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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656화 (1,413/2,000)
  • 1656화. 마지막 한 걸음

    *

    한립은 시간만 충분히 주어지면 더 많은 만륜단을 제련할 수 있었고, 진선경 후기에 머무는 내내 부족함 없이 복용하면서 수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립이 기분좋은 것은 단지 많은 양의 단약을 얻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지난 3년 동안 연단에 매진하면서 연단술이 빠르게 늘었고, 점점 어떤 고비에 이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달리 말해 그 고비를 뛰어넘으면 또 다른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말이었다.

    그는 길게 숨을 내쉬며 표정을 바로하고 성큼성큼 약재밭으로 향했다. 그의 발걸음이 닿은 곳은 모두가 심어진 곳이었다.

    ‘흠.’

    거원 괴뢰가 일정 기간마다 녹색 액체를 떨구어 주었는데도 모두는 아직 싹이 틀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이전에 한 번 싹을 본 경험이 있어서 이번에는 조급해 않고 하얀 연못이 있는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하얀 안개가 뿌옇게 낀 연못에 혈홍색 연꽃들이 떠서 달콤한 향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 중에는 군계일학과 같이 유독 커 쟁반만 한 것도 있었다.

    한립은 그 큰 연꽃의 아래쪽에 검은 진흙에 숨겨진 물 항아리 굵기의 연근을 살피고 고개를 끄덕였다.

    짙은 핏빛을 머금은 연근에는 작은 뿌리도 붙어 있었지만 색깔과 크기가 눈에 띄게 차이가 났다. 가장 큰 연뿌리 어딘가에는 먹을 뿌려 놓은 듯 주먹 크기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경매에서 낙찰받은 얼룩 있는 혈정우가 번식을 해서 만륜단의 주재료들을 키우는 중이었다.

    녹색 액체 덕분에 잔뿌리들도 적어도 2, 3만 년의 연식을 지니게 되었고, 가장 오래된 뿌리는 단약을 제련하면 당연히 약성이 남다를 것이다.

    한립은 가장 큰 혈정우 표면의 어두운 부분에 안력을 집중했다.

    몇 년 사이 많이 자라 색깔이 진해지고, 잎사귀의 잎맥 같은 문양이 형성되어 있었다. 거기다 미약하지만 법칙파동이 느껴졌다.

    시간법칙 말고 또 다른 법칙의 힘이었다.

    낙찰을 받을 때는 어떤 법칙파동도 느껴지지 않다가 이제 와서 변화가 생긴 것은 녹색 액체가 영향을 미쳤을 확률이 높았다.

    한립은 하얀 물이 가득 찬 연못을 한 바퀴 돌아보고는 바깥으로 나갔다. 침실로 들어간 그는 침상에 머리를 대자마자 잠에 빠져들었다.

    3년간 쉬지도 못하고 만륜단을 제련하느라 심력 소모가 컸다.

    한순간도 소홀히 할 수 없는데다 틈틈이 진언보륜까지 발동해야 해서 진선경 후기의 수행과 방대한 의식의 힘을 지닌 그도 어쩔 수 없이 피로가 쌓여있었다.

    본격적으로 수련을 시작하기 전에 몸과 마음을 최상의 상태로 돌려놓을 생각이었다.

    3일 후, 밝은 표정으로 밀실로 돌아온 한립은 가부좌를 틀고 한 손에 푸른 옥병을 들었다. 옥병을 기울여 꺼낸 것은 은은한 금색의 만륜단이었다.

    단약을 삼키자 뜨끈한 기류가 기경팔맥을 타고 콸콸 돌아다녔다.

    ‘강렬해!’

    몸 안에서 일만 마리 준마들이 뛰어다니는 것 같은 기분에 순간적으로 미간을 좁힌 한립은 천천히 고통에 적응하면서 기뻐했다.

    만륜단의 약효는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강했다.

