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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657화 (1,414/2,000)

1657화. 회신

*

한립은 먼바다를 바라보면서 마음을 정리했다.

막힘없이 늘던 수행이 진전이 없어 약간 답답한 것이었지 초조한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금선경에 이르기가 그리 쉬웠으면 금선경 수사가 얼마 없을 리 없었다. 가만히 선 그의 눈속에 하늘이 차차 어두워지더니 석양이 지고 별이 떠올랐다.

하늘을 올려다보던 한립은 멈칫하더니 청회색 돌판을 꺼내 그 안에 가득 적힌 작은 문자들을 내려다보았다.

냉염 노조에게 받은 <대북도성원공>이었다. 공법을 구하고 연이어 복잡한 상황이 이어져서 까맣게 잊고 저물대 속에 처박아두었었다.

그러다 별빛이 반짝이는 것을 보고 문득 생각이 나 꺼내게 된 것이다.

영환계에서 소북도성원공을 얻어 현규 7개를 뚫고 나서 처음 7개의 선규를 힘들이지 않고 뚫을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현규와 선규 사이에 모종의 연관이 있는 것 같았다.

‘혹시 현규 36개를 뚫으면 36번째 선규를 뚫는 것도 쉽게 풀리지 않을까?’

이런 생각에 한립은 바로 동부로 돌아가지 않고 그 자리에서 서서 석판을 들고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얼굴의 희색이 가시고 곧 쓴웃음이 떠올랐다.

냉염노조가 말한 대로 석반에는 공법의 절반 밖에 적혀 있지 않아서 이걸로 뚫을 수 있는 현규의 수도 18개가 다였다.

현규 36개를 뚫으려면 나머지 공법이 필요했다.

대주천성원공은 냉염노조가 어느 유적에서 찾았다고 했으니 나머지 공법을 구하려면 그에게서 실마리를 얻어야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냉염노조의 진짜 신분을 물어놨어야 했다는 후회가 들었다.

성괴문 전투에서 본 바로 냉염노조는 암암리에 십방루에 가담한 것 같았는데 그런 거대한 조직에서 어떤 사람을 찾는다는 것은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와 같았다.

또 십방루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지만 그곳도 조직 구성이 무상맹처럼 투명하지 않을 수 있었다.

한립은 청회색 석판을 넣어 두었다.

“…….”

몸을 돌려 동부로 돌아가던 그가 몇 걸음 가지 않아 멈추었다.

촤앗!

다급한 울음소리가 멀리서 들리더니 바다가 갈라지고 저둔수가 튀어나와 그의 옆으로 날아들었다.

요수의 입에서 거무스름한 물체가 떨어져 한립의 발치에 굴러다녔다.

꾸우꾸우 거리며 끙끙대는 저돈수의 입술이 무언가에 녹기라도 한 듯 검게 변해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한립은 푸른빛을 요수의 몸에 쏘아 보냈다.

파앗!

그러자 입술 상처가 스르륵 아물어 저돈수를 기쁘게 했고 요수는 잘 보이고 싶은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어댔다.

한립은 검은 물체를 집어 들었다. 주먹 크기의 돌멩이는 검은 빛을 발산하면서도 주변의 모든 빛을 흡수했다.

돌멩이를 건드리자 손끝에서 찌르는 듯한 통증을 느낀 그는 은은한 은빛을 일으켜 반투명한 보호막으로 그것을 감쌌다.

돌멩이의 검은 빛이 지닌 부식의 힘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의식으로 검은 돌멩이를 살펴보던 그는 조금 놀랐다.

법칙의 힘이 아닌 무척 특수한 힘을 지닌 재료였는데 그의 견문으로도 무엇인지 알아낼 수 없었다.

“이걸 내게 주는 것이냐?”

한립은 저돈수를 향해 물었고, 요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이한 물건이기는 한데, 무언인지 모르겠구나. 어디서 난 것이지?”

이어진 물음에 저돈수가 몸을 돌려 먼바다 쪽을 고갯짓하면서 입을 뻐끔거렸다. 뭔가 말을 하고 싶은 것 같은데 나오는 소리는 꾸우꾸우 거리는 게 다였다.

이에 한립은 미소를 머금고 손끝에서 푸른 빛을 날려 요수의 목을 쳤다. 요수가 말문이 트이려면 반드시 변화가 일어나야 하는 부위였다.

“선… 배님……. 음음.”

눈이 휘둥그레진 저돈수가 목소리를 내보았다.

“이제 이 물건의 내력에 대해 말해 보거라.”

“예……. 이 물건은… 아주 오래전에, 부친을 따라……. 음, 돌아다니다… 어느 섬에서, 음… 발견한 것입니다.”

저돈수는 익숙하지 않은지 더듬더듬 말했다.

“어느 섬이지?”

한립이 눈을 반짝였다.

“그게……. 너무, 오래되어서……. 막 영성이 생겼을 때라, 잘 모르겠습니다.”

저돈수의 대답이 점점 유창해졌다.

촤아악!

