛가루를 움직이고 다른 손은 수결을 맺어 화력을 조절했다. 은색 가루가 빠르게 녹아 액체로 변해 꾸덕한 하얀 액체에 녹아들었다.

이렇게 재료가 하나둘 화로 속으로 들어가는 데만 반나절이 지났다.

대부분 재료가 녹아든 화로에 용 눈알 크기의 하얀 환약이 울퉁불퉁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화로 앞의 한립은 진땀을 흘렸고 호흡도 거칠어졌다. 도단 제련이 어려울 거라 짐작은 했지만 이건 상상을 넘어섰다.

도단 제련은 다른 단약 제련과는 달랐다.

일반적으로 단약을 제련하는 과정은 일단 각종 재료를 알맞게 정련한 다음 알맞은 배합과 화력으로 뭉쳐내면 되었다.

법칙의 힘을 지닌 재료들을 위주로 하는 도단 제련은 이와는 달리 재료들을 따로따로 정련하면서 법칙 재료와 부단히 융합을 시켜주어야 해서 눈덩이를 굴리듯 그 어려움이 커져 갔다.

각 재료를 적절하게 융합하면서 화력을 조정해서 약성의 균형을 맞추는 게 상당히 복잡했다.

특히 주재료인 시간 알갱이가 함유한 시간의 힘이 반드시 다른 영약의 약성과 균형을 이루어야만 완벽하게 융합할 수 있었다.

한립은 만군을 지휘해서 복잡한 진열을 짜야하는데 병사들이 통제에 따르지 않고 각기 따로 노는 것과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이 모든 돌발행동을 막아가면서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야 했기 때문에 연단술이 크게 늘지 않았으면 벌써 실패했을 것이다.

도단은 법칙의 힘을 함유하고 있어서 제련이 끝나기 전까지는 다른 법칙의 힘에 노출되면 이변이 일어나거나 실패할 수 있었다.

그래서 진언보륜의 신통도 펼치지 못한 채 오로지 연단술에만 의존해 진행 중이었다. 그는 심호흡을 하며 다시 수결을 바꾸고 재료를 넣고 불길을 키웠다.

시간이 지날수록 호흡이 거칠어지고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한립의 두 눈에 실핏줄이 퍼져갔다.

푸른빛에 휩싸인 녹색 액체가 화로 속으로 들어가 정련을 거쳐 하얀 환약으로 융합되고 있었다.

하얀 환약은 희미하게 녹색 빛을 띠다가 서서히 원래 색깔로 돌아가려 했다.

우웅!

이때 환약이 부르르 몸을 떨더니 갑자기 온갖 색깔의 빛이 떠올라 반짝거렸다. 놀란 한립이 대처하려 했을 때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퍼석!

하얀 환약이 갈라지면서 주변을 충만하게 채우던 영기도 사라지고 모든 것이 보통 단약을 제련할 때처럼 바뀌었다.

한립은 탄식을 내뱉으며 법결을 날렸다. 화로 아래 불길이 은색 화염 소인으로 변해 그의 체내로 들어갔다.

‘후우…….’

그는 갈라진 환약을 푸른빛으로 감싸 불러들이고는 면밀하게 살피며 감정의 기복을 가라앉혔다.

그는 이미 첫 번째 시도에 성공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해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거기다 그가 제련하려는 것은 삼대 지존법칙 중 하나인 시간법칙을 지닌 도단이었다.

실패한 환약이 다른 연단사에게는 쓸모없는 물건이었지만 그에게는 달랐다. 수결을 맺은 그의 뒤로 진언보륜이 떠올라 웅웅 회전했다.

보륜의 360개 시간도문이 찬란한 빛을 발하자 고리 중간에 진실안이 떠올랐다. 눈을 뜬 진실안에서 기이한 주술문자들를 품은 금빛 기류가 방출되었다.

금빛 하늘에 수많은 별빛이 반짝이는 모습 같았기도 했고 금빛 꽃이 만발한 것 같기도 했다.

시간도문이 360개로 늘어난 진실안의 통찰력은 이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눈을 감은 한립은 진실안을 통해 주위 세계를 감응하면서 눈썹을 끌어올렸다.

동부 주변의 금제들을 가볍게 투시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금제 자체의 영력의 흐름까지 관찰 가능했다.

금빛 눈동자가 움직여 한립이 실패한 환약으로 시선이 향했다. 진실안의 금빛이 거의 실체화되어 환약을 감싸고 시간의 힘을 발산했다.

화아앗!

회전하기 시작한 환약에서 초록빛이 반짝이며 녹색 액체가 분리되어 빠져나오고 있었다. 여러 재료들이 융합되던 과정이 거꾸로 흘러가서 그가 도단 제련 과정을 되돌려 볼 수 있게 한 것이다.

그가 감히 바로 도단 제련에 도전한 것도 진실안으로 시간을 돌려볼 수 있는 능력 때문이었다.