    가볍게 숨을 고른 그는 묵묵히 진언화륜경을 운용하면서 무아지경에 이르렀다.

    화아앗.

    부드러운 금빛이 그를 감싸고 있었다.

    봄이 가고 겨울이 오기를 여러번 바뀌어 동부 대문 밖의 먼지가 워낙 두껍게 쌓여서 이제는 산 벽과 대문이 별 차이가 나지 않았다.

    오백년의 시간은 범인에게는 더없이 긴 세월이어서 왕조가 변하고 각 종족의 흥망성쇠가 결정되곤 했지만 수도자들에게는 찰나에 불과했다.

    쿠르릉!

    산봉우리 위에 바람이 불고 먹구름이 몰려들어 천둥번개를 내리쳤다.

    주변 만리 내의 천지영기가 요동치며 거대하게 소용돌이쳤고, 그 안에서 큼지막한 빛덩이들이 생겨나 작은 섬으로 몰려들었다.

    이 이름 모를 섬 백 리 밖에는 새빨간 작은 섬이 하나 있었는데 붉은 산호들이 겹겹이 쌓여 만들어진 것이라 햇살을 받아 반짝거렸다.

    쏴아!

    산호섬 곁의 파도가 크게 출렁이고 적홍색 요수가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돼지를 닮은 짐승은 새빨간 털이 강철 바늘처럼 수직으로 솟아 있고 입가에 새하얀 송곳니 2개가 길게 자라나 있었다.

    특이한 점은 요수의 다리가 6개라는 점이었다. 외관은 상당히 포악해 보였는데 몸이 비대해서 멀리서 보면 동그란 수박처럼 보일 정도로 익살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흑풍해역 현지 수사가 요수를 보았다면 깜짝 놀랐을 것이다. 인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저계 요수인 저돈수(猪豚獸)가 놀랍게도 원영 후기의 기운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요수는 동그란 몸을 폭발적으로 부풀린 다음 입을 벌려서 주변에 모여든 영기의 빛덩이들을 빨아들였다. 저돈수의 몸이 붉은 빛으로 뒤덮여 반짝거리고 있었다.

    멀리 작은 섬의 웅장한 천기 현상은 그 후로도 한 시진 정도 지속하다가 서서히 사라졌다. 저돈수의 몸은 이전보다 훨씬 밝게 빛나고 있었다.

    요수는 천기 현상의 중심이었던 섬 쪽으로 아쉽다는 듯 두어 번 울부짖었다.

    이 저돈수는 붉은 산호섬에 자리를 잡은 지 오래됐는데, 수백 년 전에 인근 섬에 강력한 인족 수사가 와 요수들이 다 떠나는데도 여전히 이곳을 지키고 있었다.

    당시 막 영성이 생길 때라서 어리숙했기 때문이었다.

    다행이 인족 수사는 섬에 머물면서 요수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줄곧 들어앉아만 있었는데, 다른 강력한 요수들이 사라져 저돈수는 더욱 평안한 삶을 누릴 수 있었다.

    그래서 지능이 높아진 뒤에도 고민 끝에 이곳을 떠나지 않기로 결정을 내렸다.

    남기로 한 이유 중에는 백여 년에 한 번씩 섬에서 거대한 영기의 소용돌이가 발생한다는 것도 한몫했다.

    오늘로 무려 11번째 영기의 소용돌이였다.

    저돈수는 그때마다 타고난 신통을 발휘해서 실체화된 영기 덩어리를 흡수해 수행이 쑥쑥 늘었고 겨우 연기기 작은 짐승이었던 처음과 달리 지금의 경지에 이를 수 있게 되었다.

    수행이 원영기 최고봉에 이른 요수는 조금 전 천기 현상이 더 지속됐다면 다음 경지로 넘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다음 기회를 기다려야겠구나…….’

    첨벙!

    저돈수는 아쉬움을 품고 꼬리를 저어 물속으로 파고 들었다.

