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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655화 (1,412/2,000)

1655화. 만륜단(万輪丹)

*

시간이 지나 제례가 절반쯤 지났을 때 네 사람은 할 일을 마치고 따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낙 장로, 제례는 오몽도의 큰 행사인데 류석 수사께서는 오늘도 참석하지 않는 것인가?”

하얀 얼굴 청년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한 번 뵙고 류 수사를 본 적이 없군. 수백 년 동안이나 폐관 수련을 하는 것을 보면 무슨 대단한 비술이라도 수련하고 있는 것 같은데 말이네.”

중년 유생도 거들었다. 묘령의 여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분명히 의문을 표하는 눈빛으로 낙풍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낙풍이 그들을 향해 허허 웃음을 지었다.

“제가 어제 류석 대인께 청을 올렸습니다. 모두 바라시는 대로 오늘은 대인을 뵐 수 있으실 겁니다.”

“그게 사실인가?”

대수롭지 않은 척 물을 때와 달리 세 사람은 표정이 달라져 되물었다.

“물론입니다.”

“잘된 일일세. 요즘 흑풍해역 분위기가 심란해서 우리 오몽도가 앞으로 어찌해야 할지 방향을 잡아주셔야 할 때니까 말이네.”

다른 두 사람과 시선을 교환한 하얀 얼굴 청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철암 수사의 말이 맞습니다. 흑풍도와 청우도의 세력이 커서 우리 같은 작은 섬은 상대가 될 수 없으니 속히 입장을 정해야 걱정이 없을 겁니다.”

중년 유생이 그의 말을 받았다. 하얀 얼굴 청년이 철암, 중년 유생이 신종이었다. 낙풍은 그 말에 약간 어두운 얼굴로 침묵을 지켰다.

“너무 그렇게 비관적으로만 생각하지 마세요. 류 수사에 저희 셋이면 상당한 전력이니까요.”

묘령의 여인이 처음으로 의견을 밝혔다.

“허허, 오히려 영운 수사께서 너무 상황을 긍정적으로만 보시는 것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철암은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가만히 표현하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제례가 막바지에 이르렀는데도 한립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낙풍은 점점 초조해져 수시로 한립이 폐관 수련하는 곳을 힐끗거렸고 철암 등 다른 도주들의 표정이 묘해졌다.

“흠, 류 수사께서 바쁜 일이…….”

철암이 말을 끝맺기 전에 멀리서 남색 빛이 신속하게 날아들었다.

쿠르르.

하늘의 천지원기가 맹렬하게 요동치고 남색 광채가 드리워 제단을 물들이고 있었다.

이곳에 모인 어느 수사와도 비교할 수 없는 강력한 위압감이 느껴져 광장의 사람들은 몸이 꽁꽁 얼어붙은 것처럼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했다.

“진선경 중기!”

하늘을 올려다본 철암 등 세 도주의 안색이 급변했고 신종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침을 꿀꺽 삼켰다.

철암와 영운의 얼굴에도 놀람과 공포의 감정이 떠올랐다. 광채가 씻은 듯 사라진 자리에 남색 인영이 서서히 내려와 제단에 발을 디뎠다.

인영을 두른 빛이 지독하게 밝아서 용모는 보이지 않았지만 뒷짐을 진 사내의 윤곽은 어렴풋이 확인할 수 있었다.

“조신 대인!”

낙풍이 뛸 듯이 기뻐하며 나서서 예를 올렸다.

“조신 대인을 뵙습니다!”

낙 가 사람들이 족장을 따라 몸을 숙이자 광장의 사람들이 서둘러 예를 올렸다. 시선을 마주친 철암 등 세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그만하면 되었다.”

잔잔한 목소리에 사람들이 몸을 펴고 남색 인영을 올려다보았다.

오몽도 낙 가 사람들의 눈빛은 뜨거웠고, 나머지 세 섬의 수사들은 기뻐하는 한편 왠지 마음이 복잡해 보였다.

“폐관 수련을 해왔지만 인근 섬들과 흑풍해역의 상황에 대해서는 알고 있다.”

남색 인영은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말에 철암 등의 표정이 미미하게 굳었다.

“낙풍, 그간 오몽도와 나머지 세 섬을 잘 관리했더구나. 현월단(玄月丹)이 들어있으니 가져다 쓰거라.”

“감사합니다!”

낙풍은 하얀 옥병을 받고 감동해 허리를 숙였다. 그를 보는 다른 세 도주의 눈빛에 부러움이 느껴졌다. 현월단은 진선경 수사의 수련에도 도움이 될 만큼 귀한 단약이었다.

물자가 부족한 흑풍해역에서 그런 단약을 구할 곳은 흑풍도가 유일했다.

“열심히 수련해서 하루빨리 더 높은 경지에 올라 진선의 지위에 이르기를 바란다.”