남색빛을 일렁인 한립은 미세한 변화도 놓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집중했다. 과연 돌려보니 실패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변화는 계속되어 하얀 가루가 분리되고 환약의 다양한 빛을 발산했다. 여기까지는 실수없이 해냈지만 다시 살펴보면서 헤아려 보니 이해도가 깊어졌다.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모든 재료가 도단에서 분리된 뒤 마지막으로 시간 알갱이가 원래대로 돌아가면서 신통이 끝났다.

금빛이 두어 번 반짝이다 흩어지고 실패한 환단이 허공에 떠 있었다. 진선경 후기의 수행을 지녔는데도 진실안을 펼친 대가로 선령력 대부분이 사라져 있었다.

길게 숨을 내쉰 한립은 단약을 복용하고 눈을 감은 채 도단의 제련 과정을 머리로 반복했다.

반 시진 후, 그는 맑은 정신으로 눈을 떴지만 바로 제련을 시작하지는 못했다. 시간알갱이를 얻는데 한달은 걸리기 때문이었다.

그 한 달 간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진실안으로 시간을 역행해 도단 제련 과정을 계속해서 돌려보았다.

* * *

드디어 한 달 뒤, 장천병에 녹색 액체가 한 방울 맺혀 새로운 시간정립을 응결한 한립은 두 번째 제련에 들어갔다.

제련 과정에 익숙해 져서인지 순조롭게 진행이 되어서 지난번에 녹색 액체를 넣고 실패했던 단계에 이르렀다.

치직.

화로의 열기 속에서 녹색 액체가 정련되며 수축되었다. 푸른빛이 녹색 액체를 감싸 환약 속으로 녹아들었고 한립은 빠르게 수결을 바꾸었다.

환약에 감돌던 초록빛이 안정적으로 사라지고 아무런 이상도 나타나지 않았다. 한립의 신중한 손길에 그 후로도 연달아 다른 재료들이 환약으로 녹아들었다.

그러나 한립은 표정이 굳고 진땀을 흘리며 힘든 기색을 보였다. 이를 악문 그가 하얀 고약 같은 질감의 끈끈한 재료를 화로 안에 넣었다.

퍼석!

예상대로 화로에서 은은하게 타는 냄새를 풍겼다. 한립은 찡그린 얼굴을 펴고 휴식을 취하고는 실패한 환약을 불러왔다.

웅!

수결을 맺은 그의 등 뒤로 진언보륜이 떠올라 진실안을 펼쳤다. 금빛이 날아가 갈라진 환약을 감싸고 다시금 시간 역행을 펼쳤다.

진실안의 능력으로 한립은 금방 실패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한 달 뒤, 세 번째 연단이 시작되었다.

첫 번째 시도 때처럼 선령력을 아낌없이 써서 진실안으로 제련 과정을 수도 없이 되돌려 보았다.

진실안의 시간 역행 능력은 수많은 연습을 한 것처럼 풍성한 경험을 쌓게 해주었고 더없이 순조롭게 하얀 고약 재질의 재료를 넣기 전까지 연단이 진행 되었다.

관건이 되는 재료를 넣고 수결을 바꾼 한립은 환약이 안정적인 것을 보고 다음 재료를 화로에 집어넣었다.

연단은 막바지에 이르렀고 7종류의 재료만 무난하게 융합되면 거의 성공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두 번의 실패가 있었지만 3번 만에 도단 제련에 성공해도 무척 놀라운 성과였다. 기대감에 부풀어 있던 한립은 일각 만에 기분이 가라앉았다.

퍼석!

화로 안에서 익숙한 소리가 들리고 타는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세 번째 시도도 실패라는 이야기였다.

화염과 실패한 환약을 불러들인 한립은 미간을 좁혔다.

뒤로 갈수록 연단은 더욱 고달파졌으나 진실안으로 복기할 수 있는 한 희망은 있었다. 그저 준비한 연단 재료가 9번 분량 밖에 안 되어서 나머지 6번마저 실패하면…….

한숨을 내쉰 한립은 부정적인 생각에 잠기지 않고 다시 진실안을 펼쳤다.

* * *

한 달 뒤, 네 번째 제련이 시작되었다.

이전에 실패한 재료까지 융합하는 데 성공한 한립은 다음으로 은은한 금색 벌꿀을 환약에 융합했다.

감정을 차분하게 진정시킨 그의 눈에 다섯 종류의 재료가 들어왔다.

마음을 다잡고 이어서 재료를 넣은 그는 연단술을 극성으로 발휘해 얼굴에 푸른 기운이 돌았다. 화로 안의 환약이 미세하게 떨리다가 각종 색깔의 빛이 떠올랐다.

새로 집어넣은 재료가 환약의 다른 재료들과 조화를 이루지 못해서 뜨거운 기름이 물을 부은 것처럼 난리가 나고 있다는 징조였다.

퍼석!

한립은 현란한 수결을 멈추고 얼굴을 굳혔다. 또 실패하다니…….

또 한 달 뒤, 다섯 번째 제련.

반복해서 종전 실패의 원인을 파악한 한립은 신속하게 제련을 해나갔다.

이전에 실패했던 고비를 넘어선 그가 진중하게 다음 재료를 정련해 융합하려 했을 때 퍼석!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한립은 씁쓸하게 웃으며 곧바로 진실안을 이용해 실패 과정을 돌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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