    * * *

    동부 안, 금빛을 휘감은 한립이 전신에서 막대한 영기의 압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그의 몸에서 반짝이는 금빛 점들은 이제 35개나 되었다.

    미친듯이 반짝거리던 금빛이 차차 사라지고 한립이 즐거운 표정으로 눈을 떴다. 몇 년 동안 수행이 급격히 늘어서 겨우 5백여 년만에 선규를 11개를 뚫은 것이다.

    만륜단을 평범한 단약처럼 마구 집어 삼킨 덕분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겨우 5백년 만에 선규를 11개나 더 뚫은 것은 한립의 예상을 벗어난 성과였다. 그는 최소한 천년은 걸릴 거라 짐작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더 이상한 점은 단약에 내성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줄곧 만륜단을 복용해 왔지만 다른 단약 때처럼 약효가 서서히 줄어들지 않았다.

    여러 가지 원인을 생각해보았지만 어느 것 하나 확 와닿지 않았다. 물론 나쁜 일이 아니었으니 머리 아프게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한립은 잠시 침음하다 고개를 저었다.

    선규 35개를 뚫었으니 36번째를 뚫는데 성공하면 금선의 경지에 이를 수 있었다.

    드디어 금선이 되는 것이다.

    금선과 진선은 한 글자 차이였지만 그 실력은 천양지차라서 영계에서 대승기 수사가 도겁해서 선인이 되는 것과 같은 엄청난 성과라 할 수 있었다.

    그 고비를 뚫고 나가려면 선규 36개를 뚫는 것 외에 천인의 삼쇠 중 마지막 규쇠를 극복하는 것이 가장 문제였다.

    아직 어느 쇠락도 경험해 보지 못했으나 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만만히 볼 게 아니었다.

    천인의 삼쇠에 저항하려면 본질적으로 법칙의 힘을 장악하는 것은 기본이었다.

    그는 삼대 지존법칙 중 한 가지인 시간법칙을 수련하고 있었으니 진정으로 깨우칠 수만 있다면 진선경의 삼쇠에 저항하는데 큰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오랜 세월 갖은 방법을 써보았지만 전부 실패했고, 이제 믿을 것은 도단을 제련해 복용하는 방법 밖에 없었다.

    “……!”

    불현듯 무언가를 감지한 한립이 몸을 일으켜서 약재밭으로 걸어갔다.

    약재밭 한 구석의 새까만 흙에서 뭔가 습하면서 차가운 기운이 퍼지고 있었다. 흙 속에는 하얀 삼(蔘)이 백옥으로 조각해 놓은 듯 매끄럽고 단단하게 뿌리박고 있었다.

    도단의 재료 중 하나인 천조삼이었다. 고액의 보수를 주고 무상맹에서 천조삼 새싹을 구해 심어두었다.

    어린 새싹은 거원 괴뢰가 녹색 액체로 숙성을 시켜서 이제 연단에 써도 될 만한 십만 년된 천조삼이 되어 있었다.

    남은 재료는 노응초 하나였는데 고가를 제시했음에도 아직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어차피 흑풍해역에 있는 그는 무상맹의 소식을 기다리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고, 원래 이런 희귀한 재료는 인연이 따라줘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한립은 작게 탄식하고는 밀실로 돌아와 앉았다. 도단을 제련할 여건이 되지 않는다고 놀고 있을 그가 아니었다.

    36번째 선규를 뚫는 시도를 계속해서 최소한 수행을 진선 후기 최고봉까지 끌어올려 두어야 했다. 그는 만륜단 한 알을 꺼내 입에 집어넣고는 눈을 감았다.

    * * *

    50, 60년이 훌쩍 지났다.

    쏴아!

    백 리 밖 산호섬에서 물결이 출렁이고 적홍색 바다 요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저돈수는 멀리 작은 섬을 바라보았다. 경험상 곧 영기의 소용돌이가 나타날 시기였다.