“조신 대인의 기대에 부응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철암, 신종 그리고 영운 세분도 그간 수고가 많았습니다. 이 영보들은 수사들을 위한 것입니다.”

남색 인영의 손에서 세 줄기의 빛이 날아가 각각의 도주 면전에서 멈추었다. 비취색 여의와, 하얀 구슬 그리고 노란 깃발이었다.

법칙 파동을 내뿜는 최상급 법보들은 선기와 그리 격차가 크지 않은 대단한 보물이었다.

세 사람은 얼굴이 활짝 펴지며 얼른 보물을 받고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남색 인영은 낙풍에게 저물법기를 하나 더 날려 보냈다.

“단약과 수련에 필요한 물건들이 들어갔다. 낙풍 네게 맡길 것이니 잘 배분하여 오몽도 전체의 실력을 키울 수 있게 쓰거라.”

“예.”

“흑풍도와 청우도 간의 분쟁은 우리 오몽도와는 무관하다. 불필요한 영향을 받지 않기 위해 오늘부로 모든 이들은 섬을 떠나는 것을 엄히 금하고 봉쇄하도록 한다.”

한립의 결정에 낙풍 등 수사들은 예상했다는 듯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모두 무슨 걱정을 하는지는 잘 알고 있다. 내가 있는 한 너희들을 안전하게 보호할 것이니 안심하고 생활하도록!”

“예!”

남색 인영의 마지막 말에 사람들은 광장이 떠나갈 듯 환호했다. 모인 이들의 가슴이 믿음으로 충만해지는 순간이었다.

남색 인영은 오래 머물지 않고 휙 하고 몸을 날려 사라졌다.

그가 사라진 방향을 보며 철암, 신종, 운예의 눈에도 의심은 사라지고 부러움과 경탄만이 가득했다.

* * *

며칠 뒤, 작은 섬에서 가부좌를 틀고 있던 한립이 미소를 머금고 눈을 떴다.

지기화신이 오몽도를 포함한 네 개의 섬에 금제를 발동해 섬을 봉쇄하고 외부와의 연락을 전부 끊었다는 소식을 전해왔기 때문이다.

섬을 봉쇄하면 흑풍도와 청우도 간의 쟁투에 휘말릴 가능성도 적어지고 그의 신분이 노출될 일도 없어졌다.

이제 안심하고 수련에 매진하면 되었다. 그는 아예 자리를 털고 일어나 약재밭으로 향했다.

넓은 약재밭이 다양한 색깔의 금재로 열댓 개 구역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영초에 맞게 어떤 곳은 뜨겁고 습하고, 어떤 곳은 차갑고 무척 건조했다.

저물대에 한동안 보관해둔 탓에 영초들이 조금 시들시들해 보였지만 곧 생기를 되찾을 게 분명했다.

원래 약재밭에 심어 두었던 영약들 외에 한립은 최근에 새로 얻은 종자들과 또 다른 두병의 모두도 심어두었다.

현재 그가 지닌 두병의 수는 너무 적어서 어서 수를 채워야 진정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약재밭에는 만륜단 주재료인 만륜과, 낙영화, 혈정우도 있어서 특별히 한립의 중시를 받았다.

만륜단에 필요한 재료들이 다 갖추어졌기에 이제 주재료들만 적정한 연식에 이르면 연단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한립은 거대 원숭이 괴뢰에게 장천병을 내주고 밀실로 돌아와 가부좌를 틀었다.

약재밭을 살펴본 결과 만륜단 주재료들이 잘 자라고 있어서 오래지 않아 연단을 시작할 수 있을 듯했다.

그는 지금 도단 제련에 가장 신경을 쓰고 있는데 아직까지 천조삼과 노응초를 구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무상맹 가면을 쓰고 푸른 화면을 불러내 이전에 등록해 놓은 임무들을 확인했다. 그러나 두 영약을 구하는 임무는 그대로였다.

‘어쩔 수 없지.’

그는 잠시 고민하다 이전 임무를 취소하고 다시 임무를 등록했다.

이번에는 보수가 무려 이전의 3배였다. 이 정도로 높은 보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연락이 올 것이다.

그는 가면을 거두고 저물 법기 2개를 꺼내들었다. 청우도 수사들에게서 빼앗은 물건이었다. 의식을 방출한 그는 고개를 저었다.

외부세계 수사들과는 너무 차이가 나는 물건들이 대부분이었다.

팟.

그러던 와중에 한립이 눈썹을 꿈틀하며 저물 법기에서 푸른 영패를 불러냈다.

대머리 거한의 저물 법기 속에 있던 영패는 한면에는 봉황 비슷한 푸른 새 그림이, 다른 면에는 우(羽) 자가 새겨져 있었다.

“청우도에서 쓰는 영패인 것 같은데…….”

영패에 대머리 거한에 대한 정보가 담겨 있지 않아 신분을 증명하는 용도로 쓰이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영패를 이리저리 살펴보다 다시 넣어두었다. 근본적으로 청우도 같은 흑풍해역 세력에 큰 관심이 없기 때문이었다.