한립은 손을 저어 바닷물을 일으켰고 물의 장벽에 흑풍해역 지도가 상세하게 떠올랐다.

“지도를 잘 보거라. 대략 어디쯤이었는지 알겠느냐?”

“아마, 여기쯤이었던 것 같습니다.”

저돈수의 대답에 지도를 살핀 한립의 표정이 미미하게 달라졌다. 그가 무상맹에서 첫 번째 임무를 나갔던 홍월도가 있는 해역이었다.

“여기서 이걸 찾았다…….”

“확실한 것은 아닙니다.”

“괜찮다. 이 검은 돌멩이가 더 있느냐?”

“없습니다. 원래는 제가 천천히 연구해보려고 했는데……. 워낙 이상한 물건이라 도저히 뭔지 알아낼 수 없어 선배님께 바치는 것이 나을 듯하여…….”

고개를 조아린 저돈수가 고분고분 답했다. 한립은 피식 미소를 짓고는 단약 하나를 더 날려주었다. 표정이 밝아진 요수가 냉큼 입을 벌려 단약을 받아먹고 기운이 더 강성해졌다.

“이제 가보도록 해라. 이곳에서 보고 들은 것에 대해서는 절대 발설해서는 안 될 것이야.”

한립의 분부에 서둘러 고개를 끄덕인 저돈수가 유유히 헤엄쳐 멀어져 갔다. 한립은 요수가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다 붉은 옥함을 꺼내들었다.

난옥(暖玉)으로 제작된 옥함에 검은 돌멩이를 넣자 빛이 바깥으로 새어 나오지 않았다. 그는 옥함을 넣어두고 손바닥에 진극막을 펼치고 동부로 향했다.

그는 바로 밀실로 가지 않고 약재밭 구석에 모두를 심어둔 구역으로 향했다.

최근 36번째 선규를 뚫는데 집중하느라 수정 알갱이도 응결하지 않아서 거원 괴뢰에게 녹색 액체를 남김없이 모두에게 부어주라고 일러두었었다.

한립의 눈이 반짝였다.

모두가 발아해서 부드러운 뿌리 몇 가닥이 흙 속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아주 작은 새싹이어도 생명력은 왕성했다.

이전처럼 2개의 새싹 이파리에는 동글동글 흐릿한 금색 무늬가 들어가 있었다.

호언 노인의 도병 양육법을 연구해왔고 같은 종류의 도병을 키워본 경험도 있어서 이전처럼 막막하지는 않았다.

두병을 양성하는데 가장 인내심이 필요한 부분이 모두의 발아였는데 새싹만 나와도 절반은 성공이라 할 수 있었다.

그는 한동안 모두를 관찰하다 밀실 방향으로 걸어갔다. 가는 길에 여전히 꽉 닫혀 있던 어느 방에 시선이 갔다. 자신과 달리 해 도인은 수 백년 간 폐관하면서 아무런 소식이나 반응도 없었다.

‘저 안에서 뭘하고 있는 거지?’

한립은 시선을 거두고 밀실로 들어가 앉아 무상맹 가면을 쓰고 임무를 확인했다.

노응초를 찾는 임무는 여전히 아무도 회신이 없었다. 예상했던 바라 그는 한숨을 내쉬고 다른 임무를 두 개를 더 등록했다.

대주천성원공의 완전판을 찾는 임무와 방금 얻은 검은 돌멩이의 감별 임무였다. 이 물건은 어째서인지 그에게 아주 특별한 느낌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일을 마친 거원 괴뢰를 불러다 장천병을 받았다. 병 안에는 녹색 액체 한 방울이 모여 굴러다니고 있었다. 장천병을 옆에 내려놓은 한립은 두 손으로 수결을 맺었다.

웅!

금빛을 강하게 발산하는 그의 등 뒤로 진언보륜이 떠올라 천천히 회전했다. 보륜 위에는 반투명한 시간도문들이 시간법칙 파동을 발산하고 있었다.

수결을 변화시켜 진언보륜을 앞으로 불러낸 그는 130개가 된 도문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진선경 중기 때는 수정 알갱이를 이용해도 시간도문을 108개 까지만 추가할 수 있었는데 진선경 후기에 이러 11개의 선규를 뚫으면서 시간도문이 다시 증가했다.

그렇다면…….

장천병을 든 한립은 체내의 선령력을 주입했다.

쿠쿵!

동부 인근의 천지영기가 격렬하게 떨리면서 거대한 소용돌이를 형성해 눈부신 광선이 몰려들었다.

하늘이 부들부들 떨리고 광풍이 몰아쳐서 바다에도 격랑이 일었다. 이 놀라운 천기현상은 장장 3일을 지속되다 사라졌다.

약간 피로한 기색의 한립은 동부에서 수정 알갱이 한 알을 들고 앉아 있었다. 수정 알갱이를 응결하느라 선령력 소모가 컸지만 이전처럼 완전히 바닥이 난 것은 아니었다.

그는 호흡을 고르며 수결을 맺어 등 뒤에 진언보륜을 불러냈다.

