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654화 (1,411/2,000)
  • 1654화. 장소 선정

    *

    궁전 안 제단 위에는 그의 지기신상인 조각상이 서 있었고, 두 명이 그 앞에 절을 하면서 무어라 중얼거리고 있었다.

    대승기 수행을 지닌 두 사람의 몸에서 강렬한 신념의 힘이 흘러나와 신상으로 흡수되었다. 참배를 마치고 고개를 든 수사들은 낙풍과 짙은 눈썹에 눈이 큰 중년인이었다.

    한립도 중년인의 얼굴을 기억했다.

    그는 분명 낙 가의 합체기 장로였는데 지난 수백 년 사이 대승기에 이른 듯했다.

    이때 발걸음 소리가 울리고 낙 가의 복색을 한 청년이 걸어왔다. 청년은 궁전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바깥에 서서 예를 올렸다.

    “족장님과 대장로님께 아룁니다! 제전 준비를 마쳤습니다.”

    “알겠다. 도주들도 자리에 도착한 것이냐?”

    “철암 도주와 신종 도주께서는 이미 출발했다고 연락해 왔고, 영운 도주 쪽은 모운도에 급한 일이 생겨 약간 늦겠지만 내일 제전 대례 전까지는 참석할 수 있다고 전해 왔습니다.”

    몸을 일으킨 낙풍의 질문에 청년이 공손히 답했다. 한립은 그들의 대화를 듣고 놀란 눈빛을 했다.

    철암과 신종은 그가 한구와 곡골부인을 처리한 뒤 받아들여 두 섬에 파견을 보낸 산수들이었다.

    그리고 모운도는 인근의 또 다른 섬이었는데 청년의 말을 들어보니 역시 오몽도에 귀속된 것 같았다.

    ‘낙풍이 잘 꾸려나가고 있었구나.’

    오몽도는 그가 없는 사이 점차 영향력을 키워 일대의 제법 강력한 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이들이 말하는 제전 대례이란 오몽도의 풍습으로 50년에 한 번씩 개최되었다.

    “잘했으니, 이만 가보거라. 제전 진행에 소홀함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야.”

    “예!”

    낙풍이 손을 젓자 청년이 예를 올리고 물러났다.

    “족장님 이번 제전에 류석 대인께서 참석해주실지요?”

    “……수련에 바쁘셔서 이번에도 아마 어렵지 않을까 싶네.”

    “수백 년째 모습을 보이시지 않는데 수련 중에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니겠지요?”

    “어허, 어디서 그런 소릴 하는 것인가! 엄청난 실력을 지닌 대인께 무슨 일이 생길 리가! 게다가 수행이 높은 분들이 수백 년 혹은 천 년씩 폐관 수련을 하는 일은 흔한 일일세. 앞으로 그런 말은 삼가게!”

    얼굴을 굳힌 낙풍은 호되게 낙명을 질책했다.

    “저도 근거 없는 소문은 믿지 않습니다만, 섬의 족인들은 낙몽 선조가 실종되는 일도 겪지 않았습니까. 섬이 안정을 되찾고 발전하고 있어도 다들 혹시나 또 선조께서 사라지는 일이 생기지는 않을까 걱정하고 있어 드려본 말씀입니다.

    요즘 전란 때문에 흑풍해역 전체의 분위기가 뒤숭숭해지니까 벌써 몇몇은 이런저런 헛소문을 퍼트리고 있기도 하고요. 게다가 철암, 영운 등이 표면적으로는 예를 다하지만 류석 대인이 장기간 모습을 드러내시지 않으면 어찌 나올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낙명의 말에 낙풍도 미간만 찌푸렸다. 안 좋은 소문이 암암리에 돌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족장님께서 류석 대인께 청을 한 번 드려주시면 안 될지요? 제전에 잠깐이라도 얼굴을 비춰주시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겁니다.”

    “알겠네, 내 대인께 고해 보겠네.”

    낙명의 건의에 낙풍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제전에 대해 논의하는 사이 한립은 조용히 그 자리를 떠났다.

    낙풍이 분수에 맞지 않는 욕심을 부리거나 그가 준 권력을 남용하고 있지는 않을까 살펴본 것이었는데 여전히 그의 지시에 잘 따르고 있었다.

    오몽도를 벗어난 한립은 인근 해역으로 향했다. 거대한 소용돌이가 치면서 솨솨 거리는 물소리가 들려오는 곳이었다.

    신영이 흐릿해진 그는 물속으로 들어가 해저에 이르렀다. 반구형 남색 보호막이 반짝이고 있는데도 쪽빛 바닷물은 거칠 것 없이 안팎을 넘나들었다.

    법결을 날려 보호막에 통로를 열고 들어가자 지기화신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머리 위에 물의 법칙의 실을 띄우고 있었다.

    그간 법칙의 실은 꽤 두꺼워졌고 깨알 같은 주술문자들이 그 안에서 반짝였다.

    강력한 영기의 압력을 내뿜는 지기화신도 벌써 진선 중기 최고봉의 경지에 이르러 후기 경지에 이를 날이 얼마 남지 않아 보였다.