한립은 다시 기운을 정돈하고 진륜화륜경 3성 공법을 되뇌기 시작했다.

1성과 2성에 비해 이번 공법이 너무 난해해서 진선 후기에 이르렀음에도 아직 진언화륜경 3성을 제대로 수련해본 적이 없었다. 어차피 만륜단의 주재료들이 숙성되는 동안 시간이 있으니 노력을 해볼 요량이었다.

수련을 시작하자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30년 뒤, 한립은 한 번도 동부의 대문을 연 적이 없었고 아무도 드나들지 않아 문지방에 먼지만 가득했다.

그때 그는 약재밭에 서서 금색 나무에 달린 금빛 과실 3알을 쳐다보고 있었다. 바로 만륜과였다.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인 그는 만륜과를 따서 연단실 방향으로 걸어갔다. 가는 길에 갈림길이 나오자 잠시 걸음을 멈추고 해 도인이 폐관 수련중인 곳을 바라보았다.

한립에게 조용한 밀실을 준비해달라고 한 후로 어느덧 10년이 흘렀는데도 아직까지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뭘하고 있는 것인지…….’

한립은 고개를 저었다.

해 도인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가 헤아리기 힘든 비밀의 냄새가 풍겼다. 허나 그에게 불리한 비밀만 아니면 파고들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한립은 곧장 연단실로 가서 금제를 발동하고 자리를 잡았다.

그간 지기화신에게 제공하는 것 외에는 대부분 녹색 액체를 만륜과, 낙영화, 혈정우 세 가지 영약에 쏟아부어서 이제 족히 30번은 연단할 수 있는 재료가 준비되었다.

그는 반나절 정도 눈을 감고 마음을 가라앉힌 후 번쩍 눈을 떴다.

휙!

그의 손짓에 은색 연단로가 바닥에 떨어지고, 소매 속에서는 은색 화염 소인이 빠져나와 그 밑으로 들어갔다.

화르르.

소인은 화로 밑에 가부좌를 틀고 수결을 맺어 전신의 화염을 크게 일으켰다. 만륜단을 30번 제련하는데 필요한 재료들이 각각 모여 질서정연하게 옆에 준비되었다.

만륜단 제련법은 머릿속으로 수십 수백 번 생각했기 때문에 무척 익숙했다. 입으로 푸른빛을 뿜어 화로의 뚜껑을 연 한립은 만륜과를 꺼내 푸른 검빛으로 금색 과즙으로 만들어 버렸다.

과실의 씨앗은 당연히 빼서 한쪽으로 치워놓고 조심스럽게 과즙만을 화로에 흘려 넣었다. 그 뒤로는 하얀 점성이 있는 재료가 뒤따랐다.

* * *

연단실의 대문이 닫힌 지 어언 3년.

쿠쿵.

연단실 안에서 밝은 빛이 번쩍이고 굉음이 들려왔다. 밀실을 박차고 나선 한립의 표정이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그의 손에는 눈알 크기의 단약이 하나 들려 있었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표면에 동글동글한 문양들이 실처럼 가느다랗게 들어가 있어 굉장히 현묘한 느낌을 주었다.

만륜단이었다. 금빛의 동글동글한 문양들이 많다고 하여 이 단약의 이름이 만륜단이 된듯 싶었다.

진선경 후기 수사의 수행 증진에 필요한 단약은 제련하기가 무척 복잡하고 어려워서 그가 지금까지 해본 연단 중 가장 심혈을 기울여야 했다.

연단에 일가견이 있는 그 역시 진언보륜을 이용해 과정을 천 배 정도 느릿하게 해 처음 1년 간은 10번의 도전 중 9번을 실패하고 1번 성공했을 때도 겨우 5알 밖에 얻지 못했으니 말해 무엇 하겠는가!

그러나 이런 실패를 통해 나중에는 성공률도 높아지고 한 번에 제련할 수 있는 단약의 개수도 늘어 30번 분량의 재료로 총 55개의 만륜단을 얻었다.

평범한 지단사는 30번 분량의 재료는 고사하고 10번 분량의 재료도 구하기 힘들고 성공률도 2할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무척 놀라운 성과였다.

그래서 만륜단이 외부세계에 노출되면 진선경 후기 수사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어 경쟁하는 것이다.

웅산과 같이 신분이 높은 진선경 후기 수사도 만륜단을 얻으면 아까워서 수련하는데 쓰지 못하고 선규를 뚫을 때처럼 중요한 고비에 복용하려고 할 테고!

진선경 후기 수사를 위한 단약은 북한선역 전체를 뒤져도 몇 가지가 되지 않았고 촉룡도 같은 거대 세력도 그리 많이 보유하고 있지 않았다.

그렇지 않았으면 금선경 수사가 몇은 더 늘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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