    몇 년간 저돈수는 기연을 놓치지 않기 위해 매일같이 작은 섬을 관찰했지만 거의 10년 간 영기의 소용돌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저돈수의 얼굴에 초조한 기색이 어렸다.

    ‘인족 수사가 떠난 거라면?’

    한참을 망설이던 요수가 비대한 몸을 움직여 작은 섬으로 헤엄치기 시작했다.

    백 리는 원영 후기에 이른 저돈수에게 얼마 되지 않는 거리였다. 요수는 최대한 기운을 감추고 섬의 가장자리를 따라 인족 수사가 머무는 동부쪽으로 헤엄쳐 갔다.

    울창한 숲에 바닷바람이 불어 풀잎들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핑.

    유심히 숲을 관찰하던 요수는 입을 벌려 아주 미세한 남색 빛을 날려보았다.

    수풀로 들어간 남색 빛은 바다에 흘러 들어간 진흙처럼 순식간에 녹아 사라졌고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저돈수는 금제가 아직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희색을 드러내고 몸을 돌리려 했다.

    “하하.”

    바로 그때 바람을 타고 가벼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휙! 하고 고개를 돌린 저돈수는 너무 놀라서 혼이 달아나기라도 할 것 같았다. 멀지 않은 해안가에 푸른 장포를 걸친 사내가 서서 잔잔히 미소를 띠고 있었다.

    촤아앗!

    기함한 저돈수는 몸을 돌려 바닷속으로 첨벙 뛰어들었으나 사내의 손짓에 물결이 거꾸로 솟구쳐 갇히고 말았다.

    “원영 후기의 저돈수? 쉽게 볼 수 있는 일은 아니지.”

    한립은 마음이 답답해 오랜만에 동부를 나와 섬을 거니는 중이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만륜단을 쉼 없이 복용하고 무상맹에 해결 방법을 구했음에도 마지막 선규가 뚫릴 기미가 보이지 않아 속이 편하지 않았다.

    꾸에에엑! 꾸엑! 꾸에에엑!

    저돈수가 울부짖으면서 다리를 열심히 버둥거려도 속박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말 그대로 돼지 멱따는 소리 같은 처량한 울음소리였다.

    잠깐 저돈수를 데리고 놀던 한립은 심란했던 기분이 약간 풀리는 것을 느끼고 웃음 지었다.

    “해칠 생각 없으니 걱정하지 말거라.”

    그의 손끝에서 붉은 단약이 날아가 울부짖고 있는 저돈수의 벌어진 입속으로 쏙 들어갔다. 깜짝 놀란 요수가 울음을 멈추고 둥그런 몸에서 강렬한 붉은 빛을 발산했다.

    체내의 기운이 요동치다 급상승하고 있었다.

    꾸엑?

    저돈수는 아연한 얼굴로 몸부림을 멈추었다.

    붉은빛이 시간이 지날수록 진해지더니 결국에는 고비를 뚫고 요수를 화신기 경지로 이끌었다. 동시에 털과 피부의 붉은 기가 싹 사라지며 눈처럼 새하얀 색으로 바뀌었다.

    아랫배에서는 피부가 꿈틀꿈틀 움직이다 불룩하게 다리 두 개가 더 자라나려 하고 있었다.

    “벌써 다리가 두 개나 늘다니. 자질이 나쁘지 않아.”

    눈썹을 끌어 올린 한립은 펼치고 있던 손바닥을 풀었다.

    쏴아!

    저돈수를 가둔 바닷물이 힘을 잃고 아래로 떨어졌다. 자유를 회복한 요수는 바로 달아나지 않고 허공에 떠서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하, 어린 녀석이 내가 널 도와 화신기 고비까지 돌파해 주었는데도 아직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냐?”

    눈을 껌뻑거리던 저돈수는 가볍게 웃음 짓는 한립을 응시하다 몸을 돌려 망망대해 속으로 사라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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