    한립은 지기화신의 성장에 그리 놀라지 않았다.

    시간법칙을 지닌 수정알갱이로 중수를 응련하며 수련을 했으니 진선 중기에 이른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화신이 남색 빛을 흡수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니 바닷속 소용돌이도 천천히 흩어졌다.

    “그간 고생 많았다.”

    “저와 당신은 본래 한 몸이니 그런 말씀은 하실 것 없습니다. 이것이 그간 모은 중수입니다.”

    한립의 치하에 지기화신은 담담히 검은 보따리를 꺼내 건넸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굉장히 무겁습니다.”

    지기화신은 미리 당부하고 나서야 손을 놓았다.

    “……!”

    한립은 팔에 힘을 주었지만 보따리를 든 손이 묵직해지며 몸이 앞으로 쏠릴 뻔했다. 기합을 넣은 그의 팔뚝이 근육질로 부풀어 올라 금빛을 머금고서야 간신히 보따리를 들어 올릴 수 있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제련을 마쳐야 중수를 자유롭게 조종할 수 있다지만 그의 힘으로도 들 수 없다니 이 작은 보따리에 대체 중수가 얼마나 들어있다는 것인가?

    무상맹을 통해 고가에 구한 천수대(天水袋)란 보따리는 공간이 무척 방대해서 큰 호수만큼의 물을 채울 수 있었는데 중수가 꽉 차 있었다.

    “좋군!”

    “진선 중기에 이른 후에, 특히 흑해중수경을 4성까지 익힌 후로 중수 연화 속도가 크게 늘었습니다. 5성에 이를 날도 머지않은 듯하고요.”

    “그래, 계속 수련에 힘쓰거라. 시간정립(時間晶粒)은 최선을 다해 공급해 주겠다.”

    천수대를 챙겨 넣은 한립은 똑같이 생긴 다른 보따리 두 개를 꺼내 화신에게 넘겨주었고, 지기화신은 그것을 받아들고 다시 가부좌를 틀었다.

    남색 빛이 넘실거리는 그의 머리 위로 법칙의 실이 진동하면서 떠올라 작은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그곳을 중심으로 바닷물이 광범위하게 소용돌이 치고 지기화신의 두 손에 검은 중수가 맺혀 점점 불어났다.

    “잠깐!”

    그걸 본 한립은 놀란 얼굴로 외쳤다. 지기화신은 즉시 남색 빛을 거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흑해중수경을 4성까지 익히고 중수 응련 속도가 급증했다고?”

    “대략 3배 정도 빨라졌습니다.”

    “3배! 흑해중수경의 경지가 높아질 때마다 그랬던 것인가?”

    흠칫 놀란 한립이 빠르게 물었다.

    “앞서 3성에 이를 때도 속도가 늘기는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화신은 평온한 어투로 답했다. 그 말을 들은 한립의 눈이 반짝였다.

    ‘흑해중수경의 전반부 경지들이 수련 속도가 느린 대신 후반부로 가면서 이런 반전이 있을 줄이야.’

    앞서 흑해중수경을 만들어낸 지선도 3성까지 익히다가 지독히 느린 수련 속도 때문에 다른 공법으로 바꾸어서 이 사실이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한립은 흑해중수경을 그 지선이 창립했다는 이야기 자체가 의심스러웠다. 자신이 창립한 공법의 장단점도 모르고 중간에 익히다 포기하다니 너무 이상한 일이었다.

    “어차피 내가 상관할 일은 아니지.”

    한립은 고개를 저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털어버렸다. 이제 공법이 5성에 들어서면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 너무 궁금했다.

    수정알갱이 덕에 중수 응련 속도는 무서울 정도로 빨라서 앞으로 8성, 9성까지 중수를 응련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시 가부좌를 튼 지기화신의 몸에 남색 빛이 떠오르고 거대한 소용돌이가 생겨나는 것을 지켜보던 한립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멀리서 둔광이 날아들어 남색 보호막 밖에 내려섰다.

    “낙풍이 류석 대인을 뵙습니다!”

    “낙풍, 무슨 일이지?”

    “내일이 저희 오몽도의 50년에 한 번씩 열리는 제전 대례입니다! 혹시 시간을 내어 자리를 빛내주실 수 있을지 여쭈러 온 길입니다.”

    낙풍은 보호막 속에서 들려온 대답에 크게 기뻐하며 신속히 용건을 밝혔다. 이전에도 여러 번 와서 인사를 올렸는데 대답이 없어서 살짝 조급해지려던 차였다.

    소용돌이 속에서 오랫동안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저, 류석 대인의 수련을 방해할 마음은 전혀 없습니다. 최근 흑풍도와 청우도 간의 갈등이 심해져서 흑풍해역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족인들이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대인께서 나서 주시면 족인들이 안심하고…….”

    “알았다. 내일 제전에 가보도록 하지.”

    긴장한 낙풍이 부연 설명을 하는데 한립의 목소리가 말을 끊었다.