웅웅!

시간도문이 진한 금빛을 머금고 고리 중심으로 금빛 기류가 흘러들어 수직 동공을 지닌 눈을 이루었다.

카착.

금빛 눈의 시선에 수정 알갱이가 깨지면서 금실 한 줄기가 그 안으로 쏘아져 들어갔다. 한립은 강력한 일격을 맞은 듯 몸을 떨었고 진언보륜도 진동했다.

잠시 후 고리 위에는 눈부신 하얀빛이 모여들어 반투명한 시간도문이 하나 추가되었다. 그 광경에 한립은 희색을 드러냈다.

예상대로 진언보륜의 수정 알갱이로 시간도문을 늘릴 수 있게 되었다. 진언보륜을 거둔 한립은 장천병을 다시 거대 괴뢰에게 내주고 다시 녹색 액체를 모으게 했다.

길게 숨을 내뱉은 그는 소모한 선령력을 채우기 시작했다.

* * *

어느덧 20여 년이 흘러갔다.

한립의 등 뒤로 진언보륜이 빠르게 회전하면서 동부 안에 영롱한 금빛을 비추었다. 고리 위에는 믿기지 않는 정도로 많은 시간도문이 빽빽하게 형성이 되어 있었다.

무려 360개였다.

그간 쉬지 않고 수정 알갱이로 시간도문을 늘려왔는데 진선 중기 때처럼 일정 수량에 이른 뒤로 한계에 이르러 더는 늘지 않았다.

수결을 맺은 한립은 금색 파문을 일으켰다. 이전보다 밝고 진한 파문이 밀실 안을 채웠다. 마치 천지영기의 흐름이 멈춘 것처럼 보였다.

금빛 파문 내에서 시간이 흐르는 속도가 크게 줄어 약 3천 배 정도 느려졌다. 손을 저어 진언보륜을 체내로 흡수한 한립은 운공을 해야했다.

진언보륜의 시간도문이 늘면서 신통을 펼치는 데 소모되는 선령력도 늘어서 진선경 후기의 수행으로도 약간 벅찬 느낌이 들었다.

당연히 보륜이 발휘할 수 있는 함유한 시간법칙의 힘도 크게 늘어났다.

‘이거라면 도단 없이도 시간법칙을 깨우칠 수 있지 않을까?’

한립은 단약을 하나 꺼내 삼키고 눈을 감았다.

반나절 후.

콰르르.

한립이 폐관 수련 중인 밀실이 크게 울렸다.

기운과 소음을 차단하는 금제 바깥에서도 흐릿하게 금빛과 강력한 시간법칙 파동이 느껴질 정도였다.

바로 그 순간, 해 도인이 폐관 중인 석실 대문에서 금빛이 반짝였다.

쿠릉.

둔중한 소리와 함께 대문이 천천히 열리고 해 도인이 가느다란 금빛 뇌전들을 두르고 걸어 나왔다. 마치 금빛 실로 짠 옷을 걸친 것 같았다.

해 도인의 몸은 허공과 융화가 된 듯 보일 듯 말 듯했다.

“…….”

그는 한립의 밀실을 바라보다 다시 몸을 돌려 자신의 석실로 돌아들어갔다. 며칠이 지나 한립이 있는 밀실의 이현상이 차차 가라앉았다.

한립은 찢겨진 의복 사이로 드문드문 피를 흘리면서 창백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이번에도 실패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

어둠 속에서 미지의 힘이 그가 시간법칙을 깨우치는 것을 막고 있는 것 같았다.

파앗.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생긴 한립은 수결을 맺어 푸른빛으로 몸의 상처를 회복시켰다. 그는 새 옷을 꺼내 갈아입고 곧바로 단약을 삼키고 운공해 반나절 만에 안색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는 조용히 눈을 뜨고 초점 없이 전방을 응시하다 한숨을 내쉬었다. 도단 없이는 시간법칙을 터득하는 일은 어림도 없을 듯싶었다.

빠르게 마음을 굳힌 그는 무상맹 가면을 쓰고 화면을 불러내 다시 임무들을 살폈다.

‘엇!’

한립의 표정이 밝아졌다가 다시 원래 대로 돌아갔다. 임무란에 누군가 회신을 했는데 노응초가 아닌 검은 돌멩이 감정 임무에 대해서였다.

고개를 저은 한립은 법결을 던져 넣었다. 기대했던 노응초 관련 소식이 아니라도 궁금하긴 마찬가지였다.

일각 정도 기다렸을까?

임무의 문자가 밝은 빛을 머금고 밀실 안으로 푸른빛을 투영했다.

화아앗.

적홍색 용머리 가면을 쓴 인물이 점점 허공에 떠오르더니 점차 뚜렷해졌다. 가면 미간에 숫자 삼(三)이 새겨져 있었다.

한립은 그걸 보고 표정이 굳었으나 가면을 쓰고 있어 바깥으로는 드러나지 않았다. 허상이 쓴 가면은 교삼(蛟三)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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