    “예! 바로 가서 준비하겠습니다!”

    신이 난 낙풍이 큰 소리로 답하고 꾸벅 예를 올리고는 오몽도로 날아올랐다.

    * * *

    보호막 안의 한립이 시선을 거두었다. 내일 오몽도에는 지기화신이 한 번 다녀오게 하면 되었다.

    진선 중기 실력을 지닌 화신이 나선다면 나머지 진선 초기 산선들이야 간담이 서늘해질 것이 분명했다.

    팟.

    흑풍해역 지도가 담긴 옥간을 불러낸 한립은 그것을 이마에 가져다 대었다. 볼 일을 다 봤으니 이제 조용히 수련할 장소를 물색할 때였다.

    오몽도도 한적하기는 하지만 폐관 수련에 이상적인 장소는 아니었다. 류석의 신분이 아직 노출되지 않았어도 누군가 실마리를 쫓아 여기까지 찾아올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반 시진 후, 푸른 빛줄기가 바다에서 솟아올라 어딘가로 날아갔다.

    * * *

    한립은 3일 밤낮을 쉬지 않고 날아가서 오몽도보다 더 구석진 해역의 황량한 작은 섬을 내려다보았다.

    잡초와 숲이 우거진 섬에는 사람이 지나다닐 만한 길이나 민가가 보이지 않았고 반대로 요수들은 꽤 많아서 합체기 심지어 대승기 요수들도 심심치 않게 보였다.

    오몽도 같은 큰 섬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영맥도 나쁘지 않은 곳이었다. 한립은 방대한 의식을 퍼트려 보고 아래로 내려갔다.

    섬의 지리는 그리 복잡하지 않아 중간의 화산 분출구가 있는 적홍색 산봉우리를 울창한 숲과 늪지 그리고 초원이 둘러싸고 있는 게 다였다.

    생기가 왕성해서 꽃과 풀이 흐드러지게 피어난 섬에는 영초나 영약들도 자라고 있었다.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그는 작은 골짜기를 골라 산 벽에 푸른 검기를 날렸다.

    두부처럼 잘려나간 산 벽에 머지않아 투박한 동굴이 생겨났다.

    약재밭을 뚫을 때만 약간 신경을 썼을 뿐 다른 곳은 정교하게 다듬지 않고 진법 깃발과 원반을 뿌려 동부를 완성했다.

    우웅.

    금제가 발동되면서 은은한 푸른빛이 감돌자 동굴이 사라져 주변 풍경과 동화되었다.

    해저에 설치해 둔 전송 뇌진처럼 기운이 전혀 새어나가지 않아 진선경 수사가 의식으로 탐색한다고 해도 티 나지 않을 것이다.

    그 후, 한립은 적하봉 동부에서 거둬들인 금제들을 겹겹이 설치해서 동부를 철통처럼 보호했고 심지어 따로 대규모 진법으로 산 전체를 둘러쌌다.

    아직 발동하지 않은 대규모 진법은 혹시 모를 적의 침입을 대비한 것이었다. 진법 설치를 마친 그는 약재밭으로 향했다.

    입구에 선 그의 손에서 특별히 적하봉 동부 때보다 더 넓게 마련한 공간으로 형형색색의 토양이 날아가 안착했다.

    이전에 준비해둔 것과 흑풍해역으로 오는 동안 틈틈이 사 모은 토양이었다.

    한립은 영액을 꺼내 알맞은 토양에 배합하고는 약재밭 곳곳에 진법 금제를 펼쳐서 구역을 나눴다.

    그러고 나서야 저물대 속에 소중하게 보관해온 여러 영약들을 조심스럽게 각 구역에 옮겨 심었다. 그가 약재밭을 정돈하고 있을 때, 오몽도에서는 제례 대전이 시작됐다.

    붉은빛의 고운 광채가 하늘을 뒤덮고 섬 곳곳에 설치된 검은 나무 기둥 위에서는 화로가 활활 타올라 장엄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거대한 광장에도 통나무를 쌓아 세 곳이나 불을 지켜 놓았고 그 중심에는 제단이 있었다.

    지기 조각상이 우뚝 솟아 있는 제단 아래로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는데 낙 가의 제자들은 물론이고 그들과 다른 복장을 한 한정도 등 귀속 섬들의 수사들도 함께였다.

    군중 앞에는 네 명의 수사들이 서 있었는데 각각 낙풍, 하얀 얼굴의 잘생긴 청년, 얼굴에 검은 점이 있는 음침한 인상의 중년 유생 그리고 오뚝한 코에 반짝이는 눈을 지닌 예쁘장한 여인이었다.

    네 사람은 예외 없이 광장에 모인 사람들과 함께 조각상에 절을 올렸다.

    진지한 표정의 낙풍은 동작 하나하나가 절도 있고 공경심이 가득했지만, 나머지 셋은 티 나게 대충대충 하고 있었다.

    진선경 수사들이 같은 진선경 수사의 조각상에 참배하는데 마음에서 존경심이 우